415강-YouTube강의(그릇 신명기 28:5)20221206-이 근호 목사
제415강, ‘그릇’. 무엇을 담는 용기를 그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릇이라는 것은 인간이 아니죠. 생물체도 아니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딱딱한 흙으로 만든 살림살이에 불과합니다. 생명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 그릇을 우리는 보통 중성이다, 혹은 이건 선과 악의 가치를 논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물컵이 선합니까, 악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죠. 우리의 상식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에 보면 2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이렇게 되어있다고요.
이건 우리가 충분히 이해를 해요. 복을 받은 짐승은 증식되고 숫자가 늘어나고 튼실해요. 튼튼하게 되고 상품적 가치가 있는 목축업으로서 잘 된다, 이렇게 되는데 그 뒤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그릇이 복을 받는다.
그릇은 가치가,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 없는 객관적 대상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 볼펜이 복을 받을 것이고.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 볼펜한테, 볼펜이 복을 받을 것이고. 뭐 볼펜 한 자루가 쓰니까 여기서 금가루가 막 쏟아지고 그런 겁니까? 볼펜을 잃어버렸다가 볼펜 두 자루가 들어오고 그런 걸 말하는 거예요?
볼펜이 복을 받는다. 볼펜에게 안수하니까 그다음부터 볼펜으로 쓰게 되면 시험 칠 때 무조건 오답이 정답 되고 뭐 그런 거예요? 안 그러면 볼펜이 복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하고 주머니에 꽂아놨는데 총알이 날라왔을 때 볼펜이 대신 희생하사 내 심장은 뚫리지 않고 볼펜만 작살나는 뭐 그런 걸 의미하는 겁니까?
이런 사물에 대한 축복. 새로 산 1톤 트럭에 기도한다든지 심지어 월드컵 축구할 때 시작 전에 공에다 코 대고 성부 성자 성령 공에 축도 안수하게 되면 골이 상대방 골대에 막 들어갑니까, 우리 골대에 막 들어가요? 전반전에 4:0 먹으면 뭐 공에다 축복을 안 해서 그런 거예요? 동방정교나 천주교에서 사제가 이런 사물체에다가 축복을 한다고 향수를 뿌리고 연기 피우고 그렇게 하잖아요.
사람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물건에게도 그게 가능하냐 이 말이죠. 그렇게 축사를 하고 축복을 했다. 결과는?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그릇에 축복하니까 그릇이 갑자기 두 개 되었어요? 더 커진 겁니까? 왜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느냐 이 말이죠. 광주리가 왜 복을 받느냐? 차라리 광주리에 담긴 사과나 무화과나 포도가 복을 받는다 하면 이해되죠. 그 무화과 열매나 포도는 생물이잖아요, 생물. 생산물이 늘어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담는 그릇이 왜 복을 받아요? 포도가 복 받는 건 이해되는데 그걸 담는 그릇이 복을 받으면 아, 포도를 담으면 안 쉬고 싱싱하게 신선도가 당도가 오래 유지된다는 그런 뜻입니까? 마법의 그릇이네요, 그러면. 김치 냉장고인가요? 그런 뜻인가요?
우리가 신명기 28장 17절에 보면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이건 또 뭐에요? 아, 복 받는 것은 이 광주리에 담는 것이 돈이 되든 농산물이 되든 뭐든지 이건 나중에 크게 된다. 잘 팔린다든지 수확이 많아진다든지 그럼 이해되는데 17절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그럼 그냥 놔둔 그릇이 쫙하고 금가고 깨지는 것을 의미할까요? 여러분 아이디어는 어때요? 그런 걸 뜻하는 겁니까? 거기에 담긴 게 저주받는 거 말고 그릇 자체가 저주받는다는 게 뭐냐? 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이건 무슨 뜻인가 하면 귀히 쓰인다는 뜻이에요. 귀하게 쓰인다.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쓰인다는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토기이고 그릇으로 활용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그릇이 있고 그 그릇은 성결된 그릇, 복 받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럼 신약에 오게 되면 신약 로마서 9장에 보면 바로 쓰임을 받는다는 취지, 그릇 취지, 우리가 신명기 28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모호하고 해석하기 곤란한 그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사물체로서의 그릇이 하나의 성도라는 인격체 그 자체로 전환됩니다.
로마서 9장 21절에 보면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절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
여기 그릇의 두 종류가 딱 둘로 구분됩니다. 그릇이 의인화되는 게 아니고 사람이 그릇으로 사물화 되는 거죠. 이것은 뭐냐 하면 나는 인간을 그릇으로 보겠다. 그럼 그릇으로 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신체구조는 비슷비슷하죠.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별다른 차이 없습니다. 키 조금 크고 작고 남자 여자 그런 차이뿐이지 인간의 신체는 거의 대부분 대동소이한데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그걸 둘로 나누겠다는 말은 신체검사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그것은 뭐냐? 그릇을 비유했다는 것은 그릇에 하나님의 자비가 담기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가 담기느냐로 볼 수 있어요.
그럼 자비가 담긴 그릇은 서울, 대전, 부산 어딜 가도 어떻게 돼요? 주님께서 그릇 보시겠습니까, 담긴 것 보시겠습니까? 담긴 것 보시죠. 그럼 사람이 성도가 되어서 누굴 만날 때 자기 자랑해야 되겠어요, 자기를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자랑해야겠어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애 잘 키웠다. 이렇게 열심히 해서 집 한 채 가졌다. 뭐 어떻게 성공했다. 남들 앞에 나는 대우받았고 인기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그런 껍데기 자랑하는 겁니까? 고려 청자면 어떻고 조선 백자면 어떻고 그거 별 의미 없거든요. 조선 백자에 더러운 쓰레기 담겼다. 그거 뭐 쓰레기통이죠.
입에서 나오는 것,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의 언어로 나오는 것이 뭐냐, 무슨 내용이냐 하는 겁니다. 복음, 주님의 사랑 나오면 사랑의 그릇이고, ‘주님 사랑이 뭐지? 난 그거 몰라. 관심도 없어. 난 내 자랑과 내 사랑, 나 행한 것밖에 나는 기억나는 게 없어.’ 그럼 그건 하나님 앞에 쓸데가 없어요. 자기한테는 굉장히 쓸 데가 많아요. 평생 동안 살아왔던 모든 노력이 자기 자랑하는데 다 필요한 재료가 되지만 문제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럼 뭐 탈락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그거는 사랑의 그릇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저주의 그릇입니다. 쓰임 받는다는 것은 껍데기, 그릇, 겉모양, 화려함, 비싼 것, 그거 비교에 휘말리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