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두 종류의 시간

아빠와 함께 2022. 12. 20. 19:35

 


1 모든 창조가 완성이 되는 상태가 되면 안식이죠. 안식은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 그러면 시간이 없다는 것은 흐르지 않는 것이고 아예 없는 거죠. 흐를 것도 없죠.

2죄가 발생되었다는 말은 낙원에 악마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이 말입니다. 악마의 힘이 주입되었죠. 죄가 주어지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이 흐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나중에 죄의 문제가 처리되면 시간이 멈추기 때문에 그래요.

■3두 종류의 시간이 이제 흐르게 돼요, 두 종류의 시간. 두 종류의 시간인데 하나는 인간의 몸으로 느끼는 시간과 또 하나는 미지의 몸, 주님의 몸이죠, 주님의 몸에서 나오는 시간, 이 두 가지의 시간이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시간싸움을 벌이게 돼요. 시간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시간에 두 종류가 있을 때나 싸움이 되겠죠.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두 종류의 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하나의 시간밖에 없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딱 하나의 시간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감지하고 있는 시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사랑밖엔 난 몰라> 심 수봉이 불렀던 노래에 나와요. 타인은 내 행복을 위해서 종속되고 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죠.

■4이게 나 중심의 시간관입니다. 이 전체 시간은 누구를 지향합니까?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시간이 흐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행복할거야’. 지금은 내가 불행하지만 좀 더 시간만 주어진다면 스터디카페 괜찮게 번창할 수도 있을 거야. 누가요? 내가.  

 

■5안식은 하나님의 만족인데 행복은 나의 만족. 이 둘 사이에서 경쟁,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안식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요. 모든 것의 의미가 나로부터 나오고 나로 돌아가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 둘 사이에 경쟁과 다툼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편이고 그럼 하나님과 다투게 됐다는 이 말은 행복, 나의 만족을 위한 시도를 어느 쪽에서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안식에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신경 쓰지 말라고 부추기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겠죠.
행복, 나의 만족에 관심 두게 하는 것은 그 세력, 악마가 의도한 바에요. 악마가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너는 행복하라. 너는 행복하라, 에서 악마는 앞에 빼버리고 남는 것은 ‘나는 행복해야 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6인간은 결국 악마한테 사기당한 거예요, 행복, 나의 만족에 관심 두게 하는 것은 그 세력, 악마가 의도한 바에요. 악마가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너는 행복하라. 너는 행복하라, 에서 악마는 앞에 빼버리고 남는 것은 ‘나는 행복해야 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사실은. 악마가 내심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 못 보게, 거기로 얼굴 돌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악마의 목적이잖아요. 종교가 없는 인간은 자기한테 사기당하고 있고요. 종교가 있는 인간들은 종교한테 사기당했어요. 이래도 인간은 사기당하고 종교가 있든 없든 인간은 사기당하고 있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두 개가 서로 다투고 있는 입장에서는요.

■7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라서 여기에 주의 이름이 들어왔습니다,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 들어왔다는 말은 로고스(logos), 하나님의 계시라 합시다, 말씀인데 요한복음 1장의 말씀, 계시가 실린 시간, 계시가 담긴 시간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주의 이름의 계시가 담긴 시간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와버리면 이 계시가 담긴 시간은 목적이 있어요.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안식의 때가 남아있는데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 이렇게 믿음에 화합하지 못해서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그 대표적인 예시가 뭐냐 하면 바로 광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탈락했다는 그걸 예로 들어서 이야기해요. 갈렙과 여호수아에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내다본 것은 하나님 계시의 시간은 도착해야 될 목표가 하나님의 안식에 있는 거예요. 어느 시간을 생각했느냐의 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내가 행복하고 편하게 사는 쪽으로 가는 그런 시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인 하나님이 안식하는 그 최종적 목표로 달려가는 시간이냐 하는 거예요.

■8역사 속에 경험하고 있는 그들의 모든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사용당하고 있는 거예요.두 개의 기관차가 있는데 한쪽은 하나님의 계시가 실린 시간의 기차가 있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고 거기 탄 탑승객들의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차가 있다 이 말이죠. 그 기차가 가는 방향이 서로 완전히 달라서 한쪽은 천국이라면 다른 한쪽은 지옥으로, 서로 상반되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시간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게 한다면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 간에 작용하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요. 70년 포로기간, 70년 포로 이건 다른 나라 포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잡혔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이 포로 잡힘 자체가 하나님의 시간이 실린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70년 포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보고 뭐 사전에 협의했습니까? 물어봤습니까? 안 그러면 이스라엘 너희들이 정해라, 이렇게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안 정했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했습니다. 그 정한 것이 역대하 36장 21절, 누가 한번 읽어봅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9 70년이 비어있어야 비로소 이 안식의 땅은 제대로 처음 창조 때처럼 안식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안식을 충만할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결정이고 자기 확정입니다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 하나님의 계시죠. 그런데 그 계시의 목적이, 70년을 정한 취지가 이스라엘의 행복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안식입니다, 땅의 안식. 하나님의 땅이 안식을 하는데 비어있어야, 황무하라 하니까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 

■10 인간보다 시간이 우선이고 시간보다 공간이 우선이고 공간보다 하나님의 안식이 우선이다 이렇게 되겠죠. (인간 <시간 <공간 <하나님의 안식) 인간하고 관계없고 토지를 안식케 하는 겁니다, 토지. 인간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모르겠고, 하나님의 자기 안식을 위해서 자기가 택한 인간을 통해서 시간에서 공간, 공간에서 하나님의 안식으로 가는 이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획을 딱 잡아놨던 거예요, 하나님의 계획을.

■11 “나가줄래?”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땅, 공간이죠, 땅의 안식을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서 열심히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 놓고 그냥 나가줄래? 꼴도 보기 싫다. 나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안식을 훼손하는 것이 딴 게 아니고 바로 너희들이야. 너희들을 게워낸다. 토해낸다. 치워버린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움으로써 주께서는 속이 시원하다는 거예요. 속이 시원한 거예요.

■12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훼방한 그런 원수라는 사실을 우리 인간들은 상상을 못합니다. 제가 지금 세 번째 강조하는데요. 정말 강조하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70년을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정했다는 거예요, 70년. 이스라엘이 70년을 포로 잡히기로 정했다.

■13 70년이라는 포로 잡힌 기간, 이 계시의 시간은 점차 점차 주님의 몸이 하실 일을 증거하는 쪽으로 접근해나갑니다. 그렇게 왜 70년인가 하는 비밀에서 풀리게 됩니다.

■14 7일이 훼손되었으니까 훼손된 것을 온전하게 다시 7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필요했던 기간이 70년이었습니다. 왜 70년이냐? 처음에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안식할 때 70일 걸린 거 아니죠. 하루 걸린 것도 아니죠. 7일 걸리고 안식했습니다. 완성했으니까 안식일이 만들어진 거예요. 안식일은 7일 단위로 돌아가는 거예요. 70이 아니고 7단위였어요. 그렇다면 왜 70년이냐?  70년 포로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은 이 기간을 못 지키고 다른 몸,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진짜 이스라엘, 진짜 야곱인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70년을 완성하게 되면 드디어 안식이 되는 겁니다. 이 안식할 때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시간은, 시간이 예수님의 몸을 접근하고 접근하고 나왔던 몸이 70년이거든요. 70년, 70년 나오다가 

 

■15 나중에 예수님 몸이 완성이 되어버리면 시간 자체가 없어져버려요. 70년이라 할 때 여기 7이 들어가요. 하나님의 7, 그리고 7년 들어갔던 그 7년이 62년에 의해서 다 부서집니다. 하나님이 계획했던 것을 인간들이 부셨다는 것, 인간들이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가 부셨다는 그걸 나타내기 위해서 62. 그럼 이게 69년이 돼요. 나머지는 뭐냐 하면 1년이 되겠죠. 1은 1년이 아니라 결국 한 분으로 모든 시간은 거기다 응집이 되었다. 응축이 되었다.

■16 시간이 필요 없는 세계를 묵시세계라 합니다. 시간이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 세계. 강의 초반에 했는데, 처음 죄 짓기 전에 시간이 있었어요,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죄 지으면서 지금 미완성된 훼손된 것이 완성을 향하여 가면서 그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 시간이거든요. 처음에 창세기 때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었다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17  70이레가 다 끝나게 되면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이 일을 실행에 옮기신 주님의 나라가 돼요. 아들의 나라가 돼요. 하나님 나라에서 어디로 간다? 아들의 나라로 간다고요. 그러면 예수님의 공로가 드러나게 되면서 동반해서 인간의 공로가 다 죽어버려요.

■18 처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 때는 낙원을 만들 때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 가 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 하신 것에 대해서 인간은 적대적 반대적인 죄악 된 행동을 했다, 그런 것은 에덴동산에 없어요. 하나님이 다 하셨고 그냥 인간은 혜택을 입은 것뿐이죠, 에덴동산에서는. 그게 에덴동산이잖아요.
그런데 주의 나라, 아들의 나라에서는 인간이 ‘주님이 다 하셨다. 인간은 그냥 혜택을 입는다.’ 가 아니라 그 인간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죄인으로 바뀌어요. ‘죄인은 예수님이 하는 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바뀌어요.

■19  그래서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사는 게 되지만, 아들의 나라에서는 예수님 중심으로만 사는 거예요. 인간은 함께 살 권한이 있다, 가 아니라 예수님만 영광을 받는 그 세계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혜택을 입는데 혜택을 입어서 함께 산다, 가 아니라 혜택을 입는데 오직 그 혜택마저도 면류관을 누구한테 반납하죠? 주님에게 반납하는 조건으로 아들의 나라에 함께 사는 거예요. 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사는 겁니다.
이게 아들의 나라에요. 천국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홀로 다 이루었어요.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담할 수 없어요. 다 만들어진 걸 그냥 부여받은 거죠. 그러나 아들의 나라에서의 인간은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영원토록 계속 이어져가야 돼요. 그냥 뭐 하나님이 알아서 주겠지, 가 아니라 우리가 참 몹쓸 짓을 했습니다, 가 되어야 된다고요.

■20 하나님의 안식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뭐냐? 그 원수가 등장해야 되고 원수가 벌 받아야 돼요, 원수가. 그런데 여기 다니엘 9장 2절을 다시 보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뭘 깨달았다는 말인가?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이 의미를 다니엘이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럼 깨닫지 않은 상태에서 다니엘은 칠십 년 마치면 우리는 다시 당당하게 약속의 땅에 간다, 이럴 줄 알았던 거예요. 이럴 줄 알았는데 다니엘이 기도하는데 칠십 년을 알고 난 뒤에는 칠십 년 있어도 우리가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돼요. 아, 그 칠십 년이 칠십 년이 아니고 칠십 이레가 되는 겁니다, 칠십 이레.

■21  칠십 년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느끼고 있는 칠십 년, 365일을 뜻하면 이레라 하는 것은 인간이 몸으로 느끼는 1년, 2년, 하루, 한 달, 이런 게 축적된 1년, 2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없는 상태가 지상에 시간화 되어서 내려오는 이레를 뜻해요.

■22 그러니까 인간이 느끼고 있는 시간의 의미 없음을 밝히는 무의미적인 시간이 기존의 시간에 올라타 덮쳐버리는 거예요. 1년, 2년, 3년,...... 이런 식으로 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이 시간개념은 인간이 느끼고 있으니까. 인간이 느끼는 것은 무조건 의미 없어요, 인간이 느끼는 것은.
인간이 70년을 생각하니까 인간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70년 끝나면 돌아가리라. 그러니까 69년 지나고 70년 되면 돌아가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미 69와 70의 차이를 알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무의미, 의미 없음으로 만든다고요. 그럼 의미를 채우는 것은 뭐냐 하면 70년이 아니고 70이레가 돼요, 70이레.
이 말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70년이라는 계시는 이스라엘이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70년이라는 계시를 줬지만 이스라엘에게 준 계시인 계시적 차원에서는, 다른 민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원래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 있잖아요, 쫓겨난 이스라엘 말고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그것은 70이레라는 인간들의 시간 이해를 넘어서는, 인간의 시간 이해를 빌려오면서도 그 의미, 무의미를 넘어서는 의미가 담긴 새로운 시간 개념을 여기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23  70년이라는 것은 70년이 갖고 있는 무의미가 의미 있게 완성이 될 때 그것은 7이 되는 거예요, 7년. 그래서 70×7=490년이 아니고 70×하늘의 의미=70이레가 됩니다. 알겠습니까, 묻지도 않아요. 묻기도 싫어.
인간은 시간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예 시간을 못 느끼는 게 아니고 느끼고 있어요. 인간이 시간을 느끼는 것은 뭐냐? 이 땅, 약속의 땅 또는 그냥 땅, 바벨론 땅, 땅에서 통하는 시간이에요.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통해서 인간은 시간을 감지하게 되어있어요. 해와 달 의 변화, 새소리, 꽃 지고 꽃 피고. 그러니까 인간들이 기껏 아는 시간은 자기 몸으로 느끼는 변화, 변화와 변화 사이를 차이라 하죠, 그 차이를 통해서 시간이 정리가 돼요, 인간은.

■24  이레는 하늘의 시간이에요, 그런데 이레는 뭐냐 하면 땅의 시간과 하늘의 시간 사이에...... 인간이 느끼는 땅의 시간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인식하고 있는 또는 이해하고 있는 땅의 시간과 하늘의 시간 사이에는 빈 자리가 있어요, 빈 자리.

■25 다니엘 9장 25절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한 이레가 되고 나중에 한 이레가 오신 분이 고난 받으신 것을 반 이레, 고난 받고 난 뒤 부활한 것을 반 이레해서 한 이레가 1/2, 1/2로 또 나뉘어져요. 한 이레를 반으로 나눈다는 말은 이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거예요. 인간이 끊어진 거예요. 역사에서 묵시로 가는데 여기 이 사이 빈 자리로 둔다는 것은 뭔가 중간 다리, 어떤 다른 분, 인간에게 속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일을 하시는 분이 개입될 때나 가능한 거예요. 여기 누가 오시겠어요? 우리 주님이 오시는 거예요. 사람이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면서 사람인 분이 들어와서 인간의 시간, 70년이라는 그 책임져야 될 시간을 주님께서는 70이레로 받아줘버린 거예요. 그 70이레에 일어난 그 모든 일은 무슨 사건이냐? 예수님의 자기완성을 위한 사건들로 채워지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바로 예수님만이 하늘의 시간으로 건너가게 해줄 수 있고 인간시간은 거기에 대질 못해요.

■26 마귀가 인간에게 준 시간의식은 자기부인이나 자기포기가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할 때까지 짬을 주세요. 시간을 주세요.’ 그 시간을 말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의식의 목표, 완성 그것은 뭐냐? 뭐죠? 인간이 자꾸 ‘시간만 주신다면 일을 해내겠습니다.’ 할 때 해낸다는 일의 정체가 뭘까요? 어떤 걸 해낸단 말입니까? 자기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니면 자기가 만든 자기 힘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우리만의 세계를 뜻하는 거예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우리세계 망할 수 있는 그날이... 아이, 기쁘다.’ 이게 아니고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완전하게 비축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그런 뜻이거든요.
이 세상에 있는 우주의 모든 변화는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 있고 그 힘을 위한 공식은 전부다 (t), x의 벡터는 시간(t)의 함수로 정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이 이야기를 아까 제가 했어요. 시간만 허락한다면 지금보다 더 힘차게 여유만만하게 힘을 더 모아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합기도 하는 것보다도 스터디카페 하는 게 내가 사는 힘을 더 모을 수 있습니다. 시간만 주신다면. 이게 인간의 시간이에요.그렇다면 주님의 시간은 이 공식에 대해서 주께서는 어떻게 대처할까요? 인간들의 시간에 대해서. 주님의 세계에서는 이걸 어떻게 대처할까요? 결국 힘이잖아요. 힘 모으기 아닙니까?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힘을 모아서 이게 내 힘으로 모아지면...... 우리가 보다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뭐냐? 힘이 있으면 행복하고 힘 없으면 천하에 불행하겠죠.

■27 그 힘에 의해서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 밀려버리는 거예요. 힘에 깔려버리는 거예요. 인간들이 시도하는 이 힘에 의해서, 인간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죠, 악마가 배후에서 시도하는 힘에 의해서 하나님이 깔려서 죽어버리는 거예요. 죽어버리죠.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의 힘에 의해 깔려 죽어버리면 이 세상은 누구의 세계입니까? 오롯이 인간의 세계가 되겠죠, 인간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 안 지은 존재는 없다, 라는 데에 하나님은 성공하셨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안식의 땅에 도로 들어올 위인은 이 세상에 있다, 없다? 없다, 가 됩니다. 아무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죠. 그러니까 종교가 사기에요. 종교가 사기치고 있는 거예요, 천국 갈 수 있다고. 못 들어가요.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인간의 정체가 다 드러났죠. 마귀의 정체가 다 드러났죠. 그럼 뭡니까? 안식됐잖아요. 왜냐하면 시간은 더 이상 흐를 이유가 있다, 없다? 없죠. 시간이 흐를 이유가 없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이레가 되는 겁니다. 몇 년 몇 년, 2023년 아무 의미 없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아무 의미 없어요.

■28 이제는 이레, 예수님의 몸에서 구현되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새로운 힘이 주어지는데 그 힘은 무슨 힘이냐? 부활의 힘이죠. 부활의 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인간에게 시간의식을 허락한 것은 너희들 자체가 죽음의 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죄의 힘 또 다른 말로 하면 악마의 힘에 너는 거기서 네 힘으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성공하신 거예요. 거기에 필요한 계시가 이레입니다.  

 

■29 시간은 이미 딱 정해져있어요 시간은 시작할 때부터 최종 목적을 가진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주입된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시가 실린 하나님의 시간인데...... 마태복음 26장 29절, 이건 한번 보셔야 돼요. 상당히 중요한 건데요. 시간이 시작했으면 어디서 멈추느냐에 관한 거예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까지, 여기 ‘까지’라 하는 것은 시작과 마감 그 전체를 보여주는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들어가느냐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말은 포도주가 주님의 시간이 실린 계시라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의 시간은 포도주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마지막 포도주 먹는 그때까지 주의 일은 계속 될 것이고 마지막 포도주를 먹는 그 순간 모든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그럼 그 포도주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자기 피죠.
인간들의 시간관은...... 어떤 차이, 변화와 변화의 차이, 이것을 인간들은 사건으로 보는데 사건과 사건의 이 차이 있잖아요, 때와 때의 간격, 이것을 시간이라 하는 거예요, 시간. 인간들은 사건A를 그들이 읽어버리고 사건B를 읽어버리면 여기서 시간이라는 것을 측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사건A와 사건B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시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시간이 없어지죠. 이게 양자물리학세계에요. 양자물리학세계에서는 입자 얽힘이에요. 입자가 얽혀버리면 동시에 두 군데 같이 생겨버리죠. 그러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시간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관측하기 전과 내가 관측한 후 이 사이를 시간으로 보는 거예요.
관측 전과 관측 후의 그 사이. 관측하기 전에는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어요. 양자역학세계에서는 그래요. 그래서 사물, 어떤 물체를 관측한다는 것은 물체가 있고 우리가 관측하는 게 아니고 ‘관측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그 물체는 거기에 나타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양자물리학에서.
그렇게 돼버리면 인간의 시간이 다가 아니다, 이렇게 되죠. 그래서 그들 양자역학에서는 ‘우주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관측하는 순간 시간은 흐른다.’ 이렇게 결론지은 거예요. 이 우주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지만 관측하는 순간 시간은 흐른다. 왜냐하면 입자가 하나면 변화됐는지 안 변화됐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두 개가 있어야 변화라는 게 생기지, 혼자 있다면 움직임조차도 없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관측자가 움직인다는, 관측자를 하나 또 잡아서 인간으로 설정해줘야 우리가 관측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30 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못 벗어나는가?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용성, 실용성,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의식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과학이란 관측함에 따라서 시간도 생기고 공간도 생기니까 관측하는 우리가 있다, 라는 말도 하지만 이걸 좌표계라 하는 거예요, 좌표계. x,y,z 좌표계에 네가 어디 있느냐를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좌표계로 잡아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시간에서 못 벗어나면 인간은 공간에서 못 벗어나요. 시간과 공간에서 못 벗어난다면 인간에게 안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벗어나질 못하니까. 그러니까 시간과 영원히 계속 가야 되죠.

■31 인간은 죄 때문에 시간에 갇혀있는 거예요. 죄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후달리고 있는 겁니다. 얽매이고 있는 겁니다.

■32  ‘과도한 분업체제가 책임 소재를 애매하게 만든다. 즉 조직이 커질수록 양심이나 자책, 심의가 작동하기 어렵다.’ 이게 오늘날 현대 조직사회입니다. 왜 인간 개개인은 착하기를 원하고 선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고 내가 나쁜 죄인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으면서 왜 사회에 나가면 갑자기 개인의 선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없는가? 왜 없는 거예요? 과도한 분업체제로 인해 효율성, 조직의 효율성, 능률성이 증가하잖아요. 조직이 더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조직이 커진다, 이건 뭐냐 하면 힘을 더욱 비축할 수 있다 이 말이잖아요. 결국 여기 나온 단어가 뭡니까? 힘이죠. 인간의 모든 시간과 공간 개념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힘을 키우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건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을 때, 마귀가 예수님보고 나한테 절하면 이 모든 세상 권력, 권위에 대해서 내가 너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왜 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만큼 이 악마의 세계가 자체적으로 자기들이 살 수 있는 그것을 키워낸 거예요. 자체적으로 생산해낸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옳다 그르다 반대할 수 있어요, 없어요? 반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러니까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을 때는 (악마가) 하나의 뱀이었잖아요. 하나의 뱀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뱀이 인간보다 더 커진 거예요.

 

 ■33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개개인을 원수 세워서 하는 게 아니고 개개인을 포함한 전체, 한 덩어리 전체에 대한 싸움이에요. 이 세상 권세를 다 보이는 권세 싸움이에요. 이 권세에 대해서 욥기에도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욥기 41장에 ‘리워야단’이라는 게 나오거든요.  이것은 바다괴물이거든요. 다니엘 7장에 보면 짐승이 나오죠. 그게 리워야단이에요. 다니엘 7장에 바다에서 짐승이 나와요 (단 7:3). 그런데 짐승이 나온다는 말은, 지금 이 계시를 본 게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단 7:1)에 이걸 봤단 말이죠.

 

■34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짜놓은 하나의 속임수였습니다. “만만하냐?” 이렇게 나오죠. 이스라엘을 만만하게 보고 침투했는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를 건드린 게 돼요. 다니엘에게 70이레 계시를 줄 때 그때 다니엘이 어느 나라에 속했습니까? 바벨론에 속했죠. 그러면 아까 예레미야 25장 11절, 12절에 나온 말씀처럼 네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긴다고 되어있죠.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다가 칠십년이 끝나면 “이스라엘을 포로 잡아온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 구절이 어디서 모이느냐 하면, 이 한 가지를 하면 성경 전체가 다 풀리는데요. 어디서 이 매듭이 다 풀리느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있어요. 수요일에 했지만 언약이 들어있어요. 언약이 들어있는데 이 언약이 들어있는 이스라엘을 누가 포로 잡았느냐 하면 바벨론이 포로 잡았거든요. 바벨론이 포로 잡아왔잖아요. 잡아왔을 때 바벨론이 어쩔 수 없이 무얼 건드렸느냐?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접수했는데 그들은 접수하는 가운데서 뭘 건드렸습니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건드렸죠.
언약은 시간 따라 안식에 이르게 되어있고 안식에 이르게 되어있는 이것은 시한폭탄이에요, 째깍째깍 70년, 시한폭탄을 바벨론 제국이 건드린 것은 마치 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건드리면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황폐했잖아요. 이번에는 누구 차례냐?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이 품고 있는 언약을 건드리면 바벨론 나라가 완전히 황폐해지는 거예요.
황폐해지면서 언약의 주인공은 안식을 내다본 신약의 예수님이 되겠고 언약을 건드린 자는, 예수님이 영적인 존재 아닙니까, 하나님이죠, 영적인 존재를 건드렸다는 말은 이 바벨론이 영적인 존재로 전환되어야 돼요. 그러면 바벨론이 짐승이 되면서 이 짐승은 영적인 존재에요.
아담과 하와가 뱀이라고 생각했지만 뱀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악마가 들어있죠. 영적 존재였죠. 바벨론이 짐승이라 했지만 사실은 짐승이라는 영적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여기 짐승에 악마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계시의 진행과정에서 시간이 마감이 될 때,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감이 된다는 말은 드디어 악마의 체포 날이 가까이 오게 되면 시간은 이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거예요. 안식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옵니다. “천년이 차기까지” 요한계시록 20장 5절. 천년이 차기까지. 그다음에 뭘 한다는 게 아니라 그 ‘까지’라는 것은 시간 자체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목표에 도달해서 끝났다는 뜻이에요. 드디어 도달점에 이르러 밝힐 걸 다 밝혔다, 완성될 걸 다 완성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짐승에 속한 적그리스도 이것들을 요한계시록 20장에 유황불에 집어넣게 되면 시간은 끝난 거죠 (계 20:10, 14). 그렇다면 여기서  

 

■35 오늘날 이스라엘이 누굽니까? 성도죠. 성도 안에는 뭐가 있어야 성도죠? 그냥 교회 다닌다고 성도 아니죠. 하나님의 살아있는 계시가 있어야 되겠죠. 이 계시가 십자가 이후이기 때문에 이미 성도 자체가 종말적 존재라 해요. 종말적 존재.
이런 게 어려운데요. 종말론적 존재가 아니고 종말적 존재에요. 종말론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종말이 뭐냐 따져보니까 그런 존재다, 이건 인간이 따지는 것이고 인간이 관측하고 탐색하는 거고 인간이 탐색할 것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냥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것이 성령 공동체거든요.
마지막이라는 말은 성령이 오면 마지막이에요. 이것은 요엘서의 예언대로 마지막이 아니면 성령이 안 옵니다. (욜 2:28-32)  마지막이기 때문에 온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제는 너하고 나하고 달라, 가 아니라 마귀하고 다르죠. 왜? 마지막 때는 이 영적 존재가 모든 것을, 자기 정체를 더는 감출 수 없는 시대에 오기 때문에.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당부하기를 좀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라 이 말이죠. 이 재명을 왜 상대하고 윤 석열을 왜 상대합니까?  우리의 상대는 악마죠. 공중 권세 잡은 자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내가 관측할 수 있는 내 행복을 내가 소지하길 바라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어디서 쫓겨났습니까? 하나님이 안식해야 될 그 땅에서 추방되었잖아요. 그럼 이거 고치고 들어가야지. 고칠 수 있습니까? 무슨 수로 고쳐요? 못 고치죠. 고칠 수가 없어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중요하니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무엇이 악이다?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악이다. 그게 죄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죄인 아닌 자는 없다. 죄인 아닌 자를 없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성전 돌아와서 성전 지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스라, 느헤미야 그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포로 잡혀가서 70년 만에 돌아왔잖아요. B.C. 586년에 포로 잡혀가서 B.C. 516년에 돌아와서는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 약속대로 왔다고 좋아하면서 뭘 지었습니까? 학개, 스가랴에 보면 성전 지었죠. 성전 지었잖아요. 그게 성전입니까? 그게 성전 아니죠. 부서져야 될 성전이죠. 무너져야 될 성전이죠.
그 성전 지을 때 하나님께서 언급한 게 있습니다. 그게 스가랴에 나오는데 스가랴 7장 5절요.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그들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마음 단단히 먹고 율법대로 금식하면서 지켰는데... 실컷 금식했거든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그 금식이 진정 나를 위함이냐, 아니면 너희를 위함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럼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려면 사전에 70년 되기 전에 먼저 언급을 해서 금식하더라도 주의하라든지 언질이 있어야지. 언질도 없었어요. 70년 지나고 나니까 70년 동안 너희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의가 준비된 줄, 네가 된 줄 알아? 아니야! 너희는 다시 돌아올 자격 없어. 70년 지나고 이제 와서 왜 딴 소리를 하시냐. 이제 와서...... 진작 말했으면 우리가 금식도 안했죠. 이왕 못 돌아갈 거 개판으로 살자, 이랬을 텐데 실컷 마음 졸여가면서 율법 지켰는데, 아니래.
심지어 이런 이야기해요. 네가 할례를 행했지만 그게 마음의 할례 행한 거냐? 마음의 할례를 무슨 수로 합니까? 마음 잘라야 되는데 어떻게 마음 잘라요? 자를 수가 없는데. 마음 자르려면 골로새서 2장에 나온 대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되지. 그게 마음의 할례, 세례거든요. (골 2:11-12)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간은 된다, 안 된다? 인간은 못하는 거죠.

■36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시간은 뭐냐? 그 시간을 줌으로써 하나님이 70년이라는 것 또는 70이레를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죄인 아닌 인간은 단 한명도 남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기 계획이었습니다. 단 한명도 죄인 아닌 인간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악마한테 사기당하지 않은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 교회 가면 교회한테 사기당한 거고 교회 안 나가면 본인한테 마귀한테 사기당한 거고. 이래도 사기당하고 저래도 사기당한 거예요.
【이리로 가도 지옥이요 저리로 가도 지옥이요.】이거잖아요, 이거. 이게 종말된 현상입니다. 이리로 가도 지옥이고 저리로 가도 지옥이죠. 이건 공간개념이죠.【어제도 지옥이고 오늘도 당신 땜에 내일도 지옥이고.】한국에 있어도 지옥, 캐나다 가도 지옥이고. 도무지 안식의 때가 없고 피할 곳도 없어요.

■37 성도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렇게 대처합니다. ㅎㅎ하든지 ㅋㅋ하고 있어요. 왜? 위에서 보니까. 골로새서 3장에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합니까?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되어 있죠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3). 제가 바꾸겠습니다. 여기 없다. 우리의 생명은 여기에 없어요. 이곳에 없는 거예요. 이곳하고 안 놀아.

■38 노력→결과→평가→보상, 이 논리만 인간은 기억해요. 본인이 본인 인생을 사는 게 아닙니다. 아니고 여기 뭐가 들어갑니까? 평가가 들어가죠. 평가는 인정받는 거예요, 인정받는 것. 인간은 사는 이유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사는 겁니다. 평가받기 위해서.
자, 사람들은 이것(노력→결과→평가→보상)을 못 벗어나죠. 못 벗어나니까 인간은 이걸 예측하려 합니다. 예상하고 예측해요. 어린애들도 어른들이 교육할 때 이 논리대로 네가 인정받으면 보상받고 보상받으면 너는 행복할거야. 지금은 그렇지만 네가 언젠가는 행복할거야. 우리 가정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언젠간 우리도 부자 될 수 있을 거야. 금수저가지고 부자하고 식사하면 부자 된다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구조를 또 달리 이야기하죠. 희망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을 놓쳐버리면 그 자체로 불행이지만 희망이 있다면 어려워도, 우리는 역경과 시련이 있더라도 희망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행복해서 뭐하는데, 그래? 거기에 대한 답은 없어요. 인간이 예측하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까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 사이에 뭐가 있다 했어요? 빈 자리. 빈 자리 있다 했죠. 

 

■39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대해서 완전히 달리 이야기하십니다.【미래는 예측이 아니고 미래는 창조된다.】없는 데서 창조되는 거죠, 미래는. 날마다 만들어지죠, 날마다. 주님이 주인공 돼서 날마다 만들어져요.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결과가 있을 거고 그 결과에 대해서 남들이 평가하면 그들이 인정해줄 거고 그럼 나에 대해서 보상이 온다, 지금 이 부분에서 인간이 무엇을 놓치고 있어요? 어떤 것을 고려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를 고려 못하죠. 미래는 창조되는 거니까.
그럼 창조라 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보면 없는 데서 있죠. 그럼 창조되기 위해서는 여기 무슨 요소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죽음’이 들어가야 되겠죠. 죽음이. 실컷 노력하고 평가받고 인정받아가지고 어떤 큰 상 받고 KAL기 타고 오는데 소련이 미사일 쏴서 비행기가 폭발한다든지 중동에서 돈 많이 벌어오는데 바그다드발 KAL858기가 일본 공작원으로 위장한 마 유미에 의해서 버마 상공에서 폭파돼서 없어질 때 무슨 요소입니까? 죽죠.
성경 로마서 6장에 보면 죽음은 왜 오느냐 하면 죄의 값이었잖아요, 죄의 값. (롬 6:23) 그러니까 죽음으로써 어떤 인간도 안 죽을 만큼의 의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를 주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이 증명한 거죠. 하나님이 증명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살아계시고 어떤 인간도 애초부터 산 인간은 없었다, 가 되죠. 계시에 의하면. 그 계시를 이스라엘이 그리고 다니엘이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 다니엘이 70년 포로기간의 의미를 깨달았다, 70이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계시입니까. 대단한 계시의 여부는 인간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고, 인간 말고 뒤에 나와. 그 뒤에 나와. 앞에 잔챙이들 보내지 말고 대장 나와. 대장이 누구에요? 악마잖아요.

■40 악마를 체포할 때까지 주의 일은 계속되는 겁니다. 이미 체포했죠. 이미 체포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이 내 살과 내 피를 마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모든 시간을 끝냈습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이에요.
1000년=하루, 이게 돼요? 1000달러=1원, 이게 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천년이 하루 같다. 인간이 관측하고 인간이 관찰하는 모든 시간 개념, 인간이 관측하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변화와 그 변화 사이, 해가 떴다 해가 졌다 그런 하루,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 인간이 가능한 것 그것은 주님에 의해서 이제는 주님께서 그걸 무의미로 처리해버렸어요.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41 【시간은 예수님의 몸이다】이렇게 축약할 수가 있어요. 시간은 예수님의 몸이에요. 시간 속에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활동이 나옵니다, 활동. 이 활동이 안식이에요. 안식이 나와요.
시간에 두 종류가 있다 했죠. 하나는 계시가 실린 시간, 예수님이 실린 시간, 주님의 시간을 성경에서는 ‘때’, 내 때가 아직 남았다, 할 때 때로 이야기해요. 인간의 시간은 악마의 시간이죠. 인간에게 뭘 부여한다 했어요? F=ma,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 시간을 좀 달라. 시간 지나면 힘을 더 끌어 모을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42 주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폭격하죠. 공격하죠. 뭐로 공격하느냐? 성령으로 공격합니다. 공격하는 순간 인간의 시간이 아니고 육의 시간, 폭격함으로써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봐요. 죽은 자의 특징은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러면 그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주의 복음이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묵시적 시간에 드디어 합류가 돼요. 거기에 들어가면서 예수님의 세계에 완성된 것, 다 이루었음을 증거하는 그러한 육신으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사용된다면 그러면 성경을 어제는 두 장밖에 못 읽어서 울었지만 오늘은 예수님 땜에 내일은 다섯 장 읽으면 더 나아지는가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잖아요. 아니에요. 더 나아졌다는 개념은 없어요. 왜냐하면 

 

■43 어제도 죽었지만 오늘도 죽이고 내일도 항상 나를 죽이는 그 자체가 너는 죽은 자고 네 안에 내가 살아있다, 주님이 살아있다, 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 몸을 사용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성령이 역사를 하게 되면 그동안 주님의 일을 가렸던 내 일이 주님의 일을 가렸었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증거하게 돼요. 그러니까 나의 치료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게 중요하죠.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내가 이런 인간인데 치료가 되었어요, 하는데 치료되려면 병원에 가세요. 치료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가, 훌륭하게 되었는가, 천국 가게 되었는가, 그 이야기하라고 주께서 성령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증거.
이미 우리는 천국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벌써. 아까 어디를 가든지 지옥이죠. 성도 같으면 어딜 가도 지옥인 것을, 그다음에 ㅋㅋ, ㅎㅎ, 히히히. 어느 때도 지옥 아닌 순간이 없다 ㅋㅋ. 신난다. 성령의 신바람. 그걸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44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적인 목적, 개인적으로 나를 지키려고 하는 이유, 나의 행복, 필요한 힘, 정보, 지식, 그걸 얻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지는 않았습니까. 그게 오히려 마귀한테 속아 넘어간 사실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마지막 때에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용도로 저희들을 일방적으로 채택해 주셨사오니 다니엘을 통해서 더욱더 주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례의 완성 세례  (0) 2022.12.22
말씀안에 뭐가?  (0) 2022.12.21
현실중첩의 6모습  (0) 2022.12.19
종교 넘어서기  (1) 2022.12.19
뼛속에서 말씀이 나온다  (0) 2022.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