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분노

아빠와 함께 2022. 11. 23. 08:12

413강-YouTube강의(분노 신명기 29:20)20221122-이 근호 목사


제413강, ‘분노’. 분노를 낼 자격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범죄한 죄인이 분노한다, 이게 지금 성립이 됩니까? 뭘 잘했다고 분노해요? 그런데 인간은 아침에 눈만 뜨면 분노가 시작됩니다. 하루 종일 분노하는 거예요. 사실은 억지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지, 분노합니다.

그 분노하는 이유는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는 자기 본성에서 비롯된 거예요.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주께서는 간단하죠. 네가 뭔데?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안 돼서 분노하는 것도 분노지만 그 안 되는 것 때문에 짜증내는 게 더욱더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하는 내용이 되죠.

분노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밖에 없는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게 신명기 29장 20절에 나와요.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성질내시는 그걸로 끝내시는 게 아니고 아예 하나님의 세계에서 추방시키고 쫓아내죠. 이게 분류인데요. 분류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중심으로 잡을 때 너는 나 있는 곳에 못 있게 하는 게 그게 최후의 저주입니다.

“나는 너하고 같이 안 있어. 네가 아무리 나를 초청해도 나는 네 초청을 거절해. 너 있는 곳에 나 없을 거야. 나 있는 곳에 너 없을 거고.” 이걸 로마서 1장에서는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대환영받아도 주님한테 버림받으면 끝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그런 말씀 있죠.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16:15). 그만큼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대척된다, 반대다 하는 그걸 염두에 두시고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나는 세상사는 보람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잖아요. 그 본성을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시죠.

이 분노의 결과에 대해서 한 구절 더 보신다면 신명기 32장 22절에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이 분노가 지상에 뿐만 아니고 우리가 죽으면 죽음까지 따라가요. 우리가 죽은 그 동네 있잖아요. 죽은 자들이 모이는 음부, 죽은 자들의 집합소, 거기까지 뭐가 따라온다? 주님의 저주와 분노가 따라옵니다. 끝까지 옵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얕잡아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충 알면서 하나님 안다고 가볍게 여기면 안돼요. 흔히 이런 말 있잖아요. 끝까지 한 놈만 잡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끝까지 잡습니다. 따라가다가 아휴, 나 놓쳤다. 이런 거 없습니다. 끝까지 추적해서 하자 없이 실수 없이 오류 없이 끝까지 저주로 공격해요.

자, 그러면 이 저주를 받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왜 하나님께서 저주를 하시는가? 열왕기하 19장 28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분노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 잘났다’ 이것도 교만이지만 더 깊이 있게 들어가면 교만과 오만의 이유가 ‘나 혼자 살래요. 나 자립적으로 살래.’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나 홀로 신이 되고 싶다 하겠죠. ‘나 혼자 있을래. 나는 최종적으로 나만 남길래.’ 이걸 교만, 자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열왕기하 이야기는 랍사게라는 사람이 히스기야 왕을 얕잡아보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잖아요. 포위해서 온갖 모독을 다 했죠.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이름 불러봐라. 내 힘에서 빼낼 수 있는가.” 라고 건방을 떨었던 겁니다.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다 들었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히스기야와 유다 나라한테 그런 오만한 말을 쏟아내게 하는가?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대꾸하지 말고 가만 있어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세상이 복음 아는 사람에게 공격할 때 대꾸하지 마세요.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언급할 때 저주도 버림받음도 같이 짝을 맞춰서 그 현장에 드러내십니다.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심판하는 양 우리가 화내고 이러면 돼요, 안돼요? 우리가 구세주이고 심판주입니까? 아니죠.

그렇게 오만을 떨 때 하나님께서 그 원수 같은 교만한 자한테 묻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가 우리의 태도를 주시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네가 내 이름과 내 복음을 위하여 핍박받거든 어떻게 하라 했습니까? 분노하라 했습니까, 도리어 기뻐하라 했습니까? 네가 복음으로 핍박받을 때 어떻게 하라 했어요? 슬퍼하라 했어요, 기뻐하라 했습니까? 기뻐하라 했잖아요. 선지자들의 상에 네가 지금 합류하고 있다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난 받아서 그들을 복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거예요 (5:10-12). 이게 팔복이잖아요. 복이잖아요, 복.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제대로 된 복음을 아는지, 안 아는지 우리를 측정하는 방법은 바로 우리 주변에 복음에 대해서 모독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놀리는 자들, 오만한 자들이죠, 오만한 자들을 의도적으로 발생시켜서 그들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오만한 게 뭐냐? 교만한 게 뭐냐? 나의 미래를 내가 처리하고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교만 중의 교만이 뭐냐 하면 자기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는 거죠. 어떻습니까?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생각 안하고 주님 앞에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낮아진 내 마음, 겸손한 내 마음, 한없이 순수한 내 마음을 내세울 때 그건 혼자 살겠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작품을 만드는 거예요. 내 인생을 복음을 이용해서 내가 그럴싸한 괜찮은 신앙으로 내가 조립해내고 생산해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들이 했던 겁니다. 금식하고요. 금식을 왜 합니까? 금식하고 또 금식할 때 얼굴 찡그리고 왜 그렇게 해요? 본인의 금식을 본인이 즐기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시편 2편 1절에 보게 되면 복음을 아는 주위에 교만한 자가 같이 등장해서 들끓게 되어있어요. 시편 2편에 보게 되면 세상의 권력자들도 같이 교만을 떱니다. 분노를 유발하죠. 2편 1절에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귀신같이 세상이 알아요. 세상이 알기 때문에 그들은 가까이 와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끊고자 하죠. 로마서 8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준 사랑을 끊을 수 없느니라 (8:35).

끊을 수 없는 것을 우리 마음을 흔들어서 끊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네가 예수 믿고 그동안 챙긴 거 뭐가 있나? 예수 믿고 네 집안 잘된 게 뭐가 있느냐?” 자꾸 이런 식으로 회유와 협박과 공갈을 일삼습니다.

“너 예수 믿고 난 뒤에 여전히 죄 짓잖아. 그러니까 너 구원 못 받지.” 이런 것처럼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내 행동, 이걸 자꾸 지적하면서 정죄하면서 달려들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세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주께 선물이 들어왔다는 표시일 수가 있어요.

어쨌든 복음을 아는 순간 세상의 분노는 벌떼같이 달려든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같이 다루려고 하지 말고 대적하지 말고 도리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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