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나오는 인간의 시간관은 뭐냐? 하루는 하루고 이틀이면 이틀이고 천년이면 천년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3장 8절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주께서는 천년이 뭐 같고? 하루 같고. 하루가 뭐 같고? 천년 같고. 그것에 근거해서 주께서는 이 지구를 불바다 만드는 거예요. 심판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문제는 뭡니까? 하루는 하루고 이틀은 이틀이고 일년은 일년이고 이러한 시간개념을 낳게 만드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탈출할 필요가 있죠. 출애굽할 필요가 있다고요. 탈출할 필요가 있어요. 내 삶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돼요. 내 삶을 위하여.
이 말은 우리의 시간이라 하는 하루면 하루, 이틀이면 이틀, 일주일이면 일주일, 이것은 나를 위한 시간개념이라는 그 자체에서 우리는 탈출을 해야만 합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그것으로 탈출해야 돼요. 하루가 하루 같은 데서 벗어나서 일년이 일년 같은 데서 벗어나서.
그러면 다음 문제는 뭐겠어요? 어떻게 벗어나나, 그게 문제가 되겠죠. 무슨 수로 벗어나느냐? 분명히 심판은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께 근거를 두고 심판하는데 우리의 하루하루 소박한 우리 일상은 내 삶에 근거해서 내가 최선을 다해보면 되겠지. 열심히 착하게 살면 되겠지, 라는 아직도 거기에서 헤매고 있고 못 벗어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이 심판의 근거, 구원의 근거도 아닌 걸 그 헛짓을 아직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방어시스템으로 여기고 그걸 쥐고 있으니까 평생을 살아도 부질없는, 아무 소용없는 인생을 시간만 낭비한 거예요. 그래놓고 “나는 50년간 주님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주님한테 자기 잘났다고 이야기를 하면 “50초?” “아니, 50년.” “내가 보기에는 50초도 안되는데.” 천년이 하루 같으면요. 90년 계산해봐야 몇 초되지도 않아요.
자기의 삶을 계속해서 긍정하고 그걸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시간계산에 몰두한 거예요. 열중한 겁니다. 잘못된 시간 계산속에서 자기 인생의 모든 걸 거기다 걸었던 겁니다. 저쪽에서 화투치고 있는데 이쪽 방에다가 돈을 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한 거예요. 결정은 저쪽 화투판에서 결정 나는데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데다가 자기 인생의 자존감과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의 그 모든 것을 왜 엉뚱한 데, 헛짓에 다 투자했냔 말이죠.
그럼 우리는 어디다가 투자했습니까? 이게 이제 오늘 두 번째 중요한 거예요. 첫 번째 중요한 것은 뭡니까?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어디 있다? 주님에게 있지, 우리한테 없다. 그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게 있어요.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우리는 이미 종말 처리된 존재 또는 대상이다】이게 두 번째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거예요.
부활을 해버리니까 예수님을 죽게 만든 인간들의 시간의식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시간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 거예요. 너희들 시간 계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하루가 하루고 이틀이 이틀이 아니라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경우는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시간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이미 죽은 자에게 해당되잖아요. 그럼 죽은 자가 곱게 죽어있으면, 죽은 자는 천년이 하루 같든지 하루가 천년 같든지 시간이 관계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우리 시간이 중요하다 되는데, 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살아나버리니까 기존의 인간시간과 경쟁관계가 돼서 어느 시간이 옳은 시간인가 판결에 따라서 심판이 결정돼버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