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환상인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이것이 실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을 차갑고, 불은 뜨겁습니다. 그리니 이 물과 불은 가짜 일 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은 물과 불과 하늘의 별이나 달이나 산이나 자신의 실체는 인간의 환상을 실재라고 믿게 하는 소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대하면서 그냥 보지 않고 본인들의 욕망이나 희망이나 기대나 바램을 담아서 보게 됩니다. 개와 돼지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마태복음 7:6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한 보석을 돼지에게 주면 돼지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보석을 팔면 맛있는 사료를 더 먹을 수 있어 신난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주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인간도 하나님 보시기에 마찬가지입니다. 개나 돼지처럼 인간도 자기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왕을 찾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환상에 해당됩니다. 왕이란 인간 세계의 염원입니다. 훌륭한 왕을 원합니다. 이러한 왕의 등장에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는 이유는 본인들의 사적인 염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바를 그 왕이 자기 대신해 준 것에 대해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반깁니다. 마치 돼지가 진주를 버리고 사료를 반기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왜 하염없이 자신에 대해서 동정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욕망은 왕의 자리를 넘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신과 같이 왕이 되지 못해서 인간은 자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자기가 생각한 절대적인 이상적인 왕 모습을 누군가 보여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 세계에는 대단한 왕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왕이란 어디까지나 궁극적 환상일 뿐이요 인간성의 한계입니다. 이 한계는 인간 세계 스스로는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환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우상숭배를 낳은 겁니다. 인간의 행위가 범죄가 되는 것은 피해자가 발생될 때입니다. 세상을 환상적으로 보면서 대단한 왕과 지도자를 원하는 것도 범죄가 되는 것은 이 의식에 의해서 피해보는 분이 등장하면 성립합니다. 즉 욕망의 끝이 ‘환상적인 신’만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거라면 이 욕망에 의해서 피해입은 분은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로서 인간의 모든 환상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은 이 세상에 유혹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에 유혹받고 살아왔음이 들통난 겁니다. 실재하는 것에 유혹받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자신의 욕망이 첨가되어 만들어지는 환상에 본인이 유혹받는 있는 겁니다. 이는 곧 육의 한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