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2022년 8월 28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1:18-20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와 사도 바울은 예언계에 속했지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악마에게 속해져 있습니다. 즉 이들은 예언에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보기에 사도 바울이 이들 두 사람을 사단에게 넘겼다는 말은 참으로 혹독하고 잔인한 욕설처럼 느껴질 겁니다. 어떻게 같은 인간이면서도 인정사정없이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느냐고 반발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이 이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제대로 알아보고 평하느냐고 이들 편을 들고 싶을 겁니다. 이들 두 사람이 성품이나 성장과정이나 이웃에 대한 태도라든지 평소에 인품을 다 고려해서 과연 막말의 상대가 되느냐가 의심스러울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잔인함을 보인다는 점에서 일반사람들은 사도에 대해서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질 수도 있을 겁니다. 과연 악마에 속했는지 아니면 하나님편에 선 자인지 무엇을 두고 규정할 수 있는지가 궁금할 겁니다. 고린도후서 5: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즉 예수님에 대해서 ‘육체대로 아는 것’과 ‘영적인 안목으로 아는 것’과 대비가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육체대로 하는 것은 평소에 예수님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해서 육체대로 보고 있다는 점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언을 따라’ 주어진 관점은 이 ‘육체대로 하는 것’이 기껏 ‘육체대로 아는 것’에 불과함을 제대로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는 ‘예언을 따라’ 움직이기에 이 디모데와 극히 대조되는 인물로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제대로 규정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후메네오라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2:17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암이 퍼져나가는 식으로 다른 복음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는 올 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사람도 디모데후서 4:14에 나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 대한 악랄하게 감정을 품고 공격한 사람입니다.
부활은 실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진행중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육체대로 아는 것’과 그것과 달리 ‘예언대로 아는 것’이 함께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겁니다. ‘육체대로 아는 것’을 ‘사물성’혹은 물체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대로 아는 것’을 ‘의미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물성이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있음/없음으로 구분지울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의미성이란 예수님만이 부활하여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이 맺으진 세계이기에, 예수님의 일하심/인간이 일함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대조적이고 투쟁적인 관계가 성립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사물성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사물성에서 벗어난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분이 죽고 없어져도 자신들이 일상은 별반 달라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이 부활해 버리니 여기서부터 ‘육체대로 아는 것’, 즉 사물성의 한계가 드러난 겁니다. 사물에 해당되는 자는, 오로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결코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음이 밝혀졌습니다. 사물성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세상을 삽니다.
반면에 디모데는 예언에 따라 삽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모두 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화나게 한 겁니다. 사도를 말로서 물어뜯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예언을 물어뜯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3:33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저돌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의로움과 존재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것이 바로 그들이 지옥을 가야 될 이유가 되고 맙니다.
인간들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충실함이 쌓여서 결국에는 지옥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사물성에 대해서 혹독하게 비난하지 않고 잔인하게 평가하지 않아서 그러합니다. 이는 곧 인간은 자꾸만 홀로 있고 싶어합니다. 사단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대로 움직였습니다.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즉 ‘하나가 둘’이 되신 겁니다.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분의 하나님의 활동하신 겁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러나 욥의 경우나 노아의 경우,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창 6:8-9) 욥기 1장에서 욥이 자녀 10명이 다 죽습니다. 그리고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가져가시지 않습니다. 욥은 자신을 사물성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의미성으로 보십니다. 욥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미리 나타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키시는 취지’안에서 진행하십니다. 지키고자 하시는 것은 생명나무입니다.(창 3:24)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사물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미성을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날마다 사물성으로 돌이켜서 깨어져 마땅함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고백했던, 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고백으로 인하여 인간의 광기란 자기에게 속한 의(義)와 존재 의미를 지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폭로시킵니다. 사도의 지적에 의할 것 같으면 불신자는 상종할 가치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악마가 자기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날마다 혹독하게 나무라서 우리 안에 우리가 지킬 나의 것이 아예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강-디모데전서 1장 18-20절(광기)2208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18-20절입니다.
디모데전서 1:18-20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본문에 이름 세 사람 나오고, 사도까지 합하면 네 사람 나옵니다. 우선 이름이 나온 사람은 18절에 디모데, 20절에는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그렇게 되겠습니다.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디모데, 이 사람 가운데서 디모데는 사도바울편이에요.
사도바울 편인데 디모데가 사도바울 편이라는 그 근거를 사도바울은 ‘디모데는 예언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 그래서 사도 본인도 예언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 그 예언은 주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예언과 무관한 사람, 예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후메네오라 하는 것은 주보 요약에 나와 있지요. 【후메네오라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2:17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암이 퍼져나가는 식으로 다른 복음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무엇이 지나갔다고 하느냐?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는 거예요. 【부활이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는 올 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사람도 디모데후서 4:14에 나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 대한 악랄하게 감정을 품고 공격한 사람입니다.】
아주 사도바울을 물어뜯는 거지요. 달려들고요. 미친 듯이 그렇게 한 겁니다. 이 두 사람은 예언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언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이것은 자아한테, 자기 자신한테 속해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믿음이 파선하고 양심이 깨졌다는 말은 결국 이것은, 인간의 자아는 하나님의 예언과 들러붙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 말입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예언, 주님의 지시와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데 이 알렉산더와 후메네오가 사도바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에게 잘해주다가 배신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알렉산더와 후메네오가 왜 이 귀한 성경에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버림받은 자의 대표자들 입장에서 등장한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은 똑 알렉산더와 후메네오같은 현상을 보이면서 신나게 복음의 세계를 떠나게 되어 있다, ‘바이바이’ 하게 되어있다는 거예요. 욕하면서 떠나게 되어 있고, 그리고 후메네오 같은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지금이 부활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부활이 지나간 게 아니고 지금 부활작용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듯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가지지 않는 것이고, 거기에 관심 두고 싶어도 둘 수가 없어요. 보이는 것이 너무 강렬해요. 보이는 것이 전부고 그게 인간으로서는 마땅하고 당연한 거지요.
그리고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이들에 있어서 특히 비극적인 것은, 오늘 사도바울 나오고, 그다음에 디모데 나오고, 후메네오, 알렉산더, 눈에 보이는 사람은 네 명 나오지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하시는 그런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20절에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 악마가 여기 또 등장해요, 악마가. 그러니 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가 믿음에 파산한 것을 본인이 몰라요. 본인이 양심을 버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더더구나 모르는 게 뭐냐 하면, 자기가 사탄의 세력권 안에서 매여 종속되어 있고 거기서 꼼짝 마라, 하는 식으로 거기에 꽁꽁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이 사람들이 모릅니다.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예언의 세계 바깥에 추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티를 내면서 복음에 대한 강렬한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제가 언급한 것 이러한 이야기를 저는 그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서 둘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나눠서 설명하면 이래요.
고린도후서 5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이라는 한 분을 두고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개의 관점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육체대로 보는 거예요. 그것은 육체대로 예수님은 뭐 누구의 아들이고, 어떻게 살다 돌아가셨다, 그걸로 끝이다, 라고 육체대로 평하는 것은 그렇게 평하는 본인이 육신 육체에서 못 벗어났다는 그 티를 그대로 노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해서 바라보는 그 관점으로 인하여 인간이, 본인이 평소에 어떤 관점으로 계속 자기를 생각하고 있느냐를 그것을 완전히 폭로 당하게 하시지요.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육체 말고 그러면 달리 예수님을 평할 수 있느냐?
여기에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제는 다른 식으로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육신대로 한다면 세상 육신대로 예수님을 평하는 사람이 맞아요.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다가 십자가에 사형당해서 무덤에 묻혔는데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서 예수님 부활했다고 구라를 쳤다.”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후메네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활은 이미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만약에 후메네오 말이 틀렸고 진짜 예언대로 예수님이 지금도 부활해서 살아계신다면 육체대로 아는 것, 저는 그걸 사물성(事物性)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인간의 사물성 또는 물체성,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 봐가지고 사물은 태어났다가 나중에 죽고 없어지고 깨지고, 이런 특징이 있잖아요.
그것 말고 예수님이 사물성에서 태어나서 사물성으로 죽었는데, 그 이야기가 끝이어야 하는데 사물성에 의하면, 인간이 육체대로 예수님을 평가하면 그게 오케이, 제대로 된 평가인데 거기서 인간의 사물성을 뒤엎는, 인간의 사물성의 한계를 뚫어버리는 부활이 이루어져 버린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일종의 우리와 같은 육체, 우리와 같은 사물로 봤다는 것은 이게 뭐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냥 잘못됐다, 하고 끝나면 되겠는데 부활하고 난 뒤에 인간이 비로소 예수님만 의미 있고요, 나머지 인간들은, 육체로 아는 인간들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둘로 나누겠습니다. 사물성(事物性)과 의미성(意味性), 유일하게 이 세상 전부를, 의미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의미성에 의하면 인간이 놓친 게 있습니다. 인간이 육체로,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대로 육체로 봤을 때 놓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사탄입니다. 악마입니다. 악마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지금 후메네오 알렉산더 이 사람은 본인이 악마의 세계에 속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눈에 보이는 게 다기 때문에, 사물성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보기 때문에. 사탄은 사물이 아니거든요. 영(靈)이거든요. 사물성으로 영이 파악이 안 돼요.
예수님만이 부활했다는 말은, 천국은 사물성 인식을 갖고 있는 자들을 천국에서는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육체로 어떻게 하면 천국갑니까?” 누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데 “집사님,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천국에 못가라고 인간은 사탄의 지배를 받게 한 겁니다. 천국에 오지 말라고. 너희들한테는 천국이 있어도 없는 게 된다고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천국이 없는데 무슨 천국을 언급해요? 인간에게는 천국이 해당이 안 되는데요. 없어요. 사물성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 이야기에도 똑같지요. 똑같이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사물성과 의미성을 이야기할 때,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 왜 다시 태어나야 되느냐? 인간의 사물성은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사물성이 처음 출발했던 곳, 출생지점까지 되돌아가야 돼요. 되돌아가서 출생지점과 그 이전 없었던 시절로 되돌아가야 돼요. 그런데 없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이미 늙어빠져서, 나이가 많아서 안 되거든요. 니고데모도 그렇게 난감한 태도를 취했는데 “어떻게 이 나이에 다시 엄마 태 속에 들어갑니까?”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없애는 방법은 죽이는 거예요. 사물성을 죽여서 가는 거예요. 이런 게 어려운데요. 뭐가 사물성이냐 하면, 항상 사물성은 ‘여기 있다, 없다.’로 논하는 게 사물성이고요, 의미성은 ‘내가 하느냐, 아니면 주님이 하느냐?’ 이게 의미성이에요. ‘살아 있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진짜 살아 있는 주님이 모든 일을 하신다.’ 이게 의미성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체로밖에 생각을 못 해요. 육체로밖에 생각 못 하기때문에 사물성이라 하는 것은 이미 자기가 있잖아요, 있는데 있는 인간들이 뭘 알지를 못하느냐? 내가 없을 경우를 생각을 못 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면 내가 온전히 죽으면 안 되고요, 약간은 미진하게 살아 있어야 죽었다는 것을 알까 말까 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온전히 죽은 것을 모르지요. 실눈 뜨고 ‘내가 죽어있나?’ 눈 뜨는 것은 아직 죽음을 모른다는 뜻이에요. 같은 뜻으로요, 양심이 부서졌다, 깨졌다, 양심을 버렸다, 라는 것을 알려면 양심이 약간이라도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어야 이게 가능하거든요. 양심이 다 깨져버리면 양심이 깨진 것을 모른다고요.
인간이 자기가 죽은 것을 모르는 이유는 아직 덜 죽어서 그래요. 아직 사물성이 남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냥 흉내나 내요. 흉내 내야 소용없거든요. 의미성은 오직 예수님만 의미를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부활했거든요.
그러면 왜 사도바울과 디모데는 이 사실을 아느냐? 사도바울과 디모데는 예언에 따라서 움직이거든요. 하나님의 의미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까 나의 사물성은 이미 깨어져버린 사물성이라는 것, 나의 육신은 더 살아봐야, 또 지금 죽어봤자 육신에 불과하고 이미 죽은 육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서 알게 된 겁니다. 성령을 따라서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에 대해서 아주 철저하게 그들의 악마의 광기를 찾아내서 아주 패대기를 쳐버려요. “너는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 네가 사탄이 장악하는 힘에서 네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일깨워줬다는 거예요.
저는 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에 대한 사도바울의 태도를 ‘사도의 잔인함의 극치’라고 보고 싶어요. 사도가 이렇게 독한 분인 줄을 예전에 미쳐 몰랐지요. 예언에 따라 살지 않는다고 이렇게 독하게 취급하시는 사도, 사실은 성령 받은 자라면 불신자에게 다 이렇게 이런 태도를 가져야 마땅합니다. 일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동정이나 인정 그것 다 완전히 발라버리고 그 속의 악마성을 색출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악마를 악마답게 취급할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주 잔인하게 대우해야 돼요.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우리를 비난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정말 성령 받고 정말 예언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 우리의 의미라는 것, 우리의, 나의 의라 하는 것은 절대로 이 육체와 연합되지 않는다는 것, 갖다 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철저하게 알아야 돼요.
내가 양심에 파선했고, 믿음 다 깨졌고, 나는 내 자아만 위하며 살아간다, 눈에 보이는 것 그게 다다, 라는 사실을. 그런 자가 바로 멀리 있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임을 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예언에 속한 사람이에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사도바울의 말에 동의가 되는 거예요.
이 말에 사도가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에 대해서 “너는 지옥이나 가라, 인간들아!”라고 아주 매정하게, 아주 비정하게, 냉혹하게 그렇게 처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평소에 내가 나한테 ‘너는 지옥이나 가!’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돼요. ‘인간아, 성령 받기 전의 너는 지옥이나 가!’
사람이 인정사정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상대를 대할 때 어떤 나의 이용가치로 대하지 않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대하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심하게 다루면서 나한테 들어오는 이익은 뭐냐?’ 이런 것 없습니다.
상대에 대해서 가장 잔인한 조치 처사가 뭐냐 하면, 바로 상대로부터 어떤 것도 건질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너는 나하고 우열을 논할 대상조차도 아니야’ 라고 상대를 보는 거예요. ‘마귀가 대단하냐, 내가 대단하냐? 한번 붙어볼까?’ 이것은 아직도 상대를 상대로 대우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가라. 너는 저쪽 사람이야. 너는 저쪽 지옥 사람이야. 저리 가!”라고 한다는 것은 ‘너는 나하고 상대할 가치도 없어.’ 그런 뜻이거든요. 이걸 여러분이 불신자한테 너무 차갑게 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왜 철저하게 차갑게 대우 못 했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우호적으로 다뤄왔지 않은가? 평생 동안 남 욕하기 전에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고 남 비난하기 전에 왜 나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는 생각을 왜 못하고 있었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만 부활했는데 그 말은 뭔 뜻이에요? 우리는 그냥 육신에 사물에 불과하고 육체에 불과한 거예요. 나중에 깨져야 돼요. 사물의 특징은 깨지는데 있습니다. 유리창처럼, 거리의 옹기처럼 완전히 박살 나는 거예요. 박살 나면 ‘없다’가 되어버려요. 우리는 어차피 있어봤자 없는 것이고, 있어 봤자 우리는 평생에 하루하루 너무 자기에게 성실하게 충실한 삶을 살아오고 있어요. 지금도.
그런데 하루하루 충실하고 성실한 삶이 쌓이고 쌓여서 그게 지옥으로 합류하게 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지옥 가려고 열심히 산 거예요, 지옥 가려고. 사탄에 내어줬다, 악마에 내어줬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 자기의, 자기의미, 이것보다 더 확실한 악마적인 표식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기의, 자기의미, 왜 그런 것을 하는가?” 물으면 “이게 나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이게 바로 악마에 속했다는 표시에요. “너 왜 그렇게 하느냐?” “주께서 하시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의미성이에요. 이게 의미성이라고요.
교회 와서 사물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이여, 나 대신 출근하시고, 나 대신 애 키워주시고, 나 대신 아파주시고, 나 대신 코로나 다 걸리게 해주고, 나 대신 죄를 처리해달라’ 이게 사물성이에요. 이게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결국은 이익 보겠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이익 보겠다는 것.
이게 예언입니까? 예언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사도는 악마의 광기(狂氣)를 잡기 위해서 본인이 광기를 총동원하는 겁니다. 이래야 돼요. 점잖게 하면 안 돼요.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점잖게 대우하면 안 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광기를 개발해야 돼요. 주님의 광기입니다. 주께서 나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데서 오는 광기, 더 살아도 소용없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 이게 하나의 광기거든요.
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광인(狂人)으로 봤어요. 미친 사람으로 봤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세요. 오늘 본문이 내가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악마를 거론하는 이 사도바울은 이거 광기 아닙니까? 남들이 보면 광신도라고 평하기에 적합하지요. “사도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사도행전에 나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도바울 네가 미쳤구나. 네가 예수한테 미쳤구나.”
다시 말해서 그 정치하는 왕 입장에서 볼 때 사도바울 속에서 광기가 보였던 겁니다.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저 인간은 뭐 예수가 살아 있다,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는 모양이지?’라고 다른 사람이 사도바울을 그렇게 평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평을 받습니까? 열심히 사네, 착실하고 착하기도 하지, 이런 평을 듣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저 사람은 예수 믿어도 예수에 너무 빠지지 않아서 그게 좋아.” 이런 거요. 뭐 어떤 소리 듣고 싶어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그 소리를 이미 본인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내가 만일 미쳤어도 주님을 위해서 미쳤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내가 정신이 온전하다면 그것은 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부터는 육체로 알지 마라. 주님은 육체로 알 대상이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이 사물성에 있는 인간을 의미성의 나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주께서 하는 방법은 뭐냐? 예수님이 인간과 똑같은 사물성을 가지고 와서 소모되어 버리지요. 망가져 버려요, 이 땅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너하고 똑같이 육체로 와버려요. 와가지고 너는 너를 건사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데 주님은 바스러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소모되고, 소비되기 위해서 육체로 오셨어요.
그렇게 해서 어떤 육체도 이제는 천국은 넘볼 자격이, 잽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겁니다. 인간의 어떤 사물성, 육체로서는 이 깨어짐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서 말미암아 여기서 인간들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셨던 원리가 등장합니다.
그건 뭐냐? 하나가 둘이 되었다는 겁니다. 한 하나님이 두 분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인간은 하나만 고집하거든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만 고집하는데 하나님 쪽에서 인간의 이 육체성, 사물성을 완전히 틀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것이 사탄에 속한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가 둘로 분리됩니다.
그래서 디모데와 사도바울은 본인이 분명히 누가 봐도 육체를 갖고 있어요. 사물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체성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예언이라는 의미성, 예수님 세계의 의미성이 같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하고 똑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지만 이게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는 거예요. 사물성과 의미성, 이 세상을 둘로 나눠서 봐야 된다 그 말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걸 수학에서는 이진법(二進法)이라 해요. 수학에서 이진법은 0과 1로 나누지만 제가 편의상 1과 2로 나누겠습니다. 1과 2, 성경 전체가 이진법으로 설명이 돼요. 이진법이 되면 prime number, 소수(素數)라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숫자를 2진법에서 2로 맞춰보겠습니다, 2로!
2로 맞춰버리면 모든 이 세상의 변화가 2로 전부 다 소급이 되어버려요. 예를 들어서 13같은 경우에는 2로 다 소인수분해가 돼요. ‘2³+2²+20’ 합하면 ‘8+4+1’이 되면 이게 13이 돼요. 13이라는 것을 소인수분해 하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17도 마찬가지예요. ‘2⁴+20’ ‘16+1’ 하면 되는 거예요.
창세기 5장 25-2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어젯밤에 이 969세를 2진법으로 나눠봤어요.
‘29+28+27+26+23+1’ 그렇게 하니까 969가 나와요. 모든 것이 이진법으로 다 정리가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이. 왜 이진법으로 정리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어두움과 빛 두 개로 나누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이런 말을 해요. 27절에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인간이 하늘에서 벌써 둘이 돼요. 하늘과 땅, 인간, 둘이, 2가 된다고요. 눈에 보이는 1이 전부가 아니고 2가 되는 것은 거기다, 사물성에다가 의미성이 찾아오게 되면 사물성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 비로소 드러나는 거예요.
주님께서 활동하실 때 의도적으로 이 사물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일을 하셨어요. 마가복음 8장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소경이라는 사물성에다가, 육신에다가 침이라는 사물성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그다음에 24절에,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을 보나이다. 사물성이 보이는 거예요. 나무같은 것, 사람이 아니고 나무 같은 거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이것은 사물성이 아니고 인간이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 인간은 그저 나무와 인간이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추가적인 의미가 담길 때, 예수님이 앞으로 일할 부활 세계의 활동을 이렇게 미리 앞당겨서 악마에 속해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님 세계의 의미성을, 거기다가 흔적을 남기는 그런 행위들을 예수님이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셨던 거예요.
거기서 다시 주께서 안수하니까 뭐가 보이느냐? 25절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은 네가 나를 경유해야, 예수님을 거쳐야 비로소 육체에서 육체로 보는 게 아니고 의미에서 육체로 보는 것, 오늘 본문대로 하면 예언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것,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걸,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해요. 이제는 예수님을 육체로 알지 않고 영으로 아는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 6,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인간들 보기에 예수님께서 사물에다 진흙이라는 사물을 갖다 바름으로써 어떤 효과가 주어졌다고 보이잖아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눈을 뜬들 그것은 의미성이 아니고 사물성이에요. 나중에 주님께서 소경인데 그 눈 뜬 사람에게 다시 예수님이 말씀을 하니까, 예언을 하니까 비로소 예수님께서 육신의, 육체의 눈을 뜨게 한 게 아니라는 사실, 영적 소경에서 영이 보이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거지요.
꼭 우리가 암에 걸리고 소경이 되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귀찮은 방법 말고 바로 성령이 와서 육신으로, 영적으로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는, 실로암의 눈을 뜨는 그 방식, 예언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 디모데와 사도바울이었던 겁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육신을 버리지 않고, 육체를 버리지 않고 사용하시는 그 이유들을 여러분이 이제는 아시겠지요? 욥기에 보면 나와요. 욥기 1장에 보면 자식 열 명인데 자식 열 명 다 죽습니다. 자식 열 명이 다 죽어요. 그럴 때 욥이 1장 21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지금 욥이 놓친 게 하나 있습니다. 뭘 놓쳤느냐 하면, 왜 본인은 하나님께서 취하지 않았는지를 그걸 모르고 있어요. 자식 열 명을 취하는데 왜 본인은 취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욥이 선지자기 때문에 그래요. 선지자는 이미 죽은 자에요. 욥이라는 사물성에 주님의 의미가 담겨버리면 이미 욥은 죽은 자고 의미를 주신 주님이 욥과 함께 살아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십자가에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 이것은 ‘너희들 보기에 내 육체가 사는 것으로 보이느냐? 주님으로 사는 것은 안보이지, 그지? 이 사탄에 속한 인간들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이 예언에 따라 디모데가 움직인다는데,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요, 이 예언의 근원은 뭐냐 하면, ‘지킨다’는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창세기 3장에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하는 모든 태도는 지키는 쪽이에요. 뭘 지키는가? 생명나무를 지킵니다. 지킨다는 말은, 들어올 사람만 들어오고 못 들어올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왜? 나는 너를 지키고 싶은 게 아니고 따로 생명나무를, 주님이 하신 일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너를 지키고 싶은 게 아니고.
주님은 너를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고 주님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예언의 취지가 뭐냐? 지키는 거예요. 예언의 속성이 지키는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뭐냐? 본인을 지키는 거예요, 본인을. 본인을 지키는 겁니다. 얼마나 대조가 돼요! 본인 지키다가 지옥이나 가지요.
주님은 예수님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의미성에서는 뜻이 뭐냐 하면, 아까도 했지만 ‘주께서 했느냐, 아니면 네가 했느냐?’를 늘 물으시는 겁니다. 인간의 사물성은 ‘있다, 없다.’에요.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뭐. 누가 어느 놈 천국 가본 적 있나?’ 이런 식으로 ‘있다, 없다’로 끝나요.
그러나 주님은 사물성을 갖고 오되 내가 있게 했다는 겁니다. 내가! 욥의 자식 열 명 죽을 때 욥까지 죽이지 않아요. 살려두는 이유가 욥을 통해서 의미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욥 하나 살고 죽고 하는 그것은 별 의미 없어요. 주님께서 앞으로 이 땅에 오실 때 이렇게 이야기한다, 를 욥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욥은 힘들어요. 어려워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여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여러 사람 돼요. 몸 아파서 죽여달라고, 기도 제목이 죽여달라는 거예요. 그만 살게 해달라고. 안 됩니다. 그거 안 돼요. 주께서 필요할 때까지 우려먹을 것 다 우려먹어요. 완전히 진국 되게 우러날 때까지 다 우려먹고 이제는 더 이상 뽑아낼 것이 없다 싶으면 그때 갖다 버립니다. 그게 바로 예언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예언에 의해서 의미성을 줌으로써 여기서 인간들로 하여금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으로 이 땅이 구분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그것을 매일같이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어줍잖게 신앙 흉내 내는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 다 해요. 그거 백날 다 해야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안 받습니다. 그것은 예언을 따라 한 게 아니에요. 사탄에 따라 한 거예요. 이 사도바울이 이렇게 잔인하게 광기의 극치를 보이는 이유가, 예수님도 그랬었어요, 예수님도!
마태복음 23장 32,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욕하는 대목은 잘 생각이 안 나지요.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강조한 거지요. 겹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지옥이 있다는 것, 사탄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들을 두었다. 그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총동원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주님을 그걸 악마의 광기로 본 거예요.
8월 21일 MBC 뉴스에 악마를 보았다, 악마의 광기에 대한 뉴스가 나왔어요. 물론 그 뉴스에서는 저처럼 “보았다. 악마의 광기가 여기 있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파주성당에서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MBC뉴스에서는.
파주성당에서 사십 대의 보좌신부가 고해성사 처음 온 20대 아가씨를 사적으로 만나서 차에서 손을 잡았는데 놔주지를 않았어요. 손을 빼도 “우리 밥 먹으러 가자.” 하면서 주물럭거리고 그랬어요. 나중에 카페까지 찾아와서 “너 보고 싶었다. 우리 만나자.” 그렇게 된 겁니다.
여러분은 그걸 보면서 ‘저 사탄에 속한 신부가 양심이 파선하고 믿음도 파선했다.’ 그렇게 하잖아요. 지금 그건 아니에요. 그건 광기에 속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냥 육체에 속한 거예요. 광기는 그 뒤에 나와요. 아가씨가 찾아갔어요 항의하러. “저 보좌 신부가 나를 성추행했으니 인사조치를 하든지 교회 차원에서 조치를 해달라.” 하니까 드디어 성당 전체가 광기를 보여주는데 성당의 관계자며 주임신부까지 다 동원했어요.
MBC 기자가 녹음한 것 틀어줬어요. “나가라! 어디서 이렇게 횡포냐. 나가라!” 하는 거예요. 여기서 광기를 못 찾았습니까? 광기가 뭡니까? 지킬 게 있다는 거예요. 파주 성당을 지키는 거예요, 파주성당. 이게 광기에요. 악마의 광기는 뭐냐? 지킬 게 있을 때, 지킬 게 있을 때 그게 광기에요.
인간은 자아를 못 버립니다. 자아를 지키고 자기 의로움을 지키는 것, 이게 악마의 광기에요. 그게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그래서 예수님 돌아가신 거예요. 십자가에 죽으신 그게 자기 지킬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주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돌보는 것 다 알아요. 하지만 천주교의 악마성은 뭐냐? 성당을 지키는 거예요. 성당 그 자체를 지키는 거예요. 교회 목사의 광기는 뭐냐? 교회를 지키는 겁니다. 자기 명예를 지키는 거예요. 이게 어디 남의 이야기입니까? 우리들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을 지키고, 자식 잘나게 잘 키웠다, 그거 지키고 내 인생 그만하면 선방했다, 그거 지키고 지금껏 파출소 한번 안 가봤다 그것 지키고, 그게 바로 미친 인간 안 되려고 요령 부리면서 인생 살아가는,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의고 나의 존재의미입니다. 이것은 의미 없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의미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나한테 의미 있으면 의미 있는 것이고, 그렇다는 거예요.
그들은 죽음을 모릅니다. 그들은 사탄을 몰라요. 그런 인간, 자기 지키려 하면서 남 만나면 상대방에서 ‘너 나한테 줄 이익은 뭐냐?’ 그것부터 먼저 끄집어내는 사람들이에요. 사도바울처럼 광기 있는 사람 아니에요. ‘저 사람하고 별로 안 좋지만 나중에 뭐 얻을 게 있겠지.’ “얻어서 뭐할건데요?” “내가 발전하잖아요.”
지금 사도바울은 인간의 사물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지요. 주님의 예언이 인간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저는 이걸 달그락거리는 그릇으로 보는데요. 어릴 때 맛있는 것 주면, 우리 어릴 때 할머니가 수제비 같은 것 하면 맛있거든요. 그러면 애들이 더 달라는 표시로서 다 먹고 난 뒤에 그릇에 아무것도 없는데 숟가락으로 그릇 바닥을 긁어요. 달그락달그락 긁는 거예요.
이 예언의 말씀은 의미는, 주님께서 우리의 사물성을 밑바닥까지 달그락거리면서 긁어냅니다.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주 그릇 빵꾸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사도바울보고 “너는 뭐야?” 하겠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나 죄인 중에 괴수야. 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나 죄인 중에 괴수야.”
이걸 바로 자기 의와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의미하는 그 의미성, 이러한 사탄에 속한 인간의 주장과 맞은 편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달려들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지금 자기의 잘남과 의미를 포기 못하는 인간들이 이 디모데전서 1장 20절 이걸 보고 가만두겠습니까? 물어뜯지요.
그 물어뜯는 사람이 누구냐? 알렉산더. 가는 곳마다 사도바울을 물어뜯어요. 사도바울을 물어 뜯는 게 아니고 예언을 물어뜯고, 옛날 예수님을 물어뜯던 그 이빨, 악마의 이빨로 지금 성령 받은 예언에 따르는 사람들을 물어뜯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를 17로 보고, 13으로 봐요. 50으로 보고, 969로 봅니다. 주님은 “아니야 아니야. 너는 2 아니면 1이야. 2 아니면 1이야.”
하나님과 아버지가 둘 되었던 예수님의 의미, 하나님의 의미가 예수님의 사물성을 끝까지 책임지고 죽어도 부활에 이른 것처럼 2가 되어야 될 인간들이 악마가 시키는대로 선악과 따먹고 1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2가 아니고 1.
그러면 2의 경우를 예를 들게요. 창세기 6장 8-9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노아가 혼자 있어 보이지? 아니야.”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창세기 5장에 동행에 대해서 여러분 잘 아시는 유명한 사람 있지요.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입니다. 1이 아니고 2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나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동행했습니다.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는 디모데를 본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돼요. 여러분을 본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불가능합니다. 왜? 나는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매일같이 이렇게 동행, 하나님의 의미,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는, 죄인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은 특이하게도 주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매일같이 사물로 돌아가게 만들어요. 늘 깨어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로 돌려보냅니다. 실컷 잘 살았는데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 뭐든지 하도록 주께서 예언 따라서 그렇게 일을 시키신 거예요.
농담 비슷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유대인의 농담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랍비, 성경에 충실한 어떤 랍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 신이시여, 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걸 보고 어떤 부자상인이 그걸 따라서 “하나님, 저는 돈만 밝히고, 정말 나쁜 놈이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진짜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 정말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랍비하고 부자가 화를 그렇게 내면서 “네가 어디 건방지게 이 고상한 신앙의 수준에 네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게 왜 끼어드느냐?”고 막 흉보고 놀렸답니다. 거기서 나온 교훈이 뭐냐 하면, 뭔가 있어야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거예요. 뭔가 있어야.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뭔가는 있게 해요. 아직까지 몸이 건강하고, 코로나 걸려고 낫게 만들고, 뭐든지, 뭐든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괜찮아 보이는 것을 남기는 이유는, 뭐가 있어야 정말 우리 자신을 잔인하게 다룰 수가 있어요. ‘이 양심에 파선한 인간아! 믿음에 파선한 인간아! 네가 또 살았나?’ 남들보고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자신보고 매일같이 우리 자신보고 그렇게 비난을 쏟아줘야 됩니다.‘아이고, 이것도 인간이라고.’
이 인간의 사물성, 어렵게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사물성이라 하는 것, 왜 인간의 사물성을 유지하느냐? 왜 예언에 끼어들지 않고 자꾸 사물성,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냐?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이 사물성을 끌고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고, 계속해서 미래에도 괜찮은 나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떤 노래 가사에, 노래 가사 나오면 설교 끝나는 거예요, 노래 가사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 보니까 이게 일반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대로 절실하게 잘 보여줘요.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 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래 가사입니다. 밤새도록 천장을 보며 그녀를 생각하다가 아침이 오니까 내 방이 환해진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 홀로 있던 나는 1입니다. 2가 아니고 1이에요. 1이 그날 시간의 연속성으로 인해서 그다음날도 1이에요. 이게 오늘날 일반인들의 삶 아닙니까? 백날 이야기해도 2가 되지 못하고, 누구하고 동행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래놓고 지나간 것은 잊혀지면 그만이라고? 그만일 수가 없지요. 그만 같으면 그다음날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그 글자를 썼다 지웠다 하겠어요? 이왕 하는 김에 하나 더 할게요. 인간은 1로 살아가는 거예요, 1로. 뭐 신앙이 무슨 상관있느냐? 아니에요. 2가 되어야 돼요. 동행을 해야 돼요. 노아처럼 살아야 될 인간이 1로 산다고요.
저 여린 가지, 사물성이지요, 가지.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내 사랑 그대
내곁에 있어줘
이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곳은 어디에. <내 사랑 내곁에> 김현식.
모든 이 세상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1입니다. 예언 따라 살지를 않아요. 사탄에 속해서 평생 살아봐야 그들은 지옥에 합류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우리 자신 모두를 새로운 안목에서 보게 하옵소서. 육체로 눈에 보이는 게 다라고 우기는 그들 세계 속에서 주께서 시작한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다시 보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서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모든 것이 소급해서 주께서 다 했다는 것을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