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기이한 복음

아빠와 함께 2022. 9. 11. 12:13

 

기이한 복음

 

2022년 9월 4일 이근호목사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2:1-4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2: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복음은 돌파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들은 아무리 해도 돌파하지 못하는 것까지 복음은 돌파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실어서 이 세상을 돌파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즉 성도를 급하게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과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겪었던 일을 겪게 하시는 겁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고이 지키고 싶은 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또다른 뜻은, 그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서 지정해놓은 모든 계층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든지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복음부터 봅시다. 갈라디아서 1:8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내용을 보면, 복음을 전한 사도라 할지라도, 또한 복음을 사도에게 전달해준 천사라 할지라도 아예 저주대상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곧 복음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된다는 말입니다. 그 무엇도 복음의 가치를 대신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의사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복음 이외의 모든 자는 그 안에 ‘복음없이는 곧 저주’라는 요소를 필히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복음 위주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 자기 구원 위주’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이 구원될 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십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는 저주의 대상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인간 세계에 알려지고 참으로 괴이하고 기이한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은 인간 나름대로 자체적인 권력조직체가 가다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예에 의해서 인류는 성채를 가진 ‘도시 국가’를 구성하게 됩니다. 이는 곧 자신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켜보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이는 곧 스스로 봉쇄하는 바가 됩니다.

 

국가의 취지나 이념은 이러합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지키지 아니하면 지켜줄 자는 없다”입니다. 이로서 국가라는 조직적인 권력체는 하나님 나라와 라이벌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요한복음 11:5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즉 국가의 속성은 ‘예수님이냐 아니면 국가냐’를 두고 선택하게 만듭니다. 양립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를 죽은지 나흘 만에 도로 살립니다.

 

이 얼마나 괴이하고 기이한 일입니까! 왜 사람을 죽여놓고 또 살려내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내심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무엇일까요? 창세가 3장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게 됩니다.

 

이때 이것을 악하다고 보시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행한 일을 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왜 지를 지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바가 그것, 곧 죄짓는 것 뿐이니까 그럽니다.

 

인간은 ‘니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자기를 살아보겠다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겠다는 것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무지한 가운데 더 추가적 죄를 짓는 양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느냐 하면, 구원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국가 조직체’안에 가두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인간들이 제 딴에 평생을 열심히 살았왔노라고 자부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갇혀 있는 봉쇄가 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더 자기를 옥죄게 마련입니다. 즉 결코 기이함이나 괴이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이 자체적으로 심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국가 형태라는 로마제국의 사람인 본디오 빌라도와 최후의 종교 조직체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나라의 권력층 모두가 합쳐지는 그 지점까지 나아가십니다. 이 두 조직은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라는 취지를 인간식대로 살려보겠다고 시도의 결정체입니다.

 

즉 인간이 해낼 수 없는 모든 한계지점에 주님은 자진해서 나아갑니다. 인간들은 자연의 변덕에 맞서 기술적으로 자신들을 지키는 방안에 모아보려고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개죽음 당하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망상이요 허상입니다. 인간은 진짜 진리찾기를 쉬지 않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들이 기껏 할 수 있는 바는 같은 인간들 끼리의 만남에요 그 만나는 장소가 국가기관이요 교회라는 종교단체 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 의해서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신다는 말은, 인간이 저주받은 상황이라는 것을 형성하시고 만납니다.

 

곧 죄인과 피의 만남입니다. 히브리서 13:20에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자께서 흘리신 피와의 만남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는 국가나 교회 내부에서 필히 이런 권력체는 망해야 한다는 요소를 전제하고 있는 겁니다.

 

‘루미놀’은 형사들이 살인사건 현장에서 핏자국을 찾아낼 때 뿌리는 약품입니다. 이 ‘루미놀’과 같은 기능을 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십자가 피 앞에서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생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들 성도의 존재와 활동 속에서 세상은 ‘하나님 복음 구원’ 곧 ‘예수님 구원’을 위한 공간임이 밝혀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 더는 사람 만나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디모데전서 2장 1-4절(기이한 복음)22090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2장 1-4절입니다.

 

디모데전서 2:1-4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에 국가라는 것을 사도바울이 완벽하게 받아들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만 있다, 가 아니라 국가도 있다. 나라도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조직체, 권력조직체가 있다.’도 그렇게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국가가 있어 줘야 복음이 복음대로 살아요. 복음의 취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국가를 뚫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산골에서 자연인으로 혼자 나무하고 살면서 복음 전하게 아니고 예수님이 태어나서 가는 목적지가 있는데 그 목적지가 바로 세상 권력과 종교 권력……, 종교 권력은 유대인입니다. 그건 유대 나라고 세상 권력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 세상 권력과 종교 권력이 합체되는 그 현장, 그 현장이 주께서 최종적으로 복음을 완성시키는 자리가 돼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는 바로 이방 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된 로마제국이 최종짐승의 형식을 가졌고 인류의 마지막 모든 국가의 모델케이스가 되는 그 나라의 대표자로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참~, 사람의 최고의 복이 뭐냐? 하나님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 만나면 사람 만나는 것이 시시해집니다. 자기 친구 몇 명 있고, 내가 과거에 공부 좀 했고, 이게 아무 무의미해져요. 하나님 만났으면 다 만난 겁니다. 교회 60년 다녀도 사람만 만나고 돌아간 사람이, 또는 코로나 걸려서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 될 것 다 됐는데, 진급할 것 다 진급했는데 사람만 만났어요. 그게 어디서 티 나는가? 이야기하면 사람 이야기나 하고요.

 

어제 어떤 분의 전화를 받았어요. 자기가 대구 서부지역의 어떤 장로를 만났대요. 장로 그 사람이 자랑질을 하는데 자기는 그 교회 재정을 맡고 있고 월 백만원씩 헌금을 한다는 거예요. 또 뭐 우리 교인들 부담 주는 것 같은데요, 물론 부담 느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만. 하여간 백만원씩 헌금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만났던 우리 교회 집사님은 지금 복음 이야기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나는 지금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 그 사람은 사람 만나는 이야기 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몇 주 전에 설교할 때 <꽃순이를 아시나요> 언급했지요.

 

“나는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이런 사기꾼 저런 사기꾼 만났다.” 만났는데 그게 뭐냐? 사람 만난 거예요. 사람 만날 때 인간은 그냥 만나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 만나는가? 인위적으로 권력조직체를 형성하면서 그 안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요. 교회 다닌다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 만나는 겁니다.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닙니다.

 

부부생활을 오래 하는 팁 하나 드릴게요. 부부가 결혼한 지 한 30년이나 40년 되었을 때 화목을 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 뭐냐? 교회 다니면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목사에게 시답지 않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소리를 듣거든요. 만약 부부가 교회를 안 다니면 둘이 똑같은 얼굴 대하고 똑같은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에요.

 

‘우리 30년 살았잖아. 그만 찢어지자.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 솔직하자. 같이 동거하는 자체가 숨이 막히지? 역시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최고였어. 애 대학 보내고 다 키워서 결혼시켜 놨으니까 우리는 헤어지자.’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게 되면 서류가 복잡하기 때문에 실천에 못 옮겨도 속은 그래요.

 

속은 그러한데 그게 교회를 다니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교회를 다니면 목사들이 시시한 이야기, 들을 필요도 없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나마 우리끼리라도 이렇게 사는 게 낫다.’ 이렇게 해서 화목 안 해도 교회 다니면서 화목해져요. 왜? 교회에서 아무 들을 게 없기 때문에 교회 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역시 그래도 헤어져서 따로 있는 것보다 만나는 게, 세상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 낫다는 그런 느낌을 교회가 주선을 해준다고 할까요.

 

아무 쓰잘데기없는 짓들을 하거든요. 그것보다는 우리가 낫지 않느냐. 상대적인, 자기가 인생 선방했다는 느낌을 확 주면서 화목하게 됩니다. 만남이 답답하거든 교회 나오셔서 우리 만남보다 더 쓸데없는 만남의 현장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나마 우리끼리 참으면서 살자, 이렇게 화목케 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이 만든 조직체, 유대 나라는 종교조직체지요, 종교조직체, 로마는 돈으로 축성된, 돈으로 쌓아 올린 권력 조직체입니다, 그 조직체가 현장에서 둘이 만나는 그 지점에 예수님께서 탁 끼어들었어요. 그게 요한복음 11장 50절에 나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그 당시 유대 나라 지도자가 예수님이 자꾸 말썽을 일으키니까 로마의 눈치를 보고 있는 입장에서 로마 쪽에서 뭐라고 제의하느냐 하면 “어이, 유대 나라! 내가 너희들 종교적 자유 줬잖아. 그런데 자꾸 말썽 일으키면 곤란하지.” 본디오 빌라도 입장 로마당국 입장에서는 “너희들 내부에서 일어난 말썽쟁이를 너희가 뽑아내라. 그러면 내가 옛날에 한 계약대로 너희들에게 세금만 받고 어떤 종교적 자유도 보장해줄 게. 유대교를 지키든지 여호와 믿든지 맘대로 해. 다만 말썽만 일으키지 말아라.”라는 정치적 제안을 했고요.

 

거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면서 “우리가 알아서 말썽꾸러기 제거해줄 게.” 그래서 제거한 대상이 누구냐?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에요.

 

교인치고 십자가 안 믿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그 현장에 돌입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게 돼요. 하나님을 만나는 그 조건 안에서 우리는 기존의 국가도 뚫어야 되고, 그다음에 종교도 뚫어야 돼요. 교회, 눈에 보이는 교회도 뚫어나가야 되고 국가도 뚫고 나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으로서는 뚫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국가라는 것이, 이게 국가관인데 어렵더라도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국가관, 국가의 취지가 뭐냐 하면,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입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국가를 설립하는 목적이 뭐냐?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래서 국가는 주의 나라와 라이벌 관계에 속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지력과 지혜를 총동원해서 “내 생명은 내가 지키자.” 향토 예비군 정신입니다. “내 마을은 내가 지킨다. 내 생명은, 우리 생명은 우리가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는가?”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도시국가였어요.

 

창세기 4장에서 국가의 시작은,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국민교육, 초등학교, 중학교, 모든 교육의 취지, 그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힘을 길러야 이 자국민의 생명은 자국민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는 거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을 누가 힘들게 하는가? 그것은 자연이지요. 자연에 맞서는 거예요. 변덕스러운 그 자연에 기술적으로 맞서는 거예요, 기술적으로. 원자력발전소부터 해서 인공지능, 기술적으로, 컴퓨러, 컴퓨터, 미국 갔다 왔다고 또 컴퓨러라고, 컴퓨터로 해서 지켜내는 거예요. 개죽음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의 취직이 뭐냐 하면, 이런 거예요. “더 귀한 것이 없는 것이 인간의 생명인데 그 생명 지키는데 네가 무엇을 더 보탤 수 있느냐? 보태면 월급 줄 게.” 이게 취직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래픽디자인할 줄 압니다.” “그래. 광고회사에서 너 디자인해라.” 그 광고회사가 운영되는 최종목표는 뭐냐?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이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뚫고 지나간다는 거예요, 그걸!

 

여기에 대해서 교회는 “인간의 생명 지나가는데 저도 한 다리 걸치게 해주세요.” “너희는 무슨 도움 줄래?” “우리는 예수의 피와 예수의 살을 먹임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귀한 생명을 건지겠습니다.” 이것은 천주교회가, 개신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하는데 이것은 박살나야 됩니다. 그 논조는요. 왜냐하면 그것은 신을 믿는 휴머니즘입니다. 인간을 위한 종교에요.

 

유홍식이라는 촌 사람이 바티칸의 전 세계 50만 성직자를 관리하는 교황청 성지자성(聖職者省) 장관이 되었어요.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네 번째 추기경인데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뭐냐? 오직 휴머니즘이에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교회, 그것은 오직 천주교회밖에 없습니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교회라는 게 조직화 되어야 돼요. 교황, 추기경부터 해서 조직화해야 돼요. 감리교도 감리제도, 일종의 교황제도지요. 그렇게 모든 게 조직화되어야 돼요. 그 뿌리가, 그 사상의 뿌리가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에서부터 출발 되는 겁니다.

 

잘못된 이스라엘, 엉터리 이스라엘을 유대인들이 계속 끌고 가는데 오늘날 교회 성당, 그리고 이스라엘, 유대 나라, 그리고 국가조직체, 그들의 잘못은 딱 하나에요. 스스로 와해될 수 있는 붕괴의 요소가 자체 안에 없어요. 그게 없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잘해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편 되어야 됩니다.”라는 논조입니다. 그런 논리에요.

 

십자가 정신이 없어요. 주께서 뚫고 지나간 정신이 없어요. 그냥 하청업체입니다. 일 청탁 받아서 대행해주고 덩달아 구원받겠다는 그런 취지를 걸고 여행사 하듯이 사람 끌어모아서 조직체를 형성한 거예요. 우리 이 만남의 장소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 그리워하고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시도했던 모든 인간들의 시도, 이 시도 자체, 이 노력 자체를 무산시키는 그분이 그 안에 빠져 있는 거예요.

 

국가라는 것은 왜 만들었는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가 만들었어요. 국가의 시작은 가인의 후예부터 시작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스스로 자기 쪽에서 봉쇄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국가입니다. 스스로 봉쇄조치를 취한 거예요. 그게 캐슬(castle)이에요. 성(城)이에요. 외부의 적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만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본인이 본인을 가두게 된 꼴이 된 겁니다.

 

캐슬 있잖아요. 아파트 이름도 캐슬 아닙니까? 롯데캐슬.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갑옷을 입었다 칩시다. <양들의 침묵>이라는 영화에 보면 그 미치광이 유명한 박사가 정신병동에 있지요. 움직이면 더 조이는 옷을 입고 있어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자기 하나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정신병 옷을 껴입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를 그렇게 지키면 지킬수록,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조여들어 가네요. 바보 아니에요? 그걸 네 자로 스트레스라고 이야기합니다. 암 걸리지요. 이 세상에 나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내 방식으로 스스로 조여 들어가서 내가 나를 죽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귀하다고, 귀하다고 하는 거예요. 풀릴 수 있는 여지가 없어요. 내가, 스스로 내가 봉쇄 작전에 들어갔기 때문에 내가 나를 풀어놓으면 달리 사는 방식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 국가의 힘을 키워서 다른 국가로부터, 우리나라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국민,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봉쇄 작전에 들어가는데 그때 거기에 속한 그 거주민을 자기 것으로 다 만드는 겁니다. 그게 뭐냐? 종족에서 국가로 발전되는 거예요. 마한, 진한, 변한, 삼한 시대가 나중에 삼국으로 되잖아요. 그렇게 국가로 발전하는 겁니다.

 

거기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오늘 본문 2장 4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 성경에 이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가요, 이미 모든 사람을 자기의 가두리, 그걸 가두리 양식이라 하지요, 가두리 양식, 물고기 양식하는 것, 가두리 양식처럼 끌어모았던, 먼저 실시했던 단체가 있습니다. 그게 국가입니다.

 

국가 안에 모든 인간을 자기 국민화시켜 버리는 거예요. 이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적으로 간주하는 그러한 질서가 작동하는 조직체, 그게 국가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아까 제가 그 명분을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참 아이러니하지요. 북한 김정은이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납득할 거예요. 북한 주민들을 김정은은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사랑해서 언론을 통제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언론을 통제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북한 주민들도 다 동의하고 있어요. 어버이 수령이라고 하면서 다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게 북한만 그럴까요? 여호와의 증인은 안 그렇습니까? 통일교는 안 그렇습니까? 신천지는 안 그래요? 감리교는 안 그렇고, 장로교는 안 그렇고, 침례교는 그렇지 않습니까? 순복음교회도 마찬가지지요. 그 안에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갑니까?

 

아까 우리 교회 집사님이 만났던 그 장로는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나는 내 교회 장로로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거예요. 열심히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관통해야 될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원수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놓고 그 교회들이 어떤 성경 대목을 언급하느냐 하면,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언급해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배당 크게 지어놓고 이 본문 하나 달랑 들고 와서 “만나는 사람 누구라도 이 빈집을 채우라.” 해서 전도지 돌리고 있는 거예요. 지하철에서 그리고 길거리 사거리에 나가서. 또 시끄럽다고 신고 들어오고요. “모든 사람”, 이것은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제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그 모든 사람, “모든”을 하나님이 언급하기 전에 누가 먼저, 그 모든 사람의 관리에 누가 나선 적이 있다 이 말이에요. 누굽니까?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종교단체와 국가단체가 모든 사람을 가두어놓은 거예요. 이미 “그 모든 사람은 나한테, 우리 조직에 굴복한다는 조건 하에 너의 귀한 생명을 살려줄 게.” 이게 세상에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조건들이 그 조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이게 있어요. 누가복음 19장 22절에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7절,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이게 열므나 비유라는 거거든요.

 

어떤 임금님이 출장 간 사이에 종들에게, 신하들에게 나라를 맡겼어요. 장사를 맡겼다 이 말이지요. 어떤 충성된 종은 “한 므나 가지고 열므나를 남겼습니다.” “잘했다.” 또 두 번째 종이 와서 “한므나 가지고 다섯므나 남겼습니다.” “잘했다. 너는 다섯 고을 차지해라.” 그런데 어떤 종이 와서는 “한므나 그냥 여기 두었습니다. 우리 임금님이 너무 엄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그냥 두었습니다.” 그럴 때 임금님이 하는 말이 “악한 종”이라고 표현했고 그다음에 누가복음 19장 27절에서 나의 “원수”라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원수가 있어요. “모든”이 아니고 원수가 있다니까요,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있어요.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고 “내어 쫓으라” 입니다. 천국은 “내어 쫓으라”에요. “오라”가 아니고 “가라” 입니다, 가라.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원수의 두 가지 종류와 맞닥뜨려서 그걸 뚫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의 생명은 귀하기 때문에, 내 생명이 귀하고 인간의 생명도 귀하기 때문에 이 귀한 생명을 기어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해서 결성된 단체, 유대 나라지요. 거기다가 하나님의 율법까지 줬으니까 이 율법과 결합해서 천국까지 가겠다고 나선 그러한 단체 유대 나라.

 

그리고 하나님이 율법을 준 적이 없기때문에 ‘우리에게 귀한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이 봐도 귀한 것, 그것은 우리의 생계와 목숨이다. 이 생계와 목숨을 보장해줄 게. 우리나라에서 모든 사람은 우리나라 시민이 되고 백성이 되어라.’라고 해서 가인의 후예로서 만들었던 국가. 이 종교단체, 그리고 국가단체를 주님께서는 둘 다 돌파하고 뚫고 나가버렸어요. 이것은 어느 인간도 해낼 수 없는 그 봉쇄, 봉쇄를 주께서는 뚫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현재 국가와 종교, 거기서 못 빠져나오는 모든 사람을 내가 구원할 수 있다는 주님의 뜻이에요. 자기 힘으로 못 빠져나오니까. 빠져나올 수 없어요. 이미 그들의 적(籍), 그들은 등록되어 있으니까, 국가에 주민등록 되어 있고 교회에 등록되어 있으니까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자기 생명이 귀하니까.

 

주님께서는 바로 ‘내 생명은 너무 귀해서 천국 가야 돼.’ 하는 그 자체부터 문제 삼는 거예요. 우리 자신부터 문제 삼습니다. 어떻게 문제 삼는가? 저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주님께서 사도에게 말씀한 그 복음이 이렇게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이건 오늘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2장 4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8절 말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사도바울 본인이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도 저주받고 천사도 저주받는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복음 앞에서는 ONLY, 오직 저주, 저주받을 일만 발생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뭐, 뭐누구든지 구원받는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복음 앞에서는. 어떻게 이 두 개의 말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이 말씀과 “복음이 온 것은 너희들 저주받아야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복음이 왔다.” 이게 어떻게 매치가 되고 조화가 되고 연결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복음에 대해서 신기해하라 그 말입니다.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야 돼요. 왜냐하면 세상 교회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서로 좋은 게 좋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으샤으샤 해주는 게 당연하고, 이게 인간들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라고 다들 그렇게 느끼면서 살아왔잖아요.

 

“서로 원수 만들지 않고, 좋은 소리하고, 서로 덕 세우는 일을 하자.” 이게 상식에 해당되는데 뭐가 기이하냐 하면, 저주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 복음 외에는 다 저주받는다. 이 복음 외에는 다 빼버려. 다 저주받아.” 그 이야기가 굉장히 신기한 것으로 새롭게 받아들일 것을 사도는 권고합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뭐냐? “우리 저주받는대.”라는 그 소식이 그렇게 기쁘고 새롭게 들려야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 저주받는대.” “누가?” “진짜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한대.” “나 몰랐는데?” 그건 진짜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지요. 얼마나 듣고 싶은 반가운 소리입니까? “너 천국 못 가. 너 지옥 가.” 이게 얼마나 그동안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잖아요.

 

인간의 그 문명이라는 것은 무엇을 상실한 것을 모르고 계속해서 뭔가 상실한 것을 찾고자 문명을 일으켜 왔었습니다. 상실한 것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냥 무조건 보상 받아야 된다는 그 생각 때문에. 뭘 잃어버렸는지를 몰라요. 뭘 잃어버렸는지를.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잃어버렸던 자였어요, 처음부터.

 

그게 창세기 2장과 3장에 선악과 따먹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따먹은 것을 보고 그것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어요.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입니까? 선악과 아담도 따먹고 하와도 따먹었을 때 자기는 악한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보기에만 악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자기 죄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내가 죄인인데 예수님 피로 씻고 구원 받겠다.’ 이게 죄인 줄 모르는 거예요. 이게 죄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인간에게 그런 권한과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겁니다. 기존의 종교단체에서 맨날 하는 게 “하나님은 사랑이라” 그것 아닙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맨날 그 노래 부르는 이유가, 마치 구원받을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줄로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똑같이.

 

그러나 구원은 선물입니다. 횡재에요. 구원의 확률은 영퍼센트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나봐야 알아요. ‘아, 내가 그동안 착각하고 살았었구나.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인간은 구원받을 권한과 어떤 권리 같은 게 애초부터 없구나.’ 따 먹은 당사자 아담도 하와도 모르는 그 선악과 따먹은 것 ‘이것 좀 따먹으면 어때?’ 자기가 죄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게 왜 죄인 것을 아담과 그 후손을 통해서 번식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결론이 뭐냐?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인간구원이 아니고 하나님 구원이에요. 인간구원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에요. 왜냐? 죄도 하나님만 알고 구원도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 하나님만 아시는 하나님 자기 구원,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아들 구원시키는 겁니다. 기도하신 내용처럼 아버지가 아들만 구원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가 필요해요. 그 죄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가 필요한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도 필요하고 그리고 교회, 성당, 유대교가 필요한 겁니다.

 

그들이 그걸 통해서 다 그들 내부의 본인도 모르는 자기 욕망과 욕구와 본성을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자, 내 생명은 귀하니까 스스로를 지키고 구원받기 위해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종교단체에서 다 끄집어내 줘야 돼요. 다 끄집어내고, 다 끄집어내기 위해서 인간은 자아가 계속 있어야 돼요. 자아가 있어 줘야 인간이 죄인이 돼요. 끝까지.

 

그리고 그 인간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계속 얼마 동안 살다가 이 땅에서 죽어나가야 됩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다음에는 우리 차례 계속 죽어 나가야 돼요.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려주는 방법은 살리는 방식으로 죽이기 때문에 살려주는 거예요. 계속 죽이기 위해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죽어 있고, 내가 누굴 미워하지 않더라도 그 인간은 죽어 있어요.

 

인간이 범죄 한다는 것은 죽어 있는 것을 만지는 것을 범죄라 합니다. 아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데 뭐 있는가 싶어서 그걸 가지려고 할 때 그게 범죄가 되어버려요. 죽어 있는 것을 왜 그리 탐을 내지요, 인간이? 그래도 인간은 오직 죽어 있다고 보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탐이 나는 거예요. 저 다이아, 웬 다이아 하지요 웬 다이아, 그런 모든 것들, 고급 차 등등. 탐내지 말라. 십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에 나오잖아요. 탐내지 말라고.

 

왜 그렇게 탐을 내느냐? 왜 인간은 자꾸 범죄를 저지르느냐? 중요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게 죄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은 기괴함이 없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가 없어요. 인간은 못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믿는 것밖에 못 해요. 그게 바로 범죄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교회에서 예수 믿고 지옥 가라.” 그것 때문에 교회 만들어놓은 거예요. 이왕 믿는 거 예수나 믿고 지옥 가라 그 말이지요. 제가 아직까지 인간이 구원받는 이야기에 대해서 한 적 없습니다. 지금까지.

 

갈라디아서 1장 8절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했거든요. 여기서 짧은 본문이지만 여러분이 무엇에 주목해야 되느냐 하면, 그 저주받는 대상에서 사도바울이나 천사가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이 나는 복음 전하기 때문에 나는 저주받지 않을 거라는 내용이 이 성경 구절에 담겨있지 않아요. 복음을 전하는 자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줬던 천사라 할지라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은 인간구원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만 건지기 때문에 복음도 아닌 게 그럴 재주도 없는 게 복음에 끼어들지 말라 그런 이야기에요. 그동안 국가가 모든 인간을 자기의 권력체 안에다 다 집어넣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무국적자로 있어 버리면 흔히 말해 ‘법의 보호를 못 받는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법의 보호를 못 받는다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 국적이 한국 국적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사장님은 한국 국적인 줄 알고 우리 회사에서 일해달라고 해서 “이력서 봅시다” 하니까 이력서가 없어요. 주민등록도 없어요. 취직 못 하지요. 안 해주지요. 안 해주면 굶어죽지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국가라는 조직에 등록이 안 되어 있으면 너희들은 우리가 나서서 널 죽여버린다’ 그런 뜻이에요. “모든” 이라는 것은 등록된 모든 사람, 우리 국가에 등록된 모든 사람, 그래서 이 “모든”에 대해서는 개개인, 어떤 개인을 막론하고 다 합치면 “모든”이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이미 “모든” 이라는 말을 국가가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적(籍)이 없는, 어떤 자기 터가 없는, 자기 호명의 자리가 없는, 그걸 주체라 하는데 호명의 자리가 없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따로 모여서 “모든”은 없고요, 이미 “모든” 안에서 나라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에게 주민등록을 줄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우리가 알게 돼요.

 

지금 말을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들을 하고 계시는데 이런 겁니다. 인간은 성경의 “모든”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니까요. 우리가 아는 “모든”은 내가 국가에 속해있고 어떤 사람이든 같은 인간끼리 모여 있으면 이게 “모든”이라고 기껏 그 정도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아는 게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구원 안 되어도 그만이에요. 안 되는데 교회가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니까 그다음부터 어떤 오해가 생겼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대해서 알고, 내가 천당 간다고, 그렇게 안다고 우기는 종교단체에 소속이 되어서 안다고 우기는 이 변질된 앎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왜 그런가 하면, 창세기 3장에서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몰라요. 인간은 하나님이 어떻게 아파하느냐, 그것은 뒷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픈 게 중요하지 하나님 아픈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아픈 것을 내가 알면 그걸로 내가 아는 것으로 된 거예요. 내가 인생 힘들면 그걸 내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환상이고 망상이고 가상이에요.

 

인간은 진실을 모릅니다. 자기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는 그것이 주님이 아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그게 가상이 되어버려요. 허상이 되어버립니다.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게 되어버린다고요. 무지한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성경에서 원수가 된다 하니까 멀뚱하니 ‘왜 자비로운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악한 자여” “뭐가 악한데?” 수용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이것을 어떻게 수용시키는가? 창세기 3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의 아들을 죽입니다.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아들을 죽여요. 유다는 야곱의 언약 안에 속하는 겁니다. 언약이 인간을 통해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요. 그래서 유다는, 야곱의 아들 유다는 기괴한 일, 난처한 일을 자기 인생에서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말씀드리면 나사로, 마리아 오빠가 죽어요. 죽고 난 뒤에 나흘 만에 다시 삽니다. 저는 이걸 기괴하다고 보는 거예요. 기괴하다.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무지의 소치예요. 인간의 행함은 무지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기괴한 겁니다. 뭐가 기괴하냐? “사도바울 본인이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것은 낯선 겁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사람만 만나고 싶어요. 복음 전하는 목사를 만나고 싶어요. 그거 사람 아닙니까? 복음 잘 아는 집사 만나고 싶어요. 그거 사람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 만나야 되는데 자꾸 복음 전하는 사람 만나고, 집사 만나고, 맨날 옆에서 복음 전하는 남편 만나고 그러지요. 포항에서 오면서 복음 전하는 남편, 그런 남편만 만나고 있다 그 말이지요.

 

주님을 만나게 되면 어느 것 하나 주님 일이 아닌 게 없어요. 그러면 내가 뭐 하겠다는 그것은 죄 밖에 안 되니까 그냥 시키는대로 할 뿐이에요. 내가 생각한 선악 체제에 의한, 이것은 죄니까 안 하고 이것은 의로우니까 한다, 그것 말고 그냥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냥 살아가면 살 떨립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 시키는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만 아는 체험이 뭐냐? 살 떨려요. 발발발 떨립니다.

 

왜? 두 시간 뒤에 무슨 사건이 터질지 내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로 하여금 계속 죄짓게 하는 이유는, 죄를 지어야 용서가 용서답게 되기 때문에. 용서란, 죄를 모르면 용서가 의미가 없어진다고요. 신약성경 복음서에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서 용서했다는 말은 우리는 무지해서 몰라요. 나 좋으라고 믿으면 되는 줄로 알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구원은 주님 소관입니다. 주께서 죄짓게 하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용서라는 게 이게 선물인 것을 알아요. 심지어 용서받기 위해서 지은 죄도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죄인 된 것도 선물인 것을 알아요. 강도가 왜 그렇게 큰소리쳤습니까? 남의 집안 박살 내놓고 자기는 “예수님! 하늘나라에서 저를 생각해 주세요.” 왜 그렇게 뻔뻔스러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알았거든요. 내 인생이 이 자체가 선물인 것을.

 

내가 나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구원되기 위해서, 예수님만이 의롭다 하기 위해서 나를 주께서 충분히 활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네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걸 또 누가 아느냐? 백부장이 알았어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살 떨립니다, 정말!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눅 7:8)

 

내가 하는 일에 나의 평가를 중지하는 거예요. 나의 내 평가를 중지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나의 봉쇄를 그만두는 거예요. 내가 나를 뚫고 나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뚫고 나오는 거예요. 스트레서 받을 일이 없지요. ‘뭐 내가 어때서?’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내가 뭐 어때서? 나도 나를 평가 안 하는데 남이 나를 왜 평가하지?’ 평가할 수가 없어요. 주님의 구원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생뚱맞게, 오늘 제가 기괴하다, 기이하다 했는데 기이하고 괴이한 일을 발생시켰거든요.

 

그중 하나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에요. 물 길러 온 여자, 과거사 다 뒤집어내서 “네 남편이 다섯 명이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 사귄다.” 그 이야기가 왜 그 여인에게 필요했던 겁니까? 여인은 꽁꽁 감추었던 비밀이었어요. 비밀은 자기 의사로 일부러 누구한테 그걸 자랑삼아 한 적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주 앞에서 기이하게 또는 괴이하게, 놀랍게도 주께서 일을 벌여서 주님 앞에 톡 하고 요거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를 토하게 만드는 거예요. 주님께서 왜 그렇게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평생 너는 죄만 지었다’는 이 기쁨을 왜 그들에게만 선물로 그런 인식을 줬습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따먹을 때 자기가 악한지 몰랐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낸 성도한테는 내가 하는 일이 악하다는 것을 아는 기쁨을 줘요. 그런 행복을 준다고요. 내가 하는 것이 뭐든지 악하고 죄가 된다는 것,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것.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이유가, 그 성도를 이 세상에 뿌려버려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곧 “내 증인이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 네 원하고 관계없이 반드시 너는 증인일 수밖에 없어.”

 

이렇게 뿌리는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이 범죄현장, 어떤 범행현장에서 수사당국, 과학수사 할 때 뭘 뿌리지요. 루미놀(luminol)을 뿌려요. 루미놀은 어떤 성분이냐 하면, 철분만 만나면 광채를 발산하는 그런 화학약품이에요. 그걸 뿌리니까 일반인의 눈에는 안 보이든 핏자국이 보이거든요. 루미놀. 그리고 제가 아침마다 산책하게 되면 거미줄이요,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거미줄이 언제 보이느냐 하면, 비가 올 때 그래서 물방울이 거미줄에 초롱초롱 맺힐 때 ‘거미줄이 여기 있네.’ 하고 피해갈 수 있거든요.

 

이 세상은 망상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에게는 현실의 전부입니다. 해답도 없으면서 무조건 해답을 찾아가는 어떤 노력같은 거요. 루미놀을 그냥 뿌리듯이 예수님께서 자기 성령의 사람을 그냥 뿌려버립니다. 뿌려버리면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가 바로 생명인 것을 바로 그 현장에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자기 백성을, 강도를 뿌려버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오빠도 뿌려버리고, 창기도 뿌려버리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창녀를 데려와 가지고 사(赦)함을 뿌려버리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과 하나님이 보시는 현실이 이렇게 다르다. 그게 창기기 되든, 강도가 되든 모든 사람 누구든지 차별 없이 내가 성령 준 사람은 기존의 국가에 속한 ‘모든’이 아니라 내게 속해야 될 ‘모든 사람’을 나는 모든 분야에서 활용하겠다.” 이게 오늘 본문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도, 국가로부터 무국적자로 배척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 나의 구원에 필요한 조건들이 다 되는 거예요.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2차대전 때 미군 조종사의 영웅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투기에 두 명 타잖아요. 전투 중에 비행기가 추락하게 되었을 때 조종사 하나가 총에 맞았고 나머지 한 명은 멀쩡한데, 멀쩡한 조종사 혼자라도 낙하산 타고 내려오면 되는데 안 뛰어내리고 끝까지 부상당한 동료 조종사와 같이 함께 있다가 비행기가 추락하고 폭발해서 다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두 사람 다 죽었다는데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았지요?” 물었거든요. 레이건 대통령이 “그럴 것 같았어요.” 그게 바로 국가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겁니다. 자꾸 인간은 위대하다, 인간의 생명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 라는 것을 계속 함으로써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들, 인간끼리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끼리 모여서 국가라는 우리 모든 사람을 조직한 이 조직체, 여기에 우리의 소망을 만들자.’ 이 시도가 주님 보시기에 망상에 불과한 거예요, 망상에!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 어떤 나이 60이 넘어서 오신 분이 있는데 60대 되도록 맨날 사업하면서 술만 먹고 맨날 문제나 일으키고, 바람피우고 나쁜 짓만 하다가 우리 교회 청년회 헌신예배에 교회나 구경 가볼까, 하고 왔다가 은혜받고 난 뒤에 그 장로가 부동산 교회에 바쳐서 예배당 짓고, 교육관 넓히고, 주차장 짓고, 그 장로는 나이 90 넘어 코로나 걸려서 죽었다.’

 

목사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끼지 않고 남은 재산을 후손들에게 복음 전하라고 내가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죽었다는 거예요.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그 사람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럴 것 같아서”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이 뭡니까?” “우리 교회가 단단하고 굳건해지잖아요.” 이게 바로 교회가 하는 짓입니다. 교회는 무너질 요소를 스스로 가리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돌파했던 주님의 구원인데 인간 구원시키려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그 피의 생산공장,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그게 목자, 공장장이 목자거든요. 목자가 뭐냐? 피의 언약이에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신다는 말은, 인간이 저주받은 상황이라는 것을 형성하시고 만납니다. 곧 죄인과 피의 만남입니다. 히브리서 13:20에서,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자께서 흘리신 피와의 만남이 곧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너 이미 죽었어.”라는 그 소식, “너는 죄인으로 네가 죄지어서 죽은 게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죽어있었어.”라는 그 소식, 원초적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만드는, 우리를 창세기 3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 소식이, 그 소식이 바로 주님의 구원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활용당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담는 그릇으로 구원되는 겁니다. 그게 진리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은 뭐냐? “너희들이 내 진리를 알기를 원한다. 아버지가 아들만 구원하는 그 진리를 담는 그릇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의 차별과 인간의 멸시 어떤 것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구원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끝으로 기존에 전도하는 고구마 전도고, 비둘기 전도고, 그렇게 전도하는데, 흔히 이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있으면 안 되고 외국에 나가야 되고 선교사로 나가야 된다.” 자꾸 그렇게 우기는데요. 진짜 선교사 나간 사람들, 물론 주의 뜻이겠지요, 그런데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국에 복음이 없는데 왜 남의 나라에 가느냐는 겁니다.

 

“저는 핍박받았습니다.” 그러면 오케이. “복음 전하는데 핍박받아서 쫓겨서 갔습니다.” 그러면 오케이. 그런데 핍박도 안 받았는데 왜 가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복음으로 핍박받았다는 뜻이 무엇이냐 되묻고 싶어요. “복음을 전하는데 남들이 안 알아줘서 그랬습니다.” 아니 그게 복음의 뜻이 아니라 복음은, 내가 한국에 있든 어디에 있든 오직 주님의 구원, 복음은 주님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 나 구원받기 위해서 복음을 준 게 아니라는 사실, 그 사실을 아는 자가 복음을 아는 자에요. 그걸 알았다면 굳이 외국에 나갈 필요까지 없잖아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모든”이라는 말을 두 가지 입장에서 나눠서 쓰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과 인간이 생각하는, 무식한 인간들이 알고 있는 “모든”, 그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쓰는 “모든”을 부정해 버리고 그것을 저주해버립니다. 주께서 하는 것은 성령을 줌으로써 주님의 복음을, 복음이 담긴 자, 복음이 거기에 작동하는 자, 주님의 몸으로써, 우리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만 구원된다는 사실, 우리는 그 지체에 딸려 가는 거거든요, 그 지체로, 그 몸만 구원하고 기존의 아담의 몸은 전부 다 퇴출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그야 말로 주님을 성령 안에서 만난 사람이고 그 성령 안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은, 피를 흘리신 이유는, 피 흘리신 당사자만 보고 그분만 모시고 그분 안에 있을 때만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그 사실인 줄 압니다. 이제는 내 몸에다 나를 담지 말고 주님 몸에 담긴 죄 있는, 죄지은 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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