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으면서

십자가에 함께 죽음

아빠와 함께 2022. 9. 11. 07:18

설교전 노트: 십자가에 함께 죽음    이근호목사

2018년 2월 1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2:19-21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9.  For I through the law am dead to the law, that I might live unto God.
20.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21.  I do not frustrate the grace of God: for if righteousness come by the law, then Christ is dead in vain.


인간의 존재보다 율법의 존재가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다시 낙원으로 귀환하려는 의도는 이미 악마와 결탁해서 망해버린 인간의 의식들입니다. 우리를 살려내기 위한 율법, 즉 하나님의 법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는 인간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자기를 위한 존재’로 굳어져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않음’으로 바뀔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토록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울 앞에 서면 보이는 그 신체, 그 육체를 자기식대로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육체’란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토대로서의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내신 그 육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용도는 알지 못한 채 육체를 통해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용도의 육체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거울 앞에 눈에 보이는 그 육신과 그 육신을 기어이 오래토록 보존하고자 애쓰는 자아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 육체가 처음부터 이 ‘자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내가 그 육체를 보존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저 거울 앞에 보이는 저 신체가 내가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아가 그것을 계속 지키고 보존하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서 ‘불일치’가 발생되는 겁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공포스러운 겁니다. 나의 것이라고 우기는 그 신체가 훼손될까봐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육신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손상되고 있고 늙고 병들고 기침나고 감당이 되지 안될 정도 청춘에서 멀어집니다. 이 잘못은 처음부터 이 육체가 나의 것이 아니다 는 것을 반증합니다.

 

인간들은 이유로 모르는 채 자신의 육체를 자신이 관리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안정된 일상’이 되고 싶어서 ‘일상의 안정화’를 꾀합니다. 보다 여유롭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존재의 바다에 ‘진리의 위치’가 따로 있음을 모릅니다. 인간들의 ‘일상의 안정화’ 시도 때문에 사람들에게 진리란, 여유롭고, 건강하고, 부산떨지 않는 삶을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가운데 모든 인간을 함몰시키는 구멍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애초부터 잘못된 식으로 이어져오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율법사건입니다. 율법의 의미를 담고 벌어지는 일입니다. 율법은 최종적인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뻗어나온 긴 그림자 같은 겁니다. 해질 무릅, 전봇대에서는 긴긴 그림자를 땅에 드리우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의의가 인간 세계를 형성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보다 율법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율법의 이와같은 선행적 가치를 위하여 만들어진 동산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애초부터 사람들에게 위험스러운 ‘선악과 나무’실과는 심어놓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통해서 죽음을 끄집어내고 저주를 끄집어내기 위해 개시된 겁니다. 그래서 율법이 살아나면 인간은 죽고, 율법이 죽으면(사라지면) 인간은 자신이 산 사람인양, 살아도 될 가치가 있는 존재인양 행세하게 됩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즉 인간은 (율)법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의 취지가 완성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아라는 존재는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달하는 운반체로서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육체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말은 전에 있던 내가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살아 있는 능력’으로 활동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 성도는 존재가 아니라 능력이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능력은 ‘십자가 사건’ 즉 율법의 완성으로서 벌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적하는 율법의 기능이 곧 율법 사건이 되면서 그동안 이스라엘 나라를 이끌고 오신 겁니다. 왜 지적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율법 사건을 통해서 알려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민수기 21장에서 나오는 놋뱀 사건입니다.

광야에 나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해댑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내가 원하는 내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광야라는 환경이 우리들의 의도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자신이 자기의 신체를 살리는 식으로 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물도 없고 양식이 없어 원망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마치 소집한듯이 불뱀들이 몰려와서 원망하는 백성들을 물었습니다. 이  사태를 해결하는 마무리로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놋뱀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간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물려죽게 한 놋뱀의 형상을 쳐다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이 곧 뱀의 얼굴이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뱀에 지배받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자신의 소속도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얼굴을 갖고 있음도 몰랐던 겁니다. 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자신의 원판이 뱀이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 즉 ‘뱀의 후손’의 정체는 ‘여자의 후손’에 입각한 사건 앞에서 노출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그 곁에서 떠났습니다. 일종의 수치를 느낀 겁니다. 예수님은 이점을 간파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최소한의 ‘믿음 있음’의 영역에 들어오려면 적어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율법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할 것같으면, 자신이 이미 죽은 자에게만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과연 믿음 있는지 없는지 여부마저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믿음은 ‘행함에서 믿음입니다.’ 결코 ‘믿음에서 믿음’이 아닙니다.(롬 1:17) 이미 죽은 자에게는 수치도 사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다시 조립되는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276강-갈 2장 19-20절(십자가에 함께 죽음)1802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19절-20절입니다. 신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두 개의 순서를 연결시키고 있어요. 하나는, ‘나’라는 것은 죽었고 내가 죽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육체가 되고그 육체에 대해서 새로운 나로 전환이 된다는 겁니다.

그 순서가, 나라는 것이 육체로 변하고 육체가 다시 나가 되는 그 순서, 그 중간에 나라는 것이 죽었기 때문에 내가 꾸미고 내가 생각해놓은 그 순서는 아니고 나와 함께 계신 분의 지상에서 공생애를 살았던 그 예수님의 지상에서 하신 일의 순서가 육체, 나라는 이 매개를 통해서 그대로 보여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나나 여러분이 살아 있다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엄연히 주님이 살아 계심을 신경쓰라는 겁니다. 주께서 내가 살아 있는 이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광고하고 있는 거예요. 전파하고 계시는 겁니다. 주님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고 이용을 하고 계시는데 이용할 때 그냥 이용해 버리면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용가치가 없기에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면, 육체라는 용도로 바꿔서, 용도를 전환시켜서 우리를 사용하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생기는 우리의 ‘자아’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살아 있다, 를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사도바울이 이야기할 때는 너와 나 개인 간을 비교해서 진리를 끄집어내지는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왜 오셨는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이 되셨는가? 그것을 집어넣어놓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자아가 살아있으면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냥 내 두뇌 속에만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지식에 머물고 말아요. 하나의 지식으로 박히고 마는 겁니다. 나는 살아 있고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지시고 살아 있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지식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지요. 지식이 되어버리면 실제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냥 정보만 취득했을 뿐이에요. 나에 대한 어떤 달라진 변화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여전히 주인공이 내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시기전에 율법을 왜 주셨느냐 하는 문제점이 등장하지요. 율법 주시고 율법 끝나고 난 뒤에 마지막에 예수님이 오시거든요.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면 예수님을 바로 보내서 예수님과 함께 구원시키면 되는데 그 전에 율법을 왜 깔아놓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지금 갈라디아서 2장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율법이 없을 때는 우리는 살아 있어요. 그런데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고 죽은 존재입니다. 이게 로마서 7장 8절에서 9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지만 율법이 오고 나자 나는 죽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9절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고 되어 있다고요. 성경에서, 율법이 없을 때 우리는 살았고 율법이 올 때는 이미 우리가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는 성경을 덮고 사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살았다’ 하는 그 개념하고 달라요.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저에게 와서 “아저씨는 살았네요.” 이러면 ‘뭐라는 거야? 내가 살아 있으니 걷고 있지. 그러면 죽었어? 이상한 사람 아니야?’라고 이상한 사람 취급할 거예요.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어찌어찌해서 여러분은 살았습니다.”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 전혀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저게 뭐라는 거야? 처음부터 살았지. 당신은 거울도 안 봐?’

우리가 일상적으로 거울을 봅시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거울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치지요. 그러면 엄연히 거울을 내가 보고 있으니까 나는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았다는 말이 새삼스럽고 이상스럽게 들리는 겁니다.

거기서 좀 더 가게 되면 인간이 살았다는 것은 내 눈에 보기에 신체가 거울 앞에 나타나니까, 그 신체가 있으니까 내가 살았다고 보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묻습니다. 그 신체가 살았는가, 네가 살았는가를 묻는 거예요. 이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에요. 거울 앞에 서 있는 네 모습, 키가 백 7십 얼마, 하는 그 모습.

제 키가 173인데 지금은 잘 안 되는거 같아요. 173센티의 그 신체가 있는데 그 신체를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나, 거울에 비추는 그 내 모습은 어떤 게 있느냐? 저 살아 있는 신체를 나는 계속해서 살려내야 돼, 라는 욕구를 가진 자아가 그 신체를 통해서 수상하게 불거져 나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요. 이게 두 개의 이미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는 것을 더 살고 싶어 하는 이것이 불일치, 신체가 계속 살아 있는 것과 내가 살고 싶다는 이것이 일치가 안돼요. 인간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을 수용하면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계속 살아 있어야 해.’라고 나오는 것은 이 살아 있는 신체가 결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걸 계속 살려줘야 겨우겨우 살 수 있다는, 그 살아있음을 보존하려는 또 하나의 자아가 생기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거울에 비추는 네 신체가 네가 살려야 될 용도의 신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신체고 용도인데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신체에 대해서 어떻게 유지해볼까, 그 신체를 살게 해볼까, 라고 노력하는 새로운 자아를 뭔가 엉뚱한데서 계속 유입시키는 겁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계속 살고 싶은 거예요. 정말 살아 있다는 것이 살아 있다고 한다면, 정말 제정신 이라면 살아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그것을 살리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나와 줘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 신체를 내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살려준다면 나는 ‘내가 내 인생을 살려야지’ 하는데서 손을 떼야지요. 그게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내가 알아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내 자아가 있기 전부터 이미 신체가 이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어지게 한 분이 누구냐를 찾으면 돼요. 나를 이 땅에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분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내 신체를 살리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 신체가 점점 더 죽어가고 있네요. 그러니까 여기서 불안이 생기고, 공포가 생기고, 위협이 생기는 겁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참새를 친히 키운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들풀을 친히 키우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솔로몬의 입은 옷보다 들풀이 더 화려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지금 네 것도 아닌 것을 네가 손대고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제일 큰 죄악은 뭐냐? 내가 나를 구원하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왜 내가 내 구원에 신경 써야 됩니까?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입니까? 네 것이라면 처음부터 재벌 집에 태어나고 왜 네가 알아서 옵션 집어넣어서 태어나기 전에 네 생각을 집어넣어서 로봇 만들 듯이 만들어내지, 이제 뒤늦게 감당이 안 되어서 ‘왜 이렇게 나는 가난 하냐’ 하면서 헉헉거리면서 사는 모습. 그것은 원래 있는 신체, 본래 주님이 주신 신체하고 허겁지겁 그것을 뒤치다꺼리 하는 나하고 그 신체를 다룰 주인공이 틀어져 있다는 겁니다. 원래 손대지 말아야 할 신체를 네가 엉뚱한 데서 와서 손대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본다, 교회도 안 다닌다, 물론 교회와도 마찬가지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게 뭐냐 하면 안정된 일상을 원해요. 성경이고 뭐고 다 귀찮아.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귀찮아. 안정된 일상을 원합니다. 안정된 일상을 원하기 때문에 일상의 안정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안정된 일상은 목표고 일상의 안정화라는 것은 그 목표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여유 있게 살 수 있느냐, 몸 건강하게 편하게 살 수 있느냐를 계속 시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만큼 달아나는 그 나이 늙음, 몸 아픔, 그걸 어떻게 뒤따라가서 손에 장악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편하게 살고 싶어도 온 삭신이 쑤시는데 어떻게 그걸 따라잡을 수 있겠어요.

청춘을 되돌려 달라고 한들 청춘이 돌아옵니까? 안돌아오잖아요. 백날 내 인생의 안정화를 취했지만 안정된 일상은 우리한테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길에 가는 아무사람한테 이야기를 해 보세요.

그 사람은 지금 안정된 일상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아무 소리 안하고 그런 이야기를 딱 했을 때 자기안정화작업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매치가 안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교회 오는 이유가 안정된 일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오는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나는 죽었다는 이야기거든요.

2장 19절 말씀도 그렇고 2장 20절 말씀도 그렇고. 나는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죽은 놈이 이야기는 왜 하느냐?” 그렇게 나오잖아요. 사도바울이 나는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안정된 일상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들아, 그 일상 속에서 함몰되는 구멍이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진리의 위치에요. 진리의 위치.

 

공리주의라 하는 것은 내 편한 것이 진리고, 내 즐거운 그것이 선이다, 하는 것이 공리주의거든요. 공리주의 사고방식 속에서 항상 기본은 뭐냐? 나는 안 죽어야 해. 나는 안 죽어야 해. 이 신체를 내가 보존해야 돼. 신체와 나라는 것이 일치되지 않는데 일치되지 않는 그 갭을 자꾸 줄이려고, 합치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이 신체덩어리, 이 근육덩어리를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하고 합치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죽었고’라는 말을 해버리면 “뭐 그 따위 복음이 다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을 살려줘야 그게 기쁜 소식이고 그게 교회 할 일이지 ‘너는 죽었고’를 판정내리기 위해서 교회 온다? 그거 희한한 거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걸 강하게 외쳐요. 그게 복음이라고. 네가 죽었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함몰된 그 구멍 속에 빠져버려야 된다는 거에요. 그 진리의 위치는 특이성이 있어요. 그 진리의 위치를 평소에 우리가 찾지 못하는 이유가 평소에 안정된 일상화를 추구하다 보니까 그 구멍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나는 살아야지, 나는 살아야지, 헐떡이면서 그 바탕위에 모든 매사, 성경보기, 헌금하기, 교회 나오기, 전부 다 나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이 신체덩어리를 내가 보존 안하면 누가 보존하랴, 이런 사고방식 가지고 계속 가다보니까 ‘너는 죽었고’라는 말이 낯설게 들리고 “그런 말도 있어요?”라고 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모든 이야기를 ‘나는 죽었고’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너희도 죽었고’ 살아 있는 생사람보고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왜 살아있는데? 죽음을 운반하는 거예요. 죽음을 운반하는 매개체. 죽음을 운반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내 죽음?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운반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체를 이 땅에 만들어내신 겁니다.

 

그리고 그 신체를 뭐로 바꾸는가 하면, 나는 죽었기 때문에 죽은 것은 존재로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존재는 죽어버리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뭐냐? 존재에서 능력으로 바뀌는 겁니다. 우리는 능력의 가시체에요. 능력의 집합체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보다 더 우위에 있는, 더 강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그 능력이 종처럼 나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움직이는 주님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계속 죽어줘야 돼요. 주님이 살아 있으려면 우리는 계속 죽어줘야 됩니다.

그 진리의 위치, 거기에서 뭐가 나오는가? 우리가 생각도 못한 초과적인 힘이 나와요. 우리가 생각한 이상의 능력이 나오는데 그 능력은 드디어 우리 존재에 대해서, 내 신체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손을 떼게 만들어요. 손을 떼게 만든다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지진 일어나면 그냥 벌벌벌 떨어야 되고, 모든 것이 진동하는 대로 같이 흔들어야 되고, “그러면 나 안 되잖아.” 하면 주님께서 “그게 왜 안 되는데?” 왜 지진은 일본에만 일어나야 되고 포항이나 다른 한국에서는 안 일어나야 되는데? 그 이유가 뭐냐? “그러면 나는 죽잖아요.” 이렇게 되잖아요. “나의 모든 살고자 하는 계획이 틀어지잖아요.” 합니다. 주님께서 하는 말이 “너는 이미 죽었어!” 죽은 놈이 왜 자기 죽음을 걱정하고 있느냐 그 말이지요.

네가 사는 것은, 너를 위해서 사는 것은 끝났어요. 이미 마무리되었어요. 그런 것은 없어요.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반증하기 위해서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내 뜻대로 자살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살아 있는 한 주께서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수단으로서 우리의 육체를 끝까지 계속 활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는 활용 당했고. 이런 생각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 과연 죽어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습니다. 없는데

 

사도바울 자신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우리하고 똑같은데, 아담의 자손인데, 우리는 몰랐는데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이 전부 다 살고자 하는 사람만 있는데 어떻게 진리가 있는 위치, 그 함몰된 구멍을 어떻게 발견했느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에요.

 

사도바울은 여기에 율법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율법은 긴 그림자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율법은 어디서 나온 긴 그림자인가? 저녁이 되면 전봇대의 긴 그림자가 나오잖아요. 그 전봇대의 긴 그림자는 어디서부터 나왔느냐 하면, 전봇대가 있음에서 긴 그림자가 나오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십자가가 있음에서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율법이에요. 율법을 따라가다 보면 어디가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가 나와요. 1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율법으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존재보다 우선되는 것이 율법이라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못 지켜서 죽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율법 되게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는 필히 죄인이 되어야 되고 그 죄 값으로 우리는 죽어야 율법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잘 진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우선이 아니고 율법이 먼저 있어요. 선한 율법이 율법 값을 하기 위해서 율법이 의도한대로 세상은 진행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됩니다. 기뻐해야 돼요. 그 율법적인 정신, 모든 율법, 다른 말로 하면 사건화 된 율법이라고 해도 되는데, 율법이 그냥 문자로 되어 있는게 아니고 현실이 되니까 이 현실에 퍽퍽 터지는 사건 속에 다 율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율법의 최초가 뭐냐?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심어놓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이게 참 어려워서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은데 졸지 말고 참을성 있게 들어보세요. 에덴동산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면 거기서 위험요소는 사전에 제거하는 것이 옳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숙모의 아들, 나한테는 조카가 되는데 숙모 아들을 나에게 맡겨놓았어요. 숙모의 입장에서는 자기 아들을 맡겨놓고 자기는 볼일을 보러 갔으니까 자기 아들 근처에 위험한 것이 없기를 바라지요. 왜? 자기 아들을 생각한다면 그 아들이 있는 공간에는 내 아들 죽이는 어떤 것도, 해롭게 하는 어떤 것도 없어야 된다는 것이 엄마의 당연한 생각이에요.

그러나 제 생각은 뭐였냐? 애 근처에 고추장은 있어도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고추장을 찍어 먹고는 매워서 두 번 다시 안 먹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은 철딱서니 없는 총각 때 생각이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숙모가 자기 아들이 고추장을 먹고 매웠다는 그 소리를 듣고는 두 번 다시 나에게는 애를 안 맡겼습니만 지금 생각해도 좀 미안해요.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립니다.

에덴동산이 사람을 위한 것 같으면 절대로 사람에게 해가 되고 사람이 죽게 되는, 하나님이 스스로의 창조를 포기하게 만드는 요소,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은 치워버려야 되고, 선악과를 사전에 심지 말아야 돼요. 율법적기능이라 하는 것은 법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신체를 거기에 심어놓는 겁니다.

인간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 법 위주에요. 법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따먹고 죽으라고. 인간은 잠시 있다가 죽는 그것으로 자기 역할 다 한 거예요. 인간이 죽을 때 율법은 살아나는 겁니다. “거봐! 법이 우선이잖아, 너보다도. 우리보다도 말씀이 우선되잖아.” 그렇다면 인간을 만들지 말지 왜 인간을 만들어놓았느냐?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따먹는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래야 “따먹지 말라. 그러면 죽으리라.” 한 그 명제, 그 문장이 현실로서 확 퍼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기의 말씀이 엄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구성하는 요건이 되는 겁니다.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거 봐라. 내 말이 맞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따먹어야 되는 거예요. 따먹고 우리가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율법을 누가 줬는가? 율법은 그림자니까 그림자의 뒤를 따라가면 누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요. 오늘 본문에서 내가 죽는 장소가 나와요.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계심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게 어려워요. 예수님이 계심에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내가 죽는 거예요. 이것은 차이가 뭐냐? 예수님하고 우리가 같이 놀 파트너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존재하시고 따라서 우리도 존재한다. 이러면 안돼요. 예수님이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가 되면 안돼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능력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예수님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전환된 채 우리에게 사건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은 예수님 입장에서 율법 사건이에요. 율법의 저주를 우리한테 보여주니까. 율법은 인간에게 저주로만 나타나요.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하나님의 이 원칙을 계속 유지하고 계속 지켜나가십니다. 예수님은 그냥 멀쩡하게 오시지 십자가에 죽기는 왜 죽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주셔야 마귀에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먹으면 죽으리라, 해놓고 그 다음 이야기에 뱀이 등장합니다.

마귀가 등장해요. 마귀가 등장하고 난 뒤 그 다음 이야기가 뭐냐? 갑자기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고 뱀의 후손이 등장해요. 뱀의 후손의 정체는 여자의 후손 앞에서만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 뱀의 후손의 정체가 드러남으로서 뱀이라는 것은 악마에 속하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따먹을 수밖에 없게 된 그 인간과 뱀의 결탁된 그 요건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만유의 주가 되는 요건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야기해봐야 어려우니까 그냥 민수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광야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수기 21장 4, 5절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나님께서 광야에 이스라엘을 보냈더니 그들이 있는 대로 원망을 다 합니다. 누구한테? 하나님께 원망하고 모세한테 원망한 거예요. 원망할 때 어디서 왔는지 불 뱀들이 사방에서 소집되어서 백성들을 물게 했고 그중에 죽은 자가 많다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여기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그 뒤에 9절에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백성들은 처음에 그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살았다.’ 그 다음 민수기 21장 8절과 9절에 나오는 말이 ‘살았다’에요. 같은 ‘살아 있다.’ 인데 그 차원이 달라요. 격이 다르고, 급이 다르고, 클래스가 달라요.

앞에 있는 ‘살아 있다’는 것은 원망을 해대는 ‘살아 있다.’에요. 그게 정상적인 일상, 일상의 안정화를 시도하는 모든 인간들이 지금 광야에서 다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살아 있는 내가 계속 살고 싶은데 하나님 당신이 내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라고 원망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기도한다는 것도 일종의 원망이에요. 데모하는 거거든요. 기도한다는 자체가 촛불 집회하는 거란 말이지요.

기도내용 들어보세요. 날 살려주세요, 그거잖아요. 제가 금요일에 어떤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우리나라에서 잘 사는 사람들, 재벌아줌마들 기도내용을 들었어요. 골프 같이 치러 갈 사람이 없어서 기도하고 있대요. 기도의 급이 다르지요. 나는 살고 싶은데 왜 안 살려주느냐고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철야하고 악을 쓰면서 기도하는 겁니다. 나는 살고 싶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서 물어 죽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놋 뱀을 만들었거든요. 그 놋 뱀이 뭐냐? 쳐다보라는 거예요. “네가 뱀이었어.”라는 거예요. 너를 물어 죽이는 뱀이나 너나 같은 한통속이라는 겁니다. 왜 너는 네가 뱀인 것을 왜 모르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너는 죽었다고, 그러니까 창세기 3장, 선악체제, 여자의 후손, 전부다 율법, 율법사건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율법사건이에요. 계속 우리가 죽어 있는, 악마에 속한 뱀 같은 존재라는 사실, 뱀과 우리가 일치된다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거울 앞의 그 얼굴이 뱀의 얼굴이에요. 배암 잡사바, 그 배암의 얼굴이 거울에 비취는 겁니다. 그게 탐이 나고, 그걸 유지하고 싶고, 계속 그걸 살리고 싶고.

그래서 예수님 오실 때는 배암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로마서 8장 3절에.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이 예수님에 대해서 달려들었고, 이상한 소리나 한다고 했지요. “당신 목수의 아들밖에 안되잖아.” 전부다 그런 식으로 했을 때 심지어 제자들도 실망하고 다 떠났어요.

그냥 떠난 것이 아니고 실망하고 떠났습니다. 가룟유다는 배신감을 느꼈고요. “당신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래가지고 자살했잖아요.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면서 교회 다니고 있어요. 내가 뱀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 놋 뱀을 바라보라는 것이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바로 놋 뱀의 얼굴을 하고 오신 거예요.

누가 믿었으리오. 그 실패의 얼굴을. 전부 다 기피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을래. 다 기피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유발한 범죄사건이에요. 그리고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범죄자입니다. 남자로 한번 태어났으면 저렇게 십자가에 달릴 인생은 되지 말아야지, 라고 모든 인간으로 다짐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뱀을 쳐다본다는 것, 이것은 ‘살았다’의 의미가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원래 내 신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나는 내 신체에서 손을 떼야 되는 거예요.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되는 겁니다. 율법, 말씀을 드러내기 위한 신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귀가, 뱀이 요구하는 대로 나의 자존심, 내 의를 지키기 위한 내 신체로서 그동안 지탱하려고 그렇게 노동하고 살려고 애썼던 겁니다. 자기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놋 뱀을 쳐다보는 순간, 그 순간, ‘아, 주여, 내가 누군지를 이제야 알았군요.’ 사도바울이 자기 딴에 하나님 잘 섬긴다 했을 때 주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때 “주여, 누구십니까?” 자기는 옳다 이 말이거든요. 자기는 하자 없다 그 말이거든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핍박이라는 말을 집어넣습니다. 우리는 내가 살려고 하는 순간순간 주님을 계속 핍박하게 만들어요. 주님이 주시는 살려냄을 우리가 극구 밀어내고 내 식대로 내가 살려고 교회 나와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천국 간다고 그렇게 사기에 속아 넘어간 겁니다. 우리는 천국 갈 내가 있으면 안돼요. 천국 가야 될 내가 있으면 안돼요.

우리는 주님의 것으로만 천국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죄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유일하게 악마의 장막을 뚫었는데 그 뚫은 구멍이 진리의 위치입니다. 뚫고 바깥으로 튀어나오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온 몸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그 율법의 저주를 뚫고 올라갔을 때 그 율법의 저주가 완성된 모양새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피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신체는 십자가사건을 증명하기 위함이고 주님께서는 진리의 위치, 그 구멍을 통해서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자신의 영을 보내신 겁니다. 이렇게 보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뭐가 되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주님의 능력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주님의 능력은 남들 보기에 전혀 다른 자아를 양산하는데 주님의 능력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는 그 관계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 보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렇게 해서 자기는 안 살고 그리스도가 사는 거지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이제 이해되시지요. 육체라는 것이 내가 관리할 육체가 아니고 주님이 친히 자신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 육체를 관리하는 겁니다. 다시 확인해 드립니다. 법이 먼저 있고 인간은 나중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사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는 나중이에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계속 살려주는 주체가 주님인데 주님께서 살려주는 이유가 뭐냐 하면, 믿음을 생산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믿음을 생산하는 것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믿는 믿음은 내가 따로 또 있어야 되니까.

그러면 행함에서 믿음이 되어버린다고요. 로마서 1장 17절에 “믿음으로 믿음에”가 되려면 예수님이 살아 있어서 만들어진 믿음이 되어야지 내가 살아 있어서 내가 만든 믿음은 율법에 속하기에 그것은 저주받습니다. 지금 이래가지고는 잘 설명이 안 되니까 마태복음 17장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것도 율법사건이에요.

“네가 믿음이 있어?”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산을 옮겨봐라.” “그것은 감당이 안 되는데 큰 믿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아니야. 큰 믿음 아니야. 겨자 씨만한 믿음, 있고 없고의 그 경계선에 있는 믿음, 작고작고 제일 작은 믿음, 이것만 있어도 믿음 선에 넘어왔다고 증명할 수 있는 제일 작은 믿음 정도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에요.

그것 없으면, 산을 못 옮기면 애초부터 믿음 없는 거예요. 자, 이것이 율법사건이에요. 율법사건을 통해서 내가 생산하는,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생산하는 모든 믿음은 마태복음 20장 17절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도달되지 못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살려주시는, 예수님이 살려내는 믿음이 되어버리면 어떤 믿음이냐? 산을 옮기지 못해서 ‘아이고 부끄러워라. 나는 믿음이 없구나.’라는 것에 대해서 수치를 느끼지 않게 되는 능력으로서 갖는 믿음이 믿음이에요. ‘산을 못 옮기면 나는 믿음도 없는데’라고 걱정을 할 당사자가 없어지는 믿음.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산을 옮기든 말든 간에 그것은 주께서 하실 문제라는 것을 믿는 거예요. 어떤 분하고 그런 이야기했어요. 좀 여유 있게 사시는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그것도 잘 모르면서 오직 복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을 볼 때에, 이 세상에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가 영감이 안 오고,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오직 복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을 볼 때에, 좀 잘 산다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비교 경쟁하면서 성공실패를 논하는 그런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게 수치스럽다는 거예요.

목회자가 교인 숫자가 적다는 것이 목회세계에서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거거든요. 그런데 자기 교인 몇 명 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혀 수치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기뻐하는 그 목사를 볼 때에 교인 5천명 있다고 자랑질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럽고 수치스러우냐 그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느 쪽이에요? 수치를 느끼는 당사자가 되면 안 된다는 그 말이지요. 왜 우리가 수치를 느낍니까? 복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나니.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빌립보서 4장 13절에 이렇게 했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는데 무슨 부끄러울 여유가 어디 있으며 성공실패를 계산할 여지가 어디 있습니까?

성공실패를 왜 계산하고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의 움직이는 능력이잖아요. 뭘 운반한다? 십자가를 운반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했던 그 인간이 이 인간이에요.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 있는 인간.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인간.

불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를 비우라, 비우라. 자기를 죽여라, 죽여라.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자기를 죽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부처한테 은혜 받고 도 닦고. 이게 불교거든요. 오늘날 교회가 법당인지 뭔지 분간도 안돼요. 은혜를 구하는데 왜 구합니까? 자기가 자기식대로 살아보려고. 그 다음에 도 닦고. 도 닦으면 더 잘 살까 싶어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죽여라, 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 입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미 너는 죽었다는 거예요. 뭐도 죽었는가? 나의 판단도 죽었고 나의 위기대처능력도 죽었어요. 미래를 미리 앞당겨서 미리 계획 잡는 능력도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해야 돼요. 친히 기르시니까.

믿음이란 내 탓을 하지 않는 겁니다. 남 탓도 하지 않는 거예요. 탓할 자체가 없는 거예요. 범사가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에 내 하는 행동에 자기가 책임질 당사자가 없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 무슨 책임을 묻습니까?

 

그러한 상태가 다니엘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다니엘 세 친구. 다니엘 세 친구는 이미 죽었어요. 오늘날 성도를 묘사하는 적절한 율법사건이 다니엘입니다. 구약은 모조리 율법이에요. 일어나는 사건은 모조리 율법사건입니다. 선악과 사건, 아까 이야기한 놋 뱀 사건, 다니엘사건, 전부 다 사건이에요. 신약의 천국에 가는 사람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자에요. 선지자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성령 받은 성도는 불에 들어가든, 물에 들어가든, 주께서 재림해서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든, 물이 쏟아지든, 포항에 지진이 일어나든, 그것은 자기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에요.

물론 빨리 팔고 이사해야 돼요. 지금 집값이 내려가는데요. 주께서 십자가를 자꾸 드러냅니다. 21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헛되이 죽었다는 말은 지금 반복된다는 겁니다. 나 헛되이 안 죽었다, 헛되이 안 죽었다, 를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을 골치 아프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보고. 힘들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부담 갖고 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음대로 살라는 이야기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이 믿음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까 하는 것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존재하는 자체가 주께서 생산하는 믿음의 가현체, 주님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결과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내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십자가사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이제부터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되리라’가 아닙니다. 이미 되었느니라.

이 말은, 이미 너희는 죽었고. 죽은 것한테 우리가 너무 힘쓰지 맙시다.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뱀의 얼굴을 하고, 독사의 얼굴을 하면서 늘 남 물어뜯듯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맘 편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맘이 행복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악마가 쳐놓은 굴레, 주여,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처음부터 망상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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