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기만

아빠와 함께 2022. 8. 21. 17:52

하나님의 기만 

2022년 8월 21일                 본문 말씀: 디모데선서 1:17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던 사도는 자신의 이러한 고백의 바탕에 참된 하나님이 계심에서 나온 고백으로 소개합니다. 즉 참된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짓게 하고 그것을 흔쾌히 인정하는 것으로 구원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처럼 원초적인 하나님의 등장은 사울에게 심판하시는 분으로 이해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 시작은 ‘하나님의 적(敵)’이라는 신분으로 출발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입장을 견지합니다. 자기 사정을 고려해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들을 끌어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을 죄인 중에 괴수되게 한 분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리고 썩지 않으신 분입니다.

이로서 인간의 출발은 ‘썩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안에서 시작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하나님께서 계속 죽이기는 겁니다. 인간은 죽지 않으려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계속 죽이시는 이유는 아직도 자신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적(원수)이면서도 주체 파악이 안되어 천국 가겠다고 교회 나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고발하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에게는 사실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래 형상을 집어넣은 나라를 만들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다윗은 그 이스라엘 중의 한 사람이고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 중에서도 독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대상 17:16) 하지만 하나님은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흘린 피는 더러운 피이기 때문입니다. (대상 22:8)

시편 51:16에서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한 심령’ 곧 ‘썩은 심령’이었습니다. 그것은 고치지 말고 그대로 제단 앞으로 들고 나와야 합니다. 거기에 주께서 꺾으신 뼈와의 만남이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시 51:8) 즉 최초의 하나님은 형상이 다윗 내부에 꺾으진 뼈라는 형상으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형상이 발현되면 인간은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인간들이 눈에 보고 있는 형상들에 대한 파괴를 전제로 이루어진 겁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 12:12)

그 내막은 이러합니다.

1. 강물이 피가 됩니다.  이는 나일강의 신인 오시리스 Osiris와 크놈Khnum에 대한 공격입니다.

2. 개구리. 이는 개구리 머리를 통해서 보여지는 탄생과 부활을 믿는 케크트Kekget신에 대한 공격입니다.

3. 이.   이는 땅과 사막의 신 셋Set에 대한 공격입니다.

4. 파리.  이는 우아디트Uatchit 신에 대한 공격입니다.

5. 가축 전염병. 이는 암소신 하트르Hathor와 황소신Apis신에 대한 공격입니다.

6. 독종.   이는 의술의 신인 임호텝Imhotep과 질병의 신Skchmet에 대한 공격입니다.

7.우박. 이는 하늘의 신인 누트Nut와 곡식의 신Osiris에 대한 공격입니다.

8. 메뚜기. 이는 곡물의 신 셋, Seth에 대한 공격입니다.

9. 어두움. 이는 태양을 지워버리는 공격입니다. 그동안 애굽은 태양신 라Ra와 레Re를 섬겨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의 여신인 누트Nut와 하토르Hator에 대한 공격입니다.

마지막으로

10. 장자의 죽음은 곧 인간 자체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혈육에 속한 자들이 모조리 가짜 형상으로 살아가는 신들로서 살아가기에 하나님의 공격 대상이 된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진리와 구원과 천국에 이르고자 하기에 스스로 속고 있는 바가 됩니다.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유가 모세와 하나님께서 함께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모세가 지팡이와 함께 있는 것’으로 압니다. 썩은 인간의  형상의 한계이지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썩지 아니하고 영원히 천국에 함께 살 인간들을 만드십니다. 그 작업으로 ‘썩지 아니함’과 ‘영광한 영광’이 보장되는 존재를 스스로 임신해 내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임신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라는 처녀를 통해서 임신하십니다.

임신 뿐만 아닙니다. 정신적인 성장기간이나 그리고 사멸이나 매장까지 모두 참된 형상되시는 분이 인간 세게에서 진행시켰습니다. 이로서 인간의 끝은 마땅이 죽음과 저주뿐임을 확연해졌습니다. 즉 마지막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형상은 선악과 따먹은 심보, 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기만 한 그 욕망에 걸려든 형상들을 자기 것으로 전환시켜, 자기 존재를 대신 표현해주는 신으로 신봉하는 겁니다.

라헬이 아버지로 하여금 아버지되게 한 그 멋있는 형상의 우상인 드라빔을 훔쳐서 자기 것으로 삼는 이치와 같습니다.(창 31:19) 즉 인간은 자기 우상화로 인하여 사는 보람과 즐거움을 갖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발달된 ‘자기 사정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지옥입니다.

천국이란 인간의 모든 개인 사정이 제거된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가치하니까요. 천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머리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 보좌 앞에 던지는 겁니다. 기도합시다.(계 4:10)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형상은 예수님 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디모데전서 1장 17절(하나님의 기만)22082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17절입니다.

디모데전서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죄인 중에 괴수’라고 15절에 사도바울이 언급을 했습니다. 그 죄인 중에 괴수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 고백이 1장 17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이러한 눈에 보이는 자기 자신의 이 모습, 죄인 된 모습은 1장 17절에 보면,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 분으로 인하여 지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발언을,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인 중에 괴수라는 15절의 말씀은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 썩어야 될, 내가 썩어야 될, 내가 썩어야 될 존재라는 것을 아주 기쁘게 흔쾌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17절에 그분은 썩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이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이 분으로 인하여 우리는 썩어야 되고 우리 보이는 이 모든 것은 다 거짓이라는 사실을 흔쾌히 다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이야기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의 시작은 반드시 심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누구한테 행하느냐? 심판은 하나님이 적에게 행하지요. 하나님의 적, 원수에게 심판이 가해집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전에 몰랐던 것, 뭘 몰랐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적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의 적이면서도 시건방지게 천국 넣어달라는 거예요. 구원을 해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것이 바로 사울이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죄인 중에 괴수, 그러니까 나 자신이 나 자신을 몰랐던 그것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분이, 썩지 않는 분이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줬다는 거지요. 그런데 17절에 보면 만세(萬世), 옛날부터, 그런 뜻이거든요, 오랫동안, 만세, 또는 영원토록 그런 뜻인데 이것은 시작에 대해서 사울이 자기가 시작이 아니고 끝에 대해서, 마지막 상태에 대해서 본인이 아무것도 알지를 못하는 상태에요.

그러면 나 사울은, 나 인간이라는 인간은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해달라, 천국 가게 해달라, 부르짖었던 겁니다. 그런데 시작도 아시고 마지막도 아시고, 인간은 모르는데 누구만 아느냐? 하나님, 만세 전부터 왕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왕이시니까, 그 시간을 초월해서 왕이시니까 그분이 마지막에, 인간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그 상태에 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로 보느냐? 너는 나의 적이라고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라면 하나님의 적으로서 살아가는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이냐? 나의 개인적인 사정, 이걸 주로 우리 주변에 깔아놓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든 세상 모든 것을 생각한 거예요. 내 사정을 먼저 고려했던 겁니다. 살아가면서 그 사정을, 내 사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보이는 것들로만 둘러싸여 있고, 그 보이는 것들만 수집하고 그걸 끌어모으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확연하게 차이를 두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고린도전서 15장 42-46절에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42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썩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거고요.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더럽고 추잡하고 지저분한 것이라는 겁니다.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영광스럽다는 것은 오늘 본문 17절에 나오지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고 마땅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적이 되는 우리는 마땅히 영광이 없어야 되고 지저분해야 되는 것이 마땅하지요.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4절까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육의 몸이 있은즉 육의 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들만 사모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적이 된 우리한테는 이 성경 말씀을 들이대도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에게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 모든 내용이 누구한테만 사실이냐? 하나님에게만 사실이에요. 인간은 따지고, 따지고, 아무리 따져도 인간 자체가 썩어져야 될 인간, 더러운 인간,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인간, 그런 인간에게 있어서 성경은 사치입니다. 성경 내용은 그것은 너무나 귀해서 인간에게 제대로 대접을 받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개돼지한테 주지 말라고 하는데 거기서 개돼지는 인간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지요. 6절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곧 “안 믿는 인간들 개돼지만도 못하다. 그 인간들에게 성경 사실을 이야기해봐야 그것 가지고 놀다가 집어던질 것을 뭐하는데 성경 그 사실을 개돼지한테 주느냐?” 그 말이지요.

인간들이 왜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가? 그것은 인간들에게 어떤 기대심리 같은 게 있는데 그것은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 괜찮아 보이는 모든 것을 자신의 형상으로 일방적으로 규정을 해버려요. 성형수술 같은 것이 그런 건데요. 어느 배우 닮게 해달라, 내 머리 모양은 오드리햅번처럼 해 달라, 우리 클 때는 그렇게 했거든요, 그렇게 요구한다는 것은 내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하나의 형상과 나를 일치시키고 싶은 겁니다. 최종적인 형상.

오늘 본문에 보면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여기 ‘홀로 하나’라는 이 말을 통해서 인간들이 이미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형상을 홀로 하나라고 이미 확정을 지은 상태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은 뭐냐 하면, 남이 괜찮은 형상을 갖고 있으면 그걸 빼앗아서 또는 모방해서 그걸 내 형상으로 전환 시키는 그러한 삶의 투쟁을 벌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면 쉽지요. 성경에 다윗이라는 분이 등장합니다. 또 해봐야 ‘사실이 아니다. 고고학적으로 다윗의 증거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다윗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자기를 독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여겼어요. 이스라엘 왕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께 뭐라고 제안했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을 먼저 했어요. 이럴 때 다윗은 자기가 추잡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지어드리는 괜찮은 왕’ 이것이 내가 기대하는 새로운, 내가 도전할 수 있는 나의 멋진 형상, 독보적인 형상으로 간주한 거지요.

역대상 17장 1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하나님께 성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곧 “나는 백향목 집에 사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장막에 있으니 미안스러워서 내가 멋지게하나님을 위해서 내 집보다 더 좋은 집 내 집만큼이나 좋은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상당히 겸손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역대상 22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너는 이 땅에 더러운 피를 뿌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다윗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잘났으니까요. 자기는 절대적인 왕이고, 독보적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충성된 마음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하자 없는, 문제성 없는 내 형상에 대해서, 내 모습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지요. 지금껏 제대로 잘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진짜 다윗의 형상은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17절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잘나고 잘난 내 모습이 아니고 상한 심령, 썩어빠진 심령이다. 더러운 심령이다.”라고.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회복이 안 되는 더러운 심령, 지저분한 심령 그대로 가져와. 그대로 고치지 말고.”

다윗은 자기 내부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자기 내부에. 형상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괜찮은 형상을 끌어모아서 내 쪽에서 발전시키면 된다고 생각했지 내 안에 내가 손댈 수 없는 근원적이고 기원적인 것, 원초적인 형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미 심지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다윗에게 있는 거예요. 그 심지처럼 박힌 형상이 무슨 형상이냐? 바로 외부의 상한 심령, 더러운 심령으로 인하여 시편 51편 8절의 “주께서 꺾으신 뼈” 주께서 꺾으신 뼈를 다윗 속에 심어놨어요.

너 때문에 내가 대신 죽었다는 그 형상, 네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형상, 네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형상, 너 때문에 이 하나님이 죽었다는 그 요소를 다윗 속에 심어놨는데 다윗은 그 형상은 전혀 예측 못 하고 겉으로 남들 보기에 독보적이고 절대적인 것, 오늘날 우리 모든 사람들이 추진하는 그거요, 추구하는 그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밑지기 싫어하는 그것, 남한테 잘나 보이는 것, 이기고 싶은 것, 그 모습을 진짜 형상에다 덕지덕지 쌓아 올린 거예요. 그리고 쌓아 올린 그 형상을 평생 잘날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되어있다고요. 그러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습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는데 그 형상은 이미 인간이 악마로 인하여 범죄 하고 난 뒤에는 그 형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요, 악마의 형상을 자기의 이상 형상으로 계속해서 자기가 끌어모으는 거예요.

악마의 형상은 그 이유가 있어요.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너는 너 다우면 된다는 것, 이게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아담에게 유혹하는 데 성공했던 그 결과물이에요. “무쏘의 뿔로 가라. 너는 네 인생 살면 돼. 마이웨이, 너는 남 인생 흉내 내지 말고 네 인생 그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그게 네 형상이야.” 그게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게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지 않는 형상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보이는 형상과 보이는 형상끼리, 인간끼리 만나면서 누가 더 멋있게 보이고 누가 잘나 보이고, 그런 걸 대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담이 따먹었던 과일이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거거든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이 유혹의 세계를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겁니다. 거기 푹 빠져 있는 것이 진짜 네 모습이라는 거예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 탐욕이지요, 탐욕, 탐욕은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그걸 우상숭배라 하는데 그게 탐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그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워서 갖고 싶은 거기다가 자신의 모든 생명과 목숨을 몰빵해서 거기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다 집어넣어서 생겨 먹은 것이 뭐냐? 자신의 낯짝입니다. 얼굴입니다. 자기 얼굴이에요. 얼굴은, 지난번에도 낮 설교에 했습니다만, 얼굴은 일종의 도깨비 불같은 거예요. 도깨비불만 있고, 옛날 구전동화에 나오듯이, 도깨비불만 있고, 몸체나 실체는 하나도 없고 불만 번쩍번쩍 나타나는 것, 우발성으로 나타나는 것.

인간의 과거라 하는 것은 시간이 다 파먹었어요. 없어요. 인간의 과거라는 것은 없습니다. 70이 되면 69년은 다 날아갔고, 40이 되면 39년은 다 날아갔어요. 있는 것은 지금의 낯짝밖에 없어요. 낯짝, 얼굴밖에 없다고요. 그 얼굴만 있는데 그 얼굴이 나의 형상이에요. 이 얼굴 되기 위해서 그동안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거예요. 누굴 만날 때 얼굴을 들라, 하잖아요. 얼굴을 들라, 얼굴을 들라.

“네가 어디서 뭘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얼굴 좀 보자.” 이게 옥경이 아닙니까? 얼굴 좀 보자는 말이지요. 네가 옛날 헤어질 때 그 모습인지 아니면 그 얼굴인지, 얼굴 보면 다 나타나거든요. 얼굴 보면 찌질이로 살아왔는지 굴곡진 인생 살아왔는지 아니면 마나님으로 살아왔는지 얼굴 보면 다 나타나요.

그 형상에 인간은 목숨 걸었습니다. 목숨 걸었어요. 잘날 때 형상, 얼굴 보여주고 뭔가 께름칙하면 교회도 안 나와요. 그 도깨비불 남한테 안 보여주려고, 낯짝 안 보여주려고, 수군수군할까봐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 자체가 이게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영원하게 절대적인 것, 영원하게 탐욕스러운 것, 그리고 영원한 탐욕의 대가가 목적이 뭐냐? 바로 에덴동산이에요.

인간에게는 에덴동산의 천국 가는 그게 인간 탐욕의 끝입니다. 천국 가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 가느냐? 교회 나오면 된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요. 그걸 바로 우상이라 하는 거예요. 기독교의 신이 우상이 되어버렸잖아요.

창세기 31장 19절 이하에 보면 라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야곱의 외삼촌입니다. 외삼촌이 잘 살아도 너무 잘살았어요. 거기에 직원으로서 취직을 한 사람이 야곱입니다. 취직해서 그 외삼촌의 딸, 주인집 딸과 혼인을 했지요. 할 때 월급을 안 줬어요. 역시 부자가 부자 될 수 있는 것은 노동력의 착취라는, 뭐 공산주의에서 하는 말과 같은 것인지 줘야 할 임금을 제대로 안 주고 그것도 열 번이나 시급을 계속 바꿔나가요. 그런 식으로 착취를 해서 라반 자기는 더욱 부자가 된 거예요.

참다 못해서 야곱이 하나님께 고자질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래 네가 돈 벌게 해 줄게.” 아이디어 줘서 이제는 그동안 못 받은 것 퇴직금부터 각종 수당, 야근수당부터 전부 다 한꺼번에 몽땅 다 한탕 해서 도망치는 그 날 밤에, 그 날밤에 그 외삼촌의 딸 그러니까 야곱의 부인 라헬이 뭘 훔쳤느냐 하면, 이걸 훔쳐요. 31장 19절에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드라빔을 도적질했다. 드라빔이 뭐냐? 드라빔은 현재 삼촌의 나의 부자 됨을 정당화할 수 있는 신이 드라빔이에요. 내가 지금 부자라는 낯짝을 들고 살아가는 것, 현재 나는 부자다, 라는 얼굴, 이 얼굴은 항상 부자 되어야 마땅하기에 부자 되게 했다는 것을 신이 보증해줬다는 그 신이 드라빔신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교회 나오는 사람들, 종교를 가졌든 안 가졌든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드라빔을 갖고 있어요. 자신이 의롭고 지금 나의 존재는 정당하고 마땅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확보용으로서 자기가 믿는 신을 도용하는 거지요. 그게 드라빔입니다.

그러니까 이 라헬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 ‘우리 아버지가 부자인데 그러면 아버지는 아버지고 이제는 내 남편하고 살아야 되겠다. 그러면 아버지처럼 잘 사는 그게 무엇일까?’ 아버지처럼 잘 산다는 것은 라헬 입장에서 현재 자기형상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안 들고 아버지의 형상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타인의 형상을 내가 빼앗으면 되는 겁니다. 아버지를 부자 되게 했던 그 신을 자기가 빼앗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빔을 훔쳐 온 겁니다. ‘아버지만 부자인가? 나도 부자 된다.’ 이런 뜻이에요. 경쟁적이지요.

사사기 17장 5절에 보면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떠돌이 레위사람, 율법의 실효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의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고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고 율법은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사방을 둘러보면서 다른 강대국들을 보니까 그들에게는 율법이 없어요. 율법이 없는데 잘 살아도 너무 잘 살아요.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보다 더 잘 삽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한가지 여호와 신에게만 이렇게 매여 살 이유는 없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이 저쪽 나라에 있거든요. 주변 나라에 있어요. 그들이 여호와가 없고 율법이 없다는 그것뿐이지 내가 탐을 내고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형상에 대해서는 이미 그들이 확보해 있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참을 수가 있습니까? 선악과 따먹은 그 아담의 후손들이요, 그 아비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후손들이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것, 그걸 그냥 보고 지나갑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여호와는 그건 그냥 걸쳐놓고, 교회는 그냥 출석만 하고 실제로 생활하기는 세상 것을 따라잡기, 그 잘사는 사람 따라잡기, 따라잡으려면 그들이 살아가는 그 생활방식을 그대로 입수하는 겁니다.

“당신들은 왜 그리 잘살아요?” “그것은 신에게 기도하면 소원들어 주는 신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뤠에에에~?” 소원 들어주는 것. 그러면, 소원 들어주려면 신이 기뻐하는 제단을 만들고요……, 신당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사사기 17장 5절에. 신당, 천주교 신자들의 천주교 신당, 가정에 마리아상 해놓고 신당 해놓은 것 봤지요? 그 신당, 가만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또 이렇게……, 그렇게 해놓고 아침마다 비는 거예요. “우리 자식들 남산 위의 노루 새끼처럼 잘 뛰어놀게 해주시고, 어디 가도 안 아프게 해주시고……”

그게 뭐냐? 그게 자기 사정이에요. 인간이 자기 사정을 고려한다는 것, 이거 지옥입니다. 내 사정으로부터 먼저 따질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지요. 그걸 전혀 생각 못 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 적이 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나님은 시작부터 할 때 그 시작이 뭐냐? 구원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고 심판부터 출발한다는 사실, 심판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진짜배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어요. 그들은 알아야 되는데 몰랐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날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몰랐어요. 사울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주님 만나고 난 뒤에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비로소 그 고백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나 자체가, 나 자체가 나에게 형상이 되어버렸다. 나 자체가 나에게 이상적인 신의 형상이, 드라빔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된 거예요.

나는 나한테, 항상 시작을 나 개인적인 사정부터 시작하니까 내 사정은 어떻습니다, 어떻습니다, 이게 심지어 윤리체제 도덕체제까지 파고 들어왔어요. “하나님, 저는 몸이 아프고 몸져 누워 있습니다. 가난하고 몸까지 누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뭐냐? “어쩌라고? 어쩌라고! 네가 아직 심판을 덜 받았구나.” “하나님, 제가 가장이고 가정주부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어쩌라고? 가장이고 가정주부가 뭐 어쩌란 말이냐?”

너는 보이는 것들만 끌어모으고 있어요, 보이는 것들만! 네가 썩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가 썩어질 거예요. 그런데 안 썩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내 속에 박혀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몰랐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 인간을 죽여나가시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인간은 죽어가는 시체에 불과한 거예요. 계속 죽이시는 이유는 “아직도 너를 몰랐어” 너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죽이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서 내가 구원받은 증거를 자꾸 얻고자 하지요. 내가 구원받은 증거를.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증거를 빼앗아 버립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일방적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게 우상숭배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썩어야 될 것은 썩는 게 당연하고 망해야 될것은 망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거기서 구원이라는 아이디어가 왜 나오느냐 그 말이지요. 그 자체가 수상하지 않느냐 그 말이지요. 죄인 중에 괴수라면 곱게 죽으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뭘 하느냐 하면, 너 자신을 너에게 하나님께서 상처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집어 넣어준 유일한 구원의 증거가, 내가 내 구원의 상처가 되게 하는 거예요. 마치 자식이 부모한테 상처인 것처럼. ‘나라는 인간아 왜 네가 태어났느냐?’ 이런 식으로 내가 나한테 그걸 묻는 겁니다. ‘어이구, 인간아’ 이런 식으로 남이 나보고 측은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보고 나무라는 거예요. 나무래도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네가 왜 태어났지?’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특징은 속에 잠복 되어 있던 그 자기형상을 바깥으로 그걸 구체화시켜 버려요. 역사를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구체화시켜 버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상처가 되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몸의 가시가 되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저거 패 죽일 수도 없고 저거 살리기는 살려야 되는데, 저거 패 죽일 수도 없고 어이구 이 괴물아’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그게 이스라엘이 자기 상처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백성을 만들어내는데 천국의 백성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천국의 백성을 만들기 전에 먼저 하나님 자신을 하나님이 아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지상에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임신해야 돼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임신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을 임신하는 것이 아니고 마리아를 통해서 임신케 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마리아라는 인간이 예수님을 임신했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버렸어요. 모세 옆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거든요. 보이지 않는 분이 모세 옆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날 때는 인간들로 기만케 만들어버려요.

인간들로 하여금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요소가 있어요. 인간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는 방식으로 속아 넘어가는 방식을 채택합니다. 그게 뭐냐? 지팡이에요. 모세가 말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 바로가 듣고서 “어디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데?”

모세가 지팡이를 들지요. 바로가 “아이고! 지팡이잖아, 지팡이. 지팡이잖아.” 그것은 마리아가 임신했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은 예수라는 사나이, 예수라는 아들이지 하나님이 아니지.” 사람들은 자기가 눈에 보이는 것만 끌어모으기 때문에 평소에 눈에 보이는 식으로만 믿어지는 그 방식을 그대로, 하나님 일에다 그대로 적용시켜 버렸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갖고 뭘 치느냐 하면, 드라빔같은, 인간들의 존재를 절대화할 수 있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그 신들을 지팡이 가지고 다 쳐버렸어요. 지팡이 가지고 강물에 대니까 강물이 피가 되었거든요. 그것은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Osiris)를 친거예요. 모세가 한 게 신을 쳤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출애굽기 12장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열 가지 재앙이 애굽의 신들에게 벌 내리는 거예요. 나일강의 신 오시리스라는 신에게 벌을 내렸고 두 번째 개구리라는 것은 헤크트(Heqt)라는 신인데 개구리의 목을 통해서 부활과 탄생을 믿던 그 애굽의 신, 헤크트(Heqt) 신을 쳤고 세 번째 재앙이 이(蝨)인데 이것은 땅과 사막의 신 셉(seb)이라는 신을 쳤고요, 네 번째 파리 우아티트(Uatchit)라는 신을 쳤고, 다섯 번째 가축에 전염병이 생겼는데 이것은 암소 신 하트러(Hathor), 황소 신 아피스(Apis) 신을 쳤고요.

여섯 번째 독종재앙인데 이것은 임호텝(Imhotep)이라는 신, 질병 의술의 신이에요. 의사들이 의과대학 나와서 졸업할 때 선언하는 게 있어요. 그런 신을 친 거예요. 임호텝이라는 신. 일곱 번째가 우박을 내렸는데 그것은 하늘의 신 누트(Nut), 곡식의 신 오시리스(Osiris)를 친 거고요.

여덟 번째 메뚜기가 내려온 것은 곡물의 신 세트(Seth), 곡물의 신을 친 것이고 아홉 번째 어두움의 신은 애굽의 라(Ra)와 레(Re), 부부에요. 라와 레라는 태양신을 쳤고 하늘의 여신 누트(Nut)라는 여신을 친 거예요. 마지막 열 번째 친 것은 바로 그 신을 믿는 인간을 친 거예요. 인간이 신이었던 거예요. 내가 나한테 신이었던 겁니다.

이게 심판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도 심판이었고 끝도 심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다윗이 자기가 절대적이고 독보적인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린다 할 때에 다윗은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입니다. 택하신 사람 속에서 무엇이 발현되느냐? 진짜 하나님의 신이 인간으로 왔을 때 진짜 하나님의 형상과 악마가 심어준 가짜 형상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임신을 했고요, 하나님이 출산을 했고요, 하나님이 성장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별했고요, 하나님이 매장되었어요. 인간이 하는 것을 하나님이 그대로 다 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는 길 앞에 어떤 인간도 그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가짜구나.’ 가짜에요. 인간은 거짓이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하고 거짓이 달라요. 거짓말하는 경우는 이런 경우입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이웃집에 사는 할머니가 손녀 하나 데리고 탔습니다. 같이 탄 아저씨보고 “우리 손녀 예쁘지요? 그렇지요?” 그럴 때 같이 탄 그 아저씨가 “아이고, 정말 예쁘네요.” 이거 거짓말이거든요. 전혀 예쁘지 않지요. 도저히 예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예쁘다고 하니 할 수 없이 예쁘다고 해야지요. 이게 바로 거짓말하는 거예요.

거짓은 내가 거짓인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거짓입니다. 그래서 윤리 도덕적인 것이 다 거짓이에요. 바르게 사는 게 거짓입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나오느냐?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0절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져버려요. “이것은 제가 쓸 게 아니고 하나님이 쓰셔야 됩니다.” 하고 던져버려요. 그러니까 영광된 면류관을 내가 그냥 쓰고 앉아 있는 게 이게 바로 거짓이에요. 내가 쓸 자격도 안 되는데 계속 쓰고 있는 거예요. 내 영광스러움을, 내가 천국 간다는 이것을 내가 쓰면 안 돼요.

내가 왜, 천국 가는 그 은총을 내가 왜 뒤집어 써야됩니까? 그것은 우상이지요. 구원받은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되어버렸지요. 내가 기대하는, 천국 가서 멋있게 신나게 사는 내 모습이 나의 하나의 소망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걸 당연시 여기고 내 얼굴로 생각하는 거예요. 내 자신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천국에 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어비, 어비!” 자기의 면류관을 후딱, 후딱, 주님 발 앞에 후딱 던져버리는 거예요. 후딱 던져버리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서는 그걸 사도바울이 벌써부터 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영광, 모든 영광과 모든 존귀는 주님 홀로 받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홀로 있어야 된다는 것은 나의 타고난 악마의 형상이기 때문에 홀로와 홀로의 싸움이지요. 최후의 1인자의 싸움이에요. 내가 최후의 1인 자냐, 아니면 주님이 최후의 1인 자냐? 어느 쪽이, 하나님의 창조의 형상 입장에서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거짓이 아니고 진실된 것인가?

사도바울은 그걸 알았던 겁니다. 그걸 알았던 사도바울이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앞에 뭐가 붙어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보이지 않는 형상, 인간이 아예 보이지 않는 형상. 모든 인간들은 이 안 보이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해서 결국은 교회 50년 60년 다니고, 목사 장로 집사 다 달아놓고 결국 하나님의 적으로 하나님 바이바이, 하고 돌아섭니다. 그놈의 보이는 것 때문에, 그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 가지고.

모든 게 보이는 거예요. 자식도 보이고, 내가 돈 주고 샀던 그 빌딩도 보이고, 물론 우리 교회는 관계없습니다만, 내가 모은 부동산도 모두 보이고, 전부 보이고, 내가 신었던 신발, 옷, 자동차, 이 전부 다 보이는 거예요. 저것 내 것, 저것 내 것, 저거 내 것…….

보이는 것 하나가 내 것이 일대일로 대응해서 전부 다 보이는 것, 내 자식 내가 키웠어, 저 보이는 내 자식 내가 키웠어, 보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못 벗어나요. 이 교회 내가 세웠어, 이런 것. 거기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니까 말로는 믿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못 믿겠다, 못 믿겠다.

주님께서 인간을 그대로 복제해서, 복사해서 인간이 갔던 길을 그대로 가버립니다. “네가 할 수 있는 한계 다 보여줄 게. 임신했어? 내가 임신할 게. 네가 태어났어? 내가 출생할 게. 네가 배고팠어? 내가 배고파 볼 게. 네가 힘들었어? 내가 힘들어 볼 게. 다 했지? 다 했지? 그래, 똑같이 했잖아. 그래, 너의 끝은 뭐였던가?” 죽음이었지요. 매장까지 되었어요. “나도 매장당할 게.”

여러분, 지난 시간에 했지만 가룟유다는요, 자살한 게 아니고 자살 당했어요. 배후에 사탄이 들어가서 사탄한데 자살당한 거예요. 그 가룟유다의 가는 노선, 그 노선에서 나머지 열한 제자가 무슨 수로 그 노선에서 이탈합니까? 인간은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보이는 것, 그것을 수학에서 무한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자연수의 무한, 계속 더하기, 플러스(+) 해서 마지막 n까지 계속해서 더하기 해봐야 그 앞에 있는 기억 때문에 다음 것이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앞의 숫자 때문에 그 다음 숫자가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앞에 있는 숫자 17 때문에 18이 의미 있고, 그 18이 의미 있기 때문에 19가 있는 거예요. 과거에 지나간 것이 지금의 19를 아는 나의 낯짝이, 얼굴이 된 거예요. 보이는 것이 쌓아 올려져서 지금의 낯짝이 된 겁니다. 인간의 시작은 보이는 것이 전부였어요. 태초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원초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만남에, 그 인간 속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형식으로 왔다는 것은, 지팡이로 왔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기만케 하는 거에요. 인간을 기만케 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들은 때려죽여도 날 못 믿게 만들어 버려요. 제가 보이는 물부터 좀 마셔야겠습니다.

뭐 예수가 4대 성자니 어쩌고저쩌고, 인간의 모든 학문이, 뭐 예수는 하나의 종교의 성자에 불과하다고요? 성경에 고린도후서 10장에는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후서 10장 4, 5절에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모든 이론이요, 과학, 철학, 의학, 신학, 윤리, 도덕, 모든 학문, 언어학, 고고학, 이 모든 이론을 파하며, 다 부숴버리며, 파괴시키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이게 기본적인, 원래 시작된 하나님의 원래 형상이니, 그다음에 6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심판을 내리시는 이유가, 모든 학문의 인간의 높아짐이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왜 학문과 학문끼리 서로 통하고 학교에서 교육이 그리 잘되는 이유가 뭐냐? 모조리 다 거짓이거든요. 선생님부터 2학년 1반, 2학년 2반, 다 거짓이거든요. 거짓이니까 거짓끼리 잘 통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들을 믿는 것끼리 서로 잘 통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들끼리.

신학도 마찬가지예요. 신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신학 해서 목회 어떻게 하겠다. 목회 왜 해야 되는데? 도대체 목회를 왜 해야 돼요? “교회를 어떻게 세웁니까?” 교회를 왜 세워야 되는데? 세우는 이유가 뭡니까? 죄인 중에 괴수가 교회 세워봐야 그거 죄인 중에 괴수들 교회지 그게 뭐가 의미 있어요?

물론 고린도후서 10장 이렇게 대봐야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에게 사실이 아니니까요. 성경은 오직 주님에게만 사실이에요. 그 이유가 배후에 악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2절에 보면 악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1, 2절에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절에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그 붉은 용이 뭘 하느냐? 그 아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악마가 활동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몰라요. 마귀는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만 제거하면 끝이에요. 이 세상에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합니다. 1장 26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형상을 제거하면 끝인 겁니다. 끝이에요.

그러나 골로새서 1장 15절,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놓고 16절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는 그 아들, 그 아들을 악마는 그것만 노립니다. 여러분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시작점 형상만 그것만 제거되기를 지금도 악마는 간절히 원하고 있어요.

악마가 그걸 하는 방법은 뭐냐? 간단하지요. “네 사정을 고려해서 교회 다녀라. 네 사정, 네 개인적 사정을 고려해라. 네가 교회 다녀서 자식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 따져봐라. 네 수입이 늘어났나 줄었나, 그것 따져봐라. 네가 교회 다녀서 몸이 건강해졌는가, 더 아픈가, 그것만 따져보고 네가 교회 다녀서 네 자존감과 네 자존심이 더 높아졌는지, 안 그러면 뭉개졌는가, 그것 따져봐라.” 이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그 방식에서 악마는 한시도 물러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똑같아요. 똑같아 보이는 것들에 치중해서 하나님의 적으로 돌려세우겠다는 것이 악마의 수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을 어떤 식으로 구원하는가? 여기에 얼굴이 중요하게 등장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3절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인간은 얼굴밖에 없어요. 낯짝밖에 없어요. 도깨비불 같아요. 인간은 가면만 있어요, 가면. 안에 실체도 없고 그냥 가면이에요. 오늘의 가면, 그게 오늘의 나예요.

그 가면 이마에다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그 도장을 찍는다는 말은, 시편 51편에 나오는 바로 다윗에게 알려준 성령하고 똑같은 거예요. “너 때문에 꺾여진 뼈가 있다. 망가진 형상이 있다. 너는 잘난 형상을 고집하는데 너 때문에, 그 잘난 너 때문에 망가져 버린 형상,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 네 안에서 지금의 너의 얼굴에 어떤 흔적 표시가 되기를 바란다.”

그게 인입니다. 얼굴에 이마에다 도장을 찍어버려요. 에스겔에 나오지요. 천사가 와서 먹물로 도장을 찍지요.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일체 내 사정이 제거된 세계입니다. 나의 입장, 나의 처지, 형편을 완전히 제거시켜 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예수님의 형상을 담는 그릇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자체로서는 아무 쓸모 없다는 거예요.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상한 심령이지요. 다윗의 고백처럼 아예 상한 심령, 아무 쓸모짝이 없어요. 쓸모짝 없다는 것은 더 이상 나라는 나의 보이는 형상에 대해서 내가 나를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는 쓸모짝 없어 폐기처분해야 마땅함을, 그게 나인 것을 인정하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 말입니다. 주님 따라오라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남의 것이 탐이 나고, 내가 저 모습 닮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는 게 있지만, 그러나 그 답답한 것, 내가 뭔가 된 줄 알았더니만, 신앙인 줄 알았더니만 그게 다 밑으로 내려가지요. 그걸 부침(浮沈)이라 합니다. 상승했다 다시 하강하고.

이게 수련회 때 에스겔 1강에서 나와요. 1강을 다시 한번, 참석 안 한 분들이 있어서 다시 설명하게 되면 하나님의 보좌가 두 개 있습니다. 한쪽에는 심판하는 보좌, 번개가 쳐요. 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구원의 보좌가 있습니다. 거기는무지개가 있어요. 고요해요. 그 사이에 궁창이 있어서 이게 통과를 못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심판하는 보좌에서는 인간들이 해보려고 기어올랐다가 떨어지고, 기어올랐다가 떨어지고, 맨날 우리의 삶이 믿는다, 싶은데 무슨 일 터지면 불신자로 확 드러나지요. 또 믿겠다, 싶으면 뚝 떨어지지요. 자기한테 기대를 걸었다가는 실망, 실망했다가 다시 기대, 이게 아래쪽 보좌 심판의 현장에서는 내 사정을 고려해서 내 구원을 고려하는 이것은 지옥 같은 겁니다. 일상이 그래요, 일상이.

예를 들면 그런 겁니다. 노래 가사에도 나오지요.

우리는 나란히 커피를 마시며
뜨거운 가슴 나누었는데
음악에 취해서 사랑에 취해서
끝없이 행복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고
갈색 등불 빛만 남아
외로운 찻잔에 싸늘한 찻잔에
희미한 갈색추억……<갈색추억>

벌써 이렇게 나오면 저게 무슨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떠나니 갈색 등불만 남았어요. 참 희미한 갈색 추억. 그렇게 뜨거운 가슴 나누고 음악에 취하고 사랑에 취해서 좋~다, 이걸로 죽 갈 줄 알았는데 세상에 그대는 떠나고 외로운 찻잔에 갈색 등불만 남았어요.

이게 부침(浮沈)이에요. 인생이라는 게 고요함이 아니고 망가지지요. 이것을 우리가 겪게 만들어요. 겪게 만들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오늘 듣고 다 알았다, 가 아니라 이 말씀이 내일 또 써먹고, 한 달 뒤에 또 적용되고, 몇 년 뒤에 또 적용되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지만 내가 홀로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 내 안에 있는 십자가만 영광 받으실, 면류관 내가 건방지게 쓰고 있을 잽이 안된다는 것을 날마다 부침(浮沈)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이 족히 비교가 안 되는 놀라운, 내 사정을 일체 고려하지 않는 천국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 세계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처럼 기쁘게 기쁨으로 흔쾌히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전체를 알지 못하고 남들 흉내 내면서 평생을 뒤따라 갔습니다. 남들 걸리는 코로나 걸리고, 남들 먹는 약 먹으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그 외 다른 인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죽어 마땅함을 감사히 여기고, 죄인 중에 괴수됨을 기쁨으로 여기는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저희들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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