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근성
2022년 7월 31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1:7-11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1: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1: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구분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개인적인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대하는 자들로 생긴 현상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들의 특징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필생을 사업’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들은 복음도 받아들이고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원칙도 같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보는 인간과 하나님 보시는 인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복음과 율법, 둘 다 인간의 선택하거나 선별한 처지에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과 복음 모두 인간의 나타남 이전에 준비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어느 하나 골라잡든지 아니면 둘 다를 취득한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과 복음이 모든 인간을 골라잡아 분류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어서는 아니된다는 확정됨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의 자기 일에만 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겁니다. 하지만 자기 일에 열중하므로서 주님의 일은 완전히 도외시됩니다. 인간의 일로 인해 주님의 일이 막혀진 상황에 인간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들은 자신이 ‘죽은 자’라는 인식을 하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 20:11-16까지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미 죽은 사망한 자요, 자신은 애도하니 자신은 엄연히 살아 있는 자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같은 인간들이나 통용되는 이해에 불과합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보니 거기에 천사 둘이 예수님의 시체 놓였던 위쪽과 아래쪽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사라진 것에 대해 매우 신기해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리아는 자기 판단을 가동시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본인이 예수님을 찾고는 있지만 막상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는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즉 ‘살아 있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사신 분을 못알아봤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 마리아는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지만 곧 그 다음에 ‘마리아’라고 불러주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불러주실 때 비로소 인간은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광야 때, 이스라엘은 대규모 집단을 이루면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은 ‘주의 이름’뿐입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이 ‘주의 이름’으로부터 혜택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하늘로부터 만나와 반석에서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들 죽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마땅히 살아있으며 이 살아 있음이 정답이라고 우깁니다. 실은 인간 존재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살아 있는 겁니다. 율법은 바로 이 ‘인간 성질’을 겨냥해서 주어진 겁니다. 인간 자체가 자기 성질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성질은 터져 나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범죄들은 인간의 본연의 성질에서 나오는 승부근성에서 비롯된 겁니다. 싱부근성이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남들에게 지고는 못살겠다”는 오기에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율법 앞에서 인간은 벌써 패배자입니다. 즉 살려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죽어 마땅한 겁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신이 절대로 율법을 이루지 못하는 자로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이는 모든인간을 한 유형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성경은 이처럼 인간은 유형type로 생각하는 반면에 인간들은 자신을 개별적인 사례token로 여깁니다.
그래서 율법과 자신을 연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은 인간 개인과 연계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예수님과 연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행하심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시려는 행하심입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16) 율법과 개인과 연계하면 율법에서 사망의 권능이 나와서 그 사람을 저주하고 심판해 버립니다.
이처럼 죄 사함이란 개인적인 구원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개인이 일으킨 일로 여파로 생겨난 겁니다. 예수님깨서는 ‘죄사함’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내신 겁니다. (개별적 사례가 아니라) 유형과 사례를 쉽게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은행에서 돈을 찾으면서 자신이 맡긴 그 돈을 찾고자 한다면 이는 참 어리석은 일인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손 때’라는 가치는 은행에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은행에서는 보편적으로 누구나 통하는 돈의 가치 안에서 그 사람에게 인출해줄 뿐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죄사함의 가치는 인간의 율법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죄 사함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고린도후서 4:7-10에 보면,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애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성도는 자기 일, 자기 것으로 자기를 개별적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새로운 유형의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 족합니다. 로마서 9:21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즉 성도는 자기 것으로 자기 그릇에 담고 다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로소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담은 다 부질없음이 드러납니다. 즉 내가 아는 나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세상 성공자로부터 피해입고 패배자로 낙인 찍힌 분이 남긴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무의미한 세상 사람과의 승부에 나서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디모데전서 1장 7-11절(승부근성)22073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7-11절입니다.
디모데전서 1:7-11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사도는 복음을 외치는데 있어서 어디까지 고려하느냐 하면, 복음에 위반되는 사람까지 지적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옳다’ 그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울러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에 반대되는 사람이 내세우는 게 뭐냐?
그것은 바로 율법의 선생, 율법을 내세우는 겁니다. 이 복음에 반대하기 때문에 일종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성경말씀 내가 지켜낼 수 있는 대로 지켜보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사도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적이고 이단적입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 있거든 여러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일단의 필생의 사업이 된 사람들, 우리 교회는 없어서 다행스럽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사람들을 아주 족집게처럼 뽑아냅니다. 그러면 율법이 악하냐? 율법이 악하지는 않지요. 선한 겁니다.
8절에 보면,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 하지만 율법이 관계되는 것은 뭐냐 하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과 관계되어 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율법이 뭐냐 하면, 내가 전한 교훈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냐를 들춰내는데 율법이 아직도 유효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말하는 교훈이 뭐냐? 11절에 나옵니다. 11절에 “영광의 복음”이 바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거였습니다. 영광의 복음. 그러면 복음의 맞은편에 뭐가 있느냐? 복음의 맞은편에 불법한 사람, 복종치 않는 사람, 경건치 않은 사람, 죄인, 거룩하지 아니한 자, 망령된 자, 아비를 치는 자, 어미를 치는 자, 살인하는 자, 음행하는 자, 호색하는 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등등, 이쪽은 전부 다 한쪽으로 몰아놨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어요. ‘나 율법 지키는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지 않을래. 나는 복음 받아들일래. 그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단은 아니고 정통적인 구원받은 사람 되고 싶어.’ 이런 의식이 발동될 것입니다.
그거 꼼수입니다. 복음을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면요, 여기 사도도 마찬가지고 일반인도 마찬가지고 내가 어느 것을 골라잡을까 하는 그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보다 선재하는 것, 인간보다 앞서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율법이고, 인간보다 앞서는 것이 복음이라는 거예요. 인간보다 복음과 율법이 먼저 제공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을 앞장세워서 일하시기 때문에 골라잡을 입장이 아니고 골라잡아도 누가 골라잡는가? 복음이 골라잡고 율법이 골라잡을 입장이지 우리가 ‘나 율법 선택 안 할래. 복음 선택 할래.’ 그런 잽이 못 됩니다. 그런 경우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은, 복음이 살아있고, 복음을 주신 그 주님이 살아 있고, 율법을 주신 주님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을 진정으로 제대로 알려면 그것부터 정리해야 돼요. ‘내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살아 있는가?’
우리는 일상생활 하면서 이걸 생각을 안 해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정답이 아닌가.’ 이미 그걸로 확정 나 버렸어요. 확정지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성경에 상투적인 멘트가 그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고 우기는데 더 이상 무슨 말 하리오.
내가 살아 있다고 우겨버리면 그 다음 나오는 논리는 뻔합니다. 내가 복음을 고를까, 내가 율법을 고를까, 이것은 내 결정 따라서 내 운명이 정해진다, 이렇게 우기는 거예요. 빨간약 줄까, 파란 약 줄까, 이것하고 똑같은 논리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우리가 보기 전에 진짜 복음서를 통해서 과연 무엇이 살아 있는지, 내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 있는지, 아니면 나도 살아있고 하나님도 살아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은 살아 있다는 말이 내가 죽어 있다는 그 말인지, 이게 정립이 먼저 되어 있어야 돼요.
그걸 병립시킬 수가 없고요, 정립을 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1절에서 15절에 보면 거기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고, 그 무덤에 찾아간 마리아가 있었어요. 11절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자,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무덤 안에 있는 사람 예수님은 죽은 자고, 그 앞에서 울고 있는 자기는 살아 있다고 분명히 자부했습니다. 이게 상식이고 이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정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무덤에 있는 자는 죽었기 때문에 무덤에 있고요, 그 앞에서는 울고 있고, 애도를 표현하는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애도를 표한다. 여기에 대해서 어떤 것도 이의 걸 수 없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바뀌는가 한번 보세요. 11, 12절, “마리아는 무덤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았더라.”
예수님의 시체가 있는데 천사 두 명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사를 대동할 때 두 명의 천사를 대동하는 경우는 바로 이 두 명의 천사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천사일 경우에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대동하고 있습니다.
그게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세 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찾아왔고요, 거기서 세 명의 천사 가운데 두 명과 예수님은 헤어지는데 하나님까지 합해서 세 명입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천사, 하늘에서 오신 셋 중에서 두 명의 천사가 빠져서 소돔과 고모라에 갑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행사하는 겁니다.
심판을 행사하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천사 나도 당했다. 그게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 그냥 심판하지 않고 정당성 뽑아내기 위해서 천사로 하여금 활동하게 하고 그 천사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떤 대우를 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천사가 인간모습으로 등장하지요. 해놓고 인간들이 천사를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여러분 알다시피 그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으로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면 이 세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미 심판받은 겁니다. 그런 경우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광야라는 게 있습니다.
광야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 동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뿐입니다. 나머지는 다 죽은 자에요. 그들은 양식 없고 물 없습니다. 왜? 양식 먹을 잽이 못되고 물먹을 자격이 안돼요. 다만 그들이 조건부로 사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의 율례,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율법, 그걸 준수한다는 조건하에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시내산 밑에서 이스라엘은 1년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은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준 이유가 ‘이스라엘 너희들 살았느냐, 아니면 율법이 살아 있느냐?’ 둘 중 하나를 너희들이 확실하게 체험하라는 거예요.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시내산을 통해서 너희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이 살아 있다는 것, 율법이 인간보다 선재한다는 것, 먼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율법받기도 전에 위반했어요. 우상 섬기면서 율법을 깨트리는 동시에 그들은 수천 명 죽었습니다. 나머지 다 죽을 겁니다. 모세가 중간에 중보로 나섰지요. “저를 봐서라도 살려주세요.”(출 32:32) 그러니까 하나님의 조건을 더 세밀하게 가져왔습니다. “내가 모세 너한테 율법 줄 테니까 모세 앞으로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율법,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율법을 안 지키면 다 죽는다.”
그 추가적인 율법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법입니다. 언약궤를 통해서 1년에 한 번씩 죄사함의 피흘림이 없이는 너희는 죽었다는 사실을 안 받아들이면 너희들은 죽는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하늘에서 보기에 인간세상은 이미 죽은 자에요.
그 죽은 자중 하나가 요한복음에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죽은 자는 예수님이 죽었고 자기는 울고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보려고 할 때에 천사 둘이 한테 마리아는 한 잔소리 듣습니다. 뭐냐 하면, 13절에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죽은 사람보고 운다고 되레 호통을 듣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내가 죽어도 사흘 만에 다시 산다’는 그 말씀이 있거든요. 그 말씀이 인간존재보다도 우선되는 거예요. “인간은 죽었는데 말씀은 살아 있어.” 그 말씀이 그대로 살아 있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겁니다.
마리아에게 말씀을 그 전에 줬거든요. 다 들은 게 있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인간에게는 안 먹힙니다. 왜? 인간은 세상교육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세상교육 너무 많이 받았다고요. 여러분들이 현실을 분석하고 측정하는데 있어서 과학, 예술, 정치, 철학, 종교, 이런 것으로 파악하시렵니까, 아니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어느 것으로 여러분 분석할래요?
말씀으로 분석할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걸로 세상을 볼 겁니까, 아니면 학교에서 배운 것, 대학교에서 배운 것, 대학원에서 배운 것, 신학교에서 배운 것, 그것 가지고 세상을 분석할 겁니까? 성경신학, 목회신학, 조직신학, 그 딴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제가 신학교에서 배울 때 조직신학, 성경신학, 목회신학, 역사신학, 그런 신학을 배웠지만, 성적도 꽤 괜찮게 나왔어요, 다 배웠지만 “이미 너는 죽었다”를 이야기한 교수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건 뭐예요? 신학교에서 가르친 것 뭡니까? “사람 성경 가지고 끌어 모아서, 교회해서 밥벌이하자.” 그거 가르치는 거예요. “신학교에서 남들은 농사지어서 사는데 너는 목사해서 밥 먹고 살아라.” 그거 가르친 거예요, 그거.
“신학교 오나 안 오나 너는 이미 죽었어.” 그걸 언급하는 신학교 총장 본적이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수상하고 문제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유-튜브가 우리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정치적 유-튜브, 국민의 힘, 윤석열 지지율, 이런 게 우리를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언제 찾아가본 적 있습니까? 없어요. 마리아가 아직도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속 구시렁구시렁 변명을 댑니다. 예수님 찾아갔는데 시체는 없고 옷만 덜렁 개져 있는데 어디 갔습니까? 14절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아……, 이거 이정도 하면 진짜 죽은 것 맞잖아요.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지요.(요 14:6) 진리요 길이요 생명을 말로 알면 뭐합니까? 실제로 만나도 누군지 모르는데요. 15절에 주님이 마리아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았다는 겁니다.
16절에, 드디어 마리아가 삽니다. 15절까지 죽은 자인데 16절에 삽니다. 왜 사느냐?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불러줬어요. 이게 생명입니다. 생명의 주입이에요. 링거 맞는 거예요. 비타민 주사 맞은 겁니다. 수면 내시경으로 잠자고 있다가 깨운 거예요. 마취 깬 겁니다. “네가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 마리아야. 너는 내 이름을 모르지만 나는 네 이름 안다. 마리아잖아. 마리아, Mary, 마리아잖아.”
마리아를 불러주는 거예요. 이로서 마리아는 주님의 불러주심으로 비로소 의미가 생겼고 주님의 의미, 주님의 증인으로서 살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살은 거예요. 그 이름, 광야 때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했던 그 주의 이름, 주의이름이, 죽은 이름 안에 살아 있는 주의 이름이 합류함으로서 이스라엘은 외형적으로 뭔가 거룩한 움직이는 민족이 된 겁니다.
그 개개인은 아무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뭐 힘들고 어렵고 여러 가지 문제 있지만 그 상담의, 복음적인 상담의 기본 중 기본은 이거예요. “혼자 살지 마라. 주께서 동행한다. 그리고 앞으로 줄곧 동행해야지 혼자 살면 안 된다.”
혼자 있을 때는 자기 일 찾잖아요. 그러나 혼자 있지 않으면 성도는 주의 일 찾습니다.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주의 일이 뭔가를 찾아요. 자장면에서 돼지고기나 찾지 말고 주의 일을 찾는 거예요. ‘왜 이렇게 맛있는 자장면을 먹게 했을까? 이게 주의 은혜구나.’ 이럴 수도 있고 ‘왜 이렇게 잘못 걸려서 맛없는 자장면이냐?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모든 것은 주의 일을 찾아서 발굴하는 것, 그게 모든 문제의 해결입니다.
왜 동행해야 되는가? 왜 인간은 죽어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보다 먼저 선재하는 율법이 그걸 다 이야기해줬어요. 어떤 사람은 오늘 본문가지고 ‘율법 지켜야지. 예수 믿고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야 돼. 뭐 안하고, 뭐 안하고, 뭐 안하고, 이렇게 해야 돼.’ 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끝난 겁니다. 율법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 저주 아래. 아주 저주의 매를 벌어요.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다는 티를 다 내버리는 겁니다. 왜 율법을 주셨느냐? 율법과 너 자신을 직접 연결시키지 말라고 준 거예요. 율법은 예수님과 연결시켜야지 율법을 나한테 연결시키면, 콘센트 나한테 꽂아버리면 이게 율법의 저주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걸, 고린도전서 15장 56절에서는 그걸 가지고 율법의 권능이라고 합니다. 율법의권능은 무슨 권능이냐? 사망의 권능이에요.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6절, “사망의 쏘는 것이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를 죽이려고, 저주하려고 우리보다 먼저 선재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이게 율법의 시선이에요. 율법을 주신 분은 주님이고요,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복음을 주신 거예요. 율법 주고 또 복음을 주신 거예요.
율법 줘가지고 저주 아래 있게 하고 복음 줘서 생명아래 있게 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시선입니다. 동행하는 자의 시선이에요. 시선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제가 아는 분이 드라마의 보조출연자로 등장했다 해가지고, 그 드라마 15회와 16회에 등장했다 해가지고 15회 16회 일부러 녹화해서 그 긴긴 시간을 눈 부릅뜨고 찾아봤어요. 내가 아는 사람 나올까 싶어서.
아는 그 사람 이름은 못 밝혀요. 서울에 계신 분인데요. 안 나와요. 왜?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에 나의 시선이 오니까 그쪽 드라마의 숨어 있는 시선을 내가 찾을 수가 없어가지고. 내 쪽에서 봐야 되거든요. 나중에 문자로 왔어요. “제가 여기 나왔습니다.” 하고 그 장면을 캡쳐를 해서 보내줬어요.
두 장면, 15회에 나오는 것과 16회에 나오는 것을 보여줘서 그걸 근거로 해서 15회, 16회를 다시 봅니다. 과연 저 장면인가, 거기 나오면 스톱시키려고. 드디어 찾았어요. 아, 드라마에 우리 아는 사람 찾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 평소에 나의 일에, 온통 독자적인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보려고 나의 일만, 계속 죽어라고 나의 일만 챙기고 나의 일만 평가하면서, 논평하면서 살아가는 내가 주의 일을 왜 찾습니까? 주의 일을? 동행하신다는 데 주의 일을 어떻게 찾아요?
자기가 살았고, 이것은 정답이고,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누가 봐도 합당한데 내가 살았다, 그 살아 있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더 살지, 이거 연구하는데 이미 자기가 죽은 자로 파악이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이 본문자체가 복음적 기능을 합니다. 네가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게 이 본문을 준 거예요. 그리고 이걸 봐도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래, 율법 지켜야지.’ 이렇게 나오도록 유도하는 말씀이에요, 이게.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먼저 주셨는가? 율법을 주심으로서 구약의 모두가 죄인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대표자 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섞여서 그들이 거의 천년 가까이 동행하면서, 아브라함은 빼놓고 이스라엘 그 이후, 이스라엘 나라가 생겨난 것이 BC 1440년 그 때니까 그냥 1500년 동안 같이 있으면서 확인해 보니까 그들은 멸망 받아 마땅한, 저주받아 마땅한,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고 확정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때문에 그러거든요. 율법은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이방민족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은 뭐냐? 신약은 모두가 환자로 만들었어요. 죄인보다 더 심한 욕이 환자입니다. 죄인 같으면 노력할 여지가 있잖아요. 환자는 미쳐버린 자에요. 거의 정신이상자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요. 신약에서 밝혀진 바는 모든 인간이 환자에요. 성경에서 죄가 뭐냐? 이게 분명하게 규정된 게 있어요. 죄가 뭐냐 하면, 전체를 볼 줄 모르는 게 죄라는 거예요, 전체를.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인간입장에서 너무 억울해요. 왜냐하면 전체를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이란 그런 뜻이야.” 그런 뜻이에요.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죄가 되는 거예요. 이걸 로마서 14장 23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믿음으로 좆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되어 있어요.
자, 말을 좀 어렵게 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주께서 하나님의 의인 또는 의 되게 하실 때에 뭐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주는가를 한번 보세요. 우리에게 착함을 집어넣어 주는 게 아니에요. 뭘 집어넣는가?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10절에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전체, 예수 안에서 통일되는 이 전체가 빠진 것이 바로 죄였다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 된 자가 성도에요. ‘내가 나쁜 짓해서 죄인이 아니라 전체 하나님의 경륜,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고, 창조 전에는 뭐였고, 마지막 심판 후에 뭐였는가, 그 전체를 한꺼번에 다 몰랐다는 그것이 죄였기에 주께서는 우리를 저주하고 심판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 자가 바로 에베소서 1장에 의하면 성령 받은 자입니다.
그 에베소서 1장 9절 뒤에 나오는 것 보면, 17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와 정신(곧 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이렇게 죽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륜이라 하는 것은 economy, 경제라는 뜻인데 이게 뭐냐 하면요, 어떤 절차를, 메커니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절차, 하나님은 이렇게이렇게 이렇게 일하신다. 그 전부를 모르는 사람은 그것은 죄인인데, 그것을 너희들이 몰랐던 죄인이었었는데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너는 이제는 의인이다, 그 말이에요.
왜 그런가? 주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같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소한 인간사 때문에 상담하고 그러지 마세요. 전체입니다 전체. 내 일 아니고 전체에요. 여러분이 커피 시킬 때,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커피 시킬 때 여러분이 “뜨거운 커피 주세요.” 또는 “냉커피 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지 “커피 존재를 주세요.” 이러지는 않잖아요.
뜨겁나 차갑나, 이걸 보는 거예요. 커피는 그 존재를 마시는 게 아닙니다. 뜨거운 음료냐, 냉기가 있는 음료냐, 그걸 마시는 거예요. 하나님도 우리를 볼 때에 우리의 존재를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발휘하고 있는 어떤 기능 같은 것을 보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제가 계속 공부한 바에 의하면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무엇을 모르고 있느냐 하면, ‘인간은 인생은 왜 사는가? 내 존재를 위해서 산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틀린 말이에요. 인간은……, 제가 지금껏 평생 살아왔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진짜 틀린 적이 없어요.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존재로 사는 게 아닙니다. 성질대로 살아요. 제가 지금껏 분석하고 파악한 것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성질입니다. 성질 안 낮춰서 교도소 가는 거예요. 백날 예수 믿어도 성질은 그대로 살아 있어요. 성질대로 가요, 성질대로!
그 성질에서 나온 게 승부근성이에요. 승부근성입니다. 인간은 성질대로 살고 그 성질이 어떤 성질이냐? 남한테 안 지려고, 이기려고 하는 승부근성. 대통령 지지율도 마찬가지입니다. 승부근성의 일종입니다. 우리나라 2인 이하, 한사람이 살든지 두 사람이 살든지 2인 이하의 가구 수가 전국에 62.7퍼센트에요. 혼자 사는 가구는 34퍼센트입니다.
이 통계가 의미하는 게 뭐냐? 패배해도 혼자 패배하려는 의식 때문에 승부근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금리가 한국금리보다 높아졌습니다. 앞질렀어요. 이 의미가 뭐냐? 이제는 한국이 미국경제한테 지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모든 주변의 통계, 모든 정보는 내 승부근성과 만나서 내 성질만, 부화만 돋우고, 혹은 내 기분만 좋게 업그레이드 시키는 그런 식으로 작용할 뿐이에요. 남한테 지지 않으려는 거예요.
가난해서도 안 되고, 건강해야 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승부근성입니다. 제가 퀴즈 하나 낼 게요. 물을 많이 마시면 피부 노화가 방지가 된다. Ο 아니면 ×. 물을 많이 마시면 피부노화가 방지가 된다. 이거 ×라 하거든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유의미, 의미 있게 들리는 것은 피부노화가 되면 패배했다는 의식이 드는 거예요. 패배했다는 것, 탱탱한 피부가 못된다면 패배자의 모습이라는 그것이 우리 몸에 잠복되어 있어서 그래요. 율법을 왜 지키는가? 승부근성 때문에 지키는 겁니다. 지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골로새서 2장 14절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율법이지요, 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과격하지요. 율법을 이렇게 매달아놓고 그걸 가지고 십자가, 뾰죡한 것 있잖아요, 십자가, 십자가로 완전히 그 가운데를, 아주 심장을 박아서 뚫어버린 거예요.
율법을 너의 자아와 연계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율법은 예수님과 연계될 문제지 너와 연계되면 사망의 권세가 저주의 권세 지옥의 권세가 너에게 작동할 것이고 너는 그걸 감당할 수가 없어요. 율법 안에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승부근성에 의해서 ‘내가 율법 잘 지키면 어제보다 더 착한 사람 되리라’는 그것은 십자가 날라 오면요, 십자가 날라 오면 우리 배에 구멍 납니다. 박아버리니까.
“율법과 너하고 연계시키지 말라 했잖아. 너하고 율법하고 손잡지 말라 했지?” 그걸 박아버리는 거예요. 십자가가 와서. 그걸 가지고, 아까 봤던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로 승리했다고 해요. 십자가로 승리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도 나와요.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겼다는 겁니다. 뭘 로? 나한테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나를 주님이 이겼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에게 이긴 거예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겠다는 나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박음으로서, 완전 음주차량도 아니고 그냥 돌진해 와서 구멍을 뚫어버린 거예요. 꼬지처럼 작살났지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게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고려해야 돼요. 이스라엘을 생각해서 성경을, 신약을 봐야 되는데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집단적이고 단체적입니다. 개별적이 아니에요.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집단으로 움직여요, 이스라엘이.
여러분 구약성경 보신 적 있지요? 집단으로 움직인다고요. 이스라엘이 집단으로. 집단, 이것은 전체, 하나의 타입(type)을 이뤄요. 유형(類型)을 이룹니다. type. 그런데 인간은, 특히 이방인 같은 입장에서는 개체에요. 유형을 이룬다. 영어로 하면 type가 되고 개체를 이루는 것을 토큰(token)이라 합니다.
성경을 볼 때 유형으로 봐야 돼요. 토큰(token)으로 보면 안 되고요. 예를 들어 만약 어떤 사람이 은행에 5십 만원을 저금했다. 저금해놓고 돈 찾으러 갑니다. 은행에서 “얼마 찾으시려고요?” “50만원이요.” “예, 50만원 여기 있습니다.” 하니까 그 사람이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은행직원에게.
“왜 화를 내십니까?” “내가 준 게 그 돈 50만원 아니잖아요. 내가 준 것은 만 원짜리 50장 줬는데 왜 5만 원짜리 10장줍니까?” 길길이 뛴다면 이건 뭐 이상한 사람이지요. 왜 그 사람이 길길이 뜁니까? 개인이 살아 있어서 그래요, 개인이. 50만원 지폐의 가치는 유형적이에요. type에요. 개인이 아닙니다. “내가 애초에 냈던 손때가 묻은 그 옛날 그 지폐를 달라.” 그걸 은행에 요구하면 안 돼요. 그건 한국은행에서 이미 도장 다 찍었어요. 이미 그 돈은 못 박았어요.
똑같은 예가 “저 사람 시계가 내 시계하고 똑같네.” 이것은 말이 맞지요. “저 사람 시계하고 내 시계가 같은 회사 시계다.” 이건 되는데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뭐 저 사람 시계하고 내 시계하고 똑같다는 말은 내가 잃어버린 시계하고 똑같다는 말이야.”라고 되어버리면 이것은 유형적이 아니고 개체적입니다.
지금 어려워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성경을 가지고 내 구원 내놓으라고 하는지 내 구원, 내 구원은 없습니다. 성경에 내 구원은. 이상한 버릇이에요. 정신병자니까 이상한 버릇이 있는 거지요. 이게 이상한 거예요. 내 구원은 없어요. 사적인 나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어떤 누구의 존재를 반영하는 기능인에 불과한 거예요. 천사와 같이 내 구원은 따로 없어요, 내 구원이. 내 구원 없으면 내 가정 구원도 없고요, 내 국가를 위한 구원도 없고, 내 교회를 위한 구원도 없어요. 지금 우리가 개인적으로 있으니까, 물론 마귀가 배후에서 그렇게 작동을 했지요, 개인적으로 있으니까 자기가 신처럼 되려고 하니까 승부근성이 성질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겠다,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율법을 준 주님 보시기에 너는 “내가 살아 있다.” “그런 거짓말 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다는 말은 네가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보기에는 ‘내 성질이 살아 있고 싶다.’ 그런 뜻이야. 네가!” 자꾸 “내 성질 못 버리면 내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아.” 그래, 바로 그 뜻이라니까요! 내가 개처럼 밥이나 먹고 사료 준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성깔대로 해야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 성깔대로.
남자들 60넘어 퇴직하고 집에 있으면서 직장 다닐 때와 똑같은 대우를 가정에서 아내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이제는 내가 산이나 좀 다니면서 놀아볼까’ 하다가 집에서 노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이게 내 나와바리에서, 네가 왜 여기 있나? 아침에 눈에 띄지 말고 나가! 나가라고! 여기는 내 영토야, 내 영토. 어디서!”
‘너는 네 영토에서 그동안 살았잖아. 왜 내 영토에, 내 관리 내 주도하에 있는 내 나와바리에 네가 왜 끼어드냐?’ 그 말이지요. “나가서 돈이나 벌어와.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인간이 자기 성질, 여자 남자 다 마찬가지에요, 그 자기성질, ‘제발 내 성질 건드리지 마라. 이 성질만 영원하여라.’ 오직 영원한 것은 성질밖에 없어요. 마이 웨이, 끝까지 내 성질대로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개인적인 성질에 대해서 율법을 거기다 뿌려버립니다. 율법을 주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거룩하지 않은 자……,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느냐? 자기 성질대로 사는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 세상은 우리 성질부리라고 그걸 받아주는 세상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일 때문에 현실이 있는 거예요. 개인적이고 토큰(token), 개체적인 것을 받아주는 현실이 아니고 유형을 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유형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에 의해서 개인적인 것은 왜 제외가 되느냐?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율법과 개인을 연계시키지 말라 했지요.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이 육신을 만나면 육신은 연약해서 율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확정된 거예요.
뭘 새삼스럽게 율법을 지켜요? 확정된 거예요.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그러니까 개인을 죽이는 방법은 율법을 줌으로서 사적인, 어떤 나라는 사적인 가치와 의미, 나의 성질, 이것은 오히려 율법으로 말미암아 더욱 더, 더욱더 사망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니까, 개인이 율법 앞에서 기가 죽으니까 개인이 화를 또 내는 거예요. 아까 기도하신 그 성도님의 기도내용처럼 개인이 또 반발하는 거예요. 너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율법 너무 합니다.’ 이렇게 속으로, 속으로만 하지요. 노골적으로 하면 또 벌 받을까 싶어 겁나가지고 속으로만.
여러분 CC TV가 악합니까? CC TV가 악해요? 전봇대 붙어 있는 그 악한 CC TV돌아다니면서 다 부숴야 됩니까? 체포해야 됩니까? CC TV가 악하지 않지요. 그 다음, 사람 죽이는 천사가 악합니까? 심판하는 천사가 악해요? 악하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이 율법에, 하나님의 CC TV에, 죽이는 천사에 제대로 호응하지 못해서 죽어야 된다면 우리가 굳이 살아야 됩니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시체와 시체의 만남이에요. 하나님 시선으로 볼 때에. 거기서 뭘 더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시체라도 이만큼 살았잖아요. 이만큼 시체라도 살았잖아요. 40년, 60년, 여기도 60년, 70년, 저기는 열 살이니 10년, 그만큼 시체였는데 시체로 태어나서 시체로 살아왔잖아요.
지난 수요일날 제가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었어요. 니느웨 멸망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그런 말을 했지요. 니느웨 사람들 니느웨 사람으로 살도록 왜 하나님께 그냥 두지 않느냐는 말이지요. 왜? 인간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다 이 생각 합니다. ‘제발 우리 인간들끼리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런 간절함으로 인간들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어요.
그래서 애국가, 잘 모르지만 애국가에 있어요.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게 왜 허락이 안 됩니까? 이게 왜 허락이 안 돼요? 우리 식구, 우리끼리 살도록 이게 왜 허락이 안 되느냐, 그 말입니다. 진짜 환자입니다. 이것은 죄인도 아까워. 환자에요, 환자.
죽어야 될 율법에 의하면 마땅히 죽어야 될 육신입니다. 그 육신인데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가지고 유형을, type, 유형을 만들었어요. 모든 개인, 모든 개인을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오직, only, 오직 그분만이 존재, 그분만이 진짜 개인으로, token으로, 개인으로 오셔가지고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요. type을 만들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성질부리던 우리, 성깔 있는 우리는 뭐냐? 하나의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릇. 여러분이 주변 사람을 상담해주고 또 여러분이 상담 받을 일이 있을 때 이 본문 하나만 하면 모든 상담 상담료 아낍니다. 상담료 필요 없어요.
고린도후서 4장 7절 이 본문만 있으면 상담 필요 없습니다.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이거 한 알만 하면 모든 회충은 다 떠나가요. 4장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끝났지요. 우리는 빈 그릇입니다. 빈 그릇이고 거기에 성령이라는, 복음이라는, 십자가라는 보배를 그 안에 담을 뿐이에요. 이게 유형이 되는 겁니다.
내 안에 내가 차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빈 그릇이 되면 돼요, 빈 그릇. 시체인데 생명 들어와서 산거예요. 시체인데. 시체가 아니면 생명이 생명인줄 모르게 되어 있고 점점 더 주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내일 찾으면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 일 찾으면 내가 가벼워져요.
요한복음 8장 9절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려오거든요. 데려왔을 때에 그 때 주님께서 땅에다 글씨를 쓰시니까 8장 9절에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거예요. 하나씩 하나씩. 갈수록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예수님 중심인데 소위 교인이라는 사람들도 하나씩 하나씩 자기 일을 찾아서 점점 더 점점 더 멀어져가네. 점점 더 멀어져가요. 떠나가요. 예수님은 여기 있는데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떨어져 나가요.
자기중심, 개체중심이거든요. 자기 성질중심이거든요. 자기가 빈 그릇 되기 싫은 거예요. 예수님 담기가 싫은 거예요. 나는 내 성질이 담긴 그릇이고 싶은 거예요. 자살할 때까지. 상담은 받지만 주님 중심으로 오기는 싫어하는 거예요. 주의 말씀 있습니다. 안 옵니다. 주의 십자가 있습니다. 안갑니다. 나는 율법대로 지켜가지고 잘나고 잘난 인간, 그게 내 승부근성에 맞습니다. 오늘 제목을 승부근성이라 해야겠다. 모든 게 승부근성, ‘내가 왜 져? 내가 왜 지냐고?’
사무엘상 24장에 보게 되면, 다윗과 사울의 만남에서 다윗이 사울, 철천지원수, 자기를 죽이려고 따라다니는 사울을 만나고 거기서 사울이 거기서 잠자고 있을 때 살금살금 다가가서 뭘 하느냐? 베옷의 깃만 잘라버려요. 나중에 그것도 양심의 가책이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보배를 담은 빈 그릇의 특징이 승부근성이 없어져요. 승부근성이 있으면 성공자가 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뭐냐? 성도로 하여금 그 성공자에 의해서 피해 입은 피해자로 만들어버립니다. 패배해도 상관없는 존재, 패배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나는 사람하고 상대해서 이겼다, 졌다’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상대해서 율법 앞에서 ‘애초부터 나는 패배자였다’는 것을 흔쾌히, 쿨하게 그걸 인정해 버리는 거예요.
주님 앞에 내가 패배자인 거예요. 주님 앞에, 율법 앞에서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보배, 내가 율법 못 지킨 죄인인 것을, 그것을 알려주시는 그 성령을 담는 그릇으로, 그릇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전체가 다,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의 경륜, 예정하신 경륜이 다 담기는 겁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21-2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권리가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고자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오.”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거리가 있느냐? 한쪽은 진노를 담는 그릇, 한쪽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을, 용서, 죄 사함을 담는 그릇,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릇으로만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눈을 떠가지고 그걸 알아먹는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져도 괜찮다는 거예요, 져도.
사울 왕이 나를 쫓아와서 죽이려고 해도 사울 왕 당신하고 나 싸움 안 해요. 왜냐?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 시시하게 인간하고 안 싸웁니다. 그게 바로 개별성에서, 개체성에서 떠나버린, 주님이 만든 파도, 파고, 물결, 그 물결이 들이닥친 사람이에요. 우리 속에.
우리들은 갈수록 빈 그릇이 되는 겁니다. 아까 하다 만 고린도후서 4장, 그 뒤엣 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겠지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 답답함이라는 표현을 기도원에서 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컬컬한’, ‘답답하고 컬컬한 심령’이라 하잖아요.
전부다 자기 성질 때문에 그런 것은 모르고, 남한테 안 지려고 그런 성질인 것은 모르고, 그저 자기 자신은 모르고 그저 다 하나님 탓이고 남 탓이고, 내가 너 때문에 성공 못했다는 거예요. 왜 네가 성공해야 돼? 하나님 앞에 이미 패배자인데 네가 왜 굳이 성공해야 됩니까?
그것으로 여러분 평생 발목 잡힐 거예요? 평생 악마한테 농락당할 겁니까?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잖아요. 본인이 알아야지요. 본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시체라는 것, 시체가 뭐 성공한들 시체지 뭐 있어요? 여러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서로 상호 비교할 필요 없어요. 광야 시계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배운 사람 안 배운 사람, 전부 다 밥도 못 먹고 물도 없는 그런 인간들이었어요. 광야에서 그게 개체성이 아니고 집단성이에요. 유형이에요 유형.
9절,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리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그릇이 연단되면 연단될수록 안에 있는 그 성령의 능력, 생명의 능력, “마리아야” 불러주는 그 능력은 더욱더 으리번쩍 빛이 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이기심을, 십자가자랑을, 우리 개체가 방해 안하게 되면 십자가 공로는 더욱더 빛이 난다고요. 육신으로 하지 못한 것을,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사했다는 그 사하심이 빛이 난다고요.
하, 참, 뭐 고민 있습니다, 이런 남들의 이야기 들어보면 전부 다 승부근성, 자기 성질 못 죽여서 나오는 거거든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런 말씀이 고린도후서 4장에 있었더랬습니다. 예! 이런 말씀이 있었어요.
각자 지금 자기 일에 정신 팔려서 이것만 잘되면 나는 남에게 성공했다는, 승리자가 된다는 그 자랑거리에 미쳐가지고 성경에 이런 말씀, 주께서 의도적으로 패배자 되게 해서 은혜 준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지요. 우리가 성공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는 주님만 자랑할 수밖에 없는, 은혜만, 고마움만, 감사만 계속 우리 빈 그릇에서 계속 나오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빈 그릇에 쓰레기 좀 채우지 마세요. 쓰레기, 똥, 오줌, 쓰레기, 나의 일 채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율법 주시고 그리고 생명 주신 이유가, 우리가 얼마나 쓰레기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줄 압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 복음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이 교훈과, 세상의 어떤 것이 대치가 되고 반대가 되는지 그걸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