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시는 주님
2022년 8월 7일 본문 말씀: 디모데전서 1:12-14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현실이란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 발견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 행복과 자기 만족과 자기 성공을 요청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바깥 세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염두에 둔 현실과 연결될 수가 없는 겁니다.
주님의 세계는 인간들에게는 실은 ‘없는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손해 안보고 이익을 보려는 데 온통 정신이 쏠려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무지(無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사실은, ‘복음의 실재는 사도의 변화를 통해서 나타난다’입니다.
사도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사도 본인의 변화가 아니라 사도에게 외래적인 주님께서 일으킨 것이고 그 일은 제대로 된 현실의 일환으로 일어난 겁니다. 즉 현실은 분명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하는 그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입니다. 거짓입니다. 사도에게 변화를 유발한 현실이 현실이며 똑같은 원리를 성도에게 적용시킨 그 현실이 현실입니다.
복음을 알고자 한다면 사도의 변화와 그의 고백을 들어보라는 겁니다. 그는 예수님 만나기 전과 후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이 안다고 자부하던 자였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전혀 모르는 자였습니다. 사도에게 있어 과거에 무지는 단지 무지함이 아니라 ‘죽어있다’입니다.
숨쉬는 형태로 죽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그냥 숨쉬는 것 외에 무의미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7-19)
즉 현실을 제대로 못보고 있으니 그는 주님 보시기에 소경인 것과 다를 바 없고 이런 상태에 음식을 먹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사울이 음식을 다시 먹는 이유는, 단순히 사울을 살려두기 위함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행 9:15) 즉 주님의 현실 속에 누비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의 인간은 딱 두 가지 종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없이 내버려진 부류와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비참한 자기 모습을 알게 된 부류입니다. 주님의 찾아오심으로만 보여주는 참된 현실을 위하여 주님은 인간들로부터 피해다녔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소위 자신들이 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의해서 발견되어지지 않기 위해 인간의 현실에서 도망치듯이 사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찾음의 의미를 무산시키기 위함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바라는 바는 자신의 의미성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먼저 비참한 인간의최종 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이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서 폭행자요 훼방자로 핍박자임이 들추어지는 자리입니다. 즉 인간은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해서는 자신의 최종 모습을 알 길이 없습니다.
장엄하고 엄중한 그분 앞에서 비로소 인간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인간의 혀 끝에서 지옥불이 나오고 있는 바를 인간 본인들은 몰랐던 겁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일체 믿음이 없기에 그 어떤 형편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자기 카드 쓰지 않고 주님의 카드를 계속 긁어대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이방인의 사도에게 일어난 사적 변화는 실은 유대인들이 왜 멸망당했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에 입각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떤 원리가 가동되는지를 일반화시켜 보여주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족보를 따져봐도 자신들이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필히 구원받는 증거자로 자처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혈육은 실은 이방왕들의 손에 넘어간 것을 고려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마태복음 1: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이 짧은 문장에서 이스라엘의 나라가 종결되고 이방나라 수하의 스룹바벨 총독으로 낯설게 새로 시작됨이 나타납니다. 즉 스룹바벨이 연결고리는 유다나라의 주도권이 배제되는 조건에서 성립됩니다. 성전을 새로 만드는 재원은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조달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이어진다는 취지는 이스라엘 역사에게 사라졌습니다. 즉 인간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적 족보에서 예수님은 사라져버린 겁니다. 인간의 역사 이해는 주님을 찾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마태복음 1:16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3:23에서 요셉의 아버지는 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숨겨진 인물들이 주님의 족보를 미궁의 숲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이점은 바로 이방인들이 겪어야 될 일들과 같습니다. 인간은 유사성을 근거로 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5:4에서 예수님께서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으려 가서 찾고서는 어깨에 매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양에서는 ‘주님의 친히 찾아오심’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찾을 수 없는 자기 백성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찾아내십니다. 이렇게 찾아냄을 당한 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주님에 대해서 핍박자요 훼방자임을 자백하게 됩니다. 이는 일체 주님은 인간 자신의 관심사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생리는 이러합니다. 뭔가 신기한 일이라는 일어나면 마치 신적 존재자로 오해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라는 터키 중부지방에서 앉은뱅이를 낫게하므로서 낯선 봉변을 당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신이 강림된 존재로 오인받았습니다.(행 14:8-18) 성도는 일체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박살내는 그 현실의 증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감격합니다. 너무나도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격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희박한 경우를 적용시켜 주신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아멘 』
4강-디모데전서 1장 12-14절(피하시는 주님)22080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전서 1장 12-14절입니다.
디모데전서 1:12-14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복음의 활동이 놀랍게도 개인적으로,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어디 있느냐, 또는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 또는 예수님이 어떻게 활동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제시합니다. “사도바울 봐. 사도바울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봐.” 이런 식으로 주님이 활동하고 있고, 살아 계시고, 복음이 지금도 작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디에서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도바울은 전에는 몰랐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전에 무엇을 내가 몰랐다, 를 사도바울은 몰랐던 거예요. 내가 어떤 대목에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긍휼을 입고 보니까 내가 정말 어떤 것을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전에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자기가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충성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누구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사투를 벌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바울은 복음을 내세우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데 어떻게 사투를 벌이는가 하면, “나는 몰랐던 자였다.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동시에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실은 없었다.”를 증거 하는데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겁니다.
나는 믿음도 뭔지도 모르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소망이 뭔지도 모르는, 이 모르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는데 주께서 알려줬다는, 주께서 나를 모르는 자로 지금껏 살게 하셨다는 그 점을 알리는데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르는데 하나 배웠으니까 더 알면 되지 않겠는가?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았다, 이러면 감사하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도는 이 ‘몰랐다’를 죽었다 와 같은 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목숨 끊어지면 죽었다, 목숨이 이어지면 살았다, 라고 세상에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게 바로 미련하고 무지한 ‘몰랐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겁니다.
지식으로 모르는 게 모르는 게 아니고 자기가 죽어있는 채로, 죽음을 실어나르는 채로 흔히들 살았다고 우기는 그 점에 정말 제대로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전에는, 13절에,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내가 전에는, 이렇게 할 때 사도가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식이 모자란다, 가 아니라 누구를 상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전에는 혼자 공부하고, 혼자 열심히 하고, 혼자 하나님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연구하면 그만큼 자기가 발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독서실에서 혼자 또는 깊은 산중 산사에 묻혀서 혼자 도 닦으면 자기가 알고자 하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점점 알아간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기도원에서 도 닦는 사람의 문제가 거기에 있어요. 절도 불교도 문제가 있는 것이 그 점인데 그런데 사도가 말하는 몰랐다는 것은 누군가가 등장해요, 누군가가 계시고 그 계신 분 앞에 나를 비춰볼 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무지한 자인지 그 때에 폭로가 된다는 거예요.
혼자 자기 머릿속으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서는 내가 제대로 모른다 할 수 없고 누군가의 마주침, 부딪힘, 이걸 통해서 내가 무지하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 무지하다는 것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죽어있는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의 마주침에서 만남에서 알 수 있는 거예요.
일단 자기가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 같으면 쓸데없이 말이 많지가 않아요. 그런데 자기가 살아서 어떤 희망을 가져 버리면 그 희망을 쟁취하기 위해서 그때부터는 말이 많아집니다. 이 말이 많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내 사는 것이 더 잘사는데 이익이 될까?’ 그러한 요령과 꼼수가 막 작렬하니까 말이 많아지는 겁니다.
그걸 야고보서 3장에서는 ‘지옥의 혀’라 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지옥의 혀, 지옥 불을 혀에 담아서 내뱉는 거예요. 백날 이야기해봐야 ‘나는 지금 지옥에 살고 있습니다.’ 하고 티 내는 것밖에 안 되지요.
죽었다, 라고 하는 것은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이사야 선지자 말씀처럼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내가 망하는 백성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거대하고 장엄하고 어떤 웅장한 어떤 분 앞에 자기가 너무나 왜소하고 작은 존재로 서 있는 이 새로운 현실 상을 본인은 알게 된 거예요.
같은 키의 그만그만한 인간들끼리에 있어서 ‘내가 잘났나, 네가 잘났나’ 이게 아니라 도저히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엄정하신 그분 앞에 우리가 설 때에 비로소 우리는 무지한 자고, 무지하다는 것은 곧 죽었다, 를 의미하고 죽은 자가 할 말은 “내가 죽어 있는 것 맞습니다.”라는 고백 외에 무슨 다른 고백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지요. 그래서 이 대목이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났던 그 대목에서 나옵니다.
사도행전 9장 17-19절에 보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나니아, 사도바울에게 찾아왔던 예수님께서 또 바쁘게 아나니아까지 챙겨가지고 사울이라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접촉하게 만나게 해줬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서 ‘형제’라고 부르면서 너나 나나 둘 다 예수님 때문에 이곳에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선하셨습니다, 했는데 사울은 지금 소경 되어 있고요, 소경 되어 있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지요.
아무것도 못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는 게 없어요. 눈 감겼으니까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왜 아무것도 모르냐 하면, 지금껏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하고 전혀 다른 인생을 경험하니까 지금껏 살아온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리고 밥도 먹지를 않았어요. 먹어봐야 소용도 없어요. 몸도 약해지지요.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 밥 먹고 살아야지,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고 눈이 감겨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는 밥을 더 먹으나, 세월 더 보내서 숨 쉬고 사나, 그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과거의 사울은 그랬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없는 세계는, 예수님이 없는 세계를 알지 못한 이런 입장에서는 자기가 알던 세계는 주님이 활동하는 세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를 모르는 자는 그냥 없는 존재에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 앞에서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알 때 그것은 다 안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안 거예요. 본인이 어떻게 공부했느냐,가 본인이 어떤 노력을 했느냐, 가 아니라 어떤 세계의 출현, 어떤 세계의 나타남, 그걸로 한 사람은 그냥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고, 한쪽은 내가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그러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요. 있어도 무의미한 존재, 하나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비참하고 내가 죽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딱 두 종류 외에는 어떤 다른 종류의 사람도 없습니다. 아나니아가 사도바울에게 우선 무지함부터 떨어지게 하지요.
눈에서 비늘 떨어지니까 비로소 새로운 눈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그 현실, 주님 빠진 현실이 아니라 주님만이 활동하는 현실을 알 때 그때 사도바울은 밥을 먹어야지요. 이제는 살 이유가 있습니다. 밥을 먹으니까 강건, 건강해지지요. 그리스도께서 살게 해주신 강건은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비로소 사도는 죽었다, 의 상태와 살아 있다는 상태가 예수님의 개입으로 어떻게 양쪽으로 차이 나는 것을 비로소 제대로 아는 사도가 된 겁니다. 사도는 그런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사도행전 9장 15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아나니아한테 이야기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기 위해서 내가 의도적으로 찾아갔다는 거지요.
사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한 게 아니고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 택한 겁니다. 할 일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그다음에 ( )다. 주님께서 하루하루 삶을 연장 시켜 주는 이유는 ( )다. 그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는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사울로 사도를 하게 한 것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서 사도를 보낸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직접 구원하면 되는데 왜 사도를 보내느냐? 바로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이 활동하고 복음이 나타나는 증거는 바로 사도바울에게 일어났던 경우 경험을 똑같이 반복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까요? 그새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뭐가 무지한 것도 모르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인간과 인간들끼리 학교 선생님한테 배울 때는 그랬는데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이 찾아올 때 나는 비로소 무엇을 모르는가, 를 자기는 알게 되었다. 나는 복음의 훼방자요, 포행자요, 나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은혜를 모르는 자요, 따라서 그 결론이 나는 죽은 자 맞다. 밥을 먹을 자격도 안 된다. 살아도 죽은 자였다.’ 그 사실을 기쁘게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내가 교회 다니면서 갖고 있었던 믿음, 소망, 사랑, 그것 다 가짜고 거짓이었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게 된 겁니다.
사도는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뭐든지 주저하지 않고 구애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렇게 하는 말은 더 이상 사도는 자기 믿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믿음만 사용합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는 자기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주님 주신 카드, 복지 카드, 대구은행 카드, 남의 카드를 마음껏 긁어대 버립니다. 마구 써 제키지요. 어차피 자기것 아닌데요. 남은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니니까 자기가 주저하거나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이걸 종합해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살지 나를 위해서 살지 아니한다.” 이말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산다.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지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를 꼭 갖다 붙여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나는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죽은 존재라는 것을 계속 유지 시켜 가면서 주께서 나로 하여금 사명자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나의 믿음, 소망, 사랑도 다 죽었다는 거예요.
이와 같은 사도바울에 있어서의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유대인들한테도 사용하지 않았는가? 유대인한테 사용을 했었지요.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 유명한 오병이어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리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남자만 5천 명을 먹여 살렸다는, 그 많은 대중을 살렸다는 이야기.
기적을 베풀어서 많은 사람 살릴 때에 15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주께서 떠나가시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적용시켜서 사람이 어떤 식으로 달라지는가, 바뀌는가, 유대인들에게 그당시 어떻게 했는가?
똑같은 원리가 여기에 가동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피해버려요. ‘피신하시는 주님’ 이렇게 보시면 정확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믿는 구석이 있어서 따라오거든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이것은 문제없다고 자신만만합니다.
그래서 자신만만한 그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 그 믿음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속성으로서 들어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이거든요. 죽은 자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도 같이 죽었기 때문에 이것은 활용도가 없는데 본인이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믿음을 가동시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주의 일을 위해서 이 인간이 살았다고 나오는 그 믿음을 피해 도망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도망칠 때 아예 배 타고 도망쳐버립니다. 배 타고 가니까 대중들은 끈질기게 따라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믿는 자에게 의도적으로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게 하시는 상황으로 몰아세우시는 주님’ 이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알았던 거예요. 사도가 여기에 알았다는 말은, 내가 믿음 있는 한 절대로 주님께는 다가설 수 없고 오히려 주님이 내빼신다는, 도망치고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주님이 찾아올 때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믿는 자와 함께 하지 않는 주님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을 하는 이 사도바울의 고백의 지점, 고백의 지점이 바로 성도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지점으로 복음은 가동되고 있었던 겁니다. 안다는 것은 ‘새로 시작하라’에요. 맨 처음부터 다시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상당히 어렵고 골치 아픈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주께서 왜 인간의 믿음을 안 받고 도망치시고 결국은 주님 나타날 때는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준 주님자신의 믿음으로만 구원되는지를 왜 그런 식으로만 알게 하는지를 우리가 구약의 족보를 통해서 알아야 됩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1장 14절에 보면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은혜로 주어지는 그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은 기존의 인간들에 의하여 폭행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주님께서 그 믿음과 사랑을 이 땅에 비췄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자기 자신을 모를 때에 자기에게 있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에 진짜 믿음 사랑 소망을 핍박을 하고 폭행을 하고 박해를 한 겁니다. 인간은 기어이 자기 자신을 포기 못 하겠다는 거예요. 자신의 무가치를 인정 못 하겠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전부가 뭐냐?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내가 가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은 마지막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구원받고 난 뒤에, 예수님 찾아오고 난 뒤에 사도는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의 마지막 지점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도착했을 때 표현이 뭐냐? “나는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 또는 폭행자, 이것이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이 도착할 수밖에 없는 현실, 최후의 막다른 그 지점에 먼저 갔습니다.
인간들이 믿음 소망 사랑을 포기 못 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거론해도 다 거짓말이고요, 비참한 자아가 되기 싫고요, 그렇게 되기 싫다는 것이 본심이고요, 이 비참한 자아가 되지 않고 비참한데서 괜찮은 자아가 되고 싶어서 현실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행복과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뭔가 예수님에게 현실적으로 요청할만한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현실이,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그 현실이 이게 현실이 아니고 환상이었던 거예요. 세상 살면서 나의 행복과 나의 만족과 나의 성공을 기대한다는 이 자체가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의 열매, 환상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거짓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찾아오신 원칙은 딱 하나만 기억하세요. “죽지 아니하면 복음이 안 나온다.” 죽어서 구원한다는 게 목적이 아니고 복음이 나와야지요. 죽지 아니하면 복음이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것 이야기하기 전에 쉬운 것부터 먼저 말씀드릴게요. 요새 유행하는 드라마에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같은 단어 우영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역삼역 토마토등 여러 가지 경우를 대는데 그 드라마 끝 장면에 정말 복음적으로 너무나 쇼킹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이상한 변호사, 자폐증이 있는 변호사의 법률회사 간부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목에서 피가 났을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아픈 거야? 나 아픈 거야?” 제가 보기에는 복음을 어떻게 저보다 더 확실하게,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성경 보면서 자기 속에서 죄가 나오면 성도라고 여깁니다. ‘죄가 나오면 십자가로 씻어줄 거니까 내가 죄 나오는 것을 봐서 나올 때마다 십자가 피 가지고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알아야지.’ 그러니까 들은 지식은 있어서 요령 부리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성도인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은 그것이 제격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 우영우 변호사 직장상사가 목에서 뭐가 나왔느냐 하면, 피가 나와요. 피가 나오면서 “나 아픈 거야?”라고 이야기했어요. 성도는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피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와요. 그 안에 비로소 자기 죄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자꾸 내가 그 나오는 죄를 측정하려면 이것은 선악 체제에 나오는 악마가 가르쳐준 지식에 준해서 나오는 윤리적 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제대로 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아는 지식으로 지금 꼼수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도는 죄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피가 나와 버린 거에요. 예수님의 피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고 이 몸 안에 예수님의 피가 있는데 그 피가 땀샘을 통해서 온몸으로 피가 나오는 거예요.
그 말은,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자기 죽은 시체를 통해서 은혜가 나온다는 오늘 본문의 고백, 이미 폭행자 핍박자인 이미 죽었던 내 몸속에서 주의 은혜와 주의 믿음과 사랑이 터져 나오는 것을 목격하는 것처럼 성도도 자기 몸을 계속 유지해가면서 거기서 자기 죄가 나오는 것을 보지 말고 예수님의 피가 나오는 것을 봐야 돼요.
피가 그게 생명이거든요.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복음이 나오도록, 피복음이 나오도록 우리를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 천당 가라고 나온 것이 아니고, ‘너 이렇게 요령 부리면 천당 간다.’ 그게 아니고 ‘십자가 피 믿으라고 네 죄를 끄집어내고’ 이게 아니라 그냥 피가 나오면 그 피 안에서 이미 애초부터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같이 거기에 들어 있는 겁니다.
주께서 유대인에게 피신한 것은 믿음 없으라는 확인이지요. 계속 확인작업 하는 거예요. 그 장면으로 드라마는 그것으로 끝이고 그다음 회차 또 할거예요. 그 마지막 장면이 목에서 피가 나오니까 “어? 내가 아픈 건가?” 피가 나올 때 내가 죄인인가 이러면 되는 거예요. 죄가 나와서 죄인이 아니라 피가 나올 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 그렇게 하는가? 하나님 믿는 것, 주님 믿는 것이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이스라엘은 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분들인데 그게 망해요? 그들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율법 지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진짜 투쟁적인 노력을 다 했었는데 망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에 보면 예수님의 양 이야기가 나오는데 양 백 마리 가운데 의미 있는 양은 단 한 마리밖에 없었어요. 잃었다가 되찾은 양. 다른 양들은 목자가 일부러 찾아냈다는 내용이 없어요. 그런데 어깨에 메고 돌아오게 되는 그 양은 양 홀로 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양 스스로 찾지 못하는 그 천국 길을 주님이 찾아갔다는 그 내용이 함유되어있는 양은 그 잃어버린 양 유일한 양 그 한 마리밖에 없어요. 그러면 수리적으로 1 퍼센트입니다. 희박하지요. 정말 희박한 거예요.
누가복음 18장 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흔해 빠져서 성경공부 해가지고 수련회 참석해서 믿음 생길 것 같으면요, 이런 말씀 안 하지요. 수련회 참석을 해야 될 이유가, 내가 믿음 없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참석을 해야 돼요.
만약에 수련회 참석도 안 하지만 “나는 믿음 없어요.” 하는 것은 겸손으로 둔갑한 거예요. 가짜 믿음이. 여건이 안되어서 참석 안 하는 경우도 알지요. 참석하려는데 차가 폭발했다든지, 타이어가 펑크 났다든지 이런 경우, 오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못 오게 되는 그런 경우 빼놓고 참석을 함으로써 ‘야, 내가 믿음 있다는 이것이 가짜구나.’ 참석해서 들입다 싸우고 험담하고, 그걸 통해서 아, 참석 안 했으면 이런 내 성질이 이 정도까지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지금 참석하고 싶어도 여건이 안되는 사람들은 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 말은 그만큼 믿음이 그만큼 희박하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너 안 돼. 내가 안 찾아갔으면 너 끝났어.” 하는 내용을 한때가 아니라 천국에 이를 때까지 계속 유지 시켜 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의 일은 개인의 관심을 박살 내면서 주께서 만드는 진짜 현실은 말씀이 작용하는, 말씀이라는, 인간으로서는 죽은 인간들이 발견할 수도 없는 그런 세계의 존재의 활동성을 계속해서 부추기고 그걸 살려내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그게 살려지게 되면 인생을 살면서 가졌던 여러 가지 사소한 일들이 그야말로 미미하고 사소한 일에 불과하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그냥 가짜현실인 것이 성령의 들이닥침으로 말끔하게 해소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려운 것, 왜 어렵다고 제가 말씀드리냐 하면, 지금 이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에요.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를 특별히 열두제자 외에 사도바울로 정해야 될 이유는 유대인의 사도는요, 그들은 족보에 따라서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족보, 그 족보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윗의 자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이라야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 그렇다면 족보에 따라서 구원받는다면 그 자체가 구원받는 자의 원리원칙으로 확정된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족보에 따라서 원리원칙이 작정 되었지요.
얼마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해서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에 국한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혈통에 국한된다는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사건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남으로써 역사적으로서도 확인이 가능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활동성이다.
그것이 유대 사회, 다윗의 자손인 유대 사회에서 그렇게 나타난 겁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요. 유다 지파의 집합체가 유다 나라입니다. 유대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족보가 실효성이 있다는 거예요. 구원의 효과가, 효력이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족보에 따라 구원받는 거예요. 그 구원받는 족보, 마태복음 1장 12절에 보면,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대목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하도록 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12절에,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여고냐는 요시아의 아들이고요, 아들인데 요시아의 아들이 세 명이 있었어요. 여호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세 명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먼저 요시아 왕 다음의 왕이 되고, 그다음에 첫째 아들이 왕이 되고, 그다음에 나중에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마지막에 삼촌인 시드기야가 왕이 되어서 이렇게 네 명의 왕으로 유다가 마무리 지어지는데 여호야긴왕을 여고냐라고 합니다.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을 낳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 중요한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해요.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다는 거예요. 자, 여기 12절 세 번째 읽어봅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여기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은 70년 포로 이후에 성전 다시 건축하라고 바사 나라의 이방 왕들이 모든 재정적인 지원을 해서 잃어버렸던 그 약속의 땅에 다시 몇 되지도 않지만 돌아와서 유대 나라를 다시 잇고자 했던 그 총독이 스룹바벨이에요.
참 이상하지요. 여기서 제가 뭐가 이상하다고 하느냐 하면, 족보가 점핑, 점프했다는 거예요. 족보가 점프했다. 여고냐를 통해서,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를 통해서 이미 유다 나라는 망했어요. 끝났습니다. 여고냐 뒤에 시드기야 있어도 그것은 다 똑같은 입장이고 이미 뿌리가 끊어졌어요.
그러니 죽음이지요. 제가 오늘 설교 내내 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그 족보를 인정을 안 해줬다는 말이에요. 인정하지 않았던 거예요. 인간 자체를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족보대로 구원받는다, 라고 알았던 그 앎이 이게 엉터리 앎이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은 약속대로 역사를 이룬다. 오케이. 오케이. 오케이라고 여겼던 그것이 무지한 거예요. 그것은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다. 끊어짐 속에서 새롭게 알아야 될 것이 나오는 거예요, 끊어짐 속에서.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방인에게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울은 이방인들이 왜 구원받아야 되는가, 이 질문자체가 이상하지요? 이방인들이 왜 구원받아야 되는가?
이방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방인들은 사람 아니냐?’ 이렇게 나오는데 이방인은 사람 아니에요. 택한 백성은 이스라엘밖에 없습니다. 있어도 없는 존재에요. 진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지 이방 나라가 아니에요. 개같은 이방 나라 아닙니다. 천국하고 상관없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자부했어요. 자기들은 천국하고 관계있다고.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구야? 천국하고 관계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도 아니에요. 이방도 아니에요. 그 끊어짐, 끊어짐에서 나온 분이 진짜 하나님과 관계있는 분입니다. 그 대변자가 끊어졌다는, 그 절단면을 보여주는 기능을 누가 하느냐? 스룹바벨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룹바벨과 이스라엘은 끊어진 대목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할 때 그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는데 이미 바벨론으로 끊어진 상태에서는 스룹바벨이 다시 오게 되면 끊어진 상태가 붕 떠서 비어진 간격이 생겨버린 거예요. 그 잇는 부분에 어떤 요소가 들어갔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끊어졌는데 ‘어? 다시 약속의 땅에 70년 만에 돌아오네. 그러면 그 중간에 끊어진 거기에 누가 있었지?’ 누가 있어 줘야 족보가 이어지거든요.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했지요? 이방이고 이스라엘이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어진 부분이 무엇으로 이어졌는가? 바로 누가복음 3장 27절에 보면, 누가복음 3장에 예수님의 족보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과 달리 누가복음 입장에서 새로운 족보가 또 나옵니다.
그 새로운 족보에 의하면, 27절에 보면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아까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 1장 16절에 나오는 족보와 똑같은 인물이 27절에 두 사람 등장합니다. 스룹바벨 나오고 스알디엘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12절 다섯 번째 읽어봅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여고냐는 여호야긴이라는 뜻이지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태복음 1장에서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족보가 이렇게 내려오는 족보를 쓴 반면에 누가복음 3장 27절에서는 쳐 올라갑니다.
어디까지 쳐 올라가는가? 누가복음 3장 38절에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이 지상부터 쳐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려오는 차순에서는 아까 끊어짐이 끊어짐으로 그대로 남겨둬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그런데 올라가는 차순에서는 27절에 보면 그게 이어져 있어요.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그러나 마태복음 1장대로 하면 네리가 아니고 여고냐로 되어 있어야 돼요. 마태복음 1장에서는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그래서 여고냐는 아버지고 스알디엘은 아들이고,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누가복음 3장에서는 스알디엘 아버지가 여고냐가 아니고, 여고냐가 빠져있고 그 이상은 네리, 네리라는 사람이 여기 아버지로 등장하는 겁니다. 어렵지요? 왜 그럴까요? 똑같은 경우를 보면 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해서 마리아에게는 정혼한 남편이 있었는데 그가 요셉이고 그 요셉의 아버지가 마태복음 1장 족보에 야곱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3장 예수님의 족보에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요? 누가 요셉의 아들입니까?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여기 누가복음 3장 23절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으로 되어 있고 요셉의 아버지가 누구냐? ‘헬리’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둘? 요셉의 엄마가 무슨 사고를 일으켰나? 그게 아니고 마리아의 아버지 이름이 헬리고 요셉은 그 사위로 들어가는 겁니다. 마리아족보를 따라 거꾸로 치고 올라가는 거예요. 여자의 자손으로 되어버리니까, 여자 중심으로 되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족보를 했는가?
그것은 족보 자체를 마태복음 1장에서 끊어놓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죽어 있는 존재면서 살아 있다고 우기고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안다고 우기면서 살아 있으니까 ‘우리는 족보에 대해서 알아. 역사에 대해서 알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족보화 되어서 우리가 유대인으로서 구원받았어.’ 이러한 생각 자체, 하나님이 족보를 어떻게 비틀어버리는지, 또 아까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아는 족보를 거기서 피신해 가버려요. 피해 가버립니다. 빠져나가요.
빠져나가면 오병이어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따라오다가 예수님 놓친 것처럼 인간들은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 자기족보와 역사를 아는 지식으로 따라가려다가 족보에서 길을 잃어버린 겁니다. ‘어? 내가 구원받아야 될 족보가 왜 끊어졌지? 어디 갔지?’
바로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서는 그 족보가 기존의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다른 인물들, 특히 마태복음 1장 유대인들의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다른 인물들을 찾아가고 추적해감으로써 족보 자체가 역사의 밀림 속으로 길을 잃어버리고 피신해 가버린 거예요. 인간이 못 따라오도록, 따라갈 수 없도록, 찾을 수 없도록, 인간이 신학을 탐구하고 성경을 탐구해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천국 못 가도록 그렇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에 1장 13절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이 말을 사도바울에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주님을 때린 적도 없고 주님께 핍박한 적 없습니다.”라고 우기는 것은 “선악과 따먹을 때 저는 선악과 구경도 못 했는데, 선악과 따먹을 기회조차 없었는데 왜 선악과 따먹었다, 는 그 벌을 왜 우리한테 뒤집어씌웁니까?”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설교 길게 했습니다만 꼭 알아야 될 것은, 새로움이 그동안 무겁게 느꼈던 나 자신을 하찮게 여기게 만든다는 겁니다, 새로움이.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대단하고, 그렇게 아까운 나와 내 평생 이 자체가 0.1그램도 안 되는 가볍기 짝이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 설탕 한 스푼도 안되는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세계가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주 하찮고 가벼운 존재인 것을 아는 그러한 희열과 감격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사도는 자기가 시체보다 못한 것을 알고 감동 먹고 있어요.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는 바람같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의 바람같이 뭐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매 순간 그만 접어도 상관없는, 마치 칠판 위에 쓰인 분필 글씨 같아요. 지워 버리면 그만인 거예요. 새로운 세계를 사도는 소개하고 있고 그 사도가 소개하는 세계는 끊임없이 새롭게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겁니다. 그 대단한 활동 앞에서 사람들은 자기한테 관심 둘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왜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자기를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이것을 한때 예수 믿는 사람 잡으러 다녔다, 그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자기가 평생 살았던 그 모든 것을 훼방자요, 폭행자요, 핍박자로 이렇게 묶어서 규정할 수 있는 그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진리를 알고 뭐가 사실인가를 발견하는 그 방법이 기껏해 봐야 그냥 어떤 특징들을 뽑아내서 그 수다한 특징들을 한 묶음으로 보편화시키는 그걸 가지고 진리라고 그렇게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그만큼 어설퍼요.
예를 들면 전남 영광을 사백(四白)의 고장이라, 네 가지의 흰 것을 갖고 있는 고장이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쌀 하얗거든요. 소금 하얗지요. 목화 하얗지요. 또 눈이 많이 온대요. 그래서 네 가지 흰 것이 있다고 4백의 고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많이 억지입니다. 말도 안 되는 그런 이야기에요.
또 사람들은 산에 가다가 돌이나 바위에 이름 적기를 그렇게 좋아해요. 거북이 형상을 갖고 있으면 “저건 거북이 돌이다.” 여러분, 거북이 돌하고 거북이하고 같습니까? 인간세계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전체가 거북이 돌이고, 주님의 성령의 세계는 그냥 거북이에요. 하나는 죽어 있고 하나는 살아 있는 겁니다.
그 죽어 있는 게 아무리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유사성을 뽑아내고, 비유와 언어를 동원해도 그게 산 게 되지를 못해요. 어느 정도로 억지냐 하면, 산에 산불이 나서 산이 민둥산이 되었는데 그 산불 난 피해자 머리가 많이 빠졌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없지요. 이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 인간들이 이처럼 모든 것을 어쨌든 간에 자기가 여기 존재한다는 그걸로 억지를 해서 막 우기고 있습니다.
끝으로 그런 식으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사도행전 14장 8-15절까지 보겠습니다. 8절에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그에게 복음을 전하니까 그앉은뱅이가 일어섰어요. 일어서서 걷고 난 뒤에 그다음의 상황을 봐야돼요.
11, 12절에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이것은 신 이름이에요, 신 이름.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것을 보고 “저분들은 신인데 사람의 형상으로 왔다.” 이 정도로 인간의 마음가짐은 자기가 관찰한 것, 어쨌든 자기가 본 신선한 것을 붙잡아서 신의 세계에 돌입하려는 마음준비가, 태세가, 만반의 준비가 늘 일상적으로 갖춰져 있어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가 얼씨구나, 하고 따라줬습니까? 보조 맞춰줬습니까? 아닙니다. 13절 계속 읽어보면 “성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살아 있는 천사가 왔으니 그 앞에 제사하고자 하니.
14절에,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그쪽 사람들도 참 오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너무 오버가 심하니까 사도 쪽에서도 오버를 할 수밖에 없어요. 14, 15절 계속 보면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의 세계 말씀의 세계, 예수님의 활동세계를 증거 하는 사람인데, 아니 그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보고 이렇게 대접하고 우리를 신으로 섬기면 됩니까?”라고 탄식할 정도로 이 세상은 위험합니다. 이 세상은 수상합니다.
자신들이 폭행자요, 핍박자요, 가해자요, 그리고 훼방자인 것을 모릅니다. 사도가 유대인들이 주께서 족보를 피신해서 만든 족보로 기어이 말씀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이방인에게는 사도바울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자기가 죽어있고, 그 죽어있다는 증거가 우리가 얼마나 무식하고, 내가 뭘 모르고 있는가를 지금 모르고 있는 그들에게 사도는 복음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피가 나오는, 스며 나오는, 배겨나오는 그러한 사도바울을 내세워 구원 받아야 되는 사람은 동일한 지점,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동일한 지점을 구원의 새로 시작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에게 정말 우연한 일이 일어났지만 그 일이 모든 성도에게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주의 일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