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된다는 말은 지금껏 구약 내내 제공된 이스라엘의 은혜가 무효가 되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구원에 대한 정답과 내막이 이방인에 의해서 공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공개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신 겁니다. 즉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모든 이방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로 되풀이 되어 그들이 천국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천하의 의인이 되고 싶어 율법에 매진한 그 인물이 졸지에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것도 기쁘고 감격스럽게 말입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자아 문제는 결코 자아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이 떴기 때문입니다. 항상 구원받는 자아로 유지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이 몰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사실을 훼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아 구원 문제에 몰두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인간들에게 살해 당한 이유가 가리워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 어떤 경우라도 헛되지 않는 쪽으로 일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즉 인간 개인의 죽음은 예수님 죽음 앞에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마땅히, 본디 인간은 천국 가서는 아니됩니다. 이미 창세기 3:24에서는 인간은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된 처지로 봅니다. 게다가 도로 들어올까봐 철저히 막아야 될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결코 못간다’는 원칙이 작동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괄된 뜻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일괄적으로 인간은 죄인 맞습니다. 죄인이라는 당연히 지옥가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더 다른 생각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면서 자신의 구원을 고대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자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시도한 적이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 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돈에 팔아넘겼다는 일에 스스로 뉘우친 사람입니다.(마 27: 3)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신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마 27:4) 하지만 끝까지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자아를 포기 못합니다. 결국 자신의 자아에서 일어난 가책 문제를 자살로 지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제자인 도마를 보세요.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그는 더는 자기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앞에 등장된 이상, 더 이상 지킬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은커녕 감격하고 있습니다. 후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로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근원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관찰에 의해서 획득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처음부터 죄인이었기에 더는 자아에게 기대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어떻게든지 자신이 그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천국갈 수 있는 자아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자아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명으로 인해 사도의 자아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6-27)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지 못한 자는 여전히 자아를 지키는 사명에 충실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가치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매일 신경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악마의 밥입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체가 천국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이 문은 인간의 있음과 자아 관리에 의해서 살해 당해 빈 자리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성도란 자아를 사수하려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이 자아가 죄인 중에 죄수가 되므로서 더는 자아를 지킬 가치 없음을 아는 그들이 주님께서 천국의 문임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즉 성도는 아무 것도 없는 채로 구원받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관여된 그 주님의 일을 증거하는 사명을 성도는 매일 살려나가도록 주님께서 조치하십니다. 바로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가까운 모든 이로부터 배신당하게 하십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배신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41:9에 보면,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인간들은 자아를 좋게 꾸미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에 친구를 찾지만 그 친구들은 각자의 자아성으로 배신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 자신들에게 배신을 당한 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이제부터 성도는 더는 자기를 지키기 않고 기쁨으로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의롭게 하지 못함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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