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아빠와 함께 2022. 8. 16. 00:00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된다는 말은 지금껏 구약 내내 제공된 이스라엘의 은혜가 무효가 되었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구원에 대한 정답과 내막이 이방인에 의해서 공개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공개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신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모든 이방인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로 되풀이 되어 그들이 천국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천하의 의인이 되고 싶어 율법에 매진한 그 인물이 졸지에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것도 기쁘고 감격스럽게 말입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의 자아 문제는 결코 자아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이 떴기 때문입니다. 항상 구원받는 자아로 유지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이 몰랐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가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사실을 훼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아 구원 문제에 몰두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인간들에게 살해 당한 이유가 가리워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 어떤 경우라도 헛되지 않는 쪽으로 일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즉 인간 개인의 죽음은 예수님 죽음 앞에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겁니다.
마땅히, 본디 인간은 천국 가서는 아니됩니다. 이미 창세기 3:24에서는 인간은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된 처지로 봅니다. 게다가 도로 들어올까봐 철저히 막아야 될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결코 못간다’는 원칙이 작동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괄된 뜻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일괄적으로 인간은 죄인 맞습니다. 죄인이라는 당연히 지옥가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더 다른 생각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꼼지락거리면서 자신의 구원을 고대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자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시도한 적이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그 자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돈에 팔아넘겼다는 일에 스스로 뉘우친 사람입니다.(마 27: 3)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신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마 27:4) 하지만 끝까지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자아를 포기 못합니다. 결국 자신의 자아에서 일어난 가책 문제를 자살로 지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제자인 도마를 보세요.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그는 더는 자기 생각을 하지를 않습니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앞에 등장된 이상, 더 이상 지킬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은커녕 감격하고 있습니다. 후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로 후회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근원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관찰에 의해서 획득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처음부터 죄인이었기에 더는 자아에게 기대하거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어떻게든지 자신이 그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천국갈 수 있는 자아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자아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사명입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사명으로 인해 사도의 자아는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6-27)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지 못한 자는 여전히 자아를 지키는 사명에 충실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가치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매일 신경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악마의 밥입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체가 천국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이 문은 인간의 있음과 자아 관리에 의해서 살해 당해 빈 자리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성도란 자아를 사수하려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이 자아가 죄인 중에 죄수가 되므로서 더는 자아를 지킬 가치 없음을 아는 그들이 주님께서 천국의 문임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즉 성도는 아무 것도 없는 채로 구원받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관여된 그 주님의 일을 증거하는 사명을 성도는 매일 살려나가도록 주님께서 조치하십니다. 바로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가까운 모든 이로부터 배신당하게 하십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배신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41:9에 보면,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인간들은 자아를 좋게 꾸미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에 친구를 찾지만 그 친구들은 각자의 자아성으로 배신할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 자신들에게 배신을 당한 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이제부터 성도는 더는 자기를 지키기 않고 기쁨으로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의롭게 하지 못함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