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잔소리와 충고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잔소리는 나를 화나게 하고 충고는 나를 더 화나게 한다고. 좀 더 세월의 때가 낀 사람은 차이를 두지 않고 뭉뚱그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디서 가스라이팅 짓거리를...’ 그리고 살 만큼 사신 분들은 이런 것들을 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고 지긋이 미소지으며 속으로 말할 것이다. ‘돈이 얼마나 없었으면 저런 소리를 듣고 살지? 쯧쯧쯧...’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고 생생히 존재를 의식하는 한, 잔소리나 충고를 달가워하는 위인은 나이 불문하고 아무도 없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나 외에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고지를 향해 발전을 도모하고 그도 안되면 땅굴이라도 판다. 스스로 유일자가 되기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하나’라는 허상에 가담해서 주저 없이 타인의 마음을 이용한다. 잔소리와 충고는 자신과 타인이 동일한 사고방식과 유사한 행동성으로 연대를 이룰 때는 나올 필요조차 없기에 편리를 위해서라면 절대 ‘나’를 우리라는 조작개념에 임시로 합치시킨다.
그러나 혼신의 힘으로 누구도 입 벙긋 못하는 자리까지 오르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떨어질 수 없기에 계속 잔소리와 충고를 해대는 진짜 장본인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오고, 그 잔소리꾼 덕분에 5억이 남아있어도 실패한 자신의 거지꼴에 낙담하며 자살하고, 평생을 아픔과 가난으로 고생하며 참다참다 결국 신세 한탄하며 자살하고, 박사학위 여러 개 가지고도 자신의 무식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신의 경지에 이르는 솜씨를 가지고도 더 뛰어난 새로움이 나오지 않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나에게만 감사하고 대견해 하다가 결국 나에게 할 감사 거리가 없어지니 자살한다. 성경 속에 말씀이 말하는 그 ‘감사’를 할 수가 없기에 인간은 모두 자살하는 인생경로로 떠밀려 간다.
예수님이 지고 가시는 십자가가 세상 바닥에 끌리며 죽음의 길을 그리고 있을 때 그분이 만들고 계신 길의 가치를 알 턱이 없기에 주님을 바라보며 그저 안타깝고 마음 아파서 우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탄식하시며 말씀하셨다. ‘할 수만 있거든 나를 위해 우는 위선과 가식에서 빠져 나와서 너와 너의 확장인 것들만을 위해 우는 너를 향해 통곡해라’ 우리의 업무는 주를 위해 울고 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한 일만을 하며 십자가 현장에서 검거되는 것이고 주님의 손가락에 가슴팍 찔리며 책망해 주시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듣고 ‘아멘’으로 순종할 수 있는 귀가 복되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기에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간구하는 마음도 결국 선악체제 안이라면 나의 구원을 배제할 수 없기에 소용이 없고, ‘나’라는 자아 밖에 계신 분이 친히 간구하시는 은총이 들어와 대신 귀가 되어주셔야만 비로소 들린다. 에서와 야곱은 들리지 않았고 보지 못했기에 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복을 받고자 했고 둘 다의 예상은 통쾌하게 빗나갔다.
야곱은 하나님의 분노가 응집되는 곳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공간에서 그분의 새창조를 입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복임을 하나님을 대면한 죽음 속에서 다른 이름이 쑥 들어와 대신 보고 계시기에 비로소 들렸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 담긴 심령만이 우리가 찌른 하나님을 위해 통곡하도록 만드시고 더이상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장애자로 주의 이름만이 온전히 사시는 터가 되는 것이 축복임을 알려주신다.
세상에 쏟아낼 하나님의 분노가 대신 임할 십자가 자리가 마련되고 예수님을 통해 죽음이 성사되었을 때, 하나님 안에 순전한 사랑도 그곳에서 죽으신 예수님께만 임하셔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시어 주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 사랑의 응축이신 주께서 하나님의 분노를 가지고 심판주로 오실 그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조가 예수님의 증인들을 통해 반복된다.
벌써 망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신하신 주님의 공로만 비쳐내는 등(燈)의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몸으로 펼치는 왕 노릇 할 때, 세상을 이미 망했다고 밟아대는 말씀을 발포하기에 결국 세상에 밟히는 제물의 모습으로 주님 희생의 공로를 풍기는 향연이 되어 실체가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역할이다.
복음이 흘러나오는 증인에게서 두 가지가 함께 비쳐 나온다. 입으로는 거룩한 복음을 외치고 있는데 몸으로는 사망의 증거를 만들고 있기에 이런 모순됨을 세상의 해석이 감당치 못한다. 이성을 좀 발휘하고 초등수준의 생각만 하더라도 언행 일치되지 않는 모습이 얼마나 상대를 불쾌하게 하고 그 말에 신뢰성을 떨어뜨리는지 알 수 있다. 분명 입에서 나오는 것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이 맞는데 당사자는 마치 자신을 포기한 것처럼 세상 장단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그것도 억지나 괴로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춤을 추고 있을 때, 그 증인의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말씀의 능력이 듣고 있던 상대방 안에 잠복 된 악마성을 자극하며 괴롭게 만든다.
예수님의 피만 바라보며 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증인의 모습과 내가 만든 말씀의 자체 해석이 맞지 아니하면서 나의 내부에서 율법의 선함과 천박한 죄가 공존할 리 없다는 숨겨진 고집이 튀어나오고 이미 속은 주님과 악마가 접전하는 전쟁터로 변해있다. 나는 텅빈 공간에 불과하다고 인식시키는 성령의 작용을 무시하기에, 내가 나답지 않다는 뒤틀림이 일어나며 나로 환원되려는 욕망의 발로로 속히 집구석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내가 존재하고 있고, 돌아갈 곳이 있고, 항상 이기는 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 예수님의 피, 십자가를 운운했던 자기기만을 또다시 들킨다. 나는 용서받지 않고도 하나님과 동등 될 수 있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든 감추고 싶다.
그렇기에 이 더러운 속내를 가리려는 모든 작용을 무장해제시키는 주님의 발가벗기는 폭력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는 자리에 와있다면 주저 없이 성령의 책망 앞에 죽기를 구하게 된다. “네가 성령을 속였다. 어찌 살기를 바라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억울할 일은 그들은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헌금했을 뿐이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미처 죽어 마땅함을 알지도 못한 채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만난 자들은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참회가 아니라 지시를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만드신 용서의 가치를 알지 못할 정도로 죄에 대해 무지하고 죄인이 되기를 싫어하면서 끝까지 피의 공로를 욕되게 하는 ‘용서받지 못할 나’와, 그 나를 더이상 단속하지 못하고 죄가 흘러나오게 하시며 죄인을 신랑이 몸으로 덮어 품에 감춰주시기에 오롯이 드러나는 ‘용서해주는 나(주님)’가 평행선을 달리며 서로 합치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
롯과 그의 처가 함께 소돔을 빠져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최종 목적지에서 그 둘은 서로 만날 수 없었다. 본래 나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새로운 내가 함께 가는데 계속 충돌하며 발생하는 희생이 누구의 의로움인지 가리키는 것이 증인의 임무이다.
택하신 모든 백성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이제 기름부음이 친히 가르치신다는 말씀을 믿는 자기인식을 붙들고 이제는 죄만 가득한 세상과 사람들의 대면을 슬며시 옆으로 밀어놓으려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이고 마귀적인지를 들추시려고 주님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흠모할 것이 하나 없는 짜증만 유발하는 증인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주는 자유는 복음과 세상을 내가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미 복음에 포획되어있는 시스템에 놓여있기에 자신에게서 손을 떼고 주님의 뜻이 담긴 기계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속에 묻혔기에 만조처럼 차오르는 세상 물결에 덮쳐져도 그것이 도리어 구원 불가의 이유를 알고 감사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
나의 매력이 너무도 세서 나에게서 눈을 뗄 수 없기에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너무 지혜가 많은 나, 아무것도 모르는 겸손한 나, 말을 잘하는 나, 성경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나, 이런 매력에 초집중이 되어 주께서 복음을 전하라는 지시가 혹 있더라도 사람의 지혜로 십자가를 가릴까 걱정되어 강력히 저항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복음 흉내 내봤자 십자가를 모독하는 죄만 가중하는 자신을 여전히 의식한다.
그러면 주님을 욕보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정당성을 지켜드리는 것이 주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일까. 그럴 자유의지가 나에게 있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복음을 듣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안뜰로 들어갈 때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정의감에 불타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려 살 소망이 끊긴 채로 왕에게 나아갔다. 살고자 할 모든 의미와 의지가 강제적으로 사라질 때 진짜 살아서 일하시는 유일한 한 분이 느껴진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살아있고 계속 살아야 할 의미가 있었기에 그곳에 예수님이 없었던 분인 것을 알지 못했다.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이미 죽은 존재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제야 예수님만 세상에 있었던 분이고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 자신도 연루된 어둠의 권세가 주는 핍박을 혼자서 온몸으로 받고 계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와 같이 주님 외에 자아가 없는 증인을 향해 이미 죽은 자를 억지로 현실에 불러내려는 폭력이 자행된다. ‘복음은 알겠는데 당신은 행동이 왜 그러느냐? 말씀은 맞는 것 같은데 왜 당신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가’라고. 복음만을 위해 세상에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이 특급칭찬인 것을 안다면 그들의 억지에 도리어 감사하며 주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 세상이 예수님 멱살을 잡고 흔들 때 주님은 저들의 오해와 곡해에서 자신을 건지시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 사건의 재료가 되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주님처럼 잠잠한 양이 되지 못하고 내가 있다고 치고 답답함을 토로하며 세상 권세에 눌려서 없는 존재를 조작하면서 마귀의 하수인으로 악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예수님에게 고통을 가하는 원수가 바로 나인 것을 주님의 증인이 고통받는 현장에서 발각당한다.
염낭거미가 알을 낳기 위해 터를 만들고 알이 부화하면서 새끼들이 나오면 어미는 잠잠히 자신의 몸을 새끼들에게 내어준다. 수백 마리 새끼들이 어미 몸에 달려들어 체액을 빨아먹을 때 어미는 몸이 다 파먹힐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의 희생적 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4:15) 말씀에서 ‘내가’와 ‘너희’에서 인간 대 인간의 주도권과 소유를 발견할 수 없고 어느 쪽이든 잉태치 못한 자로서 자신의 것에서 나올 것은 없고 생명의 출처가 바뀐 채로 낯선 내용이 나오고 그것에 동일한 마음으로 반응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에 이끌려 먼저 보내심을 받은 아비같은 증인이 없이는 말씀의 생명이 발화할 터가 발견될 수 없다.
새로운 생명이 말씀 속에서 잉태되는 반복과정은 말씀을 담은 증인을 만나고 말씀을 전해주는 그의 목숨을 파먹으며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다가 또 다른 생명의 생산 작용에 자기를 내어주게 되고 파먹히며 이렇게 주께서 자기 것들을 쓸 만큼 쓰시고 세상을 벗어나도록 목숨을 단축해주시는 조치에 말려들어 십자가의 효과만 살리고 살린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 안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내시고 텅텅 비운 채 세상을 빠져나가신 것처럼 주의 증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복음을 복음으로 알아듣는 자들에게 말씀의 체액을 파먹히고 복음을 외모로 취하는 자들을 통해 기력이 닳고 소진되면서 주께서 세상에서 빼내실 때까지 비워지고 후패한다. 애초에 사람의 원수는 없었고 오직 예수님의 원수만 있고 그분이 용서하신 원수를 향한 사랑이 죄인을 죄인 되게 하셔서 그 안에 담길 때 너무 황공해서 할 말을 잃고 잠시, 아주 잠시 잠잠해진다.
이근호
요약하면 이렇지요. "어떤 사람이 죽어 있었는데 피로 살아나서 피만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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