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울지마라!

아빠와 함께 2022. 7. 8. 19:14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12:10)  

신약과 구약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이제는 생각을 해줘야 돼요.

마태복음2장에 보면, 아기 예수가 태어나서 아기 예수 가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4절에,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지요. 애굽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가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16절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지요. 다 죽였을 때에 아주 성경은 냉혹해요. 냉정하고. 이렇게 헤롯이 아기를 죽였을 때에 진리는 주체 없이 등장해요. 사건은 주체를 공격하고, 따라서 말씀 사건, 17절에,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성경 말씀 하나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애궂은 인간들을 동원시키고 역할들을 동원시킨 거예요. 그리고 왜 동원시키는가, 전부 다 예수님과 그 창조주 구원자와 관련되어서 일어난 사건뿐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세상에 사적인 일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예수님의 고통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찔림을 당하는 사건 하나 중심이에요. 그러니 이 모든 세상의 해답은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분노, 아들에 대한 그 분노를 최종점으로 해서 해석을 다시 해야 됩니다. 모든 해석을. 아버지의 분노, 그리고 분노의 대상인 아들, 그게 십자가지요. 해석의 시작점이고 마지막점이에요. 그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위해서 인간들은 죄를 저질러야 했고, 심지어 그 분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되고요,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 이 사실을 알고 그 다음에 성도로 하여금 또는 성령을 제공된 하나님의 여기 10절에 보면,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만 너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이 찔렸다는 그 사실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것을 그들에게만 알려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게 사실이에요. 아주 냉혹하지요.

자, 그래서 오늘 스가랴12장10절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이제부터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19장36,37절, 찾아보면서 성경 해석에서 성경 자체가 이 해석을 어떻게 바꾸느냐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뼈가 꺾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시편34:20절을 말하고요.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이건 아까 스가랴12장10절.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성경 해석이 불가하지요. 어떻게 저기 있는 걸 뽑고 여기 있는걸 뽑아가지고 그걸  연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 정당성을 어떻게 인간 쪽에서 마련할 수 있습니까. 스가랴에서 한 대목 뽑고, 시편에서 한 대목 뽑고, 뽑는 게 꼭 지 맘대로 같아요.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손님한테 물어보고 하는 거예요. 치즈 어느 거 할까요? 물어보고 여러 가지 중에서 뽑아서 빵 속에 집어넣잖아요. 그런데 성경 해석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뽑아서 섞어버려요. 섞어버리면서 어느 쪽 무엇을 드러내느냐, 십자가를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셨고 세상은 망했어! 끝났어! 모든 인간은 구원은 끝났다. 차단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애곡하는 것밖에 없다. 그를 위해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해 통곡한다는 것은 아까 마태복음 보셨지요. 아들을 잃어버렸잖아요. 누가요? 이스라엘이. 라헬이. 제가 어렵다는 말을 이제는 이해하시겠지요. 성경 해석에서 일관되게 뭔가 원칙이 있어야 되는데 원칙을 의도적으로 피해가 버립니다. 신학 자체를 성립을 안 시킵니다. 신학 자체를. 어떻게 논리를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해석하겠다.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이런 해석이 나왔는지 한 군데를 더 찾아 봐야 돼요. 요한계시록1장7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리 되어있거든요. 7절에 보면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라, 이리 되어있다 말이죠.
그렇다면 요한복음19장37절에서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에서 그들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찔렀던 자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찔림을 당한 자는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찌른 자는 누굽니까? 로마 군병이죠. 일이 아주 복잡하게 돼버린 겁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스가랴의 뜻은 이래요. 십자가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달렸고 로마군병이 창을 들고 예수님의 허리를 찌릅니다. 찌르지요. 한 사람, 두 사람, 그다음 여기에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보고 있는 사람들. 보고 있는 사람들 3. 어떤 자가 그를 하나님을 찌른 것을 이들이 보리라. 이들이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스가랴12장10절에서는 이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뭐가 주어진다고요? 은총이 주어지는 거예요. 은총이. 은총이 주어지면서 그들은 뭐한다? 통곡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울었던 사람 없어요. 통곡하는 사람 없습니다. ‘참 안됐다. 역시 정치적인 힘이 실제하는 힘이었어. 예수님이 현실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죽인 그 힘이 유일하게 현실이야. 국가적 권력이야. 우리는 벗어나면 안 돼!’ 우리가 여기서 “저 분은 처형시키면 안 된다.” 하면 누가 처형 당합니까? 그 다음 차례는 누굽니까? 본인들이 처형 당하겠지요. 그래서 베드로부터 12제자들은 눈에 안 띄기 위해서 보리라, 가 아닙니다. 보리라가 아니고 안 띄기 위해서 전부 다 도망쳐 버렸어요. 그럼 이 현장에 있는 사람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존재하지 않지요. 없지요. 그러니 구원될 사람은 없는 거예요. 왜? 말씀에 의하면 제3의 인물, 관찰하는 자, 그걸 쳐다보는 그 때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도 없는데 말씀은 이렇게 있다 말이죠. 그러면 말씀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여기 제3의 자리에 누군가 채워져야 되겠지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요. 하나님은 냉혹하기에 그 말씀을 채우는 자들이 뭐냐,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이 되는 겁니다. 천국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채우는가, 갈라디아서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거 뭐 워낙 많이 해서 여러분이 외울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거 구라 같잖아요. 십자가 못 박힐 때에 그 현장에 사울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략15년전의 사건인데. 존재하지 않았어요. 없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 현장에 누가 있었다? 사도바울이 있고, 있는 정도가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에 함께 죽었다고 되어있지요. 그러나 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에는 예수님 십자가에는 예수님만 달렸어요. 2인용 아닙니다. 1인용이에요. 그리고 십자가가 두 개 더 있었지요. 세 개의 십자가에 3인이 달린 거예요. 거기에 사도바울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사도바울은 거기에 자기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사도 자체가 사도의 고백 자체가 주께서는 말씀이 되게 해버린 거예요.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만 말씀이 아니고 십자가를 적용시키기 위해서 벌어져야 될 그 모든 것도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해석, 나의 주체 해석을 비켜가서 뭐가 주어진다? 진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이건 내가 해석해서 알아먹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냥 사건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무슨 사건? 무슨 내용? 주님의 분노하심이 나를 저격하는 거예요. 나를 저격하고 내 있는 이 현장을 종말로 만들어버려요. 나로서는 더 이상 나한테 기대할 것이 아예 삭제하도록 없도록 내가 더 이상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도록 만들어버려요. 그게 창조의 위력입니다. 새창조의 위력이에요. 새창조의 위력입니다. 영구없다! 지요. 나 여기 없다! 주님의 것으로 교체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교체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틀을 만들어 놓고 빈자리를 만들어 놓고, 빈자리는 그 뒤에 성령께서 알아서 집어넣는 거예요. 갖다가 찍어 넣는 거예요. 그걸 채우는 거예요.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본 사람은 누구냐, 나중에 제자들 다 도망쳤지요. 도망쳤는데 그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여기에 여기 빈자리에 도망쳤던 12제자 다시 여기 들어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이제 주님을 안다는 거예요. 즈그는 도망쳤으면서.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그렇게 재현을 하신 겁니다. 어떻게? 주님의 당하는 그 아픔의 분노를 아버지의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낸 그 아픔을 성령을 통해서 제자들 속에 집어넣으니까 그 도망쳤던 제자들 마음속이 그 당시 십자가 사건의 현장이 되는 겁니다. 사건의 현장, 범죄의 현장, 살인 사건의 그 현장입니다. 그럼 여기서 찌른 자가 누굽니까? 본인들이지요. 로마 군병이 아니고 본인들이 찌른 자가 되지요. 내가 찔러 놓고 내게 찔림을 당하는 주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함께 구성하게 되는 거예요. 일관성 있는 일자로 혼돈에서 뭐가 잡혔습니까? 질서가 잡힌 거예요. 새 질서에요.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에요. 말씀의 질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도 주님이 항상 같이 있다는 것을 그는 고백합니다. 로마에 가는 그 지중해 폭풍 속에서도 두려워 말라. 그 전에부터 이야기했잖아요. 그 전에도 이야기했어요. 니가 반드시 로마에 가야 하리라. 그리고 이들은 풍랑 속에서도 이들은 한 명도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생명이 몇 명인가, 256명인가, 내가 마음대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의성 표준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지끼는 대로 말한다. 표준말입니다. 욕하는 거 아닙니다. 안동 의성. 자꾸 외워도 이제는 나를 못 믿어요. 틀려봐야 기억이 나지요. 실패를 해 봐야. 통곡을 해봐야. 사도행전27장37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었더라” 어쨌든 간에 그들이 예수님께서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언했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주님이 냉정합니까. 안 잃을 것 같으면 풍랑도 안 일어나야 되게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일으킬 걸 다 일으키고 안 죽는다는 거예요. 이게 해석을 할 때 주체를 비켜서, 내 이익을 비켜서, 내 선악 체계를 비켜서,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우리를 도외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이해 안하면 또 어떨 건데? 그래야 창조가 됩니다. 그래야 개선이 아니고 발전이 아니고 진화가 아니고 새 창조가 돼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한 번 봅시다. 아까 보셨잖아요. 요한계시록1장7절에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서 찌른 자가 누구냐 하면, 모든 세상 전부가 예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찔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그 시점이 온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관련되어 있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잃어버린 사건이 마지막 때가 되면 인간들이 기억하기 싶지 않더라도 전부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겨냥해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심판을 통해서 한꺼번에 알게 돼버린 겁니다. 이건 지옥 간 그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과 아들에게 분노 준 그 분노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주님의 분노가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지요. 데려감으로서 그 분이 찔림으로 사정없이 아버지로부터 찔림으로서 우리가 평화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느냐, 우리가 한 것도 없는데 왜 평화를 누리느냐, 모든 일의 시작과 마무리는 주님께서 완성 시켰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평안으로 찾아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제공하지요. 이 말은 ★1나에게 인생을 내가 감당하려고 하지 마라. 그럼 감당 안 하면 어떻게 되는가, 감당 안 하면 손 놓고 놀까요? ★2그 때, 그 때마다 주의 지시가 있습니다. 주의 지시가 있었는지, 내가 지시라고 우기고 있는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주의 지시가 있으면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3그 모든 일에 감사가 된다. 감사가 돼요. 주의 지시가 아니면 그 모든 일이 불안, 불안해요. 잘돼야 될 텐데! 주님께서 잘 될 턱이 있나! 팍 치고 올라가요. 결국 생산하는 것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주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이익은 뭐냐, 그것은 바로 내 언약대로 됐잖아. 봐! 내가 했지. 나의 말씀은 나의 열심히 하자 없이 진행된다는 걸, 진척된다는 걸 이야기했잖아! 너희들가지고 깜짝놀라게 만들어서 바로 분명히 이루어졌잖아.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라는 말을. 그렇게 해서 정립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나를 도외시하고 일방적으로 다 해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에게서는요, 주님이 찾아온 거예요.

자, 그건 신약이고 구약 때는 예루살렘은 계속 예루살렘에서 애통이 있어야 돼요. 그 다음에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이것 또 무슨 말이냐. 요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역대하35장 20절에서 25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이 참에 역대하가 어디에 박혔는지 한 번 구경해 보시기 바랍니다.

역대하35장20절~25절,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아! 어렵지요. 요시야 왕에서 말씀이 나온 것이 아니고 상대편 입에서 나오는, 상대 판에서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가게 하라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 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요시야가 그동안 나쁜 짓 했습니까? 착한 일 했습니까? 어느 왕도 해내지 못한 거룩하고 착한 그것을 다하고 난 뒤에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해서 그 현장에서 죽었어요. 하나님의 성전을 정돈하고 우상을 파괴하고 율법책대로 유월절 지키고, 그야말로 어떤 왕도 못한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바르게 신앙적으로 거룩한 유다나라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놓고는 죽여버려요. 그리고 이 느고라는 인간은 뭐냐 말이지요. 그 당시에 이집트가 아래쪽 지중해에 있다면 갈그미스라 하는 것은 이라크 쪽에 갈그미스가 있어요. 갈그미스가 있는데 이 나라가 바벨론 나라에요. 바벨론 나라. 바벨론 나라인데 이집트가 왕년에 좀 이 동네에서 터주대감 좀 노릇했어요. 여기에 있는 팔레스타인지역이라 하는데 현재 약속의 땅이지요. 가나안 지역. 가나안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이집트를 하나의 요새 미국처럼 큰 형님으로 다 모셨던 거예요. 큰 형님으로. 형님으로 모셨다 말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항상 바벨론 신성국가거든요. 바벨론 신성국가인데, 여기 바벨론하고 싸웠는데, 원래 전에는 누구냐, 앗수르하고 싸웠어요. 앗수르하고 바벨론하고 싸웠는데 이집트가 앗수르하고 연합을 먹고 바벨론 신성국가가 앗수르 이기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이 유다왕 요시야는 앗수르한테 얼마나 당했습니까. 예루살렘 빼놓고 다 빼앗겼다고 보면 돼요. 이 요단강 동쪽 다 빼앗겼어요. 전에 왕들이 우상을 장려해가지고 유대국교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나라의 국교가 바알종교에요. 국교가. 그러니까 현재 미국에 모든 사립학교에서 창조론 못 가르치게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진화론만 가르치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앞으로 남자와 여자의 화장실도 따로 하지 말고 공동으로 해야 되고, 아마 샤워실도 공동으로 할 거예요. 앞으로는. 동성애는 뭘 동성애 단어 자체가 성립되면 안돼요. 인간의 소수자의 성소수자의 의견을 보장해야 되는 게 민주주의라고. 복음은 박살내고 인권의 무한성이 오늘날 보편적 종교가 되었어요. 인권의 무한성. 그러나 인권의 무한성이라는 사실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뭐냐, 권력의 무한성 또는 투표의 투표수의 무한성이에요. 이게 전부 다 투표수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 한 표가 무한한 권력을 쥐고 있는 거예요. 정권은 만약에 그들의 수를 그들의 의견을 안 따르면 나중에 다음 차기 대통령이 못되고 정권을 못 잡기 때문에 한 거예요. 네덜란드, 스위스, 유럽 전부 다 동성애 부부를 합법적 부부를 한 거예요. 왜냐하면 부부가 됐을 때 나오는 법적인 국가의 연금의 혜택, 그것을 동성애라도 주자, 하는 그 취지로 바꾼 거예요. 그 동성애를 주자하는 나라가 우크라이나입니다. 동성애를 아주 반대하고 도저히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하면, 러시아에요. 체코, 폴란드, 헝가리부터 해서 유럽 전역이 온 학문과 철학과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육이 전력을 다하여 복음을 질식시키는 쪽입니다. 복음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우리나라의 천주교의 출석율이 8.6%잖아요. 영국의 개신교 출석율이 10명당 한 명이에요. 교회. 개신교는 그래도 교회는 다니잖아요. 그것도 옛날 말이에요. 한 명. 그래서 교회는 지어놨는데 교회를 운영할 운영비가 없어서 그 영국의 천육백 군데나 교회는 천육백이 더 되지요. 천육백군데 이상으로 교회를 매물로 내놓았어요. 왜냐하면 형광등이고 뭐고 청소할 사람, 인력이 돈이 없어서. 교인들이 오지를 않으니까. 이건 독일도 마찬가지에요. 천주교도 마찬가지에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예배당이 이슬람사원으로 나이트클럽으로 바뀌고, 계속 바뀌고 있어요. 카페로 바뀌고. 다 바뀝니다. 그게 안 되면 팔아넘겼어요. 절간으로 팔아넘기고. 그래서 이 요시야 왕이 앗수르한테 너무 당해가지고 바벨론을 치기 위해서 올라오는 이집트, 앗수르 연합군을 이게 중간에서 므깃도가 여기거든요. 여기서 중간에 막아서 너희 연합하지 말라고 나가서 내가 나가서라도 막겠다고 작렬하게 나갔는데 그 느고라는 바로왕 이름이 느고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막지마라. 안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했는데 요시야 왕이 인간적인 한계로서는 적의 입에서 여호와의 말이 나온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었던 거예요. 요시야가 뭘 모르는가, 유다나라는 망하는 그것이 말씀의 성취인 것을 모르는 거예요. 왜 요시야는 그걸 못 받았을까요? 본인이 자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겨냥해서 나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인정 못하고, “잘하면 될 거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면 되잖아요. 복음대로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여 내 자리를 좀 손대지 말고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예루살렘을 애통으로 바꾼 겁니다. 어떤 취지에서? 하나님 나도 이 세상에서 같이 울었다. 됐냐? 이게 정답이에요. 이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지만, 이 땅의 환경 이 시공간에서는 이게 애통하는 게 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유일한 하나님의 안목이고 은혜라는 거지요. 그 다음에 12절부터 보게 되면, 온 땅이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 그 다음 나단, 다윗과 나단은 왕족이에요. 왕족. 13절에 나오는 레위와 시몬은 제사장입니다. 왕족도 울고, 제사장도 울고, 그리고 모든 족속도 울고, 전부 다 따로 따로 다 우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가 올 때에 그 접점지점에 우리 주체가 감당 못할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울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울음이 이게 구약의 한계에요. 구약은 시공간 안에서 우는 것이 마지막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울지 마라! 왜? 신랑이 함께 있는데 왜 우느냐. 그러나 신랑을 잃어버렸을 때는 그 때 울어라. 그러나 신랑이 있거든 더 이상 너의 일은 니가 개인적으로 울고 불고 할 너의 일은 신랑이 몽땅 강탈해 갔어요. 다 가져갔습니다. 인수인계 다 가져갔어요. 이제 우리는 주의 일에 합류 당한 거예요. 합류한 겁니다. 그래서 그걸 제가 부산강의에서는 그걸 뭐냐 하면 상과 상다리라고. 접는 접이식있지요. 상과 상다리. 상이 가는 곳에 상다리도 같이 가있지 상만 덜렁 있는 거 어디 있어요? 항상 우리의 일은 없고 다 주의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으심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갈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 땅이 마땅히 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함을 저희들은 이제 깨달았사오니 이제는 오히려 그 울음이 벌써 거기서 벗어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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