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곡한다고요? 통곡한다고요? 운다고요? 그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의 최종점입니다. 인간은 나라는 것, 나라는 다수에서 인간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울음의 원천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내 것으로부터 탈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는 겁니다. 그럼 웃는 건 뭐냐, 그건 착각이죠. 잠시 혼돈이 온 거예요. 뭐 일이 잘된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우는 것이 기본이에요. 지금 스가랴12장10절은 바로 인간에게는 마땅히 울어야 된다는 겁니다. 망해야 되고 슬퍼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례지요. 불세례. 불과 영원히 만나야 될. 불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존재. 그러한 대상. 불세례는 그 대상이 차지하는데 그 대상이 뭐냐, 인간이에요. 인간과 악마를 불 질러 버리는 태워버리는 소실되지 않도록 태워버려서 영원히 고통을 주는 그 저주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알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준비한 것은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 예수님이 만들었던 시간과 공간속으로 이동시키는 그 작업을 주의 영이 와서 심령, 주님의 영이 와서 해주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몸소 체험을 했어요. 사람의 몸으로 왔다는 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아픔과 어떤 모순 속에 살아있는가, 그 모순의 세계에 나오라고 외친 게 아니고 친절에 친절을 더하셔서 나오라고 외친 게 아니고 주님이 데려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 답이에요. 이미 답을 얻었기 때문에 이젠 충분히 망하는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통곡하는 척하시기 바랍니다. 심각한 척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심각한 일은 없어요. 그러나 심각한 척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날 거예요. 주님! 이 타이밍이 심각해야 되지요? 타이밍이. 주님과 인간의 만남은 연이은 통곡에서만 만납니다. 그게 은혜이기 때문에. 이 심령이 이 통곡하는 심령이 누구 심령이냐, 바로 주님의 심령, 주님의 심령이 바로 우리의 심령이 돼요. 왜냐하면 이게 주님의 심령이 성령이 우리의 통곡을 미리 같이 맛본 그 맛본 통곡의 심령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탄식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울게도 하시고 때로는 웃게도 하시고 우리를 불속에서 다독거려주시고 데리고 나옵니다. 그 방향이 뭐냐, 방향이 누군가 이 자리를 탈출하신 분이 계시는 그 십자가가 그 분이 크게 느껴지는 쪽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불에 탄 거슬린 우리를 뽑아내주지요. 우리는 뭐 온 천지가 모순덩이고 지저분하고 더럽고요. 지가 지를 살려보겠다고 애쓰는 그 모습을 우리로 하여금 수시로 하게 만들어요. 그게 우리의 한계니까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느새 이 다수 중에 다수. 다수들의 다수에서 하나 쪽으로 뽑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수에서는 빠져나가지를 못하지요. 그런데 내 중심이 통곡을 통해서 그 순간 내 중심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도려냄을 당한 거예요. 뻥 뚫렸다. 이걸 무라고 하는 거예요. 무(無). 없음이에요. 내가 없는 자리가 나한테 발생되는 거예요. 내가 없는 자리가. 그리고 그동안 나를 질서 잡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놓은 그 모든 것들이 뻥 뚫린 자리에서 이렇게 쏟아지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인도함을 받으면서. ‘참, 이거 내 일 아니잖아. 주의 일이잖아. 아이구, 내 자식 아니잖아. 주의 자식이잖아. 어이구 내 남편 아니잖아. 주의 남편이잖아. 이거 내 거 아니잖아. 주의 것이잖아.’ 자꾸 내 것이 쓸려서 빠져나가버려요. 그럼 나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내 게 없어지는 거예요. 상실이라고 했는데 그걸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창조’지요. 크게 쓸게요. 창조. 이 땅에 오신 주님이 구원자만 되는 게 아니고 구원을 할 때 자신의 창조 기술을 삽입해서 구원을 해버려요. 그리고 우리한테 이야기합니다. “너를 잊어라.” 왜 잊어야 되는가, 옛것이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술은 안 잡숴도 그 정도는 알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부대에 새 부대만이 새롭게 창조를 담아낼 수 있는 포대기로서 주께서 우리를 뽑아내서 차출하신 거예요. 뽑아내서 새로운 창조를 우리라는 포대기에 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동적으로 내 것 있잖아요. 옛 것. 내 것은 밑에 있는 바닥난 공백, 뻥하고 뚫린 구멍으로 그것은 쏟아버려야지요. 그게 하루입니다. 그 다음날 되면 어제의 구성된 내가 또 하나의 폐기물이 돼요. 그 날 구멍에 대해서 빨리 나는 없애버리는 식으로 주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을 하셔요. 그러니 주의 일은 하루치 산 나를 그날 저녁으로 소멸시키는 일이 주의 일입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뜻이지만 뭐든지 내 뜻대로 된 적이 있어요? 없지요.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닌데 왜 삽니까? 이 근원적인 질문을 한 번 해보셔야 돼요. 그게 창조주가 옛날에만 창조주가 아니라 지금도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자기 창조를 발휘하셔서 자기 창조를 옛포대기에는 우리 같은 여기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 육신은 옛 부대라는 거죠.그러니까 이건 광야의 만나처럼 매일같이 새로운 음식을 먹게 되게 되면 그 다음 우리의 몸도 그 만나의 새로운 몸의 의미를 유지시켜 주는 하나의 술독, 포도주를 담는 독처럼 새로운 독으로 주께서는 새로운 독이 되라고 하루치를 주신 겁니다.누가 한 번 마태복음6장34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참새라고 생각합시다. 그리고 들에 핀 꽃이라 생각합시다. 들의 백합화. 그렇다면 들의 백합화가 내일을 걱정합니까. 아니지요. 참새가 내일 걱정합니까. 아니지요. 불쏘시개 될 수밖에 없는 그 들풀도 오늘 주께서는 이게 제 말이 아니고 3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오늘은 하나님이 충실하게 지키는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이 왔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을 그제야 아는 거예요. 내 안에 주님 계셨구나! 하는. 내 안에 주님 계시는 방식으로 나를 죽을 때까지 계속 이끌고 가시는구나! 라는 사실. 내 일을 버리고, 버리는 동시에 주님의 일을 내 일에 채우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주의 일이에요. 내가 창조주고 내가 창조하는 방식으로 너를 구원했다. 그걸 증거하고 그걸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친히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사용하려면 우리는 바로 은혜를 알아야 되고 그 은혜는 내 것에, 옛 것, 내 중심, 잘난체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 은혜가 공격을 하고 공격한 그 만남의 장소에서 우리는 애곡하고 통곡할 수밖에 없어요. 그 귀한 내 것. 그 내 것이 상실하니까요. 러시아 미사일처럼 은혜가 날아와서 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 그게 나오지요.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해서 애통하듯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애통하듯. 자, 이제 성경의 난해한 구절에 드디어 도달했습니다. 정말 난해한 구절이에요. 이 난해한 구절 해석하기 어려운데, 다른 것도 해석하기 어렵지만, 참 불가능한 이 해석을 위해서 제가 이 창조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신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잔혹하게 죽였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들을 죽였으니까 여기에 아버지의 아픔이 들어가 있고, 아들의 아픔도 있고, 성령의 아픔도 이 아들의 죽음에다가 다 들어있어요.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니 손으로 죽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장차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바칠 때 그 심정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전이시키는 것과 동일합니다. 어떤 강도가 와서 죽이는 게 아니고 니 손으로 내 아들을 그것도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잡는 거예요.분명히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할 때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하시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죽이신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해 본적이 없을 겁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의 생각은 이래요. 여러분, 모세가 홍해 나올 때 자기가 약속의 땅 못 들어가는 걸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모세가 못 들어감으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 자기 하나님의 백성이. 참 신기하지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못 들어가도 그분은 들어갈 만한 분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 직접 하나님과 직접 만난 유일한 분이고. 그리고 그동안 꾸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대행자고. 그리고 그 분이 없는 이스라엘, 모세가 없는 이스라엘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모세 덕분에 우리가 들어갔다. 그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은 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을 인간들이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라는 생각을 인간들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구원받은 그 하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이건 뭐 하나님의 심술이 아니고요, 진리입니다. 진리. 엄마가 선반에 맛있는 케이크를 올려놓고 출타했을 때, 학교 마치고 온 애가 그 케이크가 있는 걸 발견하고 케이크 지가 키가 안 되니까 의자해서 안되니까 옆에 보면 가구가 있어가지고 가구 서랍을 열고 그 가구 서랍을 계단으로 삼아서, 가구가 높으니까 케이크를 건지기 위해서 그 가구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이케아 가구로 넘어져 죽은 사람이 애들이 한 두명이 아니에요. 이케아 사고요. 조립식에 넘어져가지고 애들이 죽은 게 한 두 건이 아닙니다. 그 이케아 사고가 왜 났을까요. 높은데 기어올라가다가 넘어진 거예요. 그 애가 케이크 탐을 내면서 애가 자기 부인이 됩니까? 나는 안 먹어도 돼! 나는 먹을 가치도 없어. 이럽니까? 그럴 거 같으면 애초에 올라가지도 않지요. 인간의 종교라는 게 뭐예요? 누구를 위한 거예요? 멀쩡한 살아있는 자기를 위해서 더 살기 위해서 더 온전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종교라는 걸 갖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의지하고 딛는 그 분이 딛는 순간 내 쪽으로 넘어와서 같이 죽자고 이케아 가구처럼 나를 덮쳐버리면 서럽에 얼굴을 바치고 덮쳐버리면 결국은 성공을 못했잖아요. 내 시도가 내 구원시도가 성공을 못하지요. 그래서 구원 실패하라고 교회 다니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 믿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그 실패를 통해서 애통해하지요. 그게 은혜에요. 어디 감이 옛 술이 옛 부대에 담아서 새 술 행세하려고. 덮쳐버린 겁니다. 뭐 금식한다. 뭐한다. 뭐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시도한 우리에게 덮쳐서 구원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그거다 말이죠. 바로 그거에요. 창세기3장24절,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그 취지를 살려줘야 그 취지를 유지해 줘야 악마가 그 뒤에 입을 다물어요. 악마는 고소하는 자이기 때문에. “제 천국가면 안됩니다. 정당하게 고소하거든요.” 악마의 입을 다무는 방법은 “그래, 니 뜻대로 죽여버렸다. 됐냐! 이제. 악마야.” 악마는 자기도 못 들어가거든요. 못 들어가는 감 찔러나 본다고 지도 못 들어가고, 인간을 유혹해가지고 인간도 못 들어가게 만들고 악마는 게임 끝났다 본 거예요. 그런데 악마가 몰랐던 게 있었습니다. 뭐냐, 하나님을 사람 만들어서 마지막 아담 만들 줄은 계산을 못한 겁니다. 나중에 마지막 아담 오니까 악마가 악을 쓰면서 유혹해서 아버지를 시험하고 아버지를 의심하도록 그렇게 광야에서 의심을 했던 거예요. 옛날 아담, 옛 부대입니다. 옛 포도주지요. 그런데 마지막 아담. 새 포도주고, 그 새 포도주가 창조를 했어요. 뭘 창조를 했는가, 새 부대를 창조했습니다. 그 창조한 거 그 교체하는 작업에서 하나님은 가차 없이 아들을 죽였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가 죽는 거 보고 애곡하고 슬퍼하는 거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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