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만 범죄
2022년 5월 2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3
(1: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1: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선지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그 뿌리부터 검사맞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육신과 육신의 번식으로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뿌리는 그냥 ‘신(神)’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5)
이렇게되면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연결되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하나님쪽에서 언약에 해당되는 자는 이스라엘 왕으로 오시는 식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결합시키려고 하십니다. 다윗에게 내려주신 언약에 의할 것 같으면 다윗왕이 오시는 장소까지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과 인간들이 만난다는 것이 인간쪽에서 이해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즉 다윗 족보의 왕이라는 인물과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성전이라는 건물 요소가 구비되면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통치가 최종 완성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과연 다윗 자손에 따라 오시는 왕이 누구이며, 과연 예루살렘의 성전은 계속 유지되느냐가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 예루살렘이 멀쩡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예루살렘’이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계획이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는 점을 간파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죄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봐도 마땅한 일은, 예루살렘의 건재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장해주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동안 이스라엘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조짐이 수상합니다. 선지자의 등장은 그 시대에 사람들이 이해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반대로 나아간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움직일 때에 가장 자신을 안정적으로 삶이 보장받는 대책이라고 믿고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미래의 희망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내일은 잘 될 것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는데서 용기를 내어보는 겁니다. 즉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 자신의 근본을 볼 생각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인간이 기대하는 모든 미래는 실은 과거 내부에 있던 본질이 줄기차게 미래로 뻗어가는 경우에 해당됩니다. 즉 ‘잘 될거야’라는 희망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벌써 망가졌음’을 각 시대마다 확인하는 절차만 남아 있는 겁니다. 선지자가 비록 개인이 해당됩니다만 그 개인사가 곧 이스라엘의 국가사를 말해줍니다.
개인의 뿌리와 이스라엘의 뿌리를 한 지점에서 만나게 하는 겁니다. 그곳이 바로 주님이 일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뿌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결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아닙니다. 괜히 인간보고 책임지라고 들볶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5에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즉 예레미야 선지자는 언약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입니다. 그 언약의 하나님이 주가 되시고 그 주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선지자 하는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계획은 선지자가 이 세상에 출생하기 전부터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역사 속에 출현한 것은 애초부터 인간들의 생각과 우리 주님의 생각이 같지 않음을 나타내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편에서 보낸 선지자가 등장해서, 인간들의 생각과 싸우게 됩니다.
이 싸움을 통해서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온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님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그 내용은 결코 인간들을 긍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다투었던 일이 있었음을 후대 사람들이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파악됩니다.
즉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 사이가 상반되는 내용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시편 51:4에 보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Against thee, thee only, have I sinned, and done this evil in thy sight: that thou mightest be justified when thou speakest, and be clear when thou judgest.(KJV) Against Thee, Thee only, I have sinned, And done what is evil in Thy sight, So that Thou art justified when Thou dost speak, And blameless when Thou dost judge.(NASB)
여기서 ‘주께만 범죄했다’가 무슨 말일까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주님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 일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은 실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애초부터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없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신의 뿌리는 출생일부터 따집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그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을 잡고 자라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해야 될 일은 이스라엘의 뿌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불가능으로 생겨난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획하는 바를 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불태워지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조차 역시 인간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불가능힘으로 생긴 현상이라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시대가 망해지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감추어진 뿌리를 드러내려고 하시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
애초부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는 파멸되게 계획잡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가 무슨 일을 한들 모든 것이 ‘주께만 범죄한 일’이 되는 식으로 세상을 구성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어디에도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언약이 비로소 완수가 됩니다.
불가능함은 오직 불가능함으로 드러나야 하고 고백되어지는 것이 선지자의 운명이요 오늘날 성도의 운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장래에 부질없는 희망을 낙으로 여기며 살지 말고 과거에 있었던 진실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예레미야 1장 1~3절(주께만 범죄)22052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50페이지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대목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왕 이름이 등장하는데 아몬이라는 사람도 왕이고 이 왕은 이스라엘이 두 조각 났습니다. 북쪽은 일찌감치 망하고 남쪽은 아직 견지하고 있는 그때 남쪽 나라가 아직 견지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 남쪽 나라에 유다 지파에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에 하나님이 약속을 줬는데 다윗왕에게 내렸던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오게 되는데 그때 예루살렘에 오시는 메시아가 다윗왕의 족보를 따라오시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바뀌지 않을 영원한 단회적인 임금이 이스라엘에 오셔서 그 왕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심판을 받고 통치를 받는다는 내용을 다윗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 나라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이냐 하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주목해야 할 일이 생긴 겁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약속에 준하면 거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거기에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보내신 다윗 족보에 따르는 왕이 만나기만 하면 이 세상은 끝,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최종 정리정돈이 다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북쪽 나라가 미리 잘린 것은 북쪽 나라에 없는 게 남쪽 나라에 있다는 요점을 알리기 위해서 미리 잘렸고, 남쪽 나라가 있는 것은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그 점을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이 예레미야에게 4~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앞으로, 미래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과거는 다 지나갔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의식 속에는 미래가 궁금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실 메시아의 그 모습을 미리 선지자를 통해서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식으로 선지자의 위상을 보여주느냐. 시간을 거꾸로 돌립니다. 거꾸로 돌려서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라고 시간을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처음에 계획된 것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개될 뿐이라는 겁니다.
예레미야에게 내가 복중에서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았다는 이야기는 앞으로 이스라엘을 따질 때 그런 식으로 따지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우리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라는 그런 것 좀 묻지 말고 ‘앞으로 교인 몇 명 더 오겠습니까’라는 거 묻지 말고, 더 오기는커녕 홀라당 다 빠져나가도 할 말 없는데 그런 것 좀 따지지 말고 뿌리가, 그 교회의 뿌리, 선지자의 뿌리, 메시아의 뿌리, 그 뿌리를 거꾸로 추적해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다”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계획한 바가 네가 태어나서 나는 여기 존재한다는 그 존재보다 우선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는 신경 쓰지 말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는 나중 문제고, 내가 있기 전에 무엇이 있었느냐가 나를 결정하고 규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실 메시아가 나중에 오신다고 되어있지만 그건 시간상이고, 처음부터 계신 분이 나중에 오시는 거예요. 그래야 도중에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 운명이 바뀌는 그런 사단 안 날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마음은 항상 존재하니까 항상 연약한 갈대와 같아서 바람 불면 여기 후루룩 저기 후루룩 휘둘리게 되어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닦달하면서 ‘정신 차려, 이놈아’라고 해도 누가 뭐 정신 안 차리고 싶습니까. 70세 넘으면 다 잊어버리는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도 다 잊어버려요. 설교도 돌아서면 오전 설교 다 잊어버렸어요. 왜? 돌아섰기 때문에. 유턴이 그만큼 무서운 겁니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뭐, 마음을 다잡고 결심을 해도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나중에 여러분들이 요양병원에 앉아서 ‘어머니, 신앙생활 잘했습니다. 예수님 은혜로 살았습니다’라고 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가 누군데’ 아무것도 몰라요. 자기 이름도 모르는데 무슨 남의 이름까지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거꾸로 역순하는 거예요. 선지자의 인생도 네가 존재하기 전부터 따져보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앞으로 네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미 아신 분의 각본대로만 진행될 뿐이다. 너만 각본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고 네 주변의 모든 국가적, 정치적, 시대적 상황도 각본대로 움직이니까 너는 각본대로 말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신의 뿌리를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둬버리면 그때부터 나오는 것은 당당함이에요. 여당당 남당당 말고 당당함. 당당함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뭐냐 하면 어떤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이 이 말에 대해서 건드리든지 씹어버리면 그 사람에게 가차없이 저주가 주어질 만큼 당당한 거.
내가 거기에다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서 지식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 나를 미리 아신 그분이 내 입에 담아주는 그 이야기만 하란 말이죠. 그러면 그걸 시비 거는 그 사람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알아서 할 일은 아니니까요. 괜히 자기가 모든 것을 꾸며서 이야기해버리면 그 사람의 반응과 태도에 대해서 굽신거리고 아부한다고 또 바빠요.
회사 직장에서 그런 일 많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눈치 보다가 어느 라인에 서야 하느냐 고민하는 거죠. 그 라인 어차피 사다리타기 하면 전부 다 꽝이에요. 출애굽기 3장 15절에 보면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하나님께 두면 되는데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라고 되어있어요.
아브라함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 아니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그분이 사람 형태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되면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 그대로 세상의 보이는 거, 보이지 않는 거,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만드셨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가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죠. 당연한 겁니다.
심판대에 끌려가기 전에 미리 주님께서 내 백성이라고 따로 빼돌리는 것이 있어요. 특혜를 줘서 따로 빼돌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빼돌리게 되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미리 빼돌려버려요. 이건 아빠 찬스 아니고 주님 찬스예요. 십자가 찬스입니다. 청문회 한번 할까요? 삼성전자에서 경찰이 수사하면서 반도체 장비와 기술을 어떤 퇴직한 사람이 업체를 만들어서 중국에 200억에 빼돌렸어요.
그걸 기술유출이라고 해서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국가 근간을 흔드는 그런 기술을 중국에 빼돌렸다는 기술유출로 수사를 받고 검찰에 수사당하고 사법당국에 고발당하죠. 사람들은 그걸 몰래 하죠. 그런데 왜, 복음은 그렇게 유출되어도 수사를 안 합니까. 복음은 유출되어도 사람들이 믿지를 않아요. 그것은 뿌리를 모르는 채 자꾸 미래에 미래에 꿈과 희망에 도치되어서 마치 자기가 천년만년 살 것같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자신의 토대이고 뿌리인 바탕을 봐야죠. 바탕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예수님이에요. 인간의 지식은 예수님 그 이후로, 너머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 나를 본 자만이 아버지를 알아요. 예수님의 아버지와 하나님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로만 우리에게 계시했어요.
이건 제자들도 몰랐던 겁니다. 제자들도 여호와이고 사도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 사울 때는 그저 ‘여호와, 여호와, 율법, 율법을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다’라는 것뿐이고 그 여호와가 여호와인 줄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여호와를 둘로 구분해서 한쪽 여호와를 채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바알이냐, 여호와냐?, 하나! 둘! 셋!’ 이러면 사람들이 쉽게 선택해요. ‘여호와’
그러면 예수와 예수 중에는 어느 것 선택할 거예요. 우리가 아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알려준 예수님과 이게 같지를 않아요. 같을 리가 없죠. 장차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미래만 생각하는 그 버릇을 그대로 성경 본문에 집어넣어서 해석해서 ‘죽으면 천당 가는구나. 좋다’라는 것은 가짜 엉터리 예수고 진짜 예수님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십자가로 데려가요.
십자가로 데려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시편 51편 4절에 나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뭐 다른 건 필요 없이 이거 하나면 충분해요. 이거 하나만 해석해도 성경해석 충분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해도, 우리가 죄를 안 지었다고 해도, 주께 범죄 한 일이에요.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주님에게 뭔가 계획이 있기 때문에 태어났는데 그 계획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해도 죄인 되게 해서, 오직 십자가 지신 분만 주가 되도록, 십자가 지신 그분만 증거되게 세계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가지고 설계하신 겁니다.
우리는 뭘 해도 주께만 범죄 한 거예요. 주께만.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숨만 쉬어도 그게 주께만 범죄 한 거예요. 그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우는 아이보고 닦달하지 마시고,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가 복중에서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정해졌다니까요. 인간은 죄인 될 수밖에 없게 한 거예요. 의도적으로 선악과 따먹도록 선악과가 탐스럽게 그것도 동산 한 가운데 있게 하시고 거기에 마귀까지 들어오도록 허락하시고 그 구성요소가 딱 죄인 되기에 합당한 설비들이 갖춰진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인간이 에덴동산에 살도록 동산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영원하도록 만든 거예요. 에덴동산은 거쳐 가는 폼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세상을 주께서 낙원으로 만들어놨다. 너희는 거기에 잠시 살았는데 너희들이 악마와 한패가 되어서 쫓겨났다. 이게 창세기 2장, 3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좀 두꺼워요. 2장과 3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가라. 이 인간아’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뒤에 이야기가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시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소급해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예수님 본인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하는 일과 예수님 하는 일을 경쟁붙여 놓은 거예요. 내가 하는 일.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족족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기어이 의인은 하나도 없게 만들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거기에 집어넣으신 거예요. 율법을 집어넣으시니까 율법은 선한 겁니다. 율법은 좋은 거고 흠이 없는 거예요. 흠이 없는 것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흠이 있는 존재로 발각되고 만 겁니다. 율법은 선했지만 너는 선하지 못했다. 우리 자신의 근원부터 헤쳐서 우리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거예요.
이런 사실이 신약에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이런 사실, 우리가 모든 것을 해도 율법에 의해서 죄밖에 없다는 사실을 구약적으로는 어떻게 보는가. 그게 바로 오늘 본문 3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이 사로잡힌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급작스러운 논리를 동원해서 신약의 결론을 압축시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로잡힌다. 이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 사람에게 사로잡힌 것을 여러분도 아시죠?
사로잡히기만 했습니까? 옥에만 가셨습니까? 그렇지 않죠. 이 세상에서 퇴출했습니다. 무슨 뜻이겠어요. 예수 없는 세상인 것을 확 티를 낸 겁니다. 그게 오늘날 메스컴을 통해서 티가 나요. 그거도 아주 확 납니다. 예수 없는 세계. 뭐 8월 초파일 되면 KBS에서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서 온갖 불교 교리와 불가에 아기 중이랑 여자 중 동원해서 앞장세워 설명하면서 크리스마스 때는 십자가 복음은 입 벙긋 안 해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이야기, 밥 퍼주는 이야기, 그건 복지 단체에서 하는 이야기지 그게 복음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리고 은둔생활 하는 거, 은둔생활은 그냥 노는 거예요. 백수들 모아놓고. 그게 무슨 기독교이고 복음입니까, 도 닦는 거죠. 지난번에는 프랑스 유학 가서 모자이크하는 사람 이야기 나왔는데 그건 예술 하는 사람 이야기죠. 그것과 크리스마스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도대체가 복음을 말을 못 하게 만들어요. 복음이 이 나라에 끼어들지 못하게 만들어요. 왜? 마귀가 살아있으니까요.
주께만 범죄 했다는 이야기를, 장차 오실 그분에게 죄만 짓는 인간들밖에 없고 그런 나라들밖에 없다는 말을 못 하느냐는 거죠.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다. 그러니까 이게 죽어 마땅한 거죠. 드라마 보면 뭐 의리 찾고 뭐가 안됐다고 안쓰러워하고 장애자가 불쌍하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사람이 몸의 장애자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장애자입니까?
영혼이 이미 장애자예요. 멀쩡해도 장애자고. 몸 아파도 장애자고 교통사고 나도 장애자고.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이고 미친 사람이고 장애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라고 주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 만드신 거예요. 예레미야의 고생은 뭐 뻔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말귀를 알아먹는다는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못 알아먹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는 이야기는 예루살렘이 사로잡힌다고 했으니까 예루살렘은 사로잡힌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던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떠났다. 우리 인생은 끝났어. 이게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어’라고 하는 이것이 예레미야가 원래 해야 할 이야기예요. 희망적인 거, 긍정적인 거 일체 없습니다. 자기 주제 파악도 못 하는 것이 무슨 긍정을 할 쨉도 못되죠.
선지자는 우리 인생을 과거로 돌립니다. 과거로 돌려서 우리 조상 아담부터 이미 우리는 맛이 갔다. 우리는 독 안에 있는 쥐가 번식하는 것처럼 아담 안에서만 번식하기 때문에 아담이 하나님께 하는 행세,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똑같이 하고 그래서 우리는 주께만 범죄 했고 뭘 해도 주님 보시기에 전혀 성에 차지 않는다. 왜?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범죄자다. 끝! 그러니까 구원받을 생각 말고 천당 갈 생각 마라. 네 주제 파악이나 해라.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이야기했던 겁니다. 이 이야기 자체가 예레미야 시대에 율법으로 작용해요. 율법으로 작용하니까 사람들은 그 입 다물라고 달려들겠지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보내신 하나님 입장에서는 여기서 뭘 뽑아내시냐 하면 ‘불가능함’, 다시 말해서 이게 예레미야에 나오는 말씀인데(예레미야 13장 23절) 표범이 무늬가 없어진다든지, 흑인이 백인 된다는 것이, 구스인이 하얗게 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불가능한 거예요.
이 비슷한 소명 받은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6장 9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네가 가긴 가는데 네가 하는 말은 당최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있다. 알아듣는 것에 실패하고 불가능이다. 너는 그것을 먼저 인식하고 가거라. 인간이 주께 구원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똑같은 말씀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도 이야기합니다.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만약에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만약에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사도바울처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령 받아서 천국을 가는 사람이 생긴다면 -실제로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많죠. 스데반집사도 그렇고- 그런데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가능만 이야기할 것이다.
내가 이런이런 식으로 은혜받았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하셨는지 굳이 이야기하자면 지금 주님이 저에게 그렇게 일을 벌이셨습니다. 마치 예레미야처럼. 내가 찾아가지 못하는 내 뿌리를 미리 알고 계시는 그 여호와 주님께서 그 뿌리에 계획된 대로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는다는 시나리오 각본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로 구원되는 겁니다.
영화제 감독상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박찬욱이 아니고. 주님이 감독이에요. 다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당당하세요. 왜? 내가 안 했기 때문에. 내 의로움과 내 착함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하세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되었기 때문에 당당으로 밀어붙여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남들을 설득해서 뭐 이렇게 하면 나처럼 구원될 수 있다는 그거는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저지했습니다.
내가 말한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불가능이다. 앞으로 여러분도 전부 다 이름 바꾸세요. 김 불가능, 박 불가능, 최 불가능. 불가능한 거예요. 그 불가능한 각본 중의 하나가 예루살렘이 불타고 사로잡혀서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 믿을 만한 어떤 여지를 싸그리 다 불태워버리는 그 작업을 여러분들이 겪어야 합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했다, 내가 개척교회를 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싸그리 죄로 다 드러나야 해요. 내가 이 교회에 3억을 헌금했다. 뭐 안 되는 이야기니까 당당하게 마음대로 합니다.
집이 한 채 있는데 팔아서 우리교회 복음 전하라고 했다는 이런 거, 안되는 이야기니까 합니다. 그거 구원받는데 아무 도움 안 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여러분이 예레미야 되세요. 예레미야가 되셔서 여러분 가정을 돌보고 열심히 일해서 가정일에 보태고 자식 키우는 그 하나하나가 왜 이게 하나님께 죄짓는 일인지 그것을 당당하게 파악하는 일만 여러분에게 남아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레미야의 뿌리를 보았습니다. 그 뿌리가 동일하게 우리의 뿌리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조상 아담이 죄지은 것처럼, 그 죄 안에 우리가 합류되어있음을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사오니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운 것처럼 주께서 성령으로 선지자를 세우시는 그 불가능한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