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자
2022년 6월 19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3:6-8
(3: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3: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3:8)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사람이 자기 일을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주의 일에 훼방되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나의 일이 우선인지 아니면 주의 일이 우선인지를 말입니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엄청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해냅니다. 하지만 주의 일은 인간이 못해 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못해내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을 것같은 일에만 관심갖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지적받고 욕얻어먹는 일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여깁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인간이 해내는 일은 뭔가 목적이 있고 수상합니다.
즉 인간이 해내는 일은 홀로 자신이 승자가 되는 놀이에 열중하는 일입니다. 자기 만족이지요. 자기 만족도 없으면서 일에 계속 매진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내가 무가치한 자가 아니라 가치있는 자라는 것을 증명해줄 일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는 말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과 같은 성격의 일이 아닌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하는 일은 어떤 일일가요? 고린도전서 9: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사도는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주님의 연속적인 일이 자기에게 덮친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주의 일은, 주 안에서 행하지 않는 일반적인 인간의 일과 구분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린도전서 2:13-14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신령한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신령한 일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진행되는 일이며 이 일은 일반적인 육의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하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도 사람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일이 표적과 이적이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요나를 언급해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함축해서 설명하십니다.(마 16:4) 그렇다면 요나 선지자에게 그 어떤 특이점이 있었던 걸까요? 요나 1:17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 삼 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에게는 오직 자신의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그 일에 종사하려 했습니다. 그는 요나를 하나님께서 기어이 바다 위에서 색출해서 근처에 있는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고 사흘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나는 ‘죽음 안에서 사흘 동안 산 ’사람이 됩니다. 즉 요나는 벌써 죽은 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요나에게는 종말입니다. 그런데 이 종말은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인간 대 인간들 끼리의 종말의 비교가 아닙니다. “나는 천국 가지만 저 사람은 지옥간다”는 식의 비교가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감히 경험할 수 없는 종말, 곧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가하시는 종말에 요나는 미리 들어와 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요나는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강제성에 의해서 제대로 선지자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그 시대에 보여주는 하나님의 표적이요 이적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표적을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과 결부시키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요나처럼 최후의 죽음에 사흘 동안 갇히시는 겁니다.
이럴 때,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의 일’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도 이런 하나님의 일 안에서 성도입니다. 즉 이 죽음의 세상 안에 갇혀 있음을 나타내는 삶이 표적으로서 나타난 ‘주의 일’이 됩니다. 성도는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보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야 성도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타내시고자하는 표적과 이적이 뿜어져나옵니다. 사도는 자신의 이러한 삶을 ‘자유’라고 표현했습니다.(고전 9:1) 이런 경우는 구약에도 나옵니다. “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은혜를 받은 모세이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에게 있어 모세는 ‘얼굴없는 자’가 됩니다. 그래야 ‘자기 영광과 자기 가치를 위한 자기 일’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곧 ‘나의 일’에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위한 일을 벌리게 되면 꼭 타인들은 자기 일에 끌어들입니다. 이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끌어드린 타인들 중에 하나님도 들어 있고 예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자기 놀이판에서 최고로 되게 해 달라고 흥정하기 위해 끌어드립니다. 바로 이런 시도는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생각과 그것이 나오는 자기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니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음부, 즉 죽음의 세계는 계획이나 목적도 없습니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이방나라들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더불어 야곱이 나타났습니다. 그 야곱의 아들들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과도 싸우고 사람과는 싸우는 새로운 하나님상을 드러내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율법이 들어오면서 율법이 철심이 되어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종말을 안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율법이라는 심이 자기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잘 말해줍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죄가 작동하게 되면 자신의 그 어떤 일이라는 이 죄의 기능을 억제할 수 없고 도리어 패배당함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20)
성도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니 비로소 성도도 생기고 구원도 생기고 천국도 생겼습니다. 복음의 자체적인 능력으로만 주어지는 의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깁니다.(롬 1:17-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가치를 챙기는 나의 일과 그것을 죄로 지적하시는 주의 일이 함께 작용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데살로니가후서 3장 6-8절(얼굴 없는 자)22061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6-8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6-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에 “형제들아”라고 언급을 하면서 사도바울이 “형제들 가운데서 이 사도바울처럼 일하지 않는 자에게서 떠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자신이 주 예수 안에서 지금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일하는 자들끼리만 형제라고 할 수 있고, 예수 안에서 일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사도바울이 일하는 것 같이 일하지 않기 때문에 결별을 선언해야 될 대상이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도바울은 도대체 어떻게 일해가지고 자기를 표준으로 삼는가?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이 날 수밖에 없지요. 고린도전서 9장 1절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자기를 자유자로 봅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주 안에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은 자유자로서 하고, 사도로서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기가 일을 하면서도 자유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세상에서 인간들이 벌이고 있는 일과는 전혀 소통되지 않고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13-14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일 안 한 게 아니에요. 일했어요. 아버지께서 시킨 일을 했는데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일에 미쳐서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하는 일이 저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아보지를 못했어요. ‘뭐야, 저 일은? 저 태도는? 저 행동은?’
주님께서는 자기 일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표적이다. 나는 이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먹지는 못하고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말씀이 있어요. 너희가 내 안에서 일하는 내 일을 통해서 아버지 일을 드러내는데 너희는 그렇지를 않다는 거예요. 너희 일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일을 전혀 드러내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너희들이 일과 내 일이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과 이적의 의미를 품고 나타나는데 너희들은 바로 그 표적과 이적의 의미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으니까 너희들의 일과 나의 일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의 예를 드는데 그 예가 요나의 표적입니다.(마 16:4)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너희들이 요나가 하는 일, 요나가 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았는지를 너는 도저히 감 잡지 않고 있지? 요나를 이해 못 하면 역시 내가 하는 일을 이해 못 해.”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이해 못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예수님이 하는 일이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은 줄창 여호와만 부르짖고 여호와만 경외한다고 그 난리를 치는 거예요. 성전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경배한다고 난리 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알아? 하나님을 지금 알고 하는 이야기야?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 하는 일을 경유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는 일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억지에요. 신을 믿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성경,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을 통해서 그것이 다 드러났어요.
인간은 믿지 말래도 절대 존재를 믿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절대적으로 나를 보호할 어떤 절대 신을 은근히 그리워하고 기대하고 있어요. 신이 없다고 하는 그것은 자기 본성과도 어긋납니다. 부처를 믿든지 알라를 믿든지 그 용어는 상관없이요, 예수를 믿든지 관계없어요, 무조건 나보다 큰 어떤 분이 계시고 나는 그분에게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 이게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럽습니다.
로마서 1장에도 나와 있어요. 너희가 “하나님을 알되”(21) 하나님에 대한 인식 신인식은 누구나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요나의 표적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그들이 알고 있던 신은 뭐냐? 우상입니다. 거짓된 거예요.
왜 그들은 신을 똑바로, 제대로 믿지 못하고 우상을 믿는가? 이미 인간의 조상 아담의 결정적인 잘못은 뭐냐? 뱀이 자기를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몰랐다는 이것이 결정적 실수였지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악마를 몰랐습니다. 그냥 인간들은 하나님만 알면 만사가 깔끔하게 정리된다고 생각했어요. 교회 와서 하나님 믿으면 만사가 정리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나님 믿는 그 마음이 이미 악마가 집어넣어 준 신의 마음으로 하나님 믿는데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그게 바로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를 죽였어요. 이 아이러니,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짜 하나님을 죽여버리고 모독하는 이런 아이러니, 이런 모순, 그것은 유대인에 그치지 않지요. 오늘날 이 세상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을 알고 있어요. 부처님, 하나님, 뭐 어떻게 조상님, 뭐라고 부르든 도와줄 자를 찾는 것은 인간이 타고 난 겁니다. 왜 그러냐?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의 본성이 그대로 있어요.
언젠가 제가 그런 설교 했듯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자기가 발전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발전을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내 현재 형편보다 더 나아지기를 싫어하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러한 마음 자세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법에 막혀야 되는데 뒤에서, 배후의 악마가 부추기니까 막히는 것, 내가 피조물로서 어떤 한계를 가지는 것이 아주 못마땅한 거예요. 에이, 그냥 그냥 치고 나가는 거예요. 하나님이고 뭐고 그냥 치고 나갈 때 그들은 악마가 인간을 망쳤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하나님이 네 인생 망쳤다고 생각해서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요나에게 일어나는 그 표적, 하나님이 요나를 다룰 때 장차 올 예수님께서 진짜 하나님은 요나 안에서 요나와 같은 코스를 밟아서 온다는 사실을 미리 요나에게 담아줬기 때문에 요나의 표적이라고 예수님이 자기와 일치시킨 겁니다.
요나 1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물고기 배, 물고기 뱃속을 요나 2장 2절에서는 그걸 죽음의 세계라고 해요. 스올의 뱃속, 스올이라는 것은 음부의 세계, 죽은 자들이 세계입니다.
죽음의 세계에서 3일 동안 머물고 있는 것, 죽음의 세계 안에서 산채로 3일 동안 있는 것,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그 안에 응축되어 있다는 그 말입니다. “3일 동안 죽음을 겪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올 수가 없다.” 그 이야기에요. 부활의 맛도 보지 못하고, 영광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준비된 물고기 안에서 요나를 받아주게 되는데 요나가 전도해야 되고 전파해야 될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3일로 압축을 했어요. 인류의 역사가 몇천 년인지를 모르겠습니다만 그 몇천 년을 3일로 압축을 해서 그걸 큰 물고기, 캄캄하고 어두운 물고기, 죽음의 세계를 요나로 미리, 그 죽음의 세계를 요나로 하여금 맛보게 한 거예요. 3일 동안.
그렇게 되면, 3일 후에 요나가 나오고 난 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오고 난 뒤의 삶은 어떤 삶이냐? 죽음 이후의 삶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 이것은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처럼 주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면. 예수 믿고 더 살아보려 하는 것,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복 받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 그런 내용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미, 이미 죽어야 돼요. 이미 죽어야 된다고요. 이 이미 죽었던 요나의 삶, 요나의 출발점이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성도란 없습니다. 성도가 없기 때문에 구원도 없고, 구원이 없기 때문에 천국도 없습니다. 천국도 없고, 천국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은 고기 뱃속으로 압축시켜 볼 때에.
그런데 성도가 없고, 구원 없고, 천국 없고, 그리고 진짜 하나님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 없는 거고요,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없는 이곳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구약을 통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구약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 전제가 뭐냐?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옴으로써 비로소 나타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찾아오지 않으면 절대로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냥 이방 나라, 이방 나라, 다수의 이방 나라들만 넘쳐나는 세계, 그게 이 세상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없어요. 없는데 그 없는 나라가 왜 생겼느냐? 그것은 이 이방 나라, 가짜 신들만 믿는, 악마가 가르쳐준 그 신, 악마가 조작해낸 그 신, 그 신들만 믿는, 가짜들만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약속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주면서 언약이라는 그 작은 고무조각에다가 하나님께서 언약을 언약대로, 언약의 능력대로 거기에 힘을 불어넣어 주니까 그 야곱의 언약대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왜? 이스라엘 그 이름이 야곱의 이름이기 때문에. 야곱의 이름은 어디서 나왔는가? 이삭에서 나왔어요.
이삭은 어디서 나왔는가? 아브라함에서 나온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줬고 그 열매가,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네 백성이 많으리라, 하는 것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이 뭐냐? 싸워야 돼요. 왜 기존의 신들이 있으니까, 기존의 인간들이 있으니까. 하나님과 인간들과 싸운다는 이름을 압축시키면 이스라엘 돼요. 디모데후서 2장 4절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 것을 군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2장 4절에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크라이나 사람도 아니면서 한국에서 어떤 대위가 자진해서 용병으로 참전했지요. 아파서 다시 돌아왔지만. 그 사람이 자기 생활에 얽매입니까? 그거 해서 유-튜브 영웅 되려고 그런 짓 했습니까? 할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는 그런 것 때문에 갔을까요?
자기 말로는 이래요. 자기 말입니다. “군인이 임무는 약한 자를 돕는 것이다. 그래서 갔다. 국가니 법이니 그런 것은 내 안중에 없다. 약한 자 편에서, 억울한 자 편에 서서 싸울 수 있는 대로 싸우는 것이 군인의 임무다. 충성!”
군인으로 모집된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딱 나오잖아요. 성도의 생활은 자기가 없다 이겁니다. 성도란 자기가 없다는 거예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고 싶어서 환장해서 니느웨로 간 게 아니에요. 자기 생활에 철저해서 자기 챙기기 위해서 갔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기회였습니다. “요나, 요나, 거기 있어. 요나, 알았어, 알았어!”
요나는, ‘오직 나는 나만 살아야 되겠다. 오직 나는, 나한테는 최종적인 것은 나뿐이다. 나 잘되는 것이 나의 행복의 목표다.’ 철저하다, 됐어, 그 철저함, 그 철저함을 하나님이 가장 다루기 좋았던 겁니다. 왜? 하나님의 일은 그 자기 일의 철저함과 극한 대조를 이루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일은 나타나기 때문에.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은요, 진실 또는 진리라는 것은 세상의 자기중심의 허망한 것과 싸울 때만, 방해받을 때만 진리가 나타나요. 성경 공부한다고 진리가 나타나는 것 아닙니다. 성경 천 독, 백 독 한다고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교회 일 한다고 그게 주의 일 아닙니다.
주의 일은 나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는 일이에요. 그 깜깜한 곳에. 아직 나이 96세도 안 되었는데 벌써 죽으라고 하면 억울하겠지요. 96세도 안 되었는데, 전국 노래자랑 사회자 나이도 안되었는데 벌써 죽으라고 한다면 억울하잖아요.
그래도 성도라면 나이 무론하고 나이가 열 몇 살인지, 스물 몇 살인지, 열아홉 살인지 상관없이 그냥 압축된, 이 세상을 압축시킨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지금 그게 사도바울이 하는 주의 일이에요.
“그 일 아니거든 형제 아니라고 여겨라.” 거기서 떠나라는 이야기입니다. 규모 없이 행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예수님의 일을 전했는데 그 일과 무관하게 따로 자기 일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규모 없이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6절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지금 사도는 본인이 책임 질 수도 없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일관성이 있어야지 구약은 구약이고 신약은 신약이고 이런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나가 자기한테 철저해서 도망치는 중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날쌔게 덮쳤잖아요. 요나가 달리고 있는데 요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요나가 달리고 있는, 유람선인지 화물선인지 그런 구분도 잘 없으니까, 하여간 배 타고 지중해로 가는 거기까지 주님께서 따라가서 납치를 한 겁니다.
납치해서 제대로 된 선지자, 제대로 된 주의 일은 어디서 하는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한 고래 뱃속에 들어가서 딱 3일 동안 완전한 죽음체험을 하게 하신 겁니다. 하고 난 뒤에 고래가 주의 뜻에 의해서 욱, 하고 토해내니까 그 토해낸 장소가 희한하게도 니느웨와 가장 가까운 해변가에 토해졌습니다.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지요, 이라크, 거리가 좀 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해변가에 요나를 토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회개해서 하나님께 돌아온 게 아니고 고래가, 고래가 하나의 잠수함처럼 사용되어서 요나를 토한 겁니다. 그 고래가 뭐냐? 이 땅을 누비고 다니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바로 압축된 세상의 종말, 세상 종말의 덩어리가 고래가 되는 겁니다. 표적이 되는 거지요.
이걸 단출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요, 대조적인 인간들과 인간들 간의 종말이 아닙니다. 전체 인간들과, 하나님 자신 속에 있는 종말과 인간들 전체가 생각하고 있는 종말과의 대비입니다. 너무 간추려서 이해하기 힘들지요? 뭐냐 하면, 너는 죽어서 지옥 가지만 나는 죽어서 천당 간다, 이런 인간 대 인간의 종말의 대조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성경의 종말은.
모든 인간의 생각하는 종말, 이게 종말론적 종말인지, 세대주의적 종말론인지, 전천년주의, 하여튼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종말, 교회에서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종말 론, 그 종말론을 한통속으로 만들어요. 만들어놓고 그 종말론과 예수님이 품었던 종말론과의 대조에요.
인간들이 종말론을 생각하는 것은요, 딴 것 아니에요. 나라도 혼자 천당 가려고 만들어낸 아이디어입니다. 그거 뭐 당연하게 거짓이지요. 물론 교회는 그것 가지고 장사하고. 우리는 종말론을 기다릴 자격이 애초에 없습니다. 애초에 종말을 가질 자격이 없어요. 뭔가 사람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어야 뭐 종말이라는 것도 뭔가 기대할만한데 애초부터 우리는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인데 무슨 종말을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보다 누가 가까운가 하면, 악마가 가까운 거예요. 하나님 소리보다 악마의 소리에 완전히 몸에 스며든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을 듣는 자가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악마에 조종받고 살아가는 존재예요. 우리가, 그 악마의 조종을 받고 있는 존재가 천국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 종말론, 구원론, 이라고 조직신학을 만들어요. 교회에서, 신학교에서. 그건 악마가 만든 거지요.
자, 다시 해 봅시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아닙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 민족에게는 성도라는 게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가짜지요. 하나님 해봐야 우상이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고, 천국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여기 필히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분명히 성도는 없어야 되는데 성도라고 우기는 자들이 등장하고 천국 간다는 자들이 등장할 때에 여기서 우리는 조사를 해봐야 돼요. 무슨 조사? 악마가 어떤 식으로 구라를 쳤는지 조사에 들어가야 됩니다.
나를 내가 조사를 해봐야 된다고요. 내가 나를 조사를 해야 돼요. 지금 하나님 말씀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당사자가 나가 아닌지, 사도의 말을 일방적으로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잘못 해석해서 나 좋아라, 하는 쪽으로 장난치고 있는 것이 나가 아닌지, 또 내 속에 악마가 그렇게 나한테 시키고 있지 않은지 조사에 들어가야 돼요.
이거 조사 없이 그냥 나오면 왜 안 되는가?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기 일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설교가 시작됩니다. 자 설교를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일이 있어요. 자기의 자존심을 걸고, 자기의 명예를 걸고 하는 자기만의 일이 있습니다. 남하고 차이 나는, 개성이 있는 자기가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자기 일이 있어요.
자기 일이 없는데 주의 일을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이미 인간은 자기 일이 턱 하니 있어요. 자기 일이 있고 여기서 교회에서 천국이 뭐니, 구원이 뭐니, 예수님이 누구니, 십자가 피를 언급하니까 내 일은 내 일대로 챙기고 건재하게 안 다치게 챙기고 여기에 추가해서, 성경에 있는 그 말씀을 추가해서, 하나 더 추가해서, 보태서 그래서 이 땅에서 내 일하고 재미있게 살다가 죽으면 천당 가겠다는 그러한 계산, 통박을 굴리는 거예요. 인간은. 누구나요. 누구나.
사도바울한테는 그런 게 용납이 안 돼요. 예수님한테도 용납이 안 되고. 그게 뭐, 그게 장난치는 거지 그게 뭐예요? 그것은 표적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에요. 요나는, 자기가 선지자, 그 자기 일이 있어요. 그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안 하겠다고 도망치고 있었던 겁니다. 선지자 일이 요나 자기 일이었던 거예요.
주님은 요나 속에 선지자라는 자기 일을 빼내고 주님의 자신 일로 바꿔버린 거예요. 고래 뱃속에서 인간은 자기가 죽지 아니하면 결코 내 일이 소실되지 않습니다. 농사짓고, 고기 잡고, 사업하고, 교사로서 활동하고, 목사로서 월급 받고 살고, 전도사로서 살고, 신학 교수로 살고, 이것 전부 다 주의 일 아니에요. 본인 일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악마로부터 사주받아서 자기 일을 안 다치고, ‘목사님, 다른 것 몰라도 내 일 다치게 하지 마세요. 이건 내 일입니다.’ 가정적으로는 자식 키우는 게 자기 일이거든요. 무조건 내 일, 요것 간수 하는 것, 이것 왜 합니까? 거기에 스며있는 악마의 정신이 뭡니까? 그것은, 인간은 홀로 승자가 되고 싶은 놀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한 놀이를 평생토록 합니다. 인간이 조금 더 자라서 주변에서 정보를 얻고 지식을 얻고 살아가면서 뭉쳐진 것은 오직 나를, 나에 의해서, 나만을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나를 위한 그러한 놀이, 게임, 결국은 결과는 내가 승자에요, 내가 최종 승자에요. 그거 하나 챙기려고 자기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일 하면서 인간은 가만있지 않고 타인들을 끌어당겨요. 자기 일에. 내 일에. 좀 도와 달라고하지만 사실은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다가 나중에 가치 떨어지면 홱 하고 다시 내뱉으려고 타인들을 자꾸 끌어당겨요. 자기 일에. 그렇지 않은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돼요. 그 내막을. 최종 승자는 이미 결정되었어요. 내가 최종 승자에요. 16강, 8강, 4강, 준결승, 최종 승자는 나예요. 나를 위해서 모든 스케줄은 다 그렇게 짜였습니다.
그러면 왜 자기가 승자가 되려고 하는가? 창세기 3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다 나와요.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10절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인간이 왜 자기가 승자라는 폐쇄적 놀이를 평생토록 하느냐? 그것은 수치를 제거하기 위한 놀이입니다. 자기가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수치스럽지 않기 위해서 타인을 끌어당길 때 자동적으로 남도 가만히 있으면 자기도 똑같은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승자가 되는 게임을 또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여기부터 자기가 완전히 수치스럽지 않기를 원하는데, 수치스러우면 분노가 일어나니까 수치스럽지 않기를 원하는데 수치스런 일이 벌어지면 그다음부터는 뭘 하느냐? 복수가, 복수가 감행됩니다. <복수는 나의 것> 이런 영화가 있거든요.
인간은 한시도 복수 안 하고 지나간 적이 없어요. 꿈속에라도, 평소에 길을 걷더라도 항상 복수를 생각합니다. ‘어딜 감히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이런 마음을 우리는 이성적으로 꾹꾹 내부로 누릅니다. 물론 폭발할 때까지만 그렇지만, 스프링 누르듯이 자꾸 이걸 눌러요.
그래서 이런 마음으로 교회 오니까 교회 와서 하나님께 비는 것은 뭐냐? 내가 당한 수치를 대신 복수해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거예요. 적들에게는 복수를,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보상을. 그 보상이 뭐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그렇게 거래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게 뭔데? 내가 최종 승자로 홀로 우뚝 서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지 않으면 행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만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You raise me up” 그런 게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제일 높은 산꼭대기에 세워주기를~” 그런 가스펠 송이 있어요. “you raise me up~” 그런 노래가 있어요.
나를 최고로 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최고로. 이 최고가 2등을 하면 1등은 내 복수 대상이 돼요. 2등은 만족스럽지 않아요. 3등도 만족스럽지 않아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하고, 그 일 속에서 그 나를 위한 놀이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타인이니까 그 타인을 내 일에 끌어당기는 거예요. 예수님을 내 일에 끌어당기는 겁니다.
나로 최종 승자가 되어서 나중에 죽고 나서는 빵빠라빵~ 천사들 나팔 소리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교회가 그런 일을 해주고, 목사가 그런 일을 해줘야 그 목사가 목사 값을 제대로 한다는 겁니다.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그걸 주의 일이라고 이야기해요. 말씀대로 했으니까 나에게 보상을 달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보상,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자에게 저주를 퍼부어주시고.
사람 사는 게 뭐예요? 바로 그거예요. 그게 제대로 안 될 때는 분노하고. 도대체 성경을 뭐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성경 본다고 하면서 그런 생각이 계속 난다는 것은 정말 성경을 건성으로 그냥 안 본 거예요. 아예 보기 싫든지.
로마서 7장 16-20절은 이렇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가 원치 않는 일……,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인간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은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가 구체화 된 게 바로 나예요. 우리 자신이었던 겁니다. 누구누구 어느 부모의 자식이 바로 이 죄 덩어리였던 거예요. 죄 덩어리기 때문에 천국을 원하고, 천국을 원하는 그것이 죄고,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죄고, 내가 성도라고 자부하는 게 그게 죄고, 하나님의 영광 돌리고 경배하는 자체가, 교회 와서 예배하는 자체가 이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거예요.
사람들은 윤리 도덕을 행하는 이유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고요, 미리 아는 게 선이 뭐고 악이 뭔지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윤리 도덕을 찾는데 윤리 도덕으로 했을 때 그 처벌이 진짜 윤리 도덕의 차원 같으면 주님께서 그렇게 처벌을 안 해요.
“나쁜 짓 하면 벌 받아라, 착한 짓 하면 복 받아라.” 이게 윤리 도덕적 차원의 처벌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처벌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하나님 자신의 종말, 하나님 자체의 종말을 십자가를 통해서 이걸 실시해 버리는 것, 그게 처벌이에요.
그게 무슨 윤리 도덕적 차원의 처벌입니까? 인간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려주는 처벌이지요. 그동안 교회 뭐 때문에 다녔습니까? 착해서 복 받으려고 다녔어요? 주의 일 한다고 복 받으려고 다녔어요? 나와 내 집안 잘되기 위해서 다녔습니까?
처벌이 뭐냐? 내 적을 처벌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처벌해 버렸어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나는 아버지로부터 처벌받는 거예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게 하나님 스스로 자기에게 만들어버린 종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말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이미 종말, 처절한 종말을 맞이해야 마땅함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악마와 결탁된 상태에서 못 고칩니다.
자꾸 율법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주님께서 이 땅에서 자기 일을 하라 하는 것은 그 일을 해야 우리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죄를……, 율법이라는 철심, 우리한테 철심을, 여러분 철심 아시지요, 디스크나 관절 수술할 때 철심 박잖아요, 이질적이다 그 말이에요, 이질적인 것,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철심을 집어넣었습니다.
집어넣으니까 이스라엘이 뭐냐? 하나님 메시아를 죽이는 역할을 톡톡히 한 거예요. 율법이 철심으로 박혀버리면, 꽂아버리면 이스라엘은 율법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움직임이 뭐냐? 하나님 자체를 살해하는 일 쪽으로 방향이 잡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이스라엘은 전체 인류의 선지자예요. 요나 같은 존재예요. 하나님 율법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구원받으리라’ 생각하는 그 속에 그들은 놓친 게 있었어요. 율법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결정짓고 우리를 죽여버린다는 그 고유기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던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에게 뭐가 꽂히는가? 그 율법의 기능, 말씀의 기능이 우리 안에 쑥 우리의 육신에 꽂히게 됩니다. 꽂히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졸지에 신령한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 신령한 사람이 될 경우에는 우리는 이미 죽음 이후의 삶으로 살게 됩니다. 나는 죽은 자라는 사실로 인하여 나는 자유자가 되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2장 13, 1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사도바울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도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 했습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율법이 흠이 없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했지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언급을 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내가 말씀대로 지키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철심으로 내 안에 박힐 때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일이에요 나로 하여금 이 고래 뱃속에서 평생을 살게 만드는 거예요. 이 깜깜한 세상 속에서 요나처럼. 그래야 우리가 표적이 되거든요.
이스라엘 속에 이런 경우가 모세의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모세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19절에 이야기하고, 20절에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가 나와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럼 얼굴을 보지 못하는 자에 속한 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얼굴 부위를 주님께서 아예 도려내 버리지요. 얼굴 부위에 뭐가 달려있느냐? 두뇌도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세계에서는요,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죽음의 세계는 어떤 계획도 없어요. 어떤 목적도 없습니다. 전도서 9장 10절에 보면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이걸 자유라 합니다.
이게 자유에요. 얼굴 부위를 도려내는 거예요. 여러분이 유원지에 가게 되면 몸체는 예쁜 여자 원피스 그림 그려놓고 얼굴 부위만 동그랗게 도려내서 얼굴만 집어넣고 사진 찍는 그런 것이 있지요. 어떤 천사 그림 그려놓고 거기에 자기 얼굴 집어넣는 것. 얼굴 부위만 도려내는 거예요. 얼굴 부위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 뭐가 없는가? 이게 없어요. 얼굴이 없어요. 주님은 모세를 볼 때 얼굴 빼고 가실 게요, 얼굴만 도려내고 모세를 다루는 겁니다. 얼굴 없는 상태로 주의 일을 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의 잡다한 생각, 우리의 쓸데없는 나를 위한 놀이, 그게 전부 어디서 나오는가? 이 머리에서 이 얼굴 때문에 나오는 거거든요, 얼굴 때문에. 이것만 도려내게 되면 우리는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재미있는 실험이 뭐냐 하면, ‘얼굴 없는 미녀’를 생각할 때 얼굴 없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단어가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얼굴 없는 미녀’라는 거예요. 이상하다, 얼굴이 없는데 미녀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해요?
그런데 인간이 특징은 뭐냐 하면, 뭔가 비어있는 공백에다 뭔가 끊임없는 자기의 상상으로 그 공백, 빈자리를 메운다는 거예요. ‘지금은 내 한 달 수입이 2백만 원이지만 내가 5년 뒤에는 천만 원 될 것이다.’ 5년 뒤는 없어요. 없는데 그걸 좋게 메워요. ‘지금은 내가 대리 밖에 안 되지만 10년 뒤에 내가 사장될 거야.’ 혹은 ‘지금은 내가 바닥 박박 비는 청소부지만 나중에 주식 해서 이 회사 내가 접수할 거야.’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항상 상상을 해도 빈자리에다가 자기가 최고의 홀로 승자가 되는 내용으로 계속 그 빈자리를 메우니까 이 세상은 전부 다 허구, 허구와 허상만 꿈꾸는 자들의 만남이에요. 그러니까 그 허상을 위해서 남들을 자기 일에 끌어당기고, 맘대로 안되면 복수해버리고, 저주해버리고, 좀 잘된다 하면 약간의 보상은 해주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삶이잖아요.
자기를 위한 삶이 그게 무슨 주의 일이 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 가지고 해놓은 주석들마다 보면 가관입니다. 뭐가 가관이냐 하면, 사도바울은 자기가 주의 종이지만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 말씀 대로 자비량(自備糧)을 했다는 거예요. 자비량이라는 말 오랜만에 들어보지 않습니까? 옛날에 교회 좀 다녔던 사람들, 초짜들은 잘 안 들어봐서 그런 단어가 있었습니까, 하겠지만.
자비량,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목사면서도 자기 직업이 따로 있어서 교인들로부터 월급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돈 벌어서 그것으로 살고 교인들에게 무상으로 복음 전하는 그런 행태의 모습을 자비량이라고 하는 거예요. 교인들은 좋지요. 자기들 돈 안 나가니까. 헌금 적게 했다는 비난 안 받아도 되니 좋지요.
그런데 그걸 사도바울이 자기가 맡은 주의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왜 그런 해석을 하는 겁니까? 왜 사람들이 그런 해석을 하기를 원하는 겁니까? 그것은 해석자 목사 자신이 자기가 돈 벌든지 안 그러면 자기 아내가 피아노 레슨해서 돈 벌든지 해가지고 ‘이렇게 자비량 하니까 나를 제발, please, 진짜 목사라고 좀 알아달라.’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이 연사는 호소하는 거예요.
내가 월급 안 받고 내 힘으로 돈 버니까 요새 같은 이런 세상에 나같이 진짜 찐, 찐, 찐, 찐짜, 찐짜 목사가, 이런 목사가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의 종으로 알아달라는 겁니다. 이단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보기에는 이단이에요.
그게 왜 이단이냐? 그게 목사로서의 자기 놀이에요, 놀이. 자기가 가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홀로 선한 자가 되는 승자가 되는 그런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대외적으로 자기가 훌륭한 사도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대내적으로 자기 내부에서 무엇이 자기를 이긴다 했습니까?
죄가 자기를 이기는 거예요. 살면 살수록 자기는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기쁘게, 기쁘게 그걸 증거 합니다. 그게 자유자의 모습이에요. 왜? 그래가지고, 사도바울이 나중에 죄 지어가지고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 안 해요. 왜? 사도바울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이기 때문에 이게 없어요. 자기 얼굴이 없어요.
자기 얼굴이 이 육신, 몸뚱이, 육신은 오직 죄를 더욱더 죄 되게 드러내기 위한 율법의 실험도구가 되는 거예요, 실험도구. 자기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철심으로 박혀버리면 이제 남은 것은 주께서 내 몸을 쓸 만큼 쓰시다가, 필요한 만큼 쓰시다가 알아서 다 썼다, 뽑아낼 것 다 뽑아냈다 하면 알아서 주께서 우리를 버리실 겁니다.
이게 자유가 아니고 뭡니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께서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죄에 박혀 있음을, 악마와 결탁되어 있음을, 악마가 내 몸을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그걸 까발릴 수 있게 해주신 게 이게 얼마나 자유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게 얼마나 자유냐 이 말이지요. 나는 자유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의의 종 외에는 그 말을 못 합니다.
죄의 종은요, 나는 죄의 종이라는 말을 못 해요. 왜냐하면 죄의 종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오직 자기가 최종 승자가 되는 그 놀이마당을 떠나지를 못합니다. 망하기 싫어요. 실패하기 싫어요. 성공하고 싶어요. 내가 나다움을, 가치를 드러내고 싶습니다. 결국 나는 홀로 위대하고 싶어요. 나 혼자, 그것도 남하고 나하고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나 혼자 위대하고 싶어요. 내가 최고이고 싶어요. 이 시험에서 무슨 힘으로 우리가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안 되는데!
로마서 1장에 보면 극한대립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극한 대립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어요. 없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면 의인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18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걸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하나님의 철심이 박히게 되면 하나님의 저주와 보상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철심 자체에서 보상이 나오고 저주가 나와요.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 저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의가 되는 보상이 이 철심 자체에서 나온다고요. 철심 자체에서. 요나가 혼자 있을 때는요, 자기 살 궁리만 했어요.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납치되어서 감금되었지요. 그 어두운 고기 뱃속에 감금되었을 때 그다음부터 나오는 모든 일은 그 요나와 고기 뱃속에서 나오는 그 환경, 그 자체에서 나오는 그 상황을 거부하면 저주, 그걸 받아들이면 복이 되는 그러한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자기 성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세자로 ‘주의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일. 그러니까 나에게 해코지한다고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은 이 얼굴이 없기 때문에, 얼굴이 없는 자는 누구에게 복수를 감행할 권한도 없습니다. 그런데 안에 있는 철심이 알아서 주님의 적에게 저주를 퍼부어줘요. 우리가 굳이 저주를 안 해도.
그러니까 주의 일이라 하는 것은 나의 일이 날아간 그 이후에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먹고 마시고 몇 년을 사는 것 다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상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상을 받게 되어 있어요. 내 행한 대로 상을 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은혜로 상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 주의 은혜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악하고 음란한 요나의 세계다, 라는 것을, 저주받을 요나의 세계다, 라는 것을 우리를 요나같이 사용하시는, 그렇게 쓰시는 그 써주심에 의해서 모든 것이 주의 일로써 정리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일을 하지 않거든 그 형제에게서 돌아서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목사가 월급 안 받고 자기가 해놓고 남한테 구제하면서 공짜로 설교한 게 왜 주의 일이 아닌가? 그것은 자기 일이거든요. 흉내가 가능하고 모방이 가능해요. 사람이 아주 극한 윤리 도덕으로 할 수가 있어요. 자기 희생으로 할 수가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내가 죄인 됨을, 그런 짓 하는 것조차, 내가 자비량해서 남 구제하고 공짜로 설교하는 이게 죄입니다, 하는 것은, 그것은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주의 능력이에요. 그게 자유인입니다. 더 이상 내 자랑할 게 남아 있지 않은 그 자유를 감사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랑할 게 아예 없음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릴 때 어떤 아줌마가 애 낳으면서 집안이 안 좋아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거래를 합니다. “내가 아들을 낳으면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겠습니다. 그대신 이번 일만 잘 해결해주시면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겠습니다.” 이런 쓰잘때기 없는 악마적 결정을 해놓고 나중에 아들이 고3 되었어요.
수능 점수 잘 안 나오면 나중에 신학교 보내도 마음이 편한데 수능점수가 서울 의대 갈 점수가 나왔어요. 큰일 났습니다. ‘그래도 주님과 한 약속이니까 이거 안 하면 우리 집안 박살 날 거야.’ 하나님 그런 식으로 박살 안냅니다 왜냐하면 이미 박살 났기 때문에 이미 박살 났는데 뭘 박살 내요. 이미 쓰레기인데 뭘 더 쓰레기 할 필요는 없어요.
그걸 가지고 억지로 “아들아, 미안하다만 너 의대 가고 싶지? 그지? 하지만 미안하다. 신학교 가라. 그게 엄마의 소원이다. 하나님하고 약속한 거니까 변경은 없다.” 이게 바로 마귀 짓입니다. 이게 바로 마귀 짓이에요.
자식이 신학교에 가든 뭘 하든 그것은 자식에게 맡겨둬요. 왜? 자식은 자기 나름대로의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기 놀이가 있기 때문에. 엄마가 자기 놀이에 빠진 것처럼 자식도 자기 놀이가 있다고요. 자기가 최고가 되고 싶은 그 악마와 결탁된 놀이가 있다고요. 그걸 엄마가 어떻게 간섭합니까? 어차피 다 주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인데요.
하나님의 종말을 우리는 미리 경험해야 돼요. 십자가를 통해서 미리 경험한 자, 죽어서 천당, 이런 생각하지 마시고 미리 죽었고, 얼굴 빠졌고, 그 빠진 사이에서 주님의 얼굴만 우리 안에 작용하고, 가는 대로, 시키는 대로 사시면 도착하는 곳은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설프게 주의 일 흉내 내고, 예수님 모방하고, 사도바울 모방하는 짓 그만두게 하옵소서. 속에는 자기가 신앙적 영웅이 되는 탐욕이 들끓으면서 마치 아닌 것처럼, 희생하는 것처럼, 봉사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이 악마의 죄까지라도 이제는 우리가 밝히 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