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형제와 원수

아빠와 함께 2022. 7. 4. 09:57

형제와 원수 

2022년 7월 3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3:13-15

(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3: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생판 모르는 사람을 보고 ‘형제’라는 말을 하는 것은 가벼운 우호적 호칭으로 보지 마시고 진지하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동일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혈육적인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와 경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의 시작은 곧 자아의 시작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출생한 적이 있기에 나타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게 되면 의식이 죽게되니 자아라는 것도 없는 바가 됩니다. 인간의 운명은 ‘피조성’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는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에 고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악마 때문입니다. 악마는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처럼 심판주도 아니요 구원주로 아닌 것을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영원토록 피조물인 것에 대해서 원망한 겁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고 싶었던 겁니다. 이 악마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가 인간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해버렸습니다. 온 인간들이 악마의 조종을 받고 합세해서 하나님에게 대들도록 했습니다. 악마의 모든 일은 복음으로부터 사람들이 눈돌리도록 하는 겁니다. 한계가 있는 피조물들이 합세하여 힘을 합쳐 한계없는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에게 대들었던 겁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우선적으로 자기 생각부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그들에 의해 혈육적 형제들의 연대에 대해서 외부인이 파고들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형제들 사이에는 비밀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반대 외부인에 대해서는 내부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탐색하는 식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나 가족들 사이에는 이런 약점이 용납되면서 그 대신, 혈육 연대성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게 됩니다. 이런 혈육 연대성을 사정없이 박살 낸 사건이 바로 유월절의 밤입니다. 즉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대표해서 하나님을 마중나갈 자가 없음을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분명히 하게 했습니다.

즉 잉태된 자, 모두는 하나님의 공격 앞에 마땅히 고생해야 하고 저주받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누가 내 형제며 모친이냐”고 하실 때, 아무도 예수님의 형제가 될 자가 없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도 없었습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말씀을 행할 자가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마 12:50)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 ‘말씀의 칼’로 자기 자신을 찌르라고 주신 겁니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 말씀으로 치워버리게 하시라는 겁니다. 악마의 앞잡이로 살면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어지간히도 자신이 자기를 상대로 사기를 처온 겁니다.

진정한 존재는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의식이 있는 한, 오만하고 내면적으로 왜곡시키고 외형적으로 가식적인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자칭 신이라도 되는 양 건방짐을 발휘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주시는 바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인간의 뿌리가 잉태 됨, 그 너머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형제는 ‘잉태된 자가 아님’을 조건으로 합니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갈 4:27) 즉 땅에서 잉태되지 못한 자 되기 위해 땅에서 잉태된 것을 제거하시는 바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이 의식의 세계에 보내셨습니다. 최종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었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인간들은 잉태되고 난 뒤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되는 성도는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고 도리어 주님께서 반문합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아무 말씀을 안하셨지만 정작 주님의 형제된 자들은 도리어 반문하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들이란 자신에 관한 관심사를 우선으로 두고 계속 자기 말을 해왔음을 나타냅니다. 즉 원수됨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형제됨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미 잉태된 자를 무효화시키고 그들이 인생에서 남겨진 죄악들을(하나님의 원수된 태도, 즉 자기부터 생각하는 의식) 제거하시면서 그 흔적을 의의 흔적, 곧 예수님에게 해주신 것으로 일방적으로 번화시키는 일을 은혜로 하십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형제입니다. 형제란 형제들 사이에 그 어떤 차등이 없게 하십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  구약에서는 실제 혈육적 관계를 통해서 ‘잉태치 못한 자들 끼리 형제’가 어떻게 성사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야곱에게 있어 에서는 형이면서 원수였습니다.(창 27:41)

하지만 창세기 33:3에서는 야곱이 형에게 나와 일곱 절을 하고 형 에서는 동생을 껴안고 웁니다. 이것은 원수관계가 아닙니다. 이렇게 된 것은 먼저 야곱이 얍복강에서 어떤 괴한을 만나고 야곱은 밤새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데 실은 그 분이 자신을 축복했던 그 하나님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온 것을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리가 야곱의 가정 내에서 일어납니다. 아버지 없는 틈을 타고 욥의 형들이 요셉을 죽음이 넘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애굽나라의 노예로 빼돌렸고 결국에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요셉은 창세기 45:4-5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4-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들이 곧 하나님의 원수임을 아는 자가 주님의 형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단단한 우리들의 혈육 연대성을 말씀으로 깨뜨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7강-데살로니가후서 3장 13-15절(형제와 원수)2207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15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3-15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사도바울이 ‘형제’라는 말을 썼는데 도발적인 발언에 해당됩니다. 그것은 이미 형제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 그 단어가 굳어져 있어요. 부모가 같은 사람을 형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같지 않은데 형제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형제가 되려면 형제는 살아오면서 겪었던 그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약점을 갖고 있지 않은 걸 형제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만남은 그냥 만나지 않고 서로의 약점을 살피기에 굉장히 분주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예” (저 사람의 약점이 뭘까?) 약점을 쥐고 있어야 기 싸움에 눌리지 않고 그 사람에게 이용당할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형제라는 것이 굳어져 있는데 사도 바울은 형제라는 말을 ‘함부로’ 하고 있어요. ‘함부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이 형제라는 말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보면 원수라는 말도 언급하고 있어요. 원수같이 대하지 말고 형제같이 대하라고.

원수라는 것도 이미 육적인 입장에서는 우리 가족의 비밀에 대해서 엿보는 것들은 전부 다 원수입니다. 이걸 가지고 ‘육의 연대성’이라 해요. 강력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 육의 연대성, 우리끼리, 같은 DNA를 가진 우리끼리의 연대성을 그걸 깰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인생 살면서 힘들 때 결국 누가 도와주겠어요? 아무리 서로 싸우고 지내도 형제간에, 일가친척, 부모, 부모가 도와줘요. 남들은, 남들은 다 가 버립니다. 심지어 결혼했어도, 배우자도 가버려요. 배우자는 가더라도 날 낳아주신 아빠 엄마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아, 이게 바로 혈육의 연대성, 강력한 연대성입니다.

“저희 애비 말도 안 듣는게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고 아버지라 하느냐?” 불신자들이 교회 가는 사람들 보고 맨날 하는 욕이 그 욕이에요. “자기 애비 제사도 안 드리면서 무슨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고 그 난리냐?” 강력한 이 육의 연대성, 형제라는 것, 부모들이 떠나면서 자식이 좀 있는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뭐냐? “나 죽더라도 너희끼리 싸우지 마라.”

그런데 사실 싸움이라는 것은 부모가 분란을 일으켰지요. 분란을 일으켜 놓고 죽고 난 뒤에는 자기 정당성 챙긴다고 “너희끼리는 싸우지 마라.” 아버지는 삼촌들과 싸워놓고, 아버지 형제들 간에 싸웠으면서 자식들한테는 형제들 간에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형제라는 것이 강하게 이렇게 등장하는 것, 그것은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 땅에 원수 취급 받으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형제가 없어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막 3:33)라고 하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5) 하는데 그 듣는 자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가 없었어요. 형제가 없는데 여기서 사도가 “내 형제들아”라고 언급하는 것은 이점에 대해서는 사도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분명히 언급을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잉태치 않는 자만이, 이 땅에 잉태치 않는 자만이 하늘나라 주님의 형제가 된다는 조건을 단 거예요. 27절에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劬勞)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왜냐하면 이 잉태된 자는요, 혈육의 연대성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너무 강해서 세상적인 사람들의 형제는 될 수 있어도 주님의 형제가 될 수가 없어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잉태됨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로 작심을 했습니다. 이 땅에 잉태되었다는 것,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저주가 되게 만들어 버렸어요.

이게 피조물의 업보 같은 거지요. 태어났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은 누가 키우냐? 인생은 사람이 키우는 거예요. 하나님이 키우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키우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아주 대찬성을 할 거예요. 찬동을 할 겁니다.

네 인생 어떻게 키웠는가? 남들이 도와줘서 키웠지. 우선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다 키운 거예요. 젖 먹이고. 심청이 아버지는 애 먹일 젖이 없어서 동네 아줌마 젖동냥을 하고 돌아다녔다는 이야기가 심청전에 나오잖아요. 아버지는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 부모 아니시면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 그 시조처럼 우리가 부정해도,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나 하나하나 모든 인생에 대해서 사람이 관여해서 사람이 지금의 나를 키워온 거예요.

가족이 형제지만 대외적으로 봐서는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형제가 있어요. “아! 대~한민국!” 일본하고 축구 할 때 “아, 대~한민국~” 갑자기 외국 나가면 전부 다 애국자 되고요, 한국말 하는 사람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고맙고, 먼 타국에서 내 눈에 나타난 것만 해도 고마운 거예요.

그게 형제잖아요. 내가 살아온 것이 그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온 거예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는 겁니다.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타인 없으면, 남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말동무 없으면 우리는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전화 붙들고 있는 이유가 남이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지금 살맛이 나는 겁니다. 이런 사이가 비록 부모와 같지 않더라도 우리는 형제보다 더 나은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형제개념의 확장이지요. 형제개념이 계속 늘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생뚱맞게 사도 바울은 형제를 따로 설정하고 있어요. 형제라는 것을 따로 설정하고 있다고요. 누구 형제냐? 주님의 형제지요.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만 예수님은 우리 새로운 형제들의 맏아들이, 맏형이 되기 위함이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는 것은 예수님이 장자가 되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섬길 수 있는 그런 혜택을 입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라고 이야기합니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독자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아들이 양자를 통해서 형제라는 가족, FAMILY, 가족을 형성하게 된 그 이유에는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먼저 죄인을 형제 되는 바탕을 미리 마련해서 그런 거예요. 형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형제라 받아주는 그 요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미리 기초를 닦아놓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8장 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이 디도를 두고 형제라고 뒤에서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의 근거가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형제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해서 먼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한 은혜를 받는 사람끼리 연락을 취하도록 했는데요, 그 은혜가 뭐냐 하면, 모든 것을 균등하게 함이라.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

곧 부자든 가난하든, 또는 똑똑하든 똑똑하지 못하든, 인생을 어떻게 험하게 살았든 가볍게 살았든 상관없이 동일한 은혜를 동일한 부모로부터, 동일한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으면 그것은 전부 다 형제가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오늘 본문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원수라는 개념도 같이 동원시키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원수라는 것을 거치지 아니하면 형제로 들어설 수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저도 형제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내가 예수님의 원수였습니다.”를 먼저 고백해야 돼요. “내가 …… 해서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라 하는 것,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은 마귀거든요. 마귀, 마귀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마귀와 결탁되어 있느냐, 이런 반발이 있을 수가 있어요. 마귀한테는 고통이 있었는데, 마귀한테 고문과 고통이 있어요. 마귀의 고통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 내가 예수님과 달리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라는 이 사실이 마귀한테는 영원한 고통이 된 겁니다. 내가 누구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그 자존심 상함, 그게 악마의 고통이에요. 그래서 악마는 인간들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반기들게 만들어 버렸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더는 피조물, 쭈그리같은 피조물 그만할 수 있고 네가 독자적으로 네 인생 가치 있게 펼 수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들을 필요 없어. 이제는 네가 너만 바라보며 살면 되는 거야.” 악마가 붙어서 인간에게 부추긴 것은 뭐냐 하면, “너는 너만 우선적으로 바라봐. 네가 잘되는 이것이 성공이야.” 그것만 쳐다보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뭐냐? 나한테 시선 돌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에요. 나부터 챙기는 게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왜? 내가 중요하니까요. 또 악마가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낳은 자식, 내가 낳아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이것은 육적인 연대감 속에서 우리 가정만, “너희들은 우리 집 식구니까 우리 집 식구만 먼저 생각하면 돼. 어디 가도 우리 집 명예와 이름을 안 더럽히는 행동만 하면 아버지 엄마로서 내가 너 팍팍 밀어줄 게. 말하고 행동해도 ‘저거 누구 집 자식이야?’ 이런 욕만 안 얻어먹게 하면 너 팍팍 도와줄 게. 공부 똑바로 해. 너 공부 안 하게 되면 나중에 거지 되는 거야. 거지 되면 우리 가문에 먹칠하는 거야. 우리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공부 열심히 해서 우리 가문에도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요새 사법고시 폐지되었습니다만) 플래카드 하나는 우리 동네에 좀 붙게 해다오.”

이게, 전부 다 강력한 육적인 연대성을 확고히 하는 이게 하나님의 원수에요. 교회에서 중보기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남의 집 아저씨는 모르겠고 내 남편은 교회 가게 해야 하겠다.’ 그런 조로 중보기도 하잖아요. 그게 육적연대성이잖아요. 남의 자식 모르겠고 내 자식은 천국 보내겠다는 것, 일종의 사명감 같은게 막 우러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육적연대성, 성경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쪽에 러시아 미사일 쏘듯이, 표적에 미사일 쏘듯이 육적연대성을 완전히 와장창 깨는 쪽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졌습니다. 그게 뭐냐? 유월절이에요, 유월절 사건. “너희들은 하나님의 원수로서 너 대신 누가 죽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다.” 이게 유월절 어린양의 대신 죽음이에요.

“우리 가족 중에서 장남아, 네가 믿음 좋으니까 네가 하나님 마중 나가라. 아니 안 되겠다. 큰딸아, 네가 믿음 좋으니까 네가 마중 나가라.” 혹은 “우리 식구 육적 연대성 가운데서 아버지가 나가세요.” 아버지, 엄마, 손녀, 아들, 어떤 자도 하나님께 마중 나가기 위해서 나설 수 있는 자는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하는 겁니다. 오죽 우리가 원수였으면 우리는 대표 못 뽑고 어린양이 대표하겠어요. 오죽 우리가 원수였으면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만 챙겼으면 우리 대신 대신 누가 죽겠습니까?

그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형제 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요, 말씀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말씀이 일종의 칼이거든요, 칼을 가지고 누구 집 비판하라고 하는 칼이 아니라, 그 칼로 네가 너 자신을 찌르라고 말씀을 준 거예요. 말씀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찌르기 전에 네가 너를 찔러봐라.” 그 말이에요. 우리는 육적연대성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완전히 박혀 있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한 생각을 말씀을 가지고 치우게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24시간 온통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 좀 말씀으로 잘라내고 치우면 안 되나, 토막 내면 안 되느냐.

원수란 나 자신을 우선시하는 게 원수입니다. 그러니까 평생 우리는 내가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거예요. 이것을 세자로 정신병이라 하는 겁니다. 평생을 내가 나를 두고 사기를 쳐 왔어요.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너 잘될 수 있어, 구원받을 수 있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해, 맨날 내가 나를 의식하는 거예요. 의식하는 것.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못 보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의식하게 되면 의식은 언제 끝나는가? 죽을 때 끝나요. 죽기 전에는 맨날 내가 나에게 사기 치는 데 한평생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제대로 우리를 보지 못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못 보는 이유가 뭐냐? 제자들이 본인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만지자 마라. 너희들이 만질 대상이 아니야. 이 제자들아!네가 나를 볼 수 있는 의식은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주어져야 돼.”

네가 현재 너를 쳐다보는 의식 가지고는 나를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전부 다 그것은 사기 치는 겁니다. 뭐 로마서 4장에 보니까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니까 ‘주여, 믿습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습니다.’ 그 믿음이 네가 사기 치는 믿음, 행함의 일종이에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인간들이 피조세계에서 악마와 결탁이 되어서 자기만 의식하면 서 자기의미만 챙기니까 그 자기의미를 챙기는 거기에서 나의 의식을 미리 제거하는 뜻에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왜냐하면 의식하는 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만 존재하십니다.

예수님만 존재하시고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건데 만드실 때에 제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고 우리 가족도, 혈육의 연대도 고통스럽고, 그리고 악마도 고통스럽고요.

이왕 만들어진 것 주께서 제거해주시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악마한테는 제거를 안 해줘요. 불신자한테는 제거를 안 해줍니다. 여러분, 불신자 부러워하지 마세요. 정신병자들입니다. 그 사람들 빈스 방거(Ludwig Binswanger, 1881-1966) 라는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철학자가 정신병을 조사를 해봤어요.

그 사람은 프로이트를 아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인데요, 자기 나름대로 정신병을 조사를 해보니까 정신병의 모든 시작은 딱 한군데서 나왔어요. 그게 뭐냐? 오만이에요. 건방짐. 건방짐, 환상, 자기가 자기를 너무 우선했어요. 그래서 늘 멍하니 환상 속에 살아가는 그게 정신병이에요.

자, 정신병은 비현실적인 것을 정신병이라 합니다. 자, 비현실적인 것이 뭐냐? 자기가 오만해서 그런데, 그 오만이 건방짐이거든요, 건방짐이 되니까 자기 내부적 의식을 왜곡시켰어요. 내부마음이 왜곡되니까 그게 외부로 나와서 그게 가식, 위장하듯이 모든 행동이 남을 속이듯이 행동하는 그걸로 나왔다. 이 사람의 결론이 그거에요.

해결책은 없어요. 이 사람이 제시한 해결책은 뭐냐?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해야 된다. 뭐 그렇게 주장하는데 그것은 우상적인 이야기고요, 우상숭배적인 이야기지요. 자기를 의식하는 데 무슨 신이 있겠어요? 자기가 만든 신뿐이지요. 용어가 어떻게 되었든지.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느냐? 사도는 전체적으로 이야기해요. 사도의 모든 발언은 전체를 다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누구와 이야기할 때 전체적으로 다 품는 이야기를 안 하거든요, 무시해도 괜찮아요.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안 듣는다는 말이 아니고 시키는 대로 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체를 예수님한테 배워서 전체를 다 알고 요약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 원수들밖에 없는데 어떻게 형제가 되느냐? 거기에 첫 형제, 형제의 맏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을 입고 오셔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 육신에서 못 벗어났다는 것을 단정 지은 일이고요, 그분이 같은 육신인 인간들 속에 자기 육적인 연대성, 그것밖에 없는 인간들 앞에서 어떤 모습을 드러냈는가?

이사야 53장 7절에 나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똑같은 비슷한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낙심하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무슨 뜻이냐 하면, ‘쓸데없이 남들에게 자기 정당성을 변명하려고 애쓰지 말라. 주께서 아신다.’

주께서 아시면 되잖아요. 왜 말을, 자꾸 변명을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입을 열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원수에서 주님의 형제 되었으면 형제 된 티를 낸다고 우리는 말을 하지 말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않았어요. 말할 상대도 안 되니까, 말할 가치도 없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를 모르니까, 유일하게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말할 것도 없어요. 그냥 입을 열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날 원수 되었던 자가 형제 될 경우에는,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됩니다, 원수되지 않고 성도 되는 적이 없어요, 원수 되었다가 성도된 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입을 닫는 게 아니고 반문이 나와요, 반문. 반문이 나올 때 그 반문이 나오는 사람들의 공통점에 있어서 주님께 오히려 반문하는 그 집단을 ‘우리’라고 이야기해요, 우리.

‘우리’란 균등한 거예요. 뭐 재산, 인격, 학식, 관계없이 우리 안에, 새로운 개념 안에 우리의 특징은 뭐냐, 형제 된 특징은 뭐냐, 성도 된 특징은 뭐냐? 주님께 도리어 반문합니다. 반문하는 것이 마태복음 25장 37절에 나옵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33절부터 보면 쉽습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나님이 마지막 때, 심판할 때 그렇게 구분된다고 이야기하고요, 34절에 “창세로부터 너희(우리지요)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다음에 35절에 보면 “내가(예수님이지요)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내가)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내가)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내가)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내가)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관심있게 지켜)보았느니라.”라고 하니까 여기에 성도된 사람 우리의 특징이 뭐냐?

37-39절에,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우리’에요, 새로운 형제의 등장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의아해 하면서 도리어 반문해요.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언제 주님한테 이렇게 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했습니까?” 이게 구원받는 오른쪽 양이에요. 이런 반문 안 나오면 그것은 구원 못 받았어요. 형제 아닙니다. 구원 못 받은 거예요.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가 하는 것을, 평생 하는 것을 그때그때 제거하고 지워버리시는 일을 하신 거예요. 한쪽은 지워주시고, 한쪽은 그냥 남겨두니까 지옥 가고, 지워버리니까 천국 가는 거예요.

지워버린 그 자리에 주의 의가 흔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지나온, 살아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주님께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왜? 우리가 내 가족과 내 의식, 내가 잘 되어야 되겠다, 나 천당 가야 돼, 이 말도 안 되는 의식에, 하나님의 원수된 의식 여기에 집중하다 보니까 주님을 몰랐어요. 주님을 알지 못 했습니다. 나 변명하기 바빠서 주님을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주님한테 하는 그 못된 짓, 나밖에 모르는 그 못된 짓을 전부 다 다 제거하면서 제거된 그 자리가 의의 자리, 의가 나오도록 하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해석을 하고, 해설하시고 규정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생뚱맞게 천국에 오게 된 겁니다. 생뚱맞게! 천국을 노렸더니 가는 게 아니고, 야무지게 천국을 위해서 애썼더니만 가는 것이 아니고 생뚱맞은 거예요. “제가 언제 천국 갈 짓을 언제 했습니까, 주님?” 진짜 주님 멱살 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에요. “제가 언제 이 좋은 곳에 오기 위해서 내가 뭘 했다고 저를 여기에 보내십니까?”

여러분, 그동안 신앙생활 어떻게 했어요? 자기 의식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신앙생활하고 교회 나왔어요. 왜? 내 의식을 내가 지운 적이 없기 때문에 이거 하면 천당 가는데 보탬 될까, 이거 하면 하나님이 좋아할까, 좋아하는 것 해야지, 이게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그래놓고 신앙생활 한다고 ‘왜 요새 복이 안 오는지 모르겠다.’ 무슨 복을 바랍니까? 뭐 했다고요? 나만 생각했는데 뭘 했다고요?

지난 목요일에 원주에 가서 특강 했어요. 천년왕국론에 대해서 특강 하고 금요일에 내려오면서 봉화 ‘백두대간수목원’이라는데가 유명하다 해가지고 찾아가 봤어요. 복음을 위해서, 그냥 놀러 간 게 아니고요, 복음을 위해서, 지금 웃는 내가 좀 우습다만 놀러간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갔다가 트랩 타고 죽 돌고 내려와서 오는 중이었습니다.

날씨는 더운데 차 타고 한 5분쯤 왔어요. 오는데 뒤가 좀 서늘해요. 바람이 들어와서 보니 트렁크를 열어놓은 채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은 “그냥 갑시다. 우산 그거 얼마 안 하니까 그냥 갑시다.” 저는 아니야, 단호히 안 된다고 했어요. ‘우산이 나를 얼마나 기다리겠는가, 되돌아가자.’

우산이 두 개가 있었는데 트렁크가 열린 채로 출발했으니까 우산 두 개가 떨어져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제 아내는 “벌써 누가 주워갔다. 90퍼센트!” 나는 “아니다. 우산이 거기 있을 것이다.” 그런 대화를 하면서 다시 가보니까 우산 두 개가 다 있어야 되는데 빨간 우산은 없고 색깔이 약간 안 좋은 우산만 거기 있었어요.

그걸 챙겨서 이제는 트렁크를 제대로 닫고 내려오면서 ‘아, 이게 바로 주님께서 하신 거구나. 둘 다 버려두지 않고 한쪽은 택하고 다른 한쪽은 버려뒀구나. 만약에 우리가 안 찾아갔으면 우산이 얼마나 주인에게 섭섭해 했겠느냐?’

주께서 그냥 일방적으로 다 원수 된 자들이에요. 로마서 5장 10절의 말씀처럼 다 원수된 자들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악마와 결탁되어 가지고 온종일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주님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방적으로 한쪽은 버려두고, 양은 찾고 염소는 버려둔 거예요. 염소 되려고 애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염소라는 개념, 양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일방적으로,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냥 뒤집어씌운 거예요.

왜? 이게 전체니까. 이게 전체에요. 전체를 인간이 모르면 개인의 이익과 결부해서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모든 것이 나부터 챙기는 의식부터 시작하니까 어떤 성경 단어를 이야기해도 전부 다 나 천당 간다, 나 잘났다, 그 의미가 중첩이 되어서 튀어나오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전체를 포용하기 때문에 전체를 포용하는 그 말씀 가지고 개인, 나만 챙기는 너를 칼로 찔러버리라, 그 말이지요. ‘나만, 내 이익이 우선이야. 나 천당 가는 게 우선이야.’ 그걸 말씀으로 찔러버려요. ‘나는 내가 원해서 천당 가려고 했습니다.’ 그 나를 찌르세요. 살해해 버리세요.

형제라 하는 것은 자기 집에 있는 냉장고 안을 보여주는 게 형제사랑이에요. 특히 여자분들은 자기 집 냉장고 누가 들여다보면……, 도둑놈 아니면 그런 일 없어요. 살림 사는 여자에게 냉장고는 자기 자존심의 끝판입니다. 보자, 누가 냉장고 열면요, 그것은 은밀한 내 깊은 자아의 자리에 허락 없이 침투한 거예요.

그런데 냉장고를 열 수 있는 분을 만난다는 것, 하~, 정말 그것은 세상에 그런 기적이, 자기의 비밀번호를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것, 이것은 나로부터의, 그렇게 힘들었던 나의 피조물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이 자기 집 비밀번호 남한테 알려주지 말고요.

그 정도로 ‘나’라는 일부에서부터 이제는 전체로, 내가 날개를 타고 날아가 버려야 돼요. FREE, 자유처럼 날개를 달고 이제는 피조물의 고통으로부터 훨훨 날아 거기서 탈출해야 됩니다. 얼마나 그동안 마귀한테 시달렸습니까! 자기 자존심 챙긴다고, 혈육적인 연대감 그거 사수한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요? 이제 졸업할 때 되었지 않습니까!

그 졸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준비한 단어가 있어요. 그걸 가지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시편 10편 18절에 보면 “고아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이게 구원방법이에요. 왜 멀쩡한 사람인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아버지가 육의 아버지를 대체해서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이거든요. 그 이스라엘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알던 그 아버지, 그 아버지 속에 진짜 아버지가 따로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낳아준 잉태된 나는 무효가 되고요, 무효가 되면 나는 잉태치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 바로 거침없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를 남겨 버립니다. 그 대목,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 갈라디아서 4장 27-29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찌르는 칼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적연대성에서, 그 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 육적연대성에서 빠져나온 사람을 핍박하는 구조로 움직이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성령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전에 네가 성령으로 태어난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성악가 조수미는 이력서 길이가 2미터랍니다. 워낙 상을 많이 타고 워낙 중요한 성악 발표회를 많이 해서 그렇지요.

그러면 우리 성도의 이력서는 뭐가 거기에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육으로 태어난 자아는 드디어 무효가 되었다, 육으로 태어난 자아는 무효가 된 거예요. 왜? 자아는 이미지고 의식에 속하거든요. 존재에 속하는 게 아닙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아요. 피조세계의 환상적인 의식에서 나라는 게 있는 겁니다.

없는 나를 자꾸 있다고 우기고, 나를 보고 싶어하면서 평생을 헛된 세월을 다 보낸 거예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내가 없는데. 내 가정을 위하여. 내가 없는데 무슨 내 가정이 있어요? 육은요, 세월 지나면 가루가 돼요. 피조물의 가루입니다. 역시 욕망의 가루에요. 먼지가 되는 겁니다. “먼지가 되어~” 하는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먼지가 되는 거예요. 그냥 먼지 덩어리가 세월이 가면 조금씩 먼지로 변해가는 거예요. 붙잡을 대상이 아닙니다. 기대할 게 없어요. 그냥 흔적이라니까요. 죄지은 흔적만 남기고 우리는 사라져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한테는 일방적으로, 주님이 일방적이에요, 행함을 보고 해주는 게 아니고 일방적인 것을 은혜라 합니다, 은혜가 우리가 남긴 죄, 죄를 전부 다 의로 바꿔주신다니까요. 의로 바꿔줘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남아있는 것은 사명이지요.

성도는 왜 삽니까? 제가 누구한테 “당신은 왜 삽니까?” 물어봤어요. 정답은,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사명이에요.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사명입니다. 사명이, 내가 나이가 몇 살인지, 내가 어느 정도 재산을 가졌는지, 그걸 까맣게 완전히 덮어버려요. 흰 눈 덮듯이. 그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명이 중요해요. 성도가 사명 없으면 그건 죽은 자에요. 자기밖에 남지 않으니까 그것은 허구지요.

임 윤찬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전에 세계적인 피아노대회에서 18세로 1등을 했어요. 그런데 콩쿨 1등하고 난 뒤에 그다음날 16시간 피아노 연습했어요. 1등 했는데 좀 쉴 만한데 쉬지 않고. 그러면 콩쿨 그 전날은 뭐 했느냐? 16시간 연습했어요. 콩쿨 되고 난 다음 날 뭐 했느냐? 16시간 연습합니다. 16시간, 새벽 네 시까지 피아노 쳤어요.

그게 바로 사명감입니다.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요. 열여덟 살 먹은 애가, 걔가 단테의 신곡을 다 외운답니다. 단테의 신곡, 천국이 무엇이며 지옥이 무엇이며, 그 내용을 다 외운다는 거예요. 복음이 있는지는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우리가 그 애를 성도라 할 수 없고, 성도는 그것보다 더 뛰어나요.

우리 이력서에 어디서 1등 한 이력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육적으로 죽은 자로 규정되었다는 이력이 있어야 돼요. ‘이 땅에 잉태한 적이 없다’가 되어야 돼요. 잉태한 적이 없고 잉태한 적이 없어야 갈라디아서 4장 26절의 말씀처럼 비로소 어머니가 보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보겠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 어머니, ‘우리’에요, 우리, 우리 어머니라. 이렇게 한다고 해가지고 또 뭐 안 상홍 그런 것 따지지 마세요. ‘하나님 어머니’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무슨 하나님이 어머니가 있어요? 아버지라는 개념은 이 지상의 아버지라는 개념을 초월한 원천의 개념이거든요. 이 아버지가 그 아버지인 줄로 착각하고 있어요.

“우리 어머니라.” 창조주다 그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 예루살렘이. 이게 어찌 어렵지 않은 이야기에요?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우리를 알잖아요.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인생은 사람이 남들이 키웠다고. 어릴 때 부모가 키웠고, 주위에서 친구들이 키웠고, 선생님이 키웠고, 다 사람이 있어서 내가 사람답게 산다, 라는 것을 지울길이 없습니다.

엄연히 내가 이 땅에 잉태되어 있는데,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있는데 성경에서는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받는 거랍니다. 그러면 뭐 어쩌란 말입니까? 잉태되어 버렸는데요. 멀쩡한 육신이 있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뿌리를,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찌르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천, 육 말고 육 그 너머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뿌리에다 말씀으로우리에게 인도해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 처음 시발점은 혈육적인 형제간에 뭔가 이질적인 것을 집어넣어요. 그 이질적인 것이 언약이고 복음입니다. 악마의 하는 일은 이거예요. 자꾸 우리로 하여금 복음으로부터 눈 돌리게 만들어요. 우리가 없는데 우리가 있다고 우기면서 있는 것 잘 살아야지, 제대로 해야지, 쪽으로 강조하는 것은 백프로 악마의 성경해석입니다. 악마의 설교에요.

그런데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뿌리로 되돌려주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너 말고, 너 말고 너 있게 하신 분을 바라보게 해요. 그분이 뭘 하셨느냐를 보게 하는 거예요. 악마는 우리가 뭘 해야된다는 것에 치중을 하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있게 하신 주님의 행하심이 여전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시작을 뭐로부터 하는가? 그 뿌리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뿌리라 하면 여러분이 잘 아다시피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그 대목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되 반석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라는 그게 뿌리고요. 또 시편 1편 3-4절에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뭐 세종대왕 용비어천가, 그 노래에 보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묄 쌔……” 뭐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런 내용이 있는데 그거하고 달라요. 우리의 뿌리를 말씀에 두고 새롭게 말씀의 세계와, 전체의 세계와 부분인 우리를 매치시켜 주는 일을 주의 말씀으로 하시는 것, 그렇게 연결된 것을 가지고 복된 사람이라, 말씀이 주는 복이 체액처럼 줄기를 타고 우리 안에 올라오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에도 나오지요. 1-2절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즉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고 너희는 가지다. 내게 붙어있어야 네가 열매를 맺는다.’ 하는 이게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이런 사실을 실제적인 육의 연대성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3장 3절에 보면 야곱과 에서의 관계가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서 창세기 27장 41절에 보게 되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돌아가실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이렇게 했어요.

내 것 다 빼앗아갔으니 이것은 나 위주로 먼저 생각하는 에서 입장에서는 용서가 안 되지요. 죽여서 그 재산을 빼앗아 와야지요. 그랬던 야곱과 에서의 관계, 원수 관계지요. 의도적으로 원수 관계를 형제간에 만들었어요. 쌍둥이로 태어나게 해서. 그 원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창세기 33장 2-4절에 보니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이게 원수지간입니까? “형님, 제가 속였습니다.” “아우야, 상관없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내가 아는데 그까짓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고 서로 껴안고 있는 거예요. 왜 야곱이, 이렇게 형을 맞서서 형을 제거하지 않으면 내것을 지킬 수 없다는 자기의식에 가득 찬 야곱이 언제부터 이렇게 형을 반겼습니까?

그것은 내가 나를 의식하는 자체가 진짜 존재하시는 하나님 앞에 원수의 모습인 것을, 하나님의 적의 모습인 것을 자기가 밤중에 얍복강에서 그걸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에게 나타난 그 누구 정체 모를 대상을 향하여 야곱은 밤새도록 싸웠기 때문에.

싸운다는 것은 밤새도록 원수 취급해서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던 그 야곱, 그 야곱이 나중에 해가 뜨기 전 새벽에 하나님이 비로소 자기 정체를 밝힐 때 그분이 바로 자기에게 복을 주신 그 당사자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복의 원수가, 복을 받고자 하는 내가 하나님의 원수였구나.’

복이라 하는 것은 나를, 원수를 원수 되게 하는 그 절차와 과정을 겪어야 비로소, 비로소 내 의식이 아니라 주님의 의식에 준해서 눈을 떠서 내가 새롭게 잉태되어야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제거 대상이고 소멸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야.’ 1천 9백몇 년도, 여러분 주민등록에 다 기재된 것은 제거 대상이라고 기재된 거예요.

이와 같은 모형적인, 구약 자체가요, 가정의 모형이거든요, 모형에서 신약의 성도가어떻게 구원되느냐를 미리 보여준 거예요. 뿐만 아닙니다. 야곱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 야곱에게 아들이 요셉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무려 12명이 있습니다.

열 두 명이 있는데 야곱이 유난히도 요셉이라는 아들만 사랑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요셉의 엄마, 진정으로 야곱이 원래 사랑했던 그 아내는 라헬이거든요. 라헬을 사랑했던 이유는 뭡니까? 야곱의 의식 안에서 ‘예뻐서’ 끝이에요. 한번 예뻐하니까 계속 예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내를 사랑했고, 그 아내가 낳은 자식만 사랑했습니다. 특히 불쌍한 것은 그 요셉이 자기 엄마가 없어요. 일찍 죽었어요. 자기 동생 낳다가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 없는 그 빈자리를 사랑하는 아빠가 사랑으로 다 메워주니까 특별관리대상이 되고 만 거예요. 특혜를 준 겁니다.

이게 다른 열 명의 형제들에게 미움이 된 거예요. 미움을 받은 요셉, 밉다는 것은 곧 원수지간이 된 겁니다. 철없는 요셉이 “나 꿈꿨다! ‘형님들, 나한테 다 꿇어’ 하는 그런 꿈 꿨다~.” 이렇게 자랑질하니까 형님들이 ‘너는 죽었어, 이제.’ 틈만 나면 저 동생을 죽이기로 작심하다가 결국은 죽였습니다.

그 혈육적 연대감 속에서는 요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었습니다. 뭐 애굽에서 살아 있어도 그것은 자기 연대성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존재에요. 죽은 존재인데 하나님의 언약이 이 야곱의 아들들을 잉태치 못한 그 뿌리, 그 뿌리의 자리에 데려가기 위해서……,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뭔가를 했는데 주께서 아무것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로 네가 살아왔다는, “제가 언제 주님한테 그렇게 했습니까?” 하는, 그 주님의 오른편 형제들만 앉는 천국의 백성되게 하기 위해서, 있던 그들을 무효로 돌리는 그 작업을 형제 중 하나를 뽑아서 그 형제의 혈육적연대감 속에서 앞서서 탈출을 감행시켜 버렸어요. 애굽에 가서 국무총리가 되게 해놨어요, 국무총리.

국무총리가 되어서 다시 돌아오게 했습니다. 형제들은, 형님들은 아직까지 자의식, 혈육적 연대감 그것이 전체인 줄로 알고 있어요. 전체를 몰라요. 잉태치 못했다는 새로운 세계, 잉태치 못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그 새로운 세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있는 것만 챙기면서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창세기 50장에 보니까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아버지가 죽었어요, 아버지 죽고 난 뒤에 형제들은 자기가 자기한테 자기 생각을 한 거예요. 우리 생각에 우리가 모함해서 동생을 죽였으니까 우리가 동생이라면, 입장 바꿔 생각해 본다면 ‘동생이 아버지 살아 있을 때는 참고 있다가 아버지 돌아가셨으니까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복수에 나설 것이다.’

왜? 모든 인간의 자의식은 반드시 보복과 복수하는 식으로 모든 행동에나서기 때문에 그래요. 형님이 공부를 잘하면 동생이 그냥 동생이 아닙니다. ‘네가 공부를 잘해? 내가 너보다 돈 많이 벌어서 내가 형님한테 복수할 거야.’ 또는 형님 없고 누나 있으면 ‘누나 한번 봐라. 내가 누나보다 돈 더 벌 거야.’ 일종의 복수거든요. 자의식에서 나온 복수.

그런데 자기들 생각에는 자기들이 아는 전체는 기껏 그것뿐이에요. 왜? 인간의 자의식은 그것까지, 범주가 그것밖에 없어요. 그래가지고 ‘요셉이 국무총리니까 우리를 복수할 거야. 내가 준 돈 다 내놔, 이렇게 나올 거야.’ 해 가지고 걱정을 합니다.

그걸 두고 요셉이 50장 19-21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이미 그 전에 창세기 45장 4절에도 그런 취지의 말씀이 있었지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말은 “형님, 형님이 나한테 한 것 나 모릅니다.”라고 한 게 아니에요. 반드시 우리가 성도라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원수된 것과, ‘매일같이’입니다, 매일 원수 된 것과,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하나님의 의로 바꾸어놓은 그 일을 매일같이 반복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어제의 믿음 오늘도 써먹고 그거 안돼요. 한 달 전에 받은 은혜 가지고 오늘도 써먹고 하는데 매일같이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그 계기를 원수된 것을 계속해서 일으키는 사건들이 터지게 만들어요. 해놓고 ‘아, 나는 나만 먼저 생각을 하고 있구나. 나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거기서 나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구나.’ 그걸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된 거거든요.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로서 하나님처럼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같은 인간 같으면 ‘너도 나하고 똑같다’ 하고 봐주겠는데 하나님 같으면 용납이 안 되지요. “이 마귀 새끼!”라고 용납이 안 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잃어버린 우산 찾듯이 일방적으로 그냥 보호해주고 데려가시는 거예요. 생명을 주시려고.

“자, 형님이 나한테 한 짓은 형님들 당신들이 아시지요? 입 다물고 있고요, 이제부터 내 차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리기 위했습니다. 언약이 뭐냐? 야곱이,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 진짜 하나님 만나고 ‘내가 하나님 원수’인 것을 깨닫는 그 절차를, 똑같은 절차를 야곱 우리 가정에 나를 이용해서 실시했습니다. 그 절차를 밟게 했습니다. 형님들은, 내가 형님들 원수로 생각할 것 같지만 절대로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라는 절차를 겪게 하셔서 생명은 반드시 그래야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하는 겁니다. 형님들, 아버지 죽고 안 죽고와 관계없이 제 사명입니다. 형님들 지켜 드리겠습니다. 제가 국무총리잖아요. 형님들 지켜주고 형님들 생계 다 보장하겠습니다. 저보고 좋~다, 하지 마시고 언약의 하나님이 바로 이런 식으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증거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뿌리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걸 증거 하는 사명이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 성도의 뿌리입니다. 입을 다무시고, 도살할 양같이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상의도 없이 알아서 우리의 죄를 다 대신 희생해서 가져가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원수 맞고, 주님께서 우리를 원수에서 구원하신 것 맞고, 우리가 죄지은 것 맞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 된 것 맞고, 그것을 증거 하시는 그 증거로써 그 주님이 하신 일을 되풀이하는 데서 주님의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냥 존재하지 말고 해야 될 일을 허락해 주옵소서, 하게 하옵소서. 나부터 챙기는 것 빼도 박도 못하고 우리의 본성인 것을 주께서 너무 아셔서 이제는 우리의 태어남을 거쳐서 우리의 뿌리까지, 우리의 뿌리부터 눈여겨보고 먼저 볼 수 있는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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