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말씀의 중첩

아빠와 함께 2022. 6. 6. 08:54

말씀의 중첩 

2022년 6월 5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3:1-2

(3:1)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내가 우선인지 말씀이 우선인지를 사도는 분명히 합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의지가 가동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세상의 구성분입니다. 세상의 성질이 사람의 성질이 된 겁니다. 따라서 세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닙니다. 세상을 탓하는 것은 곧 그 세상의 현상이 자기 자신을 탓하는게 됩니다.

따져보면 인간에게는 실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 넘겨준 본성일 뿐입니다. 세상은 항상 한 덩치가 되어 움직이고 그 안에서 요동치고 변화합니다. 하지만 세상 자체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보편적인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 양심에 입각해서 삽니다. 양심은 나의 가치를 드높이고 향상되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도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있어 필요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인간에게 양심이 있기에 자기가 망하고 손해되는 식으로 양심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일단 인간들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면 그것을 믿고자 합니다. 이 믿음은 자신의 선한 양심에서 나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훌륭하다는 분으로 소개된다면 누구나 못 믿을 분은 아닌데 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 본인은 사람들이 원하는 믿음의 대상을 비켜나가는 식으로 이 땅에서 움직였습니다. 즉 사람들의 이익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미움의 대상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모든 사람의 상식과 양심이 부합되지 않는 식으로 행동에 나서십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이 동행했던 제자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벌써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철석까지 끝까지 자신을 놓지 않는 믿음말입니다.

지옥에 가면서까지 자기를 격려하고 독려하고 힘 내라고 위로해 줄 자는 오직 자기 자신 뿐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버릴 추호의 마음도 없습니다. 끝까지 함께 할 겁니다. 심지어 그 길이 자살의 길이요 저주의 길이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믿고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기꺼이 지킬 용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결코 인간의 손에서 달성되거나 놀아날 대상이 아닙니다. 말씀은 ‘주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님답게 되기 위해서 제시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만을 위한 게임을 하십니다. 이런 마당에서 인간은 ‘피조물’이 됩니다. 

마태복음 13:47-48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은 그물 안에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가 담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골라내어 나쁜 것은 버립니다. 여기서 고기 입장은 의도적으로 제거하십니다. 피조물의 입장은 조금도 주님의 의중에 끼어들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친히 미리 정해놓으시되 결과는 인간 책임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물리학에 ‘양자 중첩 현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성자 하나를 벽을 향해 쏠  때에 중간 차단막에 틈을 하나만 두지 않고 둘을 두 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중성자 하나가 두 개의 틈을 두고 어느 쪽으로 통과하는지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실험의 결론은 중성자 하나가 두 가지 틈을 동시에 같이 통과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벽면에 나타난 그림자는 중성자가 작은 입자가 남긴 자국이 아니라 파동이 되어 나온 흔적을 보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과연 하나의 중성자가 어느쪽 틈을 지나갔는지 보려고 칸막이 부근에 관찰장치를 달라놓았더니 결과는 파동이 지난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입자가 하나의 틈을 지나가 자국만 남겨 놓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중성자 자신을 관찰하려는 자가 있음을 중성자가 의도적으로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이 실험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인간의 관찰을 마주해서 자연은 실상을 의도적으로 변신한다는 겁니다. 주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인간쪽에서 과연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면 거짓된 말씀해석만 갖고갈 뿐입니다.

창세기 27:38에서 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야곱의 형 에서는 야곱에게만 복이 돌아간 그것이 야곱이 복받을 짓을 해서 복받았다고 해석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받은 복은 양자중첩 실험은 처음부터 하나의 복이 있었을 뿐이고 그 복은 필히 복못받을 자를 대동하게 만듭니다. 즉 아무리 해도 복을 받지 못할 자들을 등장시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인간들의 자기 관찰이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 방식을 훼방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생이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체질을 통해서만 가라지와 알곡이 구분되어지기 위함입니다. 이 방식일 때만 하나님께서는 영광받으십니다. 아모스 9:9에 보면, “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특징은 늘 말씀을 위해, 복음을 위해 하나님에게 호출당하고 소환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해서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는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를 발굴해 내십니다.(행 13:46,4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만 믿었다는 바로 이점을 회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말씀중첩)220605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2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2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믿음은 보편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인간이라면 믿음이 있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그런 뜻이에요. 왜냐하면 보편적인 것이 아니니까. 인간들의 보편적인 것을 한번 따져보자 그 말이지요.

인간의 보편적인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게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은 양심이 아니다. 양심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우기지 말라.’ 그런 뜻이지요. 믿음은 모든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너한테 없는 게 나한테 있을 수 있고, 너한테 있는 게 나한테 없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뜻도 돼요. ‘네가 보기에는 같은 인간으로 보이냐? 그런데 아니거든.’ 이런 뜻이다, 그 말이지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있는 자 따로 있고 믿음이 없는 자 따로 있어요.

코로나바이러스가 생기고 난 뒤에 코로나바이러스 걸린 사람 따로 있고 안 걸린 사람 따로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중국에 계신 분하고 전화를 했는데 그분이 저의 안부를 물어왔어요. “한국은 환자가 50만이나 된다는데 목사님네도 당연히 걸렸지요?” “우리는 안 걸렸습니다.” 하니까 “그게 말이 돼요? 안 걸린다는 게 그게 말이 됩니까?”

‘걸려야 하나? 보편적인 것, 인간이라면 다 걸리는 것인데 그게 왜 안 걸리지? 아, 이게 걸린 사람 따로 있고 안 걸린 사람 따로 있구나.’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 따로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 따로 있다면 이것은 주도권이, 걸리고 안 걸리고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 돼요.

믿음이라 하는 것, 인간이 결심해서 얻을 수 있는 것 같으면 모든 인간은 양심상 살아가고 양심상 좋은 것이고 바른 것이라 하면 누구나 인간은 의지로서 그걸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니까 이 말은 뭐냐? 인간이 결심하고 결정하고 선택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이 말 자체가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모독을 의미하는 겁니다.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모든 사람이 가도록 그렇게 조치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누구나 고생하거든요. 이제 죽고 난 뒤에는 호강 좀 해보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에요. 어떤 인생을 살았든 다 힘든 인생 살았잖아요. 그렇다면, 서로가 다 힘든 인생이라면 ‘죽어서 지옥 갈래.’ 이것은 보편적이 아니지요. ‘나는 꼭 지옥 가고 싶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이 아니고, 누구 아무나 만나서 툭 치면서 “죽어서 어디 갈래요?” 하면 “천국, 좋은 데 가고 싶습니다.” 이게 보편적이에요.

그래서 천국 가고 싶은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천국 가고 싶어요, 구원받고 싶어요, 하나님 저 구원해 주세요, 이거 믿음 아닙니다. 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 다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씀의 뜻은 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원하고 있지만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여기 말씀 안에 들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1절에 보면,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편적이 아닌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공되는 믿음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라면 ‘이것은 성경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들 하는데 이 말씀이 여기 보면 “주의 말씀”이에요. 그냥 성경의 문자나 문장이 아닙니다. 그냥 말씀이 아니에요. 인쇄된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을 누가 몽땅 다 갖고 있느냐 하면, 우리 주님이 몽땅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 주님은 내가 아니고 나는 주님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주님은 나에게 뭐냐? 타인이 돼요. 타인, 남이 된다고요. 그러면, 주님이 말씀을 독점해 있다면 내가 아닌 나 말고 다른 타인이 독점해 있기 때문에 구원문제, 믿음 문제, 영생문제는 그 주님이라는 타인의 독점적인 결정에 따른 겁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압력을 가할 수 없어요. 협박 공갈이나 협상을 요청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냥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양심 정도, 그리고 미래를 미리 예방하고 조치하는 그러한 생각들, 인생 경험들, 그 정도 있지요.

그런데 그 정도는 나도 가지고 있고 너도 갖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에요. 여기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라고 되어 있어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요소를 내가 내 쪽에서 제시해봐야 말짱 꽝이고 이것은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돼요. 주도권은 주님한테 가 있으니까. 이 정도 하면 설교 마치고 다들 집에 가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안 해도 소용없고 해봤자 소용없다.

모든 것이 아니라면서요? 선착순 아닙니다. 선착순 아니에요. 추첨제도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추첨제도 신청한 사람에 한해서만 추첨을 하는데 우리는 신청요건도 안되고 신청도 안 받아 줘요. “저 천국 가렵니다.” 해도 주께서 안 받아 줍니다. 신청도 안 돼, 입사원서도 못 씁니다, 시험 칠 자격도 없어요. 시험 쳐서 천국 갈 것 같으면 원서 한 백군데 내겠어요. 할 수 있다면.

그런데 만약에 천국 가기 위해서 원서 한 백 장 쓰라고 하면 나만 씁니까? 보편적인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시도를 할 거라는 말이지요. 보험도 한 개 가지고는 못 미더워서 여러 개 다 들고, 심지어 장례보험도 보람상조 말고 여러 곳에 다 들고, 하여튼 단도리단도리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돈이 없어 못 하지 돈만 있으면 수십 군데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원천봉쇄돼요. 원천적으로 그것이 차단이 되어버린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를 구원하소서.” 주께서는 “그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놀고 있네. 네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뭘 얻을 게 있기 때문에 주를 사랑하지 네 평생 하는 행세 봐라. 얻을 게 없는데 네가 누굴 사랑해?” “제가 주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주께서 “말씀은 내가 독점했어. 네가 지킬 말씀은 하나도 너한테 없어. 저리 안 가?”

하나도 지킬 말씀이 없는데 지키기는 뭘 지켜요, 지킬 말씀이 없는데. 그래서 이 말씀에 보게 되면 인간들이 구원의 말씀이 있다고 제시된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모든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다른 말로 하면 선악 체계지요,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고, 나쁜 것은 제거하고 선한 것만 계속 가져와서 누적을 시키는 것, 어떤 강의에서 그것을 지양(止揚)이라 했어요, 쓸데없는 것은 버리고 귀한 것만 택하는 것을 지양이라고 해요, 지양, 지향(志向)이 아니고 지양, 지향은 바라보는 것이고 지양한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하는 그 모습은 항상 좋은 것만 바라고 나쁜 것은 제거하는 그런 지양적인 것, 그런 식으로 성경 말씀을 자기한테 보태는 식으로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게 하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런데 그 선배들 하는 행동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되받아 버립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보면, “화 있을찐저” 아예 저주부터 일단 합니다. 저주부터.

독사의 새끼들아, 뱀의 자식들아, 이렇게 저주하듯이 “화 있을찐저” 저주가 있을찌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자기 연출에 매진하는, 자기를 조작해내는 인간들아,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주님 뜻은 이겁니다. ‘내가 너희들 몰라? 내가 너희들을 만들었는데 너희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다 알아.’ 인간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회칠이에요. 회칠, 석회질을 회반죽해서 석회 칠을 하는 것. 인간은 회칠하고 주님은 체질하고 그렇지요. 체질, 체로 치는 것.

아모스 9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체질하는 것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도 이야기했지요. 알곡과 가라지를 체질해서 골라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 모든 인간들과, 피조세계와 세상 전부는 하나님이 홀로 즐기는 게임이라 보시면 돼요. 주님이 홀로 즐기는 게임. 우리가 거기에 주도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게임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은 나쁜 고기, 이것은 좋은 고기, 이렇게 분류시키는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필히 주님께서는 나쁜 고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나쁜 고기를.

주님이 인정하지 않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 그다음에 좋은 고기는 주님이 인정하는 좋은 고기를 따로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그 내용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안 찾아봐도 여러분이 그 대목을 아시지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천국은, 다시 말해서 천국을 만들어내시는 주인공 되시는 그분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각종 고기를 다 모으는데 그 각종 물고기 안에 뭐도 반드시 들어가야 되느냐? 나쁜 고기도 반드시 들어가야 돼요. 나쁜 고기.

47,48절에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은 게임을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부터 나쁜 고기는 버리고 좋은 고기만 취득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나쁜 고기 좋은 고기 한 그물에 다 담습니다. 다 담아요. 담아놓고 나쁜 고기는 나쁜 고기대로 따로 분류하고, 좋은 고기는 좋은 고기대로 따로 하는 것. 여기에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버릴 것을 처음부터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일단 그물에 다 담아놓고 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세상 어떤 일도 주님의 자신을 향한 자신의 일인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노리개에요. 인간은. 그걸 세자로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피조물.

어떤 영화 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남자가 바람을 피우니까 그걸 나중에 여자도 알고 “너 바람피우면 나도 맞바람 피울 게.” 이렇게 된 거예요. 영화의 대사에. 그러니까 남자가 화가 나서 “내가 바람을 폈다면 당신은 ‘내가 뭐가 부족했을까? 내가 더 잘해볼까? 내가 뭘 부족하게 했기에 저렇게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갔을까? 내가 앞으로 잘 보살피고 보듬어줘야지.’ 네가 아내가 되었으면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바람피운다고 같이 바람피우나?” 할 때 여자의 명대사가 나옵니다. 그게 뭐냐? “네가 같이 맞바람 피운다고? 그럴 수 있느냐, 이 이 여자야.” 이렇게 나오니까 여자가 하는 말이 “이 바보야! 그걸 갈라섰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걸. 뭐 그리 복잡하게 이야기해? 그걸 갈라섰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주님, 왜 제 열심을 안 받아 줍니까?” “인간아, 그걸 갈라섰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내침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그걸, 그걸 뭘 그렇게…….” “평생 주님에 대한 충성과 섬김을 좀 보시옵소서.” 아, 참,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주님 생각 안 하고, 자기가 주님의 노리개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자기가 자기를 끝까지 책임지려고 애쓰고 있는 이걸 좀 봐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갈라섰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그걸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원인이 있어요. 인간이 새삼스럽게 주님께 대들고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은 세상의 본성이에요. 주께서는 세상을 버리기로 한 겁니다. 그물에 담겨 있는 좋은 고기만 채택하고 나머지는 주께서 쓰레기로 버리기로 한 거예요. 인간이 마음 씀씀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본성은 세상에서 스며들어온 거예요. 새삼스럽게 나쁜 사람이 아니고 세상이 나쁘니까 거기 물들어서 같이 나쁜 거예요.

옛날 어릴 때 이발을 해도 집이 잘사니까 호텔 이발소에서 한 거예요. 왜 그 비싼 호텔 이발소에 가느냐? 그것은 아버지가 잘 사니까 그런 거예요. 어린아이가 아프리카 생각해서 “아버지, 아니 됩니다. 나는 저 낮은 곳 이발소에 가겠습니다.” 그런 어린애 없어요. 그냥 그걸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요.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이요, 마땅하고 당연하다 인정한 그 삶을 그냥 갈 뿐이에요. 인간에게는 실수라는 게 없습니다. 자기 실수에 후회하지 마세요. 애초부터 실수가 성립 안 되는 존재예요. 인간은 세상이 그러하니 나도 그러한 거예요, 그냥. 무슨 거기에 실수가 있습니까? 무슨 가슴을 치고 다 내 탓이요……, 네 탓 아니에요. 천주교 탓이지만, 뭐 세상이 그렇고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세상이 그러니까 자신이 뭘 세상을 변화시킬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지가 이 근 대위입니까, 남의 전쟁에 가기는 왜 가요?

아, 인간은 왜 자기 자신을 몰라도 그렇게 모릅니까? 인간은 그냥 던져진 존재, 세상에 그냥 툭 던져진 존재예요. 나 있고 세상 있는 게 아닙니다. 세상 먼저 있고 나 있는 거예요. 사람 나고 돈 난 게 아닙니다. 돈부터 먼저 났고 그다음에 내가 태어나서 돈 챙기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걸 꼭 굳이 연구 많이 해야 돼요? 연구할 필요 없어요. 주님께서는 그 악한 고기 나쁜 고기, 그걸 어떤 경우로 악한 고기 나쁜 고기, 악한 선지자라고 하느냐 하면, 일단 그물에 포획된 존재에 대해서만 악한 선지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포획의 그물망이 뭐냐? 율법이고 이 율법에 걸려든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없어요. 그러나 율법이 만들어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을 인류를 대표해서 표본 채집하듯이 딱 그것만 채집해서 시료처럼 보니까 거기서 무엇이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선지자는 이런 선지자가 악한 선지자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우상은 이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한다고 전체 이방 민족으로 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표본 채집하듯이 뽑아서, 모집단을 뽑아서 조사를 하신 거예요.

그게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래서 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되면 우리 이방 민족인 우리 입장에서는 좀 의아한 일들이 있어요. 그중 한 예가 아비가일과 나발 이야기입니다. 아비가일은 여자 이름이고 나발은 그 남편 되는 남자 이름이 이에요.

그 둘이 사는데 그 마을에 누가 지나가게 되었는가?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현상 수배범이 되어버린 다윗이 그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곳이 마온이라는 지역입니다. 거기 사는 나발이라는 사람은 거부에요. 아주 잘 살아요.

다윗 일행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스러우니까 나발이라는 사람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나의 수행원들에게 먹을 거라도 좀 달라.” 이렇게 하니까 그 나발이라는 아저씨가 “아, 요즘 왜 거지떼쓰리가 꾀이는지 모르겠어. 지나 개나 정권 잡은 사울에게 대들고, 백성들한테는 인기도 없으면서 잘난 체나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들, 이런 꼴사나운 인간들 진짜 귀찮아 죽겠어.” 하고 아주 냉대, 천대를 해버렸어요.

그런데 그 아내 아비가일은 이 다윗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소년 때 이미 골리앗을 이겼던, 하나님이 함께 있는, 현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것을 아비가일이 알고 다윗을 건드리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비가일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는 부부가, 물론 전부터도 갈라졌지만 완전히 쪼개집니다. 25절에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자기 남편이거든요. 다윗보고 하는 말이, “내 남편 불량한 존재니까 개의치 마옵소서.”라고 한 겁니다.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곧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제 남편 미련합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런 뜻이거든요. “ 여종은 내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즉 “그때 그 현장에 제가 있었으면 그렇게 주님을 천대하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자기가 나서서 남편이 천대한 그 일행을 아내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섬겨줍니다.

그때 다윗이 하는 말이, 그 여자의 정성을 보고 다윗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나를 막았다. 안 막았으면 너희 재산 다 날아갔어.”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37절에 보니까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하나님이 그 남편 되는 나발을 죽였어요. 부부관계 그것은 중요하지도 않아요. 부부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 그 가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은 이방 민족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받아들이기 곤란한 거예요. 왜냐하면 이방 민족은 ‘양심에 준해서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는 것이다.’ 이게 보편적인 거에요. 믿음은 보편적이 아닌데 인간들의 양심이라는 것, ‘될 수 있는 대로 착하면 되잖아. 착하면 나중에 하늘의 복을 받겠지.’ 이게 보편적인 믿음이에요. 이게 보편적인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특수성은 먼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의 존재의 특수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자, 그게 바로 다윗과 아비가일 그 둘의 관계를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는 주인이 되고 하나는 종이 되는 겁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운명은 결코 나한테 달려 있지 않다는 겁니다. 거기에 반해서 그 남편, 미련한 자, 하나님한테 얻어맞아서 갑자기 죽어버린 그 나발, 그 나발의 태도는 이런 겁니다. 보편적인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냐? 그러면 다 나발이에요. 내 것 내가 지키는 게 너무나 상식적으로 부합되는 이야기거든요.

인간은 자기 목숨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끝까지 자기가 책임지고 싶어해요. 이게 상식이고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세요. 구원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라고 누가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저거 괜찮네.’ 하고 내 인생은 평소에 내가 책임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뭐가 작동하느냐? 나의 보편적인 의지와 결심과 선택이 작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좋다고 그걸 가지고 “그게 믿음입니다.”라고 구라를 쳐서 그 사람을 교회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특수성이 아무 의미가 없게 돼요. 나중에 예레미야 선지서에 가보면 하나님께서는 바짝 집어내듯이 거짓 선지자들을 발굴해요, 거짓 선지자. 이것은 선지자 사무엘 때도 있었지만 하여튼 이 거짓 선지자가 범람하기 시작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이렇게 구약성경에 나와 있을 때는 여러분이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요 한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거짓 선지자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어떤 이야기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걸 거짓 선지자로 규정을 했을까? 여러분 그 점을 생각을 해봐야 되고요, 오늘날 거짓 믿음, 무엇을 가지고 거짓 믿음이라고 했을까를 연관해서 생각을 해봐야 돼요.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는 예례미야 2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만 그 중에 한 구절을 예를 들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짓 선지자의 기준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에 담아주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을 하나님의 계시랍시고 전할 때 그게 거짓 선지자입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킨 거예요. 그런데 이점을 생각해야 돼요. 자기 생각이면서도 외칠 때는 “이것은 내 생각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주신 겁니다.”라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그걸 가려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입에 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내는 자가 거짓 선지자입니다.”라고 아무리 성경에서 이야기해도 그걸 구별할 수 있는 재주는 우리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봐야 되는가? 거짓 선지자가 어떤 때 출몰하느냐? 출몰할 때가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입니다.

“이스라엘 멸망 받을만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없애버린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저주한다.” 요거 진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많이 들어봤지요? 다른 교회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릴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요거 백퍼입니다. 백 프로 거짓 선지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거기에 자기부정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거기에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백 퍼센트 요거 보장합니다. 내 손에 장 지지라면 지집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에요. 모든 사람의 특징은 뭐냐? 절대로 인간은 자기를 저주하지 못합니다. 이게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에요.

인간은 자진해서 지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지를 못해요. 자기를 늘 격려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욕해도 나는 나를 독려해요. 우리는 내 사랑을 내 속에서 없앨 수가 없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나만 쓰레기인가?”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고요.

“저 코로나 걸리고 싶어요.” 이런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코로나 걸려서 허리 부러지도록 기침하면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이런 것 없습니다. “주여 할 수만 있거든 피하게 하옵소서.” 이런 것, “죽을 때 죽더라도 내 목숨은 장렬하게 내가 끊고 싶습니다.” 이게 인간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이에요.

인간의 인간 됨, 내가 인간이냐, 그렇다면, “내가 짐승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품위는 신이시여, 보장해 주소서. 마지막 품위, 개처럼은 죽기 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고, 놀고 있다, 정말! 개가 너 보고 화내겠다.”

모든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그 이스라엘을 보듬고 싶어요. 인간의 보편적인 희구와 보편적인 소망을 자기가 끌어안고 싶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그래서 평화로운 공존이 행복을 보장한다는 거예요. 평화로운 공존이 행복을 보장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공존이 되려면 모든 말씀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는 방식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절대기준을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절대기준을 문제 삼지 않는 거예요. 며칠 전에 울산강의에서 제가 코로나 진단 키트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줄 나오면 코로나 안 걸린 것이고 두 줄 나오면 코로나 걸린 것이다.

코로나 검사하는 사람이 자기부터 살겠다고 마스크 쓰고요, 그렇게 등장하지요. 이게 인간세계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아예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줄이 한 줄이냐 두 줄이냐를 관찰하는 그 작태, 그 자체가 이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을 안 받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신학과 철학을, 인간의 과학을 안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이렇습니다. 선택은 주님이 하시고 결정은 인간의 책임으로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사전선택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시고, 그 운명은 네 책임이라고 인간책임으로 돌리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도대체 어떤 원리, 도대체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그러한 논리를 전개하는가? 그 비슷한 논리가 양자물리학에서 나옵니다. ‘양자중첩’이라는 게 있습니다. 양자중첩이라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중성자 하나를, 중성자 알갱이 하나를 쏘아서 벽면에 도달하게 하는데요, 그 사이에 중성자 알갱이가 지나갈 틈을 한 개 놔두고 쏘는 게 아니고 틈을 두 개를 놓아요.

틈을 두 개를 놓고 벽면을 향하여 쏘고 난 뒤에 결과를 보니까 알갱이가 단 한 개, 두 개가 아니고 단 한 개의 알갱이가 양쪽의 틈 두 곳을 다 같이 통과해 버렸어요. ‘이중슬릿실험’이라는 겁니다.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은 도저히 해명할 수 없었습니다. 알갱이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데 그것도 순서로 통과한 것이 아니고 동시에 통과했어요. 하나인데 어떻게 두 개 틈을 동시에 뚫고 갔느냐? 두 개의 틈을 하나의 알갱이가 동시에 뚫고 가니까 ‘간섭 효과’가 되어서 여러 개가 들어왔다는 표시가 흔적으로 벽면에 남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알갱이가 왼쪽으로 갔는지 오른쪽으로 갔는지, 요걸 한번 과학자들이 보려고 통과하는 그 지점에다가 관찰 기계를 두고 쏜 다음에 살펴보니까 두 곳을 동시에 통과했던 흔적은 없고 한곳을 통과했다는 흔적만 남아 있어요. 그 뜻은 뭐냐? “네가 뭔데 내 일을 관찰하느냐?” 관찰하는 게 문제에요, 관찰.

인간은 내 운명을 내가 관찰해서 나중에 천국 갈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 내가 구원된 사람 맞는지 아니면 지옥 가는지를, 내가 나를 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게 관찰인 거예요. 그 관찰하는 이야기가 창세기 27장 37절에 나옵니다. 양자물리학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양자물리학에서 이중슬릿 실험에서 나온 결과를 양자중첩이라고 이야기해요. 중첩되어 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중첩은 뭔데? 몰라요. 그냥 용어만, 이것은 기존의 용어로는 안 되니까 용어를 그냥 이렇게 쓰는 겁니다. 양자중첩이다. 양자중첩이 뭔데? 우리는 모르는데 두 곳을 동시에 통과한 그것을 양자 에너지가 중첩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나폴레옹의 최후의 전투는 뭐였는가?” 하고 물으니까 초등학교 학생이 “최후의 전투는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것은 말 하나 마나지요. “아침에 못 먹는 것은?” 질문하니까 “아침에 못 먹는 것은 점심과 저녁입니다.” 말하나 마나예요. 물리학에서 말하는 이야기가, 용어 자체가 아무 내용이 없어요.

창세기 27장에 에서하고 야곱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야곱을 축복하고 에서를 저주합니다. 야곱이 거짓말해서 축복을 받아낸 게 아니에요. 그것은 인간들이 보편적 믿음도 아닌데 누구나 갖고 있는 믿음 가지고 관찰해보니까 ‘아,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거짓말했지만 그 거짓말 무릎 쓰고 축복 줬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38절에 보니까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동생한테 준 축복처럼) 그리 하소서 하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은 저주받을, 지옥 갈 인간들이 할 소리가 아니라 이 말이지요.

저주받을 인간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왜 저를 버리십니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왜 저를 버리십니까’ 하는 말을 할 자격이 너한테 애초에 없다는 것을 왜 네가 사전에 몰랐느냐?” 하는 거예요. “버려도 내가 버리고 안 버려도 내가 안 버린다는 사실을 네가 왜 모르고, ‘딴 사람은 버려도 저는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그 말입니다. 그걸 묻는 거예요.

에서의 이런 사고방식은요,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모든 인간이. 그런 인간이 실수한 거예요? 실수는 없다고 했지요. 세상 자체가 그래요. 세상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자기 위주에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37절부터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너희가 죽인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아버지가 사흘 만에 살렸다.” 그 이야기 하니까 “어찌할꼬!” 한 거예요. 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을 받으려면 회개가 먼저 전제조건이 되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회개하면 자동적으로 성령 옵니까?” “자동적으로 줄게.” 그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까짓거 회개하지 뭐.” 문제는요, 인간이 회개를 못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회개가 되려면 우상을 안 섬겨야 되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최후에 믿는 것은 자기 자신만 믿고 있어요. 하나님 믿는 것은 그것은 그냥 해본 소리예요. 우리는 내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나를 떠나본 적이 없어요. 나는 나를 믿는 내 믿음에서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뭐 다른 신을 섬겼다고요? 아이고, 우리가 다른 신을 섬겼네. 부처를 믿었네. 이제는 예수 믿지.” 이렇게 회개가 되는데 부처 믿는 자가 부처 믿은 적이 없고 예수 믿은 자가 예수 믿은 적이 없어요. 아무리 예수 믿고, 부처 믿고, 알라를 믿어도 나는 나를 믿는 믿음을 포기까지 하면서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 믿을 위인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냥 몸부림쳐 보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열성적으로 믿으면 믿음이라고 해주겠지.’ 그냥 몸부림쳐 보는 거예요, 그냥! 누가 아느냐? 본인이 알아요, 그걸. 남들은 속아 넘어가도 본인은 못 속이거든요. 내가 나를 버려? 미쳤어요? 내가 나를 버리게. 나한테는 내가 전부인데 나를 버려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어디를 구라를 쳐요, 구라를!

주님의 말씀은……,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직 주님의 주도권만 나타날 뿐이에요. “이것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 믿어라.” 그런 것 아닙니다. “너희들은 못 믿어.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내가 결정하는 거야.” 한결같이 그래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나와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자체가 죄에요. 세상 자체가. 그러면 나를 통해서 세상 관찰하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시선이 필요하지요. 세상은 주님이 갖고 가요.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어어? 어디를 갖고 가요, 나를 위한 세상인데. 나를 지켜줄 세상인데 왜 갖고 갑니까?” 이런 식이에요.

“내가 바람피운다고 너도 맞바람 피워?” 이 말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나를 보듬어줘야지.” 이게 바로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에요. 내가 실수하고 모자라고 하더라도 안아 주고, 안아 주고 격려해주는, 마치 내가 나를 격려하듯이 세상도 좀, 쫌! please, 좀 그랬으면 좋겠다고 요구하는 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쓰레기입니까? 쓰레기에 달린 눈도 같이 쓰레기에요. 그 쓰레기 눈으로 관찰하니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지요. 세례요한은 알아요. 성령을 통해서. “보라, 세상을 몽땅 가져가시는 분. 세상 죄를 위해서 가시는 분. 그 가셨던 그 마지막 모습이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모습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회개를 통해서 성령이 오지만 이방인에게는 그냥 성령이 먼저 와버려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회고하듯이 다시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다 보게 하십니다. ‘아, 내가 믿는 믿음이 그게 믿음이 아니었구나.’라는 사실, 회개도 성령이 와야 가능하다는 사실, 그걸 알게 됩니다.

그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십자가에서 오는 거예요. 십자가 피 흘림에서 와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똑같은 안목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보는 것, 그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은 아니니까, 일단은 일단 쓰레기 같은 내 믿음은 아니니까요. 나를 쓰레기라고 이야기해주는 그 믿음이거든요. 그게 관계다, 그 말이지요.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고 그 관계, 그 관계가 믿음이에요.

다윗은 주와 함께 있고, 나는 그 다윗을 섬기는 종이고, 그걸로 됐지 뭐요. 그러면 됐지요. 그게 바로 말씀의 위력입니다. 늘 말씀에 호출당하는 삶, “이리 와서 이거 해라.” “예” “저기 가서 저거 해라.” “예” 이게 바로 성도의 삶이에요. 믿음 관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사도행전 마지막에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이런 단서가 붙어 있어요. 26절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도바울이 이사야의 말씀대로 현재진행중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사도행전 13장 46절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선택은 주님이 하고 결정은 본인책임으로 돌리는 방식, 이것은 양자중첩이 아니고 말씀중첩입니다.

말씀 안에서 너는 아니고, 예수님은 다 된다.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한 말씀 안에. ‘네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으려 하는 너는 버림을 당하고, 말씀이 말씀 자체의 주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너희들은 구원받는다.’ 이게 말씀 안에 같이 함께 들어 있는 거예요.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버리나,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그 뒤의 말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만 믿었다는 것이 그 새로운 의미가, 믿음이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누구한테? 영생주기로 예정된 사람. 예정을 누가 하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영생주기로 예정한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없는 그 믿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을 일방적으로 통제한다는 뜻이에요. 왜? 주님 자신의 게임이니까, 나쁜 고기 좋은 고기 게임이니까.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교회 와서 이런 소리 합니다. “내가 농부가 되어서 밭을 갈아서 혹시 보물이 있는가,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평생 교회 섬겨 왔는데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게 마태복음 13장에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을 가는데 갈다 보니 덜커덕 걸리는 게 있었어요. 보물이 땅속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버렸다 그 말이지요.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말씀을 갖고 자기도 그렇게 되어 보겠다고 평생을 교회 다녔는데, 교회 다녀서 다 해봤는데 아직까지도 보물이 없어요. 그거 뭐 당연한 거지요.

사도행전 13장 48절과 같은 취지의 말씀이 사도행전 18장 10절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고린도에서의 말씀인데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9절에,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말해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주께서 시키니까 하는 거예요.

시키니까 하는데 주께서 미리 말씀으로 뭘 하느냐? “이 성중에 내 백성 많다.” 곧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무엇이, 무엇이 참된 설교자고 무엇이 참된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감사히 여기는 것, 그걸 고맙게 여기는 겁니다. 인간의 인위적인 방법으로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저는 어느 팝송 가사에서 보니 그게 들어 있어요.

피처럼 붉은 장미에 달린 은빛 가시가 산산히 부서져 첫눈 후에 내린다.
​The silver thorn of bloody rose
Lie crushed and broken
on the virgin snow

그 피가 하얀 눈에 내리니까 눈은 하얗지요. 피는 붉지요. 눈에 확 들어오지요.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무얼 말하려 했는지
​Now I think I know
​Oh, What you tried to say to me

당신이 온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How you suffered for you sanity

그들을 놓아주려 얼마나 애썼는지. 누가? 주님이.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하지만 그들은 들으려고도 하지 여전히 듣고 있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아마도 그럴 겁니다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빈센트> 라는 노래의 가사에요. 그 가사 후반부에 이런 게 있습니다.

For they could not love you
그들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도, 인간들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었어도
But still your love was true
당신의 사랑은 언제나 진실했습니다
And when no hope was left in sight
한가닥 희망도 보이지 않던 그 때에, 온통 세상이 까맣을 때에
On that starry, starry night
별은 빛나고 있었고
You took your life, as lovers often do
흔히들 연인들마냥 당신은 스스로 생을 거두었지만, 주님은 스스로 생을 거두었지만
But I could've told you, Vincent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죠, Vincent. 이 세상은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러니까 세상 자체는 의미 없다고, 홀로 주님께서 가르쳤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 결국 당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또 있을까요?

언제?

Starry, starry night
아직도 별이 빛나는 밤에

이 깜깜한 밤에 십자가만 빛나고 있을 때 지금도 이 복음은 세상 사람들한테는 냉소적인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전했습니다. 왜?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가 있다는 하나님의 시그널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다시 보게 하옵소서. 나 행복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 아님을 깨닫게 해주시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을 어떤 취지에서, 어떤 관점에서, 어떤 시선에서, 십자가 위에서 비로소 의미가 밝혀진다는 것을 거기서만 감사한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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