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쌍둥이 언약

아빠와 함께 2022. 6. 12. 23:24

쌍둥이 언약 

2022년 6월 12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3:3-5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3:4)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악인은 악인으로 드러내면서 현실을 만듭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대단히 후한 점수를 주는 태도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일단 대충 선하다고 자부하고 그 다음에 자기 성향과 맞지 않는 자들에게는 악하고 간주합니다.

나 자신을 호의적으로 선한 사람으로 인정해버립니다. 그 결과로 인해 인간들의 선과 악의 구분은 나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로 정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이 땅에 인간들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의인될 자와 악인될 자를 지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전 결정이 언약을 통해서 현실로 형성합니다. 창세기 25:23-26에 보면,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육적으로 불임여성이 이었던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시이 선행하면서 그 내용에 따라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어납니다.

이처럼 축복과 저주는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서 그 내용이 그대로 현실로 만들어집니다. 이 원칙이 하나님의 언약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따라 예수님께서 오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사랑받을 의인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나머지는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다 악인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니되니까요. 따라서 말씀의 진정한 해석은 말씀을 대하는 자기 자신이 저주받아야 함을 합당하게 여기고 인정하는 태도에서만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에 의해서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이유는, 모두 ‘자기를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는 이런 본질에서 나옵니다.

이게 또한 쌍둥이 언약 원칙에 합당한 모습입니다. 언약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만 먼저 있었을 뿐입니다. 없는 존재가 도로 없이되는데 무어거리 억울합니까? 전혀 억울해야 할 근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문둥병, 소경, 절뚝발이, 귀머거리, 세리, 창기, 귀신 들린자, 가난한 자를 상대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 말씀의 경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의 경로는 인간들에게는 애초부터 ‘자기를 섬길’ 그 어떤 권한도 자격도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경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내세우거나 가질 만한 것이 없는 자들의 모습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에 활동하시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니 그 모습이 ‘나를 섬기고’, 혹은 ‘나를 위해서’가 아닌 모습인 겁니다.

마가복음 8:22-26에 보면, “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소경, 즉 사람을 구체적으로 본 적이 없는 자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세상 보기 관점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 자기 침을 소경의 눈에 바르니 온전히 세상 만물이 다 훤히 볼 수는 없는 단계를 성립됩니다. 이 단계에서 소경은 ‘나무 같은 것으로’ 사람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2단계로 다시 안수해 주시고 그 눈이 뜨게 된 소경을 사람들이 사는 그 마을로부터 격리시키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작업이 관여한 자를 기존의 인간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조치입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가 나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어떤 차원으로 보시는지는 관심이 없이 그저 자신의 가치를 사수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완전한 선함과 성의있는 애씀과 빠진 것 없이 촘촘한 지식 등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의 마음 속에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 너무 많이 들어차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인간의 행위는 자신을 마땅히 죽을 인간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습니다.

쌍둥이 언약 원칙에 비교됩니다. 인간들의 종교행위도 실은 자신이 자신을 섬기는 몸의 본성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데 먼저 천국에 오게 된 장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 어디서 왔느냐?”고 말입니다. 인간은 악에서 온 자들입니다. 마치 구약 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부터 나왔다’는 것은 쌍둥이 원리에 부합되는 양상입니다. 스스로 개과천선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국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를 위해 준비해 두신 바는 ‘속죄’입니다.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히 9:5)

천사들(그룹들)이 만나기 위해 대기해 있는 곳은 속죄소입니다. 이는 법계의 뚜껑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만나주십니다. 이 속죄소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희생제물이 동원됩니다. 절대로 인간들의 선함이나 성의있는 노력이나 빈틈없는 지식이 아닙니다. 이 희생제물이 있는 곳은 산당이 아니라 예루살렘입니다.

산당은 쌍둥이 언약이 없는 곳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위해 빌 의지가 있으면서 얼마든지 빌 수 있는 곳입니다. 즉 자기에게 이익이 있음을 계산해서 정성을 다하는 곳입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뭔가를 하는 자들의 집단입니다. 반면에 십자가 사건은 의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십니다.

그래야 속죄의 의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7-18, “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이제 성도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과 같이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주님의 속죄 활동에 참여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도는 주님의 시간, 곧 주님의 인내하심에 동참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세상이 망할 때까지 말입니다. (벧후 3:6-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에게 분노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데살로니가후서 3장 3-5절(쌍둥이언약)220612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3-5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3-5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난 시간에 한 2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대하면서 이 성경 말씀이 어디를 통과해서 들어오느냐 하면, 악한 자들을 통과해야 성경 말씀의 진수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사람들이 인간성이 좋아서 이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자꾸 오해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이 악한 자들을 거쳐서 들어와 버리면 악한 자들은 이 성경에 나오는 이 약속에 대해서 아주 발작을 일으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4절에서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도가 명한 것, 명령한 것, 주의 명령입니다, 주의 명령을 전하게 되면 거기에 필히 악한 자가 발생되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의 눈으로 악하다, 선하다,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 참 좋아 보인다, 인간성 좋다, 그런 것으로 사람이 선하다, 악하다, 판정 못 하고요, 아무리 사람이 선해도 내 돈 떼먹으면 그 날로 그 사람은 악한 자가 돼요. 나한테 손해를 입히면 그것은 악한 자로 규정하게 됩니다. 그것은 악한 자가 아니지요. 인간들이 자기한테 잘해주면 선한 사람이고 못 해주면 악한 자, 모든 인간은 그런 식으로 판정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악한 자라 하는 것은 반드시 주의 말씀을 거쳐야 비로소 판정이 된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 그러면 주의 말씀을 거칠 때 악한 자로 드러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지요. 우리 자신이 악한 자로 들통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 우리 자신만을 섬기면서 살아오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한테 이익 없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악한 자가 어디 있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이게 뭐가 악하냐고 발악발악 대드는데 그 대드는 것 때문에 나자빠지시고 죽으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수하려고 해요. 나를 지키려고 하는데 나를 지키려고 할 때 내 지킴에 대해서 방해가 된다든지 장애가 되면 우리는 가차 없이 저주가 날립니다. 그 상대에게.

지킨다는 것이 건강, 돈, 이것만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뭘 지키느냐? 인간은 자기의 자존심을 지킵니다. 자기의 명예를 사수하고 목숨보다 자기의 가치 의미를 더 중요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가지고 이리저리 쑤셔 보는 거예요. 한 열 사람이 줄 서 있는데 첫째 사람부터 주님께서 말씀으로 쑤셔봅니다.

첫째 사람, 예를 들어 마태복음 19장의 부자라 합시다. 주님께서 “네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오라.” 할 때 첫째 사람 부자는 삐져서 집에 갔습니다. 그 뒤에 한참 그걸 바라보는 우리는 ‘악한 자가 저기 있었구나. 부자 되면 뭐하나? 주님의 말씀을 위배하는 악한 자니까 저 인간은 지옥 가도 마땅하지.’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니까 또 쑤시고 들어옵니다. 그 사람을 예를 들어 빌라도, 빌라도라고 합시다. 본디오 빌라도를 쑤시니까 본디오 빌라도는……, 본디오 빌라도를 쑤시는 장면이 요한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는 아니지만, 대통령은 아니지만, 권력자는 아니지만 잠시 우리가 본디도 빌라도라고 치고, 5월 10일에 취임한 대통령이라 치고 윤석열 대통령이 예수님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죄수가 되어서 본디오 빌라도한테 나타났습니다. 자, 여러분 앞에도 나타났어요. 여러분이 최고 지도자고 통치자라고 일단 간주해 보는 겁니다. 상상은 뭔들 못하겠습니까? 해보는 거예요. 그런데 고소하는 사람들이 유력한 사람들이에요. 유력한 그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이고 경제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 한 사람을 모셔놓고 나한테 재판을 원하는데 그 재판을 제대로 원하겠습니까?

자기 뜻대로, 그저 형식으로 우리가 시키는 대로 그만 대충 처리하기를 바라면서 나한테 미루는 거지요. 미룰 때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인간은 자기의 명예와 가치와 의미를 지킨다 했지요. 내가 동(洞)서기도 아니고, 그냥 아르바이트학생도 아니고, 내가 최고 대법관이고 대통령이라면 체면이 있지요. 이걸 지키고 싶어서 예수님한테 뭐라고 하느냐? 이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 내가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풀어줄 권한도 있는데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요?”라고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사람이 줄에서 두 번째 사람인데 열 번째 서 있는 우리는 “저 인간, 저 악한 자.”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주님 존재 자체가 우리를 쑤시고 들어올 때 그 본디오 빌라도는 그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할까요, 안 할까요? 못하지요. 자기 체면이 있으니까, 위신이 있으니까.

열 번째 서 있는 우리는 마음껏 두 번째 서 있는 본디오 빌라도를 욕해줍시다. “저게 권력 맛을 알아 가지고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감히 창조주요 심판주인구주에 대해서 말을 함부로 하는 거봐라. 얼마나 함부로 해? 저런 시건방진 인간이 어디 있어?” 막 우리는 대통령의 불신의 모습을 보고 분노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윤씨 집안이라면, 같은 집안이라 살짝 그 분노가 없어집니다. 만약 대통령이 우리 사돈이라면, 아직 자식이 없어서 사돈은 안 되겠다, 사촌 간이라면 윤석열 막 옹호하고 이재명 까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본디오 빌라도에서 나오는 그 말뽄새를 보세요. 내가 너를 풀어줄 권한도 있고 잡아넣을 권한도 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 잘 걸렸어. 너 잘 걸렸어!’ 하는 태도였어요. “내가 뜻만 있으면 내 아버지가 얼마든지 천군 천사 보내서 나를 풀어줄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잡힌 것이 너보다 힘이 모자라서 잡힌 줄로 아느냐? 내가 내 종들로 하여금 이 세상 권력자들, 이 세상의 종들과 싸울 수도 있다. 그래서 승리한다. 네 종말이야, 네 종. 네가 이 나라의 통수권자라고 하는데 네 부하, 네 군대를 나의 군대가 이긴다.”

그게 36절에 나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이 나라에서 지금 왕이라는 뜻이에요. 나도 왕이고 너도 왕이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주님은 ‘너는 죄인이고 내가 왕이다.’ 그런 뜻으로 답변한 거예요. “나는 이 세상에 진리를 위해서 왔다. 내가 진리에 대해서 증거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빌라도가 하는말이 “진리가 뭔데?” 진리가 뭐냐, 묻는 거예요.

37, 38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진리가 뭐냐, 이렇게 묻는다는 말은 그동안 본디오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 최고통수권자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부러워하고 있고. 그게 두 번째 서 있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첫 번째 부자 날아 갔지요. 나가리되었지요. 두 번째 선 최고 권력자, 주님 앞에 나가리되었지요.

세 번째, 교회 목사가 딱 서 있다 봅시다. 목사라고 해가지고 “교회는 내가 알아서 잘 하는데 구태여 주님 당신이 간섭할 게 없습니다. 교회법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권사 될 때는 제직회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다.’ 그런 법이 다 잘 되어 있으니까구태여 당신이 관여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나오면서,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드립니다. 그게 뭐냐? 예배와 찬송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목사한테 “너는 예배와 찬송 드린다고 하는데 길가에 강도 만난 자가 있을 때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왜? 바쁘니까.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나님 경배하고 예배하고 종교적인 일을 한다고 누구도 주의 일을 관심 없이 그냥 지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딴엔 주의 일이라고는 했지만 실은 누구 일이냐 하면, 본인의 일이에요. 본인의 일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체면과, 내 위신과, 내 가진 재산과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평소에 나는 나만 섬기고 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너는 너를 섬기는 순간 나를 섬긴다는 이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경, 절둑발이, 가난한 사람, 병든자, 귀신들린 자,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준 이유가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지킬 게 없게 만드는 절차를 보여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자기가 자기 것을 지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것을 지키는 것이 너무 상식이고 너무 당연합니다. 따라서 이걸 악이라고 이야기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내걸 내가 지키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

그런데 이 절둑발이, 소경, 귀머거리,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창기, 이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더이상 이 사회에서 체면과 위신을 지킬 게 아무것도 없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에게 작업을 할 때 주님의 작업이 꽂혀서 주께서 자기 백성 만드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뭐냐? 더이상 내가 나를 섬길 수 있는걸 주께서 다 없애버리고 남겨두지 않는 현상을 드러내는 겁니다.

실제로 예를 들면 좋아요.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도. 마가복음 8장 22절-26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어떤 소경 하나를 예수님이 고치면서 눈에 침을 뱉는데 단계를 두 단계로 만듭니다. 침 뱉으시고 그다음에 멀쩡하게 눈을 뜨는 게 아니에요. 두 단계를 거치게 하면서 그 단계 속에서 눈 감긴 소경이 처음 사람을 봤을 때 어떻게 보느냐? 그 관점과 예수님이 사람을 보는 관점과 합치시키는 그 과정을 우리에게 들춰 보이십니다.

침을 뱉으시고 눈을 뜨게 해놓고, 그런데 그게 온전히 뜬 건 아니에요. 그 상태에서 “뭐가 보이느냐?”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그게 사람 같습니다.” 그 소경이 전에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귀로만 들었지. 사람이 아니고 나무 같은 것이 간다. 이게 주님의 우리 인간 보기입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길에 있는 가로수 나무하고 인간하고 똑같아요. 사람도 아닌 게 사람행세하고 있는 광경, 주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인간도 아닌 게 인간행세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무슨 자기의 자존심이 있고 의미가 있고 뭐 가치가 있어요? 체면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나무인데요. 개가 가다가 오줌누는 나무인데요. 전봇대 비슷하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님 보시기에. 그게 주님의 관점입니다.

그런 인간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해요? 그런 구라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찬양하고 예배한다는 것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우길 때나 나올……, 그러니까 본인이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자기가 보기에 자기가 존엄성이 있는 인간인 줄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보니까 이게 악한 줄을 모르는 거예요. 주님은 악을 악대로 들춰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어요. 인간이 아니고 악의 덩치, 악의 뭉치, 악의 덩어리, 숯덩어리, 진흙 덩어리, 인간을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는 겁니다. 진흙 덩이를 섬길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섬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악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어느 정도로 악하냐 하면, 본인이 악한줄을 모를 정도로 악해요. 그 악한 인간들이 말씀을 두고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면, 제가 보면 한 세 가지로 대처하는데요. 완전한 선함, 착함, 극도의 착함, 그거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다음에 성의 있는 애씀, 노력, 하나님께 봉사를 할 때 성의를 다하여, 최선을 다해 섬기고 노력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빠짐없이 촘촘한 지식, 성경을 백 독, 천 독을 해서 성경을 다 외워요. 빠짐없이 촘촘한 지식, 이게 나를 살릴 수 있을 게 아닌가, 하는 그러한 노림수를 가지고 성경 공부, 성경연구, 신학연구를 투철하게 하는 것, 이거 세 가지, 이거 속죄됩니까? 이거 세 가지 가지고.

안되지요. 왜? 이게 악함이기 때문에. 이거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아~주 이 사람들은 세계 챔피언이에요. 누가 챔피언? 우리가 챔피언, 챔피언, 바리새인들이 챔피언 감이에요. 바리새인이 천국 못가면 모든 인간은 천국 못가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은, 왜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를 해도 왜 천국에 못 가는지, 아니 왜 천국에 애초부터 갈 수가 없는 존재인지를 그거 까발리기 위해서 이 땅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거예요. 문제가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이 땅에 어떤 교회도 소용없다는 것,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우리 문제 간단하게 들어갑시다. 복잡하게 하지 말고. 뭐 요령 부리지 마시고요. 뭐 어떻게 하면 복 받습니까, 그런 사기를 자꾸 듣고자 하지 마시고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낼 때 언약을 통해서 드러낸다. 이건 상식이지요.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압니다. 들은 풍월이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쌍둥이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쌍둥이로.

창세기 25장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렇게 예언하시고 24-26절에,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애 낳지 못하는 리브가에게 약속을 먼저 주시고 임신케 하는 거예요. 그러면 임신한 아이는 뭘 이 세상에, 무슨 현실을 이 세상에 구체화 시키는가? 언약의 현실을 이 세상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서로 상반되는 존재를 이 땅에 던져주는 거예요.

로마서 9장에 보면 한쪽은 창세 전에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한쪽은 창세 전에 미움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11-13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에서와 야곱이 아예 이 땅에 없어요. 아예 사람은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참에 내가 누구냐를 좀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없어요. 여러분 자체가, 자아고 뭐고 여러분 자체가 없습니다. 없는데 언약이 먼저 있어서 여러분들이 생긴 거예요. 생겨났는데 그게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뭐냐? 지옥 갈 언약의 백성과 한쪽은 천국 갈 백성으로 언약이 둘로 쌍둥이로 되어 있다는 것을 현실화시키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종류로 만든 겁니다. 이게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아요. 정말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쪽을 뭐라고 하느냐? 악이라고 해요, 악인. 한쪽은 뭐냐 하면, 의인 되겠지요. 또는 선인, 또는 의인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오시고 난 뒤에 의인은 몇 명이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5장 1-6절에 보면, 이 세상에 의인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내가 이 세상을 멸망 안 시켰다, 이렇게 나와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찌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의인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자,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너희는 모조리 악인이라는 거예요. 악인이기 때문에 악인이 선을 행해서 선인 행세, 그런 코스프레, 흉내 내기 제발 좀 그만두라는 이야기에요. 술 끊고 담배 끊고 교회 나왔다고 해서 선한 사람, 착한 사람 아니에요.

이 세상에 어떤 선인이라고 우겨도 그 사람 돈 떼먹고, 그 사람 좋아하는 후보 안 좋아하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취미 좋아하면요, 그것은 대번에 저주가 날아오게 되어 있어요. 왜?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자기만이 선인이에요. 이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세계 최고의 고집들을 할당받고 있어요.

인간은 고집이 있어 가지고 진짜 때려죽여도 끝까지 자기는 잘났대. 이것은 못 고칩니다. 이것은 치료할 침이 없어요. 어느 한의원에 갈까요? 강동한의원 가서 치료할까요? 이건 뭐 어느 병원에 가서 고칩니까? 내가 최곤데 내가 교회 온다고 고쳐집니까? 턱도 없는 소리지요. 이건 약도 없어요.

인간은 이 땅에 출현하면서 언약을 몰라요. 언약을 모르고 언약 대신 누굴 아느냐하면, 나를 알아요. 나를 알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나의 시간과 나의 공간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나의 시간, 내가 몇 년 이 땅에 살았다, 나의 공간, 저 터는 나의 아파트고, 저 밭은 내 밭이고, 이 교회는 내 교회고, 자기 공간을 의식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뭐 과학을 깊이 연구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인간은 그 처음 출발이 단세포에요. 세포 하나밖에 없어요. 세포 하나로부터 분열된 게 인간입니다. 인간의 육이. 이 세포 하나가 결국 어디로 가느냐? 결국 흙으로 돌아가요.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이 나의 공간이라는 게 나 자체가 화장터에서 하나의 잿가루가 되어서 날아가 버려요. 나중에 뿌려버리면 다 날아간다고요.

죽을 때가 되면 시간과 공간에 압축이 되어서 시간도 그 죽는 순간이 되면 그 살아온 긴긴 세월이 한순간에 다 없습니다. 96세를 살았니 97세를 살았니, 뭐 장례식은 요란해도 본인은 없어요, 지금.

이게 왜 그러냐? 이게 현실이에요. 자, 현실은 뭐냐? 내가 하나의 포인트,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는 게 현실이에요. 나를 위한 나 자체에 대한 시간과 공간은 하나님께서는 나한테 그걸 용납한 적이 없다는 것, 이게 현실입니다. 나의 인생, 나의 부동산, 이거 인정한 적 없어요. 나는 없어요. 나는 애초부터 없었어요. 없는데 세포 하나 생겨가지고 이렇게 분열되었고, 60조 개의 세포로 분열된 거예요.

지금 저만 정신 차리는가 모르겠어요. 주님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그냥 나무 같은 거예요. 주님이 눈뜬 소경보고 사람들 사는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어요. “나와!” 왜냐하면 그 소경에게는 주님의 특별한 안목이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소경 고쳐주고 따로 분리시키는 겁니다. 주님의 손작업을 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분리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나오는 거예요. 분리되는 거예요. 애굽이라는 것,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 때는 그냥 우리나라에요. 내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애굽나라라고 독자적으로 따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예요.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그동안 정들었던 이 세상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왜? 언약은 쌍둥이니까요. 저주받을 자, 말씀은 악인을 만나서 말씀이 해석되어야 되거든요.

그 악한 자가 누구냐? 애굽에서 같이 친구니 동창이니 그것들이 악인이에요. 우리도 그중에서 악인이었고. 그런데 강제로 그 악인과 분리시키는 능력이 그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소경도 마찬가지예요. 소경은 일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눈 못 뜨는 소경이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찾아오니까 뻔히 눈을 뜨고 있고 멀쩡하다고 우기는 그 인간들과 주님과 함께 소경이 떨어져 분리돼 나오는 겁니다. 이게 언약이 작동하는 하나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거기서 출현되는 거예요. 이게 별로 어렵지 않지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언약만 들어가면 어렵지 않아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따로 떨어져 나오게 해놓고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구약을 보신 분은 알겠습니다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서에 죽 보면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망하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망합니다.

그 언약이 뭔지를 제가 신명기 12장 2-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장소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따로 정해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기존에 인간들이 사는 그 땅에는 우상들이 있는데 그 우상들이 산봉우리, 꼭대기에 있어요. 높은 곳에. 거기서 뭘 짓는가? 산당을 지어요, 산당. 산당은 뭐냐 하면, 나를 부정하지 않고 나를 섬기는 것을 인정해주는 신들을 거기에서 섬기는 거예요.

나를 섬기기 위해서 산당을 찾는 거예요. 아……, 지금 여러분 이해하고 있어요? 교회가 산당이라 이 말이에요, 교회가! 말을 꼭 이렇게 구체적으로……, 교회라는 것이 바로 우상 섬기는 곳이라 그 말이에요, 말을 꼭 이렇게 딱 떼놓고 이야기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은 모든 인간이 악인이기 때문에 절대로 내 자존심과 가치를 섬기면 안 돼요. 예루살렘은. 제가 인간은 이렇게 자기를 섬긴다고 해도 동의를 안 해요. 왜 안 하느냐 하면, 내가 나를 섬긴다 할 때 그 섬긴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게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오직 나만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걸 구태여 나를 섬길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그냥 행하면 돼요.

정치고, 과학이고, 사업이고, 장사고, 농사짓는 것, 고기 잡는 것, 자식 키우는 것, 그것 다 누굴 위해서 하는 겁니까? 나를 위해서 하잖아요, 나를! 교회 다니는 것, 기도하는 것, 누굴 위해서 해요? 나를 위해서 하잖아요. 그게 바로 나를 섬기는 것이고, 그게 바로 우상숭배고, 그게 산당이에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 측 괄호 닫고, 그게 산당이라 그 말이에요, 산당. 산당 되어야 교회가 장사가 돼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모든 말씀은 악인을 거쳐서 와요. 그 악인이 누구냐? 우리 자신이 악인이라니까요, 우리 자신이. 그러면 악인 아닌 사람이 없겠네. 예수님만 악인이 아니에요, 예수님만.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인내에 들어가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면 안 돼요. 우리는 기껏 해내는 것이 완전한 선함과 성의 있는 봉사, 그다음에 촘촘하게 빠짐없는 성경 지식, 이것 가지고 우리는 천당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천국에. 그런 것 해가지고 내 섬김이 포기됩니까? 주님은 우리 어떤 행함도 안 받는 이유가 그 행함 속에 ‘내가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내용을 품지 않고 있기때문에 그 행함을 주님께서 안 받는 행함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예를 들어서 피아노를 깨끗하게 닦는 봉사를 한다. 닦으면서 ‘그러니까 나는 지옥 간다.’ 하면서 피아노 위를 닦습니까? 식사 당번 하면서 ‘나는 죽어 마땅해. 나는 인간도 아니야.’ 이러면서 식사 당번 합니까? 식사 당번하고 뭐 할 때마다 ‘야, 내가 봉사를 다 하다니. 나는 이렇게 귀한 존재구나. 하나님이 택한 진짜 주의 종 맞구나.’ 이렇게 착각을 하면서 하잖아요, 착각을 하면서. 헌금 몇 푼 내면서도 그렇게 하잖아요.

어떻게 인간이 자기 섬김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인간은 못 합니다. 못 하면 죽어야지요. 그러니까 죽이는 게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주께서 자기 조치를 제대로 취하는 것이 죽이는 거예요. 내일까지 좀 살면 안 됩니까? 오늘 죽여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내일까지……’ 그런 것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얼마나 나한테 봉사 충성하느냐?”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네가 어디서 왔느냐?” 그걸 물어요. 택한 백성한테 “너 어디서 왔느냐?” 답변은 간단하지요. “내가 악에서 기어 나왔습니다. 내가 악에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7장 13, 14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즉 “너 어디서 왔어? 너 누구 집 자식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에요. “너 어디서 왔는데?” 이렇게 하니까 “주께서 아시잖아요. 제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애굽이 어디인데? 애굽이 바로 우상을 섬기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곳에서 나온 거예요.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내가 나를 섬긴다는 것조차 알지를 못했어요. 주님 찾아오니까 내가 나를 섬기는 이 지병, 이 골치 병은 오직 내 힘으로 고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거예요. 이게 교회 간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에요. 기도한다고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봉사한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에요. 나는 처음부터 굳어졌어요. 오직 나만을 위해서 섬긴다. 이게 굳어진 거예요.

악을 멀리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자체가 악인데 뭘 멀리합니까? 우리 자체가요! 내가 아는 시간과 공간은 전부 다 나를 위해서, 나를 섬기기 위해서 기억 속에 담겨 있는 겁니다. 내가 젊을 때 내가 공무원이었고, 내가 젊을 때 뭘 했고, 내가 왕년에 40억을 만졌고, 그런 것 있잖아요. 왕년에 내가 목사였고, 옛날에 내가 책을 몇 권을 냈고, 개척교회 몇 군데 하고, 그 자체가 지금 나는 나를 섬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게.

그 고질병에서, 그 악마 병에서 누가 고칩니까? 고칠 사람 나와보라고 해요. 아무도 못 고쳐요. 말씀은 반드시 내가 악이라는 것을 들춰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도록 한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쌍둥이예요. 예수님 빼놓고는 나머지 다, 예수님, 쌍둥이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다 저주, 예수님만 천국, 이렇게 돼야 이게 언약이 돼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이게 어렵지 않다고요. 우리가 그걸 거부해서 그렇지 이게 어렵지 않아요. 복잡하지 않아요. 너무 간단한데 내 악마성이 그걸 용납을 안 해요. 그진리를 용납을 안 해요. 꼭 본디오 빌라도처럼 “진리가 뭐꼬?” 이러고 있다고요. 진리를 이야기해줘도 몰라요. “네가 바로 지옥 갑니다.” 이래도 “진리가 뭐고?” 이러고 있다고요. 나를 지옥 보내는 게 진리인데 “나 빼놓고, 그 이야기는 나 빼놓고 하면 안 됩니까?” 전부 다 이런 식이에요, 이런 식.

자, 그러면 주님의 대책은 뭐냐? 간단해요. 속죄입니다, 속죄. 들어봤지요? 속죄. 자, 주님의 방법은 속죄에요. 죄를 그냥 두고 죄를 씻어주는 거라니까요, 씻어주는 것.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내 쪽에서 내가 개과천선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주님께서 악한 노력으로 규정을 반드시 해야됩니다.

속죄는 어디서 이뤄지는가? 산당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산당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갓바위 같은 경우에는 해발 8백 미터 이상 되지요. 연세 70 되는 분들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자식 이번에 대학 들어가야 돼. 의대 돼야돼.’ 이래가지고 나중에 미끄러지면 손톱으로 기어올라서 갓바위에 가서 넙죽 절하면서 손바닥을 뒤집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놀라운 정성입니까? 또 교인들은 어떻고요? 애 하나 대학 간다고 새벽기도 40일 연속으로 하고, 성경 쓰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 정성, 성의 있는 정성, 진심으로 하는 성의, 그게 속죄가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내 손자, 내 아들딸밖에 모르는 극한 이기주의를 옴팍 티를 내는 것밖에 안 돼요.

주님 같으면 구역질 나서 토해버려요. 신자도 아닌 게 얼마나 신자라고 칭찬을 받아 왔겠어요? 교회에서. 가짜거든요. 이걸 어려운 말로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늘나라의 연속성이 없다.”고 이야기해요. 연속성이. 연결되지 않아요. 끊어졌습니다.

그러면 속죄는 어디서 이뤄지는가? 예루살렘에서 이뤄져요. 그래서 이사야 2장 2절을 보겠습니다. 2, 3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주님은 이 세상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재편성해버립니다. 재배치해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공간이 생기는데 그 공간 한가운데 뭐가 있느냐? 예루살렘이 있고, 그 예루살렘에 성전 있고, 그 성전 안에 속죄소 있습니다, 속죄소. 속죄소, 가로 112.5센티, 세로 67.56센티, 높이 67.5센티로 된 작은 상자. 출애굽기 25장에 그 치수가 나와 있어요. 16, 17절에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이 설계도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단독으로 받아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시내산에 남겨진 모든 사람과 모세가 받아오는 율법과 드디어 불연속성, 차이가 나기 시작해요. 연결되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 십계명 가지고 내려오다가 도중에 성질나서 십계명 돌판을 깨잖아요. 그 분노 있잖아요, 그 분노, 그 분노가 성경해석이에요.

성경해석 어떻게 하는가? 자신의 자기 섬김에 대해서 분노하시면 저는 그분을 백 점짜리 해석이라고, 뭐 제가 평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렇게 평하고 싶어요. 자기 자신에 분노하는 성경해석, 남 말고, 남 말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 눈만 뜨면 나만 섬기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 따위 식으로 이용하는 그 나, 거기에 분노하는 것, 그게 최고의 성경해석이에요.

분노할 때 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무 조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을 나무 조각을 볼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뭐 나무 조각 앞에서 화낼 일 있습니까? 어디 뭐 겁날 일 있습니까? 여러분, 기도할 때 나무 쪼가리 앞에 두고 기도하세요. 벌벌 떨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안 그러면 밭에 배추 심어놨다고, 양배추 심어놨다고 보시고.

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데 자기에게 왜 분노하지 않는가? 타인의 시선이 자기에게 너무 많이 들어와서 그래요. ‘남들이 우에 생각하겠노? 남들이 우리 욕하겠지. 남들이 목사답지 않다, 집사답지 않다, 욕하겠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너무 많이 들어와 가지고 어떤 행동 하나도 벌벌 떨면서 행동하는 거예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예요. 망하면 되는데. 악인은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냥 곱게 망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자기를 악인으로 간주를 안 하니까 ‘안돼. 망하면 안 돼.’ 이게 우리 마음에 밑에 딱 깔려 있는 거예요. 기도해도 벌벌벌 떨고, 헌금해도 벌벌벌 떨고, 전도해도 벌벌벌 떨면서 ‘저 사람 하나 구원시켜야 되는데.’ 벌벌벌 떨고 있고, 봉사하면서도 ‘주께서 받아야 되는데. 안 받으면 나는 망하는데.’

원래 악인은 망하게 되어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자꾸 안 망하는 머리, 안 망하는 통박, 그런 책략을 자꾸 굴리는 거예요. 머리도 정말 나쁘다, 나빠 정말! 그냥 무너지면 되잖아요. 그게 자유 아닙니까?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네가 속해 있는 그 시공간이라는 환경과 함께, 같이 짜부라져서 같이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속죄소, 속죄소는 작은 상자인데 그 상자 뚜껑이 속죄소에요. 밑에는 무서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법궤가 있습니다. 그 뚜껑에, 하나님이 지시한 약속된 약속의 피입니다, 더러운 우리 피 아닙니다, 더러운 A형, B형 그런 것 성격 안 맞습니다, 안 받습니다, 그 어린양의 피를 그 뚜껑에 바르는데 그 뚜껑을 속죄소라 해요. 또는 시은좌, 은혜가 내려앉는 좌석, 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만나는 자리, 그걸 시은좌, 다른 말로 속죄소라 해요.

뚜껑이에요. 전체가 아니고 뚜껑, 거기다가 온통 페인트를 하는데 뭐냐, 하나님 자기가 약속, 언약의 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의 피지요, 언약의 피를 바름으로써 속죄가 돼요. 그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복음이 복음 되려면 점점 더 자기한테 분노하고 자기 행동이 아주 개차반이라는 것을 자인하면 할수록 복음의 감사와 기쁨은, 이것은 터져 나와요. 폭발해요.

왜냐하면 나의 육신은 오직 나만 섬기는 식으로 몸이 기억하거든요. 복음 뭐 들어봤자 돌아서면 또 나만 섬기거든요. 히브리서 9장 5절에 보면,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속죄소는 거기에 육의 세계만 있는 게 아니고 영의 세계, 그룹, 천사들이 육의 세계와 DMZ, 휴전선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영을 만납니다. 인간의 육은요, 세포 하나로 되어 있기때문에 세포 날아가 버리면 그 인간 자체가, 육 자체가 없어요.

이 세상은 어차피 주님의 시공간입니다. 거기서 주께서 속죄를 해주신다니까요. 속죄가 뭐냐? 죄 없다, 해주신다 그 말입니다. 죄 없다. ‘죄 없다’가 의미 있으려면 우리는 죄만 있어야 돼요, 죄만! 죄뿐이어야 되고, 악함 뿐이어야 됩니다.

여러분, 이게 신나지 않습니까? 남들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는 옴팍 죄만 있어요. 악만 있다고요. 이유가 뭐냐? 나만 섬기기 때문에. 왜 나만 섬기느냐? 타고 났는데 어떻게 해요? 그걸 어떻게 고쳐요? 나만 섬기는 그것을 무슨 수로 고칩니까? 못 고치지요.

그렇게 나만 섬기고, 우리는 교회 와도 산당으로 여기고,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오고, 이런 본성을 안 고쳐져요. 못 고칩니다. 고칠 이유가 없어요. 고칠 필요도 없고요. 본성인데요. 그 본성에 대해서 바로 복음은 속죄로 마중을 나가서 그 많고 많은 죄를 없애줍니다. 죄 없다, 해주세요. 죄 없다. 그 장소가 예루살렘이에요. 거기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입니다. 만남의 장소에요. 다른 곳에서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전부 다 산당을 만들어놨지요. 그래야 장사가 되니까. “여러분, 소원 있지요? 기도하시면 들어주십니다.” 이게 산당이에요. 이게 절간이에요. 전부 다 누가 기도해서, 누구 목사 섬겨서 잘됐다, 전부 다 절간입니다.

종교라 하는 것은 내가 나를 섬긴다, 하는 것을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서 종교를 가지는 거예요. “당신 종교 뭡니까?” “기독교” 그 말은 뭐냐? 내가 나 섬기는 것을 기독교 방식으로 섬기고 있다는 그런 뜻이에요.

자, 그러면 신약에 와서 그 속죄소에 대해서 지금도 예루살렘이 있어야 되고 그 시공간이 있어야 되는가?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이제는 옛날의 제사장처럼 늘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26절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게 뭐냐? 이렇게 되어버리면 우리의 시공간, 나의 시공간은 이제 없습니다. 주님의 시공간에 속하거든요. 히브리서 10장 17절에 보면,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소식이 또 있습니까? 없지요. 이 고마운 소식을 듣는 순간 이제부터 우리는 뭘 해도 내가 육신이 있는 한 죄만 만든다는 사실을 흔쾌히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할 수가 있습니다. ‘주여, 제가 한 모든 것은 오직 내 생각뿐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침없이 고백하는 거지요

‘이제 자랑하는 것은 내가 죄인인 것, 내가 죄인이라는 그것만 자랑하고 싶다.’ 그게 바로 십자가 자랑이에요. ‘주님은 이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다. 왜?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다음에 이 죄를 주님 쪽에서 속죄한 것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시키는가? 그게 바로 세례라는 겁니다, 세례.

“어디서 왔느냐?” “예. 세상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와 합류하자.” 그 합류하는 포인트, 지점, 그게 세례라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세례. 세례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속죄해주시는 주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 세례 공간입니다.

세례는 두 종류가 있는데 불 세례가 있거든요. 불 세례는 이 세상을 주님의 저주로써 완전히 불 살라 버리는데 그게 불 세례에요. 그다음에 성령세례가 있는데 성령세례라 하는 것은, 바로 쌍둥이니까, 쌍둥이니까 의인 되시는 주님과 함께 있는 세례가 성령세례고, 예수님이 없이 나 섬기는, 덜렁 나만 있는 그 세계를 불 세례, 불로써 저주받는 세례가 되는 거예요.

그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시간이 작용하는데요. 예수님의 시간이 작용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인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인내. 벌써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고 주님 시간으로 넘어갔어요. 이제는 ‘세상을 계속 살 거냐, 말 거냐?’는 전부 누구 손에 달려 있는가? 일방적으로 주님 손에 달렸어요.

시간은 우리 시간 아닙니다. 그게 베드로전서 3장 6, 7절에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이게 불 세례에요. 세례라는 것은 합류하는 것, 하나님의 저주가 합류된 세계기 때문에 불로써 멸망 당합니다. 7-9절,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약속은 반드시 쌍둥이입니다. 약속은 건질 자만 건지고 건지지 않을 자는 버리는 그 두 가지의 양상으로 이 현실에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은요, 언약적현실이에요. 여러분이 이제는 자기만 섬기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면 되는 거예요. 그중에 나를, 본인 자신을 끼워 넣으세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속죄 때문에 늘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나 잘되라고 하는 행동밖에 안 나와요. 예수님, 하나님, 동원시키지 마세요. 그거 다 핑계에요. 본능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내 가족, 내 식구, 내 새끼, 내 자식, 오직 내 신앙, 내 믿음, 이거 하나 자존심 챙기기 위해서 하는 것밖에 안 나와요. 아무것도 더 안 나와요. 그게 바로 죄가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속죄가 그걸 용서를 했다니까요. 속죄가 속죄로 더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더 소경과 절둑발이가, 문둥이가 되고, 거지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되고, 창기가 되고, 세리가 되어도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남의 시선은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10절에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이게 주님의 시간입니다. 이게 주님의 인내에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4절에, “너희에게 대하여는 우리의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이제는 우리가 혼자 있지 않지요. 주님의 행하심이 함께 합니다. 언약적으로 행합니다.

잊어버렸을까 싶어 다시 이야기합니다. 언약은 쌍둥이처럼 주님의 행위가 나오고 그다음에 우리의 행위가 쌍둥이로 나옵니다. 우리의 행위는 에서같은 저주받을 행위, 주님의 행위는 그 행위를 속죄하기 위해서 희생하시는 주님의 행위,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언약적 현실을 맞이하고 우리의 몸은 언약을 위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일하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

그래서 5절에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즉 “하나님이 자신이 이룬 그 언약의 세계, 약속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원해서 지금도 주께서 일하신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이고 전하는 약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섬기지 말게 하옵소서. 속이지 말게 하시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우리 자신만 섬기는 식으로 가고 있음을 이제는 눈 부릅뜨고, 주님의 안목을 가지고 죄인임을 신나게, 즐겁게, 고마운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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