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인생 (미가 4:6-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 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시작과 끝을 맞추십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이 일을 저지할 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도 나름대로 일을 꾸미고 그 일이 만족스럽게 마무리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일과 인간들이 시도하는 일이 충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혹한 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몸은 망가지고 살던 땅에서는 쫓겨납니다. 그리고 갖은 고초를 남의 나라에서 겪습니다. 문제가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과연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서 ‘자애로운 사랑’을 찾을 수가 있을까요? 로마서 9:27에서 분명히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는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라 다리를 절게 됩니다.(창 32:11)
이는 야곱의 사적인 기대나 목적은 하나님에 의해서 거절될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근원적으로 바뀌어져야 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남은 백성’은 그 전에 필히 자기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기대나 희망을 지니고 있으면 하나님의 시작과 끝을 맞추어 나가시는 일에 저해되는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저는 자’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합당한 조치라는 겁니다. 말라기 1:8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것, 병든 제물은 하나님께서 더럽다고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즉 제물의 입장에서 얼마나 양이 많고 비싼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나 아니면 못받을 만한 제물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받지 못할 인간이 있는 겁니다. ㉮저는 자, 병든자, 환란받는 자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못받은 존재임을 알려주시지만 ㉯그들에게 새로운 요소가 가미됩니다. 그것은 바로 ‘남은 자’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방나라의 노예로 팔려나가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인간에게는 ‘목숨’이라는게 있습니다. ‘숨’이지요. ‘호흡’이지요. 이 목숨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목숨을 부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악마가 시키는대로 욕심들을 덕지덕지 붙이게 됩니다. 마치 생선 뼈에 살점들이 붙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2:2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즉 인간들은 호흡하는 바로 그 점을 최후의 보루로 여기고 그것은 지켜내기 위해 인생 동안 매진하합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든지 약해진다든지 신체를 다치게 되면 졸지에 사는 것이 서글프지는 겁니다. 한심스럽게 자아를 보게 됩니다. “인간아, 왜 사냐?”는 식이지요. 목숨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에 악착같이 지켜내어야 하겠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인생살이가 구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존재함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사적인 정의감이 가동됩니다. 즉 “나는 잘못이 없는데 모든 것은 남탓이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에 복수심이 작렬합니다. 즉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한도에 갇혀 있으면서 그 안에 삶을 도모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수시로 실패로 끝납니다. 이 실패에 분노하고 격분하면서 그 책임을 무를 외부인을 겨냥하게 됩니다. 내가 성공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정의로움으로 여기면서 사적 복수심을 멈출 수가 없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받지 않는 겁니까? 왜 남은자로 바뀌어서 받으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인간의 목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판이 목숨에서 생명으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목숨생활하지만 우리 주님은 생명생활하십니다. 목숨과 생명은 다릅니다.
도대체 생명은 무엇입니까? 시편 113:5-9에 보면 생명이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생명이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목숨을 말합니다. 이 목숨에는 악마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과 끝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 생명이 하시는 일은 다음과 같이 소개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문제는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생활보다 목숨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멀쩡하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목숨의 가치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도 오해한 바입니다. 사람들이 엘리야 선지자를 죽이려 오자 엘리야는 도망치면서 자신만 ‘남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말을 수정하십니다. ‘은혜로 남은 자가 7000명이나 있다’는 겁니다.(롬 11:4)
스스로 자기 목숨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그런 자에게 생명을 증거하는 자로 바뀐다는 것은 곧 말씀으로 채워지는 인생으로 바꿨다는 말입니다. 어떤 말씀일까요? 로마서 10:2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생명은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걸치는 겁니다. 빛이 아니라 빛을 담은 등경이 되는 겁니다.(마 5:15)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진정 여분의 남은자의 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찾아주신 자만 받아주심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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