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단일인간으로 본다. 이스라엘의 숫자가 그 뒤에 아무리 늘어나도 다 하나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이스라엘이다.’라는 그 대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심으로서 율법의 그물망 속에서 그들은 한 코, 한 고리를 형성케 하는 겁니다. ‘우리가 율법이 현실화되도록 하자. 율법이, 말씀이 살아나도록 하자.’라는 이러한 의도 아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움직였던 겁니다. 이스라엘이 율법대로 사는 방식이 그들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고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하나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사건, 그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모든 공통적인 가정들만 홍해를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를 행하고, 같은 할례를 행하고 그들이 똑같은 공통된 그 바닷속을, 그냥 바다가 아닙니다, 바닷속을, 바다 그 내부를 그들은 건너왔습니다. 결코 인간의 머리에서, 인간의 예상에서 나올 수 없는 사건에 그들은 맞닥뜨렸고 부딪혔던 겁니다.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이 예상한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예상 못 한 것을 이미 내가 너희 속에 집어넣어 줬잖아.”라는 것을 요구하는 거예요.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피를 양푼으로 담아서 양쪽에 뿌리는 데 한쪽은 율법에다 피를 뿌리고, 또 다른 한쪽, 나머지 피는 이스라엘 백성 쪽을 향하여 피를 뿌렸습니다. 율법과 백성 사이에 공통된 것, 똑같은 것들로 덮였습니다. 그게 바로 흠 없는 희생제물의 피였습니다. 율법을 제시한 하나님 쪽에서도 “내가 율법 짜면, 율법을 완성하면 거기서 피 나온다. 따라서 너희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그 율법의 피에 흠뻑 젖을 때 너희들이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라고 해 줄게. 하나로 쳐 줄게.” 단일체라고 해주겠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교회를 정의할 때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하나님이 피로 사신 단체가 교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흘렸다. 하나님께서 자기 죽음으로 천국 백성을 만든다.’는 이 아이디어, 이 생각은 어느 인간에서도 나올 수 없는, 인간이 예상 못한, 달리 말해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 쪽에서 실시했습니다. 그래서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하지 못하는 불가능함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는 거예요.그럴 때 그들은 제대로 된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됨을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서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게 4절에 나오는데요 “그들의 파숫군들의 날 곧 그들의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여기 파수꾼이라는 게 나옵니다. 파숫군은 공동체가 하나 됨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거기서 차출해서 보초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집어 넣어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원리원칙을 가지고 이스라엘과 적들 사이에 다른 점이 뭔가, 그 다른 점, 차이점, 그걸 지키는 것이 이 파수꾼입니다. 이 파수꾼이 나중에 뭐로 바뀌는가 하면, 선지자로 바뀌어요. 선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요소만 외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선지자가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말은, 적이 이제는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파수꾼은 이스라엘의 파수꾼이 아니고 뭐냐 하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공동체의 태동을 알리는 그 역할을 미가 또는 에스겔 예레미야 선지자들이 그 일을 하는 겁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파수꾼의 역할,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이스라엘은 왜 이 파숫군의 역할을 제대로 못했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그 파수꾼이 제 역할을 못 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절에 보면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라고 미가 선지자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철 지났는데 과일을 찾고 있어요. 마치 예수님께서 목말라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 보니까 아직 철이 안 되어서 못 먹었거든요. 대번에 저주해버렸습니다. 무화과나무든 이스라엘이든 결코 이스라엘 편에 서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 있으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편이 되면 안 되고 누구 편이 되어야 되는가? 철저하게 하나님 편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 율법입니다, 율법의 원리가 이스라엘 속에 계속 유지되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할례 언약, 율법 중심의 단일공동체가 되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비록 이스라엘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는, 하나로 묶은 그 하나님이 함께 기거하는 나라이어야 해요. 그 ‘함께 기거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자기의 욕구보다도 하나님이 원하는 법이 살아 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이 살아 있어야 돼요. 그 율법이 뭐냐? 율법의 취지는 “너희들 속에 너희들만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율법의 취지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각자가 행해야 돼요. 무슨 할례냐 하면, 요즘으로 하면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데 그 마음의 할례가 뭐냐 하면, 성도는 날마다 공백으로부터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에요. 매일같이. 그러니까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내가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참 신기하네.’ 요 질문을 네 식구면 네 식구 다 하게 되면 그 네 식구는 누가 네 명이라 해도 그것은 단 하나로 쳐줍니다. ‘이상하다. 왜 내가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지? 아이고, 이렇게 신기한 일이!’ 할례 언약이란, 심지어 그것이 인간에게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과수 농업에까지 할례가 적용된다는 말은 그 과수원의 사과나 귤이나 딸기나 ‘내가 그 과일 먹고 내가 살아야지.’라는 원칙은, 그런 것은 할례 없는 이방 민족에서나 찾으라는 말이지요. 뭔가 차이성이 있어야 돼요. 율법이, 말씀이 우리를 살리지 그 바나나, 사과, 포도, 무화과나무, 이것 먹는다고 이게 삶이 아니고, 이게 생존이 아니고, 이게 목숨 부지책이 못 된다는 것, 이게 바로 차이성이거든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떡보다 말씀이 우선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보다 말씀이 우선된다는 거예요. 그 말씀이 뭐냐?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그러한 불가능한 요소가 인간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처음에 이스라엘은 기드온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이방 나라와 전쟁할 때 그 원칙을 그대로 적용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파수꾼이 있어야 될 이스라엘이 이게 짜부라지고 함몰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방 민족에 의해서 율법이 시시하게, 하나님의 요소가 시시하게 여겨지면서 불가능함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자기 능력과 애씀과 그러한 자기 수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의 하나 됨이 아니고, 그게 진짜 이스라엘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재주껏의 하나 됨, 그러면 자연적으로 권력 위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요. 이방 나라를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출애굽할 때 그냥 아무것도 없이 출애굽 했거든요. 하나님이 함께 해서, 주셔서 되었다 그 말이지요. 그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내 것을 안 받는다는 뜻입니다. 내 능력과 지혜를 받지를 않아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다들 불가능한 것 있지요? 그 불가능함을 제시하면 되잖아요. 그 불가능함은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왜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이게 바로 불가능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고백입니다, 불가능한 고백.
인간의 고백은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지. 코로나 걸려서 다 죽어라. 나만 살겠다.’ 이게 인간의 타고난 자기 위주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나가는 거예요. ‘왜 아직 내가 살아 있지?’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거 뭐 이런 기적에 내가 계속 휩싸여서 살아도 돼? 내가 그럴 만한 위인이 되는 거야? 그럴만한 가치가 되는 거야?’ 참 헛웃음이 나오지요.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살 가치 있는 인간으로는 전혀 모르겠는데 주께서는 계속 살려 주시잖아요. 나는 가치 없다고 외치고 싶은데 주께서는 더 살라, 더 살라, 더 살아야 돼, 이렇게 나오니까 이게 진짜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기이한 현상이 되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 내부에서 믿음으로 산 사람이 있었지요. 하지만 이미 공동체 자체가요, 다수가 의인 하나를 아주 압살시키는 그런 생리가 있어요. 그런 생리, 그런 속성이 작동하고 있어요. 인간은 자기의 가능성을 어쨌든 간에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한 인간들이에요. 하나님의 의인들이 있지만 외로워요. 그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850대 1, 미가야는 400대 1(왕상 22:6), 워워워워~! 선지자 하나 바보 등신 만들어 버려요. 엘리야도 850대 1이었습니다.(왕상 18:19) 단지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850명 한번 모아 보세요. 거의 천명 가까이 되는데 천명이 우우우우우~, 하고 있는데 혼자 해봐야 모깃소리도 안 나요. 주님이 주신 요소, 할례의 요소, 하나님의 요소가 담기지 않으면, 신약에서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그것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외쳤지요. 외쳤는데 선지자들이 외칠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단정 지으시고 이런 문구를 남깁니다. 그들은 들을 귀가 없나니. 이사야 6장 9, 10절에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선지자가 파수꾼 역할을 할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되는가? 이유는 뭐냐? 들을 귀가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들을 귀를 주시면서 듣게 하면 되지 왜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를 전하게 하고 들을 귀는 왜 안 주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할례 언약의 특징이요, 할례를 형식적으로 한다고 해서 할례 언약의 바닥에 있는 본질을 다 받는 게 아니고 일단 육은 망해야 돼요. 할례받은 육이 망해야 마음의 할례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망하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망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선지자를 통해서 계시를 전하되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귀가 있어도 이것은 폼으로 있는 거예요. 들을 귀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방 나라를 위한 파수꾼인데 이제는 내부를 향하여 파수꾼을 세우고 그 파수꾼 역할 하는 자들이 선지자고요. 에스겔 3장 17절에 봐도,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파수꾼으로 세우고 그 마지막 파수꾼이 누구냐? 마지막 파수꾼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신약에 오면, 마가복음 4장 9절에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들을 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막 4:9,23/눅 8:8/눅 14:35)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말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은 필히, 개성이고 스타일이고 간에 그 사람의 성격 인품 상관없이 똑같이 모조리 다 망해야 됩니다. 망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우리가 생각하기를 ‘우리는 안 망하고 싶습니다.’ 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함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할례 자체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할례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불가능한 것이었어요. 율법 자체가 그래요. 불가능해서 피에요. 오늘도 주의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뭐 들을 귀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들을 귀가 없는데. 왜 들을 귀가 없게 하는가? 왜 들을 귀가 없느냐 하면 이 공동체가, 인간들 이 세상 하나하나가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몽땅 다 하나로, 하나의 이름으로 망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나만 살겠다는 이름으로 나만 살면 되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개인 전체가 하나의 본질 속에 속했다는 것을 믿지를 못하고 나는 다르겠지, 하는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이 신약에 와서 더욱더, 구약 이스라엘 후반부로 해서 신약에 넘어오면 그게 더욱더 확대되게 되어 있습니다. 목숨 걸고 하는 도박판, 그게 바로 공동체, 이 세상이라는 공동체입니다. 경쟁 사회에요. 그래서 종교 생활합니다. 선과 악과의 균형 맞추기 돌입에 들어갑니다. 이걸 누가 하느냐?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해왔던 거예요.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왔던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 들어와서 파수꾼은 어떻게 하느냐?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 아주 간단합니다. 내 목숨을 내가 관리하면 더러워요. 내가 지키려 하면 더럽습니다. 그런데 이걸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니고 내 것을 누구한테 이양해 버려요. 인수인계 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에요. 창세기 22장 16, 17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건에다가 아버지로서 그 아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인수인계해버려요. 그 이삭 역할이 로마서 4장에 보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내가 받을 수 없다는, 아까 처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요소로서 이스라엘 되었다는 그 원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그냥‘나는 쇠하고 주님은 흥한다.’자기 것을 자기가 간직하는 게 아니고 그냥 주님 앞에 던지는 거예요. 줘버리는 거예요.그게 뭐냐? 제물입니다, 제물. 내가 주님의 제물로 바쳐 지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참 쉽지요. 안 쉬워요?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것은, 내가 너희를 하나님의 산 제물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5장 16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을 예수님께 바치게 만드는 일을 사도바울이 성령 안에서 해낸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제가 사도바울이라면 여러분한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 운명과 팔자와 운명과 인생을 그냥 주님께 맡기세요. 주님께 그냥 드리세요. 본인이 간직하지 마시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드리시고, 주님이 살려주면, 그리고 주께서 하게 하시면 시키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이걸 가지고 파수꾼이라고 하는 거예요, 파수꾼. 파수꾼의 특징은 자기 안에 내 것이 없는 거예요. 선과 악, 종교 행위를 해서 선과 악을 균형 맞출 이유가 없지요. 내게 아예 없으니까.파수꾼의 특징은 뭐냐? 자기 것이 없으니까 자기의 몸체가 바짝 야윈 습자지 같아요. 내 것이 없으니까.그리고 외칩니다. 마태복음 3장 2절,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세례요한이 외쳤던 그 말씀 제가 한번 외쳐볼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게 뭐냐 하면,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세상 이미 망했습니다.” 망할 겁니다, 가 아닙니다.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망했는데 무슨 도박을 하고, 무슨 희망을 갖고, 무슨 목표를 가지고, 무슨 계획을 가집니까? 망해버렸는데! 너도 망하고 나도 망했어요. 다 망했어요. 망한 나에게 미련 두지 맙시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미련 두지 맙시다.” 이게 회개에요. “오실 분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러니까 내 말 듣고 물에 풍덩 빠집시다. 빠져 죽읍시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바로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모세가, 다 같이 신령한 음료를, 다 같이 신령한 물을 마셨다고 해요. 하나의 음식을 먹고 하나의 물을 마신 것처럼 그 하나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지요.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어떻습니까? 인생 사는 것 참 쉽지요? 파수꾼은 하나를 지키는 사람이에요, 하나,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 모두가 생명이라는 그 하나,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 세상은 하나 이미, 앞으로 망할 것이다, 가 아니라 이미 그들은 망해버렸다, 일체, 그들에게는 희망은 일체 없다, 알아서 주께 미리 우리의 갖고 있는 이 목숨도 주의 것이니까 미리 드려서 이 땅에 외칠 것을 외치는 파수꾼으로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들을 귀 없어야 되는 우리에게 주께서 성령을 주셔서 주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이 뭔지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초부터 나의 것이 없었음을 기뻐하게 해주시고 이제는 주의 말씀만 가벼운 마음으로,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마음껏 외칠 수 있는 파수꾼 역할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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