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

시각들4(두증인과주님의장막)

아빠와 함께 2013. 1. 23. 17:04

 

Re:두 증인님~~^^ 질문이 있습니다. | 이근호신학 건전한가?
두 증인 | 조회 301 |추천 0 | 2011.11.30. 09:09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Bq/865

 

반갑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김성수목사님의 신학에 대해 논할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분을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그분에 대해 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대로 지난 일년 동안 김목사님의 글과 설교를 통해 나름대로 이근호씨의 왜곡된 십자가 복음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이곳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곳의 성격과 목적을 의도에 두고 올리는 것이지 김성수 목사를 광고하기 위함이 아님을 다시 밝히고 싶습니다. 우선, 주님의 장막님의 질문에 제가 아는 대로 말씀 드리자면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성화론에서 여러가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대표적으로 신인 협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그릇된 성화론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골수 개혁주의(본인은 아마 골통 개혁주의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에 대한 반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 사실입니다. 예정과 칭의에서 영화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이 어떠한 영향이나 도움이 될 수 없음이 개혁주의의 본질인데도 마치 우리의 열심이나 됨됨이가 신인 협력의 길을 열어놓은 것 같이 가르치고 종용하는 현 세대의 교회에게 반감을 넘어서 일갈하는 설교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토양이 ‘십자가를 아십니까’란 이근호의 비아양이 나오게 만든 원인이지요. 김성수 목사님의 성화론은 한마디로 우리의 죄로 오염된 본질자체의 변화에 의미를 두지 않고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 곧 창세전 언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성도의 실체와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돌아가는 과정, 즉 원형으로서 묵시를 드러내고 담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인생이고 모형으로서 역사지 인생, 역사, 첫 창조 그 자체는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 성화론, 세계관과 차별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성경의 사도들의 명령이나 권면을 단지 성도의 죄인 됨과 불가능을 들추고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에 선과 의를 향한 경향성이나 성도의 싸움을 자기의로 치부하는 이근호식의 성화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김 목사님은 성경 말씀 자체로, 말씀이(성령) 주체가 되어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실제화 (물론 이 땅에서는 완전할 수 없는) 하여 나타내심을 부정하지 않고 많은 설교, 저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이럴 때 성도는 단지 도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인격적 피조물로서 사귐과 전투가 있는 교회로서 그 과정 속에 죄인으로 폭로되어 하나님께 정복되어지고 부수어져가는 것이 성화) 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이 주님과 연합된 십자가의 삶이 없이는 은닉된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음 또한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고난이 구원의 방도는 물론 아닙니다. 고난을 자주 이야기 하다 보니 여러가지 오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성도의 삶을 고난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 사도들도 성도의 고난을 기쁨과 유익, 감사로 찬송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만큼 선악과를 입에 물고 태어난 아담의 실체를 벗겨내시는 주님의 손길, 사랑의 깊이가 고난으로 나타난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요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성도의 삶으로서 사사기를 계속 올리는 이유입니다) 그 손길에 의해 우리의 죄악 곧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신이 되어 살고 있는지, 그럼에도 거저 덮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십자가의 현실화와 함께 그러므로 선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바라고 구하는 거듭난 성도의 의지와 죄와의 분투 또한 김 목사님의 설교에서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제가 알기론 결코 이근호식의 막 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근호의 신학에서는 주님과의 관계성이 무시됩니다)) 성도의 삶과 십자가 복음을 자꾸만 대척점에 위치시키려는 일부(십자가마을) 복음을 왜곡 폄훼하는 무리들 때문에 오히려 반 개혁주의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음을 잘 알지만 개혁주의 정신과 본질은 실종되고 인간의 가치와 열심만 남은 인본주의를 대변하는, 일부 개혁주의를 표방한 세상교회를 향해 십자가만을 외칠 수 있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에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같이 저도 김성수 목사님을 잘 모릅니다. 그분을 제대로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알아가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지어져 갈 뿐이겠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골수개혁주의라는 내용이 담긴 글은 이근호와의 대화가 아니라 정석훈이라는 중국 청도에 있는 합신 출신의 십자가 마을 목사가 김목사님께 질문한 사적인 메일을 마음대로 십자가 마을에 공개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의도는 이근호 신학에 동조하지 않는 김성수 목사를 이근호 신학의 우월성을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잠시 이용해 본 것뿐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겸손히 자신의 부족함에 이해를 구하는 김성수 목사에게 낯 뜨거움을 느껴야 했지요. 각설하고 저의 두서없는 해명이 오해를 불식하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글 솜씨도 없고 표현력이 부족해서 오해를 키울까 걱정이 됩니다. 부디 과연 그러한가 하는 열린 마음으로 김성수 목사님의 글들을 만나주시길 바랍니다. 김성수 목사의 개혁주의 교리에 관한 책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출판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주님의 장막 11.11.30. 11:27
잘 읽었습니다. ^^ 두 증인 님과 토론할 양으로 한 질문이 아니였습니다. 다만 제가 궁금하던 것을 저보다 목사님을 더 많이 아실꺼 같아서 목사님의 정확한 방향과 의도를 가간접적으로 나마 알고싶었을 뿐입니다. 혹 마음에 근심이나 염려가 없으셨길 바랍니다. 사실, 저도 '그런 기도교는 없습니다'란 책을 2004년도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추천하여 저희 교회 청년부와 함께 그것으로 교리공부도 했습니다. 사실 제가 염려하는 부분은, 목사님의 초창기 설교나 가르침과 요즈음의 가르침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증인님께서는, 김목사님께서 최근에 와서 성화에 대한 열매 부분을 덜 강조하고 십자가를 더 강조하다 보니
 
주님의 장막 11.11.30. 11:30
그런것이다 라고 , 일전에 댓글에서 말씀하셨는데...사실 저는 목사님께서 성화의 열매를 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성도가 받아들이는 성화의 열매를 거의 부정하시는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저 십자가를 더 깊이 알고 자신의 '없음'을 더 깊이 알아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으로 성화를 여길뿐, 성도의 삶에서 두 손과 두 발로 행해지는 착함에 대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되신것이라고 해야 할까요....저는 그 부분이 목사님께서 위의 정석훈이라는 분의 멜에 드러난 '골수 개혁주의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됐다'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고 조심스레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목사님의 초창기
 
주님의 장막 11.11.30. 11:35
설교는 거의 다 들었습니다. 거의 초창기 설교에는, 이 땅에서 성도가 죄 이김을 통하여 천국의 기쁨을 느끼는데 그것이 나중에서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기쁨이다 라는 식으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근데 로마서 설교부터는 느낌이 이상해서 예전 처럼 설교를 듣지는 않는데, 어제 제일 최근의 설교를 들으니 '예수님을 닮자'라는 말도 하지 말라도 그러시더라구요... '예수님을 닮자'라는 것이 예수님을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영적 분별력이 없어 목사님께서 철학적 지식과 성경의 근거를 들어서 설교하시면 긴가 민가 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설교가 비성경적이다, 개혁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주님의 장막 11.11.30. 11:39
라고 확신은 못하지만 분명한건 일반적인 성화에 대한 설교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제 사견은, 목사님의 설교는 구원의 과거적인 측면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칭의입니다. 칭의에서는 자신의 무기력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성과, 무한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바로 성화와 영화 입니다. 칭의가 성화의 근거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지금도 구원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화에서 죄와의 싸움은 '이김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자신의 못나고 악한 행실들을 이길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이 성화의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두 증인 11.11.30. 13:13
예, 저역시 작년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알면 알수록, 또 세상 속에서 인생을 살아 가면 갈수록 오직 은혜요, 주님 홀로 다 이루신 전쟁이라는 것을 날마다 고백하게 됩니다. 말년의 바울사도가 죽음을 앞두고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성도의 실존을 김목사님이 전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장막님 말씀대로 '이김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죄와의 싸움이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가 김 목사님이 요즘 강조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성화, 주님이 주체가 되시는 성화이기에 우리의 부수어짐과 정복되어짐이 곧 성화라는 주장으로 압니다.
 
주님의 장막 11.11.30. 13:18
예^^ 어쨌는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증인님을 당황스럽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교제가 있었으면 좋겧습니다!^^
 
두 증인 11.11.30. 13:29
김목사님도 요즘 건강으로, 교회 내외부의 반발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본인도 이러한 반발을 예상했고 또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반응이기에 많은 시간을 고민해 오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와 복음의 본질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사명도 주께서 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로마서가 끝날 때 쯤이면 우리 모두 복음의 세계, 십자가로 만나는 주님의 사랑에 더 깊이 침몰된 우리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역시 좋은 교제를 기대합니다.
 
 
이순 11.11.30. 14:39
안타깝네요
성경말씀대로 전하려하는 김목사님에 대해서도 반대파가 있어 어려움이 있다니
하기사 성경을 통해 보아도 그런 모습이 아담의 후예인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요

제가 접한 말씀중에
가장 성경에 근거한 말씀을 전하시는것 같은데

어떤 경우에겐 하나님 그분의 뜻은 그분의 방법대로 이루어질것을 믿읍니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듯이

 
 
소용돌이 11.11.30. 19:41
우리의 삶에 맺어진 성령의 열매들은 반드시 주님의 솜씨이기에 우리에게 사유화되는 순간 가짜가 되고 말았음을 성도라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대화를 통한 개인적인 느낌은 본질의 차이가 아닌 소중하게 여기는 강조점이 다를 뿐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현게시판지기가 기대하는 것은 모든이의 각기 다른 생각과 갈등의 결과마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의 열심으로 다 이루신 성령의 열매가 성도의 인생을 모두 담아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은 대화와 적절한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하며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첼리비다케 11.11.30. 21:28
저 역시 궁금한 주제였는데 이렇게 토론이 이어지네요. 일단 김성수 목사님의 포커스는 칭의에 맞추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성화론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칭의에 근거한 성화를 비판한다기 보다는 인본주의적 성화론을 비판한 것으로 저는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생각했었습니다. 김성수 목사님께 제가 배운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출발점과 지속적인 관심은 십자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설교를 듣지는 않아서 모르겠네요. 이전에 제가 들으면서 느낀점을 적어보았습니다.
 
이순 11.12.01. 11:32
인본주의적 성화론 !
그러네요. 자칫 인본주의적 성화론에 매이다보면
율법적인 삶과도 연관되고요
그러니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겠지요
 
 
lamad 11.12.01. 13:59
김성수 목사님의 문제는. 신론을 이해하는 면이 특이 잘못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신론이 왜곡되어지만 나머지도 결국 쓰러지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에서 성화를 얼마나 강조 하는데요...

아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입니다.
 
lamad 11.12.01. 13:56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칭의와 성화의 중요한 차이점을 보게됩니다.
제가 이미 언급했던 것 처럼, 칭의에 있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하도록 부르십니다.
다시말해서 이것이 바로 성화의 전체교리의 핵심입니다.
 
lamad 11.12.01. 13:57
이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두 극단에 있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단 중생하면 하나님의 행위는 그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하지 않고 단지 그 새로운 본성만을 경험하며, 그리고 그들은 단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며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화와 관련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이런 견해는 잘못되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lamad 11.12.01. 13:57
첫 번째 움직임, 동기, 힘, 모든 것은 우리안에서 ‘하고자하며 또한 실제로 하는’ 것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제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그 두 번째 의견은 우리는 단지 예수님만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며 그분안에 거하기만 할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 외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lamad 11.12.01. 13:58
고후 7:1, 개정)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lamad 11.12.01. 14:17
저의 글입니다.
두번째 견해를 따르는 사람중 대표적인 인물이 형제회의 존 넬슨 다비와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입니다.
특히 은사적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경향성이 있습니다.

바보새님이 특히 강조한게 분별력있는 이성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의 장막 11.12.01. 19:02
예전의 김성수 목사님의 설교 중에, 김 목사님께서 자신이 신학교 시절에 로이드존스목사님의 책의 대부분을 읽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생의 후반부에 하신 설교에서는 윗글과 조금은 다른 설교를 하셨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책 제목은 생각이 나질 않네요....
 
첼리비다케 11.12.01. 22:40
로마서 강해를 듣다보니 나오더군요. 저도 궁금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후반부 설교 말이죠
 
 
littlejude 11.12.02. 18:00
로마서강해와 에베소서강해가 로이드존스목사님이 목회를 은퇴하신후 집필하신책이라고...어제 존오웬에 대해서 검색하다 백금산목사님이 쓰신 존오웬의 생애에 대한 글에서 읽었던것 같은데요...개인적으로 작은 소책자로 나온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회사역 50주년 기념설교를 발행한 책을 읽으며...
 
 
littlejude 11.12.02. 18:00
김성수목사님이 이 책을 두고 얘기하신것이 아닌가 저 혼자 생각하곤 했는데...알고보니 그 책의 말씀...고린도전서 2장2절이 로이드목사님의 비문에 남겨진것으로보아...제 사견으로 그 설교를 말씀하신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오지랍으로 댓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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