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김성수목사님의 신학에 대해 논할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그분을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그분에 대해 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대로 지난 일년 동안 김목사님의 글과 설교를 통해 나름대로 이근호씨의 왜곡된 십자가 복음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이곳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곳의 성격과 목적을 의도에 두고 올리는 것이지 김성수 목사를 광고하기 위함이 아님을 다시 밝히고 싶습니다. 우선, 주님의 장막님의 질문에 제가 아는 대로 말씀 드리자면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성화론에서 여러가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대표적으로 신인 협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그릇된 성화론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골수 개혁주의(본인은 아마 골통 개혁주의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에 대한 반감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 사실입니다. 예정과 칭의에서 영화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이 어떠한 영향이나 도움이 될 수 없음이 개혁주의의 본질인데도 마치 우리의 열심이나 됨됨이가 신인 협력의 길을 열어놓은 것 같이 가르치고 종용하는 현 세대의 교회에게 반감을 넘어서 일갈하는 설교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토양이 ‘십자가를 아십니까’란 이근호의 비아양이 나오게 만든 원인이지요. 김성수 목사님의 성화론은 한마디로 우리의 죄로 오염된 본질자체의 변화에 의미를 두지 않고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 곧 창세전 언약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성도의 실체와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돌아가는 과정, 즉 원형으로서 묵시를 드러내고 담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인생이고 모형으로서 역사지 인생, 역사, 첫 창조 그 자체는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 성화론, 세계관과 차별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성경의 사도들의 명령이나 권면을 단지 성도의 죄인 됨과 불가능을 들추고 지적하기 위한 것이기에 선과 의를 향한 경향성이나 성도의 싸움을 자기의로 치부하는 이근호식의 성화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김 목사님은 성경 말씀 자체로, 말씀이(성령) 주체가 되어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실제화 (물론 이 땅에서는 완전할 수 없는) 하여 나타내심을 부정하지 않고 많은 설교, 저서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이럴 때 성도는 단지 도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인격적 피조물로서 사귐과 전투가 있는 교회로서 그 과정 속에 죄인으로 폭로되어 하나님께 정복되어지고 부수어져가는 것이 성화) 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이 주님과 연합된 십자가의 삶이 없이는 은닉된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없음 또한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고난이 구원의 방도는 물론 아닙니다. 고난을 자주 이야기 하다 보니 여러가지 오해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성도의 삶을 고난으로 표현하고 있고 또 사도들도 성도의 고난을 기쁨과 유익, 감사로 찬송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만큼 선악과를 입에 물고 태어난 아담의 실체를 벗겨내시는 주님의 손길, 사랑의 깊이가 고난으로 나타난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요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성도의 삶으로서 사사기를 계속 올리는 이유입니다) 그 손길에 의해 우리의 죄악 곧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신이 되어 살고 있는지, 그럼에도 거저 덮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십자가의 현실화와 함께 그러므로 선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바라고 구하는 거듭난 성도의 의지와 죄와의 분투 또한 김 목사님의 설교에서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제가 알기론 결코 이근호식의 막 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근호의 신학에서는 주님과의 관계성이 무시됩니다)) 성도의 삶과 십자가 복음을 자꾸만 대척점에 위치시키려는 일부(십자가마을) 복음을 왜곡 폄훼하는 무리들 때문에 오히려 반 개혁주의로 오해 받을 수도 있음을 잘 알지만 개혁주의 정신과 본질은 실종되고 인간의 가치와 열심만 남은 인본주의를 대변하는, 일부 개혁주의를 표방한 세상교회를 향해 십자가만을 외칠 수 있는 설교자가 있다는 사실에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것 같이 저도 김성수 목사님을 잘 모릅니다. 그분을 제대로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알아가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지어져 갈 뿐이겠지요. 그리고 말씀하신 골수개혁주의라는 내용이 담긴 글은 이근호와의 대화가 아니라 정석훈이라는 중국 청도에 있는 합신 출신의 십자가 마을 목사가 김목사님께 질문한 사적인 메일을 마음대로 십자가 마을에 공개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의도는 이근호 신학에 동조하지 않는 김성수 목사를 이근호 신학의 우월성을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잠시 이용해 본 것뿐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겸손히 자신의 부족함에 이해를 구하는 김성수 목사에게 낯 뜨거움을 느껴야 했지요. 각설하고 저의 두서없는 해명이 오해를 불식하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글 솜씨도 없고 표현력이 부족해서 오해를 키울까 걱정이 됩니다. 부디 과연 그러한가 하는 열린 마음으로 김성수 목사님의 글들을 만나주시길 바랍니다. 김성수 목사의 개혁주의 교리에 관한 책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출판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
성경말씀대로 전하려하는 김목사님에 대해서도 반대파가 있어 어려움이 있다니
하기사 성경을 통해 보아도 그런 모습이 아담의 후예인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요
제가 접한 말씀중에
가장 성경에 근거한 말씀을 전하시는것 같은데
어떤 경우에겐 하나님 그분의 뜻은 그분의 방법대로 이루어질것을 믿읍니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듯이
이 대화를 통한 개인적인 느낌은 본질의 차이가 아닌 소중하게 여기는 강조점이 다를 뿐으로 보입니다. 이를 통해 현게시판지기가 기대하는 것은 모든이의 각기 다른 생각과 갈등의 결과마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의 열심으로 다 이루신 성령의 열매가 성도의 인생을 모두 담아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좀 더 많은 대화와 적절한 토론이 이어지길 기대하며 이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사실 신론이 왜곡되어지만 나머지도 결국 쓰러지게 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에서 성화를 얼마나 강조 하는데요...
아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입니다.
제가 이미 언급했던 것 처럼, 칭의에 있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하도록 부르십니다.
다시말해서 이것이 바로 성화의 전체교리의 핵심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일단 중생하면 하나님의 행위는 그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하지 않고 단지 그 새로운 본성만을 경험하며, 그리고 그들은 단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며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화와 관련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이런 견해는 잘못되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제 이런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그 두 번째 의견은 우리는 단지 예수님만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며 그분안에 거하기만 할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 외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견해를 따르는 사람중 대표적인 인물이 형제회의 존 넬슨 다비와 지방교회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입니다.
특히 은사적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경향성이 있습니다.
바보새님이 특히 강조한게 분별력있는 이성적인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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