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빈 공간

아빠와 함께 2022. 5. 23. 23:22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2:13-14

(2: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2: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3.  But we are bound to give thanks alway to God for you, brethren beloved of the Lord, because God hath from the beginning chosen you to salvation 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and belief of the truth:
14.  Whereunto he called you by our gospel, to the obtaining of the glory of our Lord Jesus Christ.(KJV)

13.  But we should always give thanks to God for you, brethren beloved by the Lord, because God has chosen you from the beginning for salvation through sanctification by the Spirit and faith in the truth.
14.  And it was for this He called you through our gospel, that you may gain the glory of our Lord Jesus Christ.(NASB)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복음은 예수님도 존재한다고 말해줍니다. 문제는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보이는 본인과 타인들에게 집중해서 세상 가치를 정합니다. 즉 빈 공간에는 아무 것도 없다(안 계시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두 손이 그냥 달려 있을 때는 아무런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두 손을 오므려서 마주보게 되면 그 안에 빈 공간이 마련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위상이고 교회의 사명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해보이는 세계가 제대로 고귀한 공간임을 자신들을 존재를 통해서 드러내는 기능자들입니다.

 

성경 말씀을 누구한테 줬느냐? 이것은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의 그 말씀과 율법은 누구한테 줬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말씀을 우리한테, 이스라엘한테 줬다고 그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그러나 구약에서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위하여 준 게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말씀을 줬지요. 그런데 그 인간들은 그걸 가로챘습니다. ‘이 말씀 지키면 복을 받고 이 말씀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하니까 이 말씀을 우리 것으로 돌려서, 마치 물꼬를 틀어서 우리 논에 물 대듯이 말씀을 내 쪽으로 향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지요. 그게 결국은 저주로 이어졌습니다. 말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이 말씀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한 그것이 실수였고, 그게 과오였고, 그게 잘못이었다는 겁니다. 신약에도 마찬가지로 이 교회들이 실수하고 있습니다. 교회 세워 놓고 ‘하나님이 말씀 주셨으니까 말씀대로 살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요. 교회 자체도 그렇고요, 개인들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으니 나쁜 것은 피해가고 좋은 것은 나에게 주어지게 해달라.’

그것은 오해이십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나오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라는 것,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것은 그냥 쉽게 생각하면 강강술래처럼 손에 손을 잡고 있는 거예요. 손을 잡고 있는데 잡아버리면 없던 공간이 생기지요. 사람들로 인하여 잠시나마 형성된, 강강술래 손잡고 있으면 그 손을 잡고 있는 그 안의 공간과 그리고 그들이 손잡고 있는 그 바깥의 공간으로 전체 공간이 돌변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들이 개인이 있을 때 느끼지 못한 빈공간, 아무도 없어 보이는 그 공간, 그 공간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네가 없는 곳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네가 없는 곳에. 너는 그냥 공간을 맞이하는 거지요. 두 손을 모으게 되면 이 안에 빈공간이 생기지요. 그러면 이 두 손은 뭐냐 하면, 두 손은 빈공간을 지향하기 위한, 가리키기 위한, 주시하기 위한 하나의 경계, 바운더리의 기능만 할 뿐입니다. 바운더리의 기능.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주인공이 아니에요. 우리 경계는 바깥과 안쪽의 철조망 같은 거지요. 그 자체는 폭이 아주 좁아야 돼요. 자체적인 폭과 면적, 이런 것에 대해서 의미를 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철조망이 굵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철조망 안의 세계는 어떤 세계이고 철조망 바깥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그게 중요하지요.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1) 여기 바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깥이라는 그게 성립하려면 안쪽 바깥쪽이 동시에 둘 다가 나타나야 되거든요. 그 둘 다 나타나는 그 경계선상에 누가 있느냐? 바로 백부장, 그리고 백부장의 믿음이 거기에 출몰한 거예요. 보초 역할 하라고 한 겁니다. 보초 또는 수위 역할. 경비원 역할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 경비원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안쪽에는 누구도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 돼요. 거기는 빈공간인 것처럼 남겨 둬야 됩니다. 죄인들을 주께서는 포섭해서 자기 사람 만들어 가지고 죄인들로 하여금 빙 둘러 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로 하여금 안쪽과 바깥쪽에 어떤 차이가 나는가에 대해서 눈을 확 뜨게 만들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양쪽에 달린 강도,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 나라’라는 말을 했거든요. 안쪽이 따로 있고 그 안쪽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그는 죽을 때까지, 죽는 순간까지 그는 강도이어야 하는 겁니다. 강도라는 전문직으로 이 세상에 하늘나라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하는 역할을 아주 장렬하게 마지막 순간에 그냥 폭발하듯이 뿜어내 버린 거예요. 평생 동안 억누르고 있던 진실이 본인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그냥 팍 뿜어져 나와요. 나 아니고 내 안쪽에 계신 분.안쪽 바깥쪽의 이 경계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나옵니다만 일곱 교회 다 사라지지요. 사라져야 되는 것이 마땅하지요. 왜? 주님은 교회 자체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경계선으로 생각하지 교회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것을 성립해서 이 세상과 바깥쪽을 분할하고 나누는 기능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라고 생각할 때 그 교회의 두께를 아주 압축을 시키기 바랍니다. 셀로판지처럼, 습자지처럼 교회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려요. 납작하게 만들어서 교회 자체의 면적을 갖지 않도록, 교회 자체가 고유의 힘을 갖지 않도록 그렇게 교회를 생각해야 돼요. 교회 안에 또 다른 교회만의 공간과 영역과 권력을 용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아주 아주 얇은 기능만 하면 그걸로 충분해요. 교회는 그냥 막이에요, 막, 그냥 막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걸 저는 담장이라 하는데 교회는 그냥 담장 역할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똑같이 오해합니다. 본인이, 말씀으로 본인 자체가 이 똥배를 살을 찌우려고 해요. 본인 자체가 온갖 귀한 복음과 성경 말씀 다 집어넣어서 자기가 통통해. 두더지 하나 몰고 갈까요, 두더지가 아니고 너구리, 통통한 너구리라면 있지요, 너구리 라면처럼 자기를 통통하게 살찌워 가지고 상대방의 성경 실력과 복음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튕기면서 시합 붙으려고 하는 겁니다. ‘비워라. 그냥 막으로 충분하다. 막으로만 해도 감사해라.’ 이걸 요구하는데 세상은, 모든 인간 존재들은 자체적으로 거기서 에너지를 채우려는 거예요. 힘을 거기다 쑤셔 넣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개인적으로 자립하는 데 성공했다, 출세했다는 그 이야기나 우리 교회 이렇게 컸다, 성장했다, 그 교회 부흥을 주장하는 그 심보나 똑같은 심보에요. 둘 다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보게 되면 13절에 이런 게 있습니다.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딛3:5). 우리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어떤 시도도 우리가 할 필요도 없고 하지 마세요. “우리의 애씀이 주님의 애씀을 모독한다.”고 제가 알려드렸어요. 나의 애씀이. 내가 애쓸 때마다 주님의 애씀을 완전히 개무시 하는 거예요. 모독하는 겁니다.

그러면 몸은, 신체는 하나인데 여기에 내가 들어 있고 그다음 여기에 성령이 같이 들어왔다는 말은, 성령께서 ‘내가 알아서 다 했으니까 너는 너 자체적으로 배를 불리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내 이름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쥐고 있을래?’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어보게 되면 우리가 나 고유의 가치를 절대로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게 될 겁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온 천하를 총 합계한 것, 그러한 묵직함보다 더 묵직함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영생이라는 겁니다. 지구의 모든 것 다 얻는 거요. 세상의 아름다움과 부의 합체에요. 그 합체보다도 더 귀하고 묵직한 게 영생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온 천하보다 귀한 게 영생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방법이, 내가 평생 끌어모은 것을 다 날려 보내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이 온 천하를 좋아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것은 온 천하가 아니에요. 그 온 천하보다 더 사랑하는 게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그게 창세기 22장 2절에 나오는 주의 시험인데요. 그게 뭐냐 하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라.” 예쁜 자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천하를 주고도 나는 너하고 안 바꾼다. 그 정도로 나는 내 목숨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지켜 주마. 왜? 너는 나보다 더 귀한 존재니까. 나는 없어져도 너는 없어지면 안 돼.”라는 그것을 주께서는 없애라는 거예요. 그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생기고 너무나 예쁜 사람 생겼다면 그것은 나한테 하나의 다이아몬드에요. 천하보다 더 귀한 다이아몬드에요. 그 다이아몬드가 있어버리면 거기서 나는 선(線)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고유의 독립적인 자기만의 영토, 자기만의 세계가 따로 형성이 돼요. 이것은 전혀 영생을 모독하는 그러한 자세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성령의 오심은 우리의 신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본래 창세 전에 원했던 대로 사용할 거냐, 아니면 네 신체의 주인공이 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네가 네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네 신체를 부릴 것이냐, 를 우리에게 독촉하는 의미에서 성령이 쑥 들어와 버리지요.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령께서 오실 때에 우리 몸을 우리한테 맡기지 않는다는 취지로 우리에게 들어오셨습니다. “네 신체 네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 신체에 그동안 뭐가 우리 주인처럼 자리 잡았는가? 고린도전서 2장 11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10절부터 보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동안 내 몸은 누가 주관하고 누가 다뤘느냐? 내 마음이 나를 다뤄왔다는 거예요. 로봇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로봇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조종하면 한발 두발 삐그덕거리면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신체 안에 너 들어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규정을 주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나가 어디서 왔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에요. ‘악마가 키운 인간을 주님 내가 없애 줄게.’ 이게 주님의 뜻이거든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이 성경 구절에서는 우리의 행한 의로운 행위와 무엇과 대조를 시키느냐 하면,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대조를 시켜 놨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을 도전하느냐?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반항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요. 이 신체라는 로봇의 주인공은 나니까 내가 신체인 내 차를 몰고 나가듯이 내 로봇을 몰고 나가서 다른 로봇 다른 신체하고 누가 누가 행복하게 사냐, 누가 더 착실하게 살았느냐, 누가 천국 가고 지옥 가겠느냐, 그것을 두고 이 땅에서 한판 붙는 거예요. 한판 대결하는 양상으로 인간은 하루하루 그걸 보람으로 살아갑니다. 이게 내 로봇은 내 관장 내 관리하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악마적이라는 것은 우리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악마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의 이런 마음을, 주께 대적하는 마음을 언제 줬는지, 그리고 그걸 왜 줬는지, 신체 안에 그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현대과학도 풀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인간이 뭐로 태어나느냐? 시편 51편, 성경으로 봐야 돼요, 성경 시편 51편 보면, 그래서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엄마의 자궁 안이, 물질에서 죄인 만드는 공정이 이뤄지는 그 현장이 엄마의 자궁이에요. 엄마로부터 분리되면서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성 세계라는 그 체제로부터 정보가 교환됩니다. 결국 이 세상은 뭐냐? 악마가 대기하고 있다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을 악마의 종으로 만드는 배양기, 배양기가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끝나면 지옥에서 정착을 하기 전에, 영구히 정착하기 전 중간지점이 이 세상입니다. 인간은 거기서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의로운 행위를 할 이유가 없어요. 의로운 행위 한다고 바탕이 바뀌지는 않으니까요. 의로운 행위를 한다는 것은 이미 바닥이 모든 정보체계, 두뇌의 지시가 악마적이라는 바탕 하에서 지시 명령이 하달되기 때문에, 내 마음이 로봇이라는 신체를 다룰 때 이미 악마적인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지시 명령하기 때문에 그 자체적으로 선악체계를 가동시켜서 이것은 선한 것이다, 착한 것이다, 백날 해봐야 그 바탕 자체는 달라질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원에 대해서는 희망을 안갖는 게 속 편해요. 천국 그런데 희망 갖지 마세요. 마귀 종한테 무슨 구원이 있어요? 지옥에 딱 합하는데, 맞는데 뭐. 이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시편 51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다윗은 성신의 도움으로, 그 당시 성령이지요, 성신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의 악마성을 미리 종결적으로 알게 되어버린 거예요. 아, 내가 상한 심령이라는 사실을 성신의 도움으로 다윗은 그걸 죽기 전에 미리 눈치를 채 버린 겁니다. 나의 의로운 행위가 이게 의로운 행위가 아니고 성신의 새롭게 하심에 도발하고 도전하는 악마의 짓이라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시편 51편 3절과 4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주님 앞에서만 죄인이 된다는 거지요.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얼마나 과학적입니까, 이게. 과학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것보다 더 과학적인 게 없어요. 땅, 땅, 땅! 이미 판결 내려버렸어요. 이게 진리다운 거예요. 이게 진리에요, 이게! 무슨 악한 것에서 선이 나옵니까? 무슨 죄에서 의가 나와요? 안 나오지요.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방금 들은 이 말씀과 이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세요. 마태복음 1장 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자, 여기 한번 보세요. 여기 보면 우리하고 다른 인간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모친이라는 신체 내에서 모친의 신체의 확장과 연장 차원에서 우리는 자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성령의 확장으로서 예수님이 태어났어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일으킵니까?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압축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복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육이었고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은 악마였다.” 이게 요한복음의 압축한 내용이에요.그들은, 자기가 악마의 지시를 받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은 뭘 믿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던 거예요. 요한복음 8장 41-48절까지 그 논쟁이 아주 치열하게 이루어집니다. 상당히 길기 때문에 제가 중간중간 띄엄띄엄 압축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기를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41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44절에서, “너희 아비는 악마다, 마귀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 근거가 뭐냐? “너희들의 진짜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내가 아버지께로서 왔음을 너희가 인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마귀에서 났기 때문에 마귀티를 낸다고 하나님 아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너희가 극구 지금 밀치고 있고 거부한다.” 그리고 47절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렇게 하니까 유대인들이 그 말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고 48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그러니까 4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이게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주장이 우리한테 상당히 고맙게 들려져야 돼요.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대화했던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이 모호하고 상상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냥 흐릿한 관념에 불과해요. 만약에 그 현장에 우리가 같이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똑같은 발언을 내뱉는 식으로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교육과 훈련을 받은 거예요. “예수님은 귀신 들렸다. 당신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야.” 그 당시 귀신들렸다는 말은 미쳤다, 그 말이에요. “당신은 미친 자에요. 내가 뭐 꼭 믿을 일 없다. 당신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인간이 육이고, 다시 말해서 악마의 지시를 받고 있으며 그들은 죽어 마땅하고, 그리고 그들은 지옥 가 마땅하다, 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신 일에 반대하지 마세요. 반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베드로마저도 그래요, 베드로마저도. 베드로가 제가 목숨 버릴 각오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자기의 가오를 이야기했지요.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예수는 너한테 없다.” 왜냐하면 본인이 있다고 여기는 순간,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순간 예수님은 없는 존재고 예수님이 없다고 하는 순간 베드로는 비로소 그때 주님이 생각한 베드로가 새로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손가락 가지고 울타리를 만들면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거예요. 손가락이 각자 자기가 자기 고유의 내 영역을 주장해버리면 예수님은 사라져 버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 하나의 울타리로 작용하면 되는데 교회 안에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품으려고 한다면 더 이상 그것은 교회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막으로만 존재해야 돼요. 있는둥 없는둥 해야 돼요.

그래서 성령이 오신 것은 있는 인간을 없앰으로 말미암아 흔적으로서, 하나의 자국으로서, 자국, 흔적, 징후로서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용하십니다. 하나의 경계. ‘내가 여기 있었는데 실은 내가 곧 없어질 거야. 내가 여기 있게 한 것도 주님의 기능때문이고 내가 없어지는 그것도 주님의 기능이야.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는 내가 나도 신경 쓰지 않고 너도 나한테 신경 쓰지 마.’ 이런 식으로 하나의 선으로만 존재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만약에 이게 폭을 가져버리면 이 천하에 나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게 되고, 그것을 내가 쥐려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유대인과 바리새인 같은 이러한 오기, 주께 대한 오기를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본문 데살로니가후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기에 너희를 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택했다.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성령, 거룩, 진리, 믿음, 구원, 그다음 14절에, 결정적으로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 그다음에 그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님은 우리를 뽑기의 뚜껑같이 사용하십니다. 뚜껑 확 벗겨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14절 나와야 돼요. 이 말씀이 우리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는 면을 드러내야 돼요. 우리는 평소에 이걸 감추고 있다가 주께서, 성령께서 딱 떼면 이것은 나를 위한 나가 아니라 나는 하나의 기능이고 주님의 택함이 그 바닥에 있었고, 성령의 거룩함도 있었고, 진리의 믿음으로 구원도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주의 복음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바닥에, 내가 뜯겨 나가는 배후 바닥에 그게 나타나게 된다 그 말이지요. 이게 교회고 이게 성도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있음이 없음으로 뜯겨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 말입니다. 자꾸 뚜껑이 자꾸 뚜껑, 자기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실제 생활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우리를 차에 태워놓고 우리를 수갑으로 핸들에 묶어 버려요. 핸들에 묶어버리고 그래서 우리는 핸들을 조종 못 하고 묶인 채 달려가게 만들어버려요. 이게 성령의 거룩함이에요. 너는 이미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룩이 쟁취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주어져 버린 그 내용이 거룩이에요. 그게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나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함은, 이것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악함에서 거룩함이 안 나오잖아요.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주어지는 거예요. 주어지는데 그 주어진 십자가 복음에, 거룩에, 거룩하심에 수갑 채워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인생을 천국을 향하여 그냥 몰아세워 버립니다.

몰아세우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주위에서, 주변에서 우리를 애처롭고 안타깝게 보는 눈들이 있어요. ‘어어? 저거 박겠다, 박겠다. 피해가야지.’ 평소 같으면, 내 행위로 구원받을 것 같으면 핸들을 조종해서, 우리는 내 살길 찾아서 핸들을 좀 민첩하게 돌려서 살길, 살길만 찾아가지고 휴~, 한숨 쉬면서 이렇게 할 것인데 주께서는 우리를 성령으로 수갑 채워서 맨날 어어어어……, 이러다가 하루하루 지나는 거예요. 어어어어어……, 절벽인데, 어어어……, 하는데 톰과 제리에요, 완전히. 이건 뭐 공사장에서 막 날아다니고요, 벌써 차가 와서 톰과 제리를 아스팔트에 바닥에 눌러놨는데 죽었다 싶으면 다시 부스스, 하면서 일어나요. 터미네이터 인공기계처럼, 액체인간처럼 다시 돌아오듯이요. 그냥 막 가는데, 그냥 막살지요, 그야말로 막 사는데 그래서 주변에서는, 주변 사람들은 발 동동 구르면서 ‘안돼! 저렇게 살면 안 돼! 저러면 망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지요.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내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지금 손이 묶였는데?’ 성령의 거룩함으로 묶였기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 착하게 살고 싶어도 못살게 만들어버렸어요. 묶인 자체가 거룩이기 때문에, 묶인 자체가! ‘다음 주에 교회 가야지.’ 누가 맘대로 교회 가요? 못가요. 핸들에 묶였는데 뭘 가요? 못갑니다. ‘열심을 다하여 가야지.’ 차 펑크 나는데 뭘 가요. 세상의 모든 것이 주위에서 어떤 인간들이 그렇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을 그렇게 현혹하는 유혹이, 온통 바람이 태풍이 불고 폭풍이 치는 거예요. ‘아이고, 우크라이나 저거 우짜노? 우짜노? 식용유 값이 오른다는데 사재기 할까, 우야꼬!’ 우리의 모든 생각은 내 로봇을 내 맘을 어떻게 조종하느냐, 거기에 집중하고 열중한다고 평생을 매일매일을 그런 식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자식 저거 교회도 안 나오고 어떻게 하노?’ 온갖 걱정, 남의 자식 아니고 자기 자식 걱정하지요. 왜? 나한테 의미가 되기 때문에,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 속에, 내 맘에 내 자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다이아몬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11절 다시 보게 되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아무도 각자 개인이 악마로부터 지시받는 것은 본인만 알고 모르는 거예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관계 없기때문에 몰랐어요. 그런데 여기서 뭐냐? 침투가 주어집니다. 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그동안 세상의 영을 그냥 세뇌받아 왔어요. 온통 세상의 영, 우리 클 때는 엄마의 영향을 받았고, 그 엄마 자체는 아빠의 영향을 받고, 아빠의 영향은 아빠가 일하는 세상으로부터 영향받아서 그것을 엄마한테 들이붓고, 엄마는 그 짜증을 자식한테 붓는데 그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태반에 있는 근육 조직이 위축이 되면서 혈액 공급이 안 되어서 그 스트레스가 애한테 그대로 가서 지금 뉴런이 자라야 되는데 그만큼 자라지 못하면 애가 좀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버리지요. 바깥에서 스트레스가 주어지니까.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자, 여기서 영을 받았다는 말은 그 영이 그러면 우리를 어떤 식으로 몰고 가는가? 영은 이미 육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났다. 따라서 이것을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그러니까 자유함이 없는 것은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자유함이 주님의 자유함이지 나의 자유함이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제대로 나의 신체라는 로봇을 이제는 제대로 된 주인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우리 손을 묶어버립니다. 손을 묶어서 우리 같으면 차마 해내지 못하는, 갈 수 없는 길을 주께서는 강제로 휘몰아가십니다. 휘몰아서 그냥 당겨 버려요. 그냥 몰쳐버리지요. 마치 KTX타고 시속 300킬로로 달리면 휙휙 옆의 풍경들이 쏜살같이 지나가지요, 쏜살같이. 그냥 세상이고, 우크라니아고, 대선이고, 미국 대통령이 오고 관계없이 그냥 쑥쑥 지나가요. 쑥 지나간다고요. 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기 때문에. 자유라는 말은 주님 앞에 붙잡힌바 되어서 내가 나한테 할 게 없다는 것. 왜 할 게 없는가? 그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 더 이상 미혹과 유혹과 매력의 대상이 되지를 못해요. 세상의 어떤 좋은 것과 어떤 변화도 나에게 불안감과 공포심과 위협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의 성령의 붙잡힌 바가 되면 우리는 그냥 없는 존재가 아니고요, 없는 존재 같으면 안 되잖아요. 있어요. 없는 존재가 아니고 그걸 죽은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있어도 있으나 마나 한 껍데기 같은, 시체 같은 존재에요. 그냥 주께서 인도하는 자동차에 탑승되어 있을 뿐이지요. 주께서 이끄시는데 탑승되어서 주님께서 휘젖고 다니는 그 자유함, 그 자유함이 우리 속까지 확장되고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이 우리한테는 시답지 않고 시시하고 사소한 일이 되고 말았어요. 예를 들어서 “교회 다음 주로 비워주세요.” 이렇게 하면 그것은 자동차 바깥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바깥에서 “어이! 안쪽에 있는 사람, 핸들 쥔 사람! 비워 주세요.” “예” 하고 그냥 비워주면 되지요. 왜? 교회는 하나의 가느다란 철조망이니까. 애초에 안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걸 ‘휘발하는 주체’라고 이야기해요. 날마다 휘발성이 있어서 날아가 버리는 주체, 휘발하는 주체, 내 것이 모이면 다시 휘발하고, 모이면 다시 휘발해서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유사성을 향한 계측, 그리스도의 형상이, 예수님이 여기 계심이 유사적으로 계속해서 보일락 말락 보일락 말락 그렇게 계속 보이면서, 주님의 현존이 나의 현존보다 더 확실하게 보이면서 나는 옅어져 가는 그러한 인생,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성도의 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아닌데,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심각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세뇌받은 것이 세상으로부터 받다 보니 모든 게 진지하고 모든 게 중요한 것처럼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주의 영을 받은 사도들이 갔던 것처럼, 스데반집사님이 살았던 것처럼 주님 가신길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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