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아빠와 함께 2022. 4. 29. 14:50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결정짓는 최종 것이 되느냐’ 지금 그 설명을 해드리는 거예요.
기존의 인간들을 이스라엘, 유다, 예레미야에서는 아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혀 인정하지 않아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제목일수도 있는데요. ‘약정 파기’.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때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약정 파기입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신다’ 그런 말도 어렵고요. 뭐 모든 걸 다 아신다면서 왜 자기가 스스로 한 일을 후회하느냐? 그럼 미래를 몰랐었나?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서 그동안 무식했는가? 이렇게 논리가 나올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약정을 파기해버립니다.

약정 파기한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예레미야 33장 19절-26절까지 나와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파한다, 파괴한다, 부순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찐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앞에 하나님이 인간하고 의논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이스라엘에게 줬던 그 언약을 내가 알아서 전부다 다 파기시켜버린다는 거예요. 여기 24절에 보면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지 아니하느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하나님께서 다 파기해버리는 거예요. 25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찐대” 26절,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지금 이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들을 깨끗하게 전부다 지워버리고 나가라 하시는 주님의 그 자기 결심의 근거를 제시하는 거예요. 너희들하고 계약 파기 되었다. 파기된 이유에 대해서 예레미야에 쭉 나오는데 여러분들이 예상하듯이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돌판을 들고 오는데 모세하고 하나님 사이에는 계약이 맺어졌어요, 돌판을 줬으니까. 그런데 돌판을 그대로 유지해야 될 텐데 백성들은 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잖아요. 백성들은 그 계약을 구경도 못했어요. 그런데 모세가 뭐 백성들한테 주고 ‘봐라. 계약 파기됐지? 너희들은 당해.’ 이런 게 아니라 본인이 알아서 계약을 중간에 파기시켜버립니다. 왜 그런가. 출애굽기 34장 1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모세가 돌판을 깨고 그 돌판을 깬 모세보고 하나님께서 글자는 쓰지 말고 돌판은 똑같이 만들라 하시고 그 만들어진 아무것도 안 써진 돌판 들고 시내산 꼭대기까지 다시 올라오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상자가 있는데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돌판은 원래 깨진 돌판이 아니고 깨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이거든요. 이게 복음의 비밀입니다. ‘대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대신하는 거예요. 사람에 대해서 대신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람 안에 집어넣고 그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속에 하나님이 끼어들어서 이 하나님마저 사람과 함께 죽게 만들어요. 죽게 만들어서 죽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는 일을 대신해서 도로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언약궤 상자가 길이 2.5규빗, 너비 1.5규빗, 높이 1.5규빗 이렇게 있는데 이 안에 돌판이 있다했죠. 돌판은 깨진 돌판을 대신한 거죠. 그리고 언약궤 위에 뭐를 부어요? 피를 바른다고요, 피. 희생제물의 피를 발라버려요. 그러면 이 피가 흐를 수밖에 없는 내력을 함유한 피가 되는 겁니다. 어떤 스토리가 있는데 스토리가 진행하면서 생산된 게 뭐냐 하면 피가 생산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지내던 그 이야기, 스토리에서 뭐가 발생된다는 말입니까? 피가 발생되는 거예요, 피가. 그런데 그 피가 되려면 이건 사단난 거잖아요. 이게 죽음이잖아요.피가 무엇을 겨냥하느냐 하면 상자 위의 피는...... 상자 위에 언약궤 위에 피를 뿌려요. 피를 이 안에 붓는 게 아닙니다. 소독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씻어주는 세정액이 아니에요. 피는 뚜껑 열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뚜껑 위에 있다고요. 그럼 피는 이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왔는데 깨어져버린 그 이야기, 그 내력과 관련되어있는 피가 되는 겁니다. ‘언약이 깨어졌다’가 현실 세계에서 나타나는 표식, 표시는 피로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피는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언약이 좌절되었다. 언약과 언약 사이에 좌절, 다른 말로 하면 단절.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이 끊어진 거예요, 인간세계와. 끊어졌기 때문에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사치입니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피는 무엇과 싸우겠습니까? 문제가 너무 어렵다.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피는 무엇과 싸우겠습니까? 피의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질문이에요. 아주 어려운 질문인데, 답변은 제 몫이죠. 질문을 제가 했기 때문에. 피는 무엇과 싸우느냐 하면 인간으로 출발한 사망의 길, 생명의 길의 기준과 싸우는 거예요. 왜? 피는 하나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언약이 깨어졌잖아요. 박살나서 새로 만든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단절이에요. 따라서 성도는 개여울의 돌로서 성령으로 두루마리처럼 감긴 성도는 자기 내부에서 이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해서 나는 사망의 길로 가지 않고 생명의 길로 갈래.’하는 그 나와 싸워야 될 성도로서의 나를 위해서 주께서는 성령을 둘둘 감아놓은 거예요.

여러분, 평화 시에는 의미라는 게 없습니다. 평화 시 자체가 한시적이고 임시적이에요. 한시적 기간이고 임시적 기간이에요, 평화라는 것은. 그럼 언제 의미가 나타나느냐. 바로 전쟁 때에요, 전쟁 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때 비로소 우크라이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거예요. 평화로울 때는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날마다 성도를 통해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성도에게 평화란 없습니다. 성도에게 평화란 없어요.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불화를 일으킨다. 심지어 가족끼리라도 부부끼리라도 부모자식 간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때, 비로소 의미는 평화 때가 아니고 전쟁 때 의미가 굳어지는 겁니다. 아, 이런 뜻이구나. 단란하게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이니까 전쟁의 지속 또는 전쟁의 반복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계속 나온다. 아까 전쟁은 무슨 전쟁이라 했습니까? 전쟁이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전쟁이 있지만 세상에 대한 전쟁이죠. 인간의 내부적인 전쟁인데 내부적인 전쟁의 구성은 이렇게 하면 알기 쉬워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국 가겠습니까?’ 이것하고 ‘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자, 이 두 문장의 차이점을 한번 보세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하는 것은 자기 구원받을 것만 챙기고 돌아서면 그만이겠죠. 그럼 자기 안에 평화가 오겠죠. 그런데 ‘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합니까?’ 하는 이 말은 세상은 누구에 의해 돌아간다는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돌아가죠. 그렇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격이 이 세상에 그대로 있단 말이죠.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해버리면 내 생각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 챙기기를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하죠. 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느냐 하는 것은 세상은 계속 물결치고 있잖아요. 변화되고 있잖아요. 변화될 때마다 그때그때 설명해야 될 임무와 역할을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겁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전쟁 중이니까. 질문을 해도 이런 관점, 2번 관점에서 질문이 되어야 이것이 말씀의 심층까지 내려갈 수 있어요. 그런데 1번-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는 여호와의 증인이죠. 성경말씀 몇 구절 달달 외우고 네비게이토나 이런 거 하면 돼요.

‘세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풀이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개인과 전체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우리 평소의 관심사, 남한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나오는 그 내용하고 지금 2번 이쪽은 정말 상당히 거리가 참 멀다는 것을 내가 느낍니다. 돈에 종속되어있으면서도 돈 없는 천국을 간다? 그게 앞뒤가 안 맞죠. 지금 연결이 안 되죠, 연결. 연결이 안 돼요, 연결이. 세상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싸운다. 이게 무슨 싸움이냐 하면 돈 싸움이에요. 돈 싸움이라고요. 우크라이나에 밀과 지하자원 있고 이런 것 차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의 길, 생명의 길 그 기능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나 돈 있다, 그거. 나 아이고 돈 없다. 생각이 돈, 자본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양적(量的)이라고 해요. 인간은 양(quantity)의 구조 속에 놓이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린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버린 이유가. 예레미야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죽이느냐 하면 소위 사람을 볼 때 돈 빼먹는 대상으로 봤던 사람은 바벨론이 와서 유다나라 다 죽여 버립니다. 왕부터 해서 죽여 버려요. 시드기야 왕이 그래서 죽어요.

예레미야애가 4장 13절,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의인의 피가 어딨죠, 의인? 그냥 피가 아니라 의인의 피라고요.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지금 힘들지만 우리가 찾아내야 될 것이 도대체 뭐를 갖고 의인이라 하느냐 그걸 찾아내야 돼요. 예레미야 31장 34절에 보게 되면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어요. 이것이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했죠.

자, 아까 말하고 연결시켜 봅시다. 지금 유다와 이스라엘에는 계약을 파기시켰어요. 이 말은 계약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이 나중에 나오는 겁니다, 계약대로.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처럼 그들이 우상을 섬기니까 계약을 깨버렸잖아요.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납니까? 모세가 돌판을 다시 만든 것 기억납니까?

너희들은 계약 파기자라고 하는 것은 그 계약 파기한 돌판의 내용을 그들에게 알려줘서 아, 우리가 파기되어 마땅하구나, 이렇게 아는 게 아니고 그들이 평소에 하던 그 본색, 자기 마음에서 나온 행동대로 여호와를 위해서 금가락지 뽑아서 소를 만들어놨는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게 바로 계약 파기라는 거예요. 진짜 어렵죠. 죄가 뭐냐 하면 일상의 일이 죄가 된다는 거예요, 일상의 일이! 우리가 하는 일상의 일이 죄가 된다는 그 이야기를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따라서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 계약 파기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에요, 계약 파기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나는 인간도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만 해당 돼요, 이게.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이 산 밑에서 우상을 섬길 때는요. 그들이 죄인 줄 알고 우상 섬긴 게 아니에요. 그냥 일상의 일이 죄라니까요. 일상의 일이 죄에요. 그래서 그들은 죄에서 일을 한 거예요. 죄=일상의 일,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equal(=) 하지 말고 화살표(⇒)로 죄⇒일상의 일이라 하면 죄가 확대되니까 일상의 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전체로 확장되는 그 원리원칙은 오직 죄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은 죄로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죄로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먼저 만들어져야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죽어 마땅하구나, 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문장으로 써야겠어요. ‘이미 죽은 자를 살려서 생전에 해야 될 일을 주께서 하게 하신다’ 이게 죄에 대해서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 인간은 계약 파기로 인해 이미 죽었어요. 죽었는데 죽었다 하니까 ‘목사님, 무슨 말합니까? 지금 살아 있잖아요. 방금 식혜 먹었잖아요. 살아 있으니까 목으로 넘어가죠. 살아 있잖아요.’ 하는데 살아있는 것은 이미 죽은 자를 생전에 해야 될 일을 위해서 주께서 하게 하시기 위해 살려준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주신 것이라 이 말입니다. 뭐 확인하라고? 이미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식혜도 만들고 귤도 준비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한꺼번에 한 문장으로 줄여서 하게 되면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가 되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일상의 하는 모든 일이 죄라고 하는 우리가 어떻게 따로 내가 나를 살려내야지, 하는 그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이미 죽었는데. ‘주님이 살게 했다’만 나와야지, ‘주님이 살게 해준 것 믿어서 나는 살아야지’ 이러한 통밥, 이런 요령을 부리지 말라 이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계속 주께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계속.

우리의 모든 일과는요, 주께서 그렇게 조성해주신 거예요. 만들어 주신 거라고, 그게. 그래야 계약 파기, 아까 봤죠, 예레미야, 계약 파기되고 다시 새 계약을 만들어서 새 계약에 준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자기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내는데 그 백성의 특징이 그 죄에 대해서 기억치 아니하는 거예요, 그 죄에 대해서. 왜냐하면 그 계약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들어있다는 것이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니까 한번 봅시다. 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아예 인간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시는 거예요.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의 갈림길이 되는 그 표징, 기호, 표증을 그 사람 속에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는 것이 뭐냐? 새 언약의 완성 곧 한 자로 하면 ‘피’가 돼요. 피를 집어넣어서 피를 집어넣었다는 그 조건 때문에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새 언약의 계약자가 되는 겁니다. 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죽었죠. 돌판 깨졌죠. 돌판 깨진 것을 누가 다시 새롭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십자가 죽었죠. 부활하신 주님이 예레미야 31장 33절의 말씀처럼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줘서 이 성령이 오게 되면 껍데기에 있는 우리는 옛날 계약에 의하면 이건 완전히 죽어 마땅하고 그 안에 새 언약, 이게 새 언약이에요, 3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뭘 세운다 했습니까? 새 언약을 세워서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어딜 가도 뭘 해도 어디 먼 나라가도 우린 새 언약의 사람이어서 그 현장에서 무슨 역할을 합니까? 그냥 개여울의 돌부리 역할해서 거기 가서 뭐 영어 배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옆에 와서 개무시하면 넌 사망의 길로 가라. 너를 보니까 천사를 보는 것 같아. 생명의 길로 가거라. 우리의 역할은 그거에요, 그냥. 우리는 뭘 했느냐? 우리는 내가 모르는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 내가 모르는 죄까지. 더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내가 짓지도 않은 죄까지 다 용서받아버렸어요.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작은 돌부리 이야기했고요. 개여울 이야기했고 사망의 길, 생명의 길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의 증표가 필요했고 그 증표가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 했어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말이죠. 그 개여울에 돌부리가 있어서 물이 갈라진다면 갈라진 길 중 사망의 길이 있고 그 길이 뭐냐. 바로 선악체계가 유지되는 거죠. 생명의 길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선악체계가 부정되고 생명나무의 거저 주시는 것으로 되죠. 그래서 생명의 길은 새 언약이 되겠습니다, 새 언약. 예레미야 31장 31절,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처럼 이 안에 무엇이 포함되느냐 하면 ‘언약(약정) 파기’가 포함되죠. 그렇게 될 때 반드시 성도는 이 사망의 길을 거쳐서 생명의 길로, 약정 파기를 거쳐서 생명의 길 속에 있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로마서 6장에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너 죄가 뭐냐?’ 하면 이 죄가 선악체계에서 나온 죄 같으면 아직 죄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죽음 사건, 피 사건, 저는 그걸 어느 강의에서 ‘유혈사태’라 했는데 하나님을 죽게 한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 점을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죽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은 아까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이 스스로 돌판을 깨게 하시고 그다음 언약궤 상자 위에 피를 냈죠. 그래서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가 율법서를 언급하고 율법서에 뭐를 발라요? 율법서를 그냥 언급하면 안돼요. 그럼 인간이 그 율법서를 지키려하기 때문에 피를 발라버리고 이쪽에 양푼 반에 있는 피를 백성들에게 뿌린다 했죠, 주일 낮 설교에서. 그러면 그 백성들과 율법 사이에 연결고리는 뭐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오직 피로만 연결되어 있어요. 피 외에는 다른 걸로 연결되지 않아요. 그 피는 흠 없는 희생물이 흘렸던 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흠 없느냐? 한번 적어볼게요. ‘흠 없는 것은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죽음으로 끝나고’ 흠 없는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말은 ‘흠 있는 것들은 이 흠 없는 것을 죽이는 것으로 자기의 본색을 다 드러내고.’

제가 두 번째 강의 좀 조심스럽습니다. 너무 어려운 게 준비되어 있어가지고. 하여튼 조심스럽지만 이것부터 이렇게 이해해주시기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것이지만 직접 들어가 봅시다. 예레미야 50장 4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죠. 5절에,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이거 뭐 어려울 게 있어요? 쉬운데.’ 하는데 이 점이 어려워요. 여기는 약속의 땅이고 다른 쪽은 바벨론 땅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와요, 예레미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오는 거잖아요. 다시 돌아오는 것.

그러면 핫도그를 봅시다. 핫도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소시지가 들어있죠. 소시지 없는 핫도그는 핫도그가 아닙니다. 핫도그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여기 주변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이방나라의 운명이 결정돼요. 주변에 걸쳐있는 이 모든 나라들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다시 돌아오면서 주변에 걸쳐있는 나라들의 운명이 결정되고 영향이 다 있는 겁니다. 운명이 결정되고 영향이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 중심이 있다. 핵심이 있다는 거예요. 핫도그에 소시지가 핵인 것처럼. 핵심이 있고 그 핵심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옛 언약에서 어떻게 옛 언약의 약정이 파기되고 새 언약이 이루어지는가, 그 경로가 인류사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요. 주변에 있는 모든 이방민족들은 거기에 따라서 전부다 작살나고 다 날라가고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물음을 다시 한번 적어볼게요. 1번-주여,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러한 관심사와 2번-내가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첫 번째가 약정이 파기되기 전에 이스라엘이 하는 모습이라면 나중에 새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은 세상을 설명하는 핵심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 새 언약 속의 이스라엘을 뭐라고 합니까? 에베소서 1장에서. 새 언약, 예수님의 피죠, 새 언약의 이스라엘을 에베소서에서 두 자로 뭐라 하죠? 이걸 가지고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가 되겠죠.

이걸 달리 한번 표현할게요, 지금 이 이야기를. 자꾸 이렇게 대조적으로 문장을 쓰는 이유는 대조적인 것을 통해야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췌장암 걸려서 6개월 남았거든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6개월 뒤에 죽는다, 이게 아까 1번 차원이에요. 그런데 첫째 시간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미 성도는 죽었잖아요. 죽었죠. 이미 죽었고 주께서 계속 살려주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6개월 뒤에 나는 죽는다’가 아니라 ‘죽는 날 앞에 6개월 남았다’. 억지 아닙니다. 왜 6개월이나 남아있어, 오늘 지금 안 죽이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상하네. 왜 6개월이나 남았지? 1번은 아휴, 6개월 뒤면 나 정말 죽는구나,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이미 본인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 안 해요. 아까 로마서 6장 2절에 보면 우리가 죽는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죄 때문에 죽어요. 산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는 모세가 돌판을, 십계명을 안 가져왔으면 그게 우상숭배가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은 뭣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아는 게 뭐가 있어요? 그냥 바둑만 두지. 아무것도 몰라요. 어제는 어제부로 끝나야 되는데 오늘도 왜 살아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제부로 끝나도 괜찮은데...... 그 이유는 죄를 더 알기 위해서 더 살게 하시는 거예요, 죄를 더 알기 위해서. 사람이 죄를 더 알아야 내가 끄집어내는 말보다 나를 죄인 되게 하신 주님의 말이 흘러나오니까 하나님의 말이 흘러나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바로 1번과 2번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야 거기서 의미가 구축이 되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5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나의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그다음에 무슨 단어죠? “모든 재앙을 내리리니” 재앙을 내리죠. 옛날에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올 때 재앙을 받은 쪽이 이스라엘이었어요, 애굽이었어요? 애굽이 받았죠.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재앙은 애굽에 떨어졌습니다. 애굽 나라 있고 홍해 건너 광야이고 광야 지나 약속의 땅으로 감에 있어서 재앙은 애굽에 떨어졌어요, 재앙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다고 애굽에 재앙이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예레미야 35장 17절에서 이제는 이스라엘이 다시 노예 생활, 이방나라한테 포로 잡혀 가면서... 그럼 애굽으로 왜 안 갔느냐? 애굽은 그 당시에 갈그미스 전쟁에서 바벨론에 패배해서 바벨론이 애굽까지 점령했어요. 그러니까 애굽 전체가 바벨론 나라에요, 그 당시에는. 포로 잡혀가면서 어디에 재앙이 떨어집니까? 예레미야 35장 17절에. 이스라엘에 재앙이 떨어지죠. 그럼 이스라엘이 옛날의 애굽 나라와 같은 입장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답변해보세요. 애굽 나라에서 누가 힘들었고 누가 괴로웠습니까? 남자 아기는 다 죽여 버려라. 그 처벌대상이 누구였죠? 히브리인들이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언약을 받은 그 히브리인들이 언약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바로 왕한테 설움 받고 학대를 받았잖아요. 그렇죠?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가면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떨어졌다는 말은 이 안에 누가 품어져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품어져있어요? 바로 진짜 새로운 언약에 준해서 살아야 될 백성이, 진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인하여 애굽 나라한테 학대받듯이 학대 받고 있었던 겁니다. 학대하는 그쪽은 아까 봤듯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도 안한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짓한 거예요, 그것 아셨으니까 그렇다면 또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을 포로 잡아갈 때 재앙이 이스라엘에 떨어졌죠. 자, 그다음에 바벨론에서 다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올 때 재앙은 어디 떨어지겠습니까? 바벨론이죠. 예레미야 50장, 51장 보게 되면 바벨론이 아주 처참하게 망가집니다. 그중에서 예레미야 51장 7-8절 보겠어요.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하는 금잔이라” 비틀거리게 만든다.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이렇게 해서 바벨론은 낫지 아니해요. 9절에 보면 바벨론은 다시 낫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을 치료하려 하여도 낫지 아니한즉 버리고 각기 고토로 돌아가자 그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하였음이로다”) 그 기간에 대해 예레미야 25장 12절에 보게 되면 이건 중요한 거거든요.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참 신기하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리라” 이 칠십년이 무슨 기간이냐 하면 바벨론 나라가 망하는 기간이에요. 망하는 기간인데 여러분들이 딱 생각할 때 칠십년이 무슨 기간이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갔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그 기간이 칠십년이죠. 동일하게 칠십년이라고요. 한쪽은 칠십년 만에 돌아오고 한쪽은 이스라엘 건드렸다고 바벨론이 칠십년 후에 바사 나라, 페르시아 나라에 망합니다. 그 칠십년이 뭐냐 하면 BC 609-539년. BC609년에 시작했던 바벨론이 BC539년에 망해요. 딱 칠십년 만에 망해버려요. 이때 바사 나라, 현재 페르시아 나라에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쳐부숴서 그 나라를 아예 없애버립니다. 없어져요. 그러니까 아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이방 나라의 운명이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이스라엘의 경로와 관련되어 있어요. 이것은 신약 시대에 인류사, 신약 시대 모든 이방나라, 현재 나라의 운명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떠나가시는 그 코스에 맞춰서 그 리듬에 맞춰서 그들의 운명은 끝장나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이 세상은 주께서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주님께서 성령의 덩어리, 성령의 두루마리로 쌌던 성도를 이 땅에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운명이 그 성도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 결정 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게 있어요. 선지자한테 한 것은 선지자의 상을 받고.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그다음 한번 보세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그다음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소자, 제자, 의인, 선지자 그게 너희들이 천국 가는 여행사라는 거예요. 여행사 직원이라는 겁니다. 본점은 보이지 않고 각 대리점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대리점 자체가 뭐 대리점, 예수장로회 교회 이런 게 아니고 그 대리점 안에 주님이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사건을 성령을 통해서 주게 되면 그 성령이 움직임에 따라서 각 하나님의 성도는 같이 움직이죠. 아까 그랬잖아요. 성도가 암에 걸려도 6개월밖에 못 산다는 말을 성도는 뭐로 바꿉니까? ‘너무 지루하지 않습니까? 일찍 죽이지 뭐하려고 6개월이나 살아있습니까?’ ‘아직 네가 네 죄를 모르는구나.’ 이렇게 해서 6개월 동안 있는데... 죄를 끝까지 다 알아야 되니까.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그 죄 있잖아요. 어떤 질문을 해도 내 중심으로 하는 그 죄. 그걸 혹독하게 다 경험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성도 안에 두 가지 지역이 있어요. 여기는 약속의 땅, 다른 한쪽은 바벨론이 있어서 성도 안에 주님께서 성령께서 예레미야의 말씀을 약속의 땅에서부터 바벨론으로 옮기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또 옮기고 돌아오고 이걸 매일같이 매일 살아있는 삶을 통해서 아침마다 저녁마다 늘 반복시키는 겁니다. 반복하게 되면 성도는 잘했나 못했나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사망의 길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는데 성도에게 사망의 길은 선악체계라 했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생명의 길은 거저 사하여 주시고 더 놀라운 사실은 죄를 기억치 않는다. 이 기억치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내가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언제 했는데?’ ‘하나님, 치매 걸렸어요?’ ‘치매보다 더 한 거 걸렸다. 나는 치매보다 더하지.’ 왜 치매보다 더 하게 기억치 않느냐 하면 ‘대신’의 작업, 업무, 업적, 성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기억을 못하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는 거예요. 대신했음만 드러내요. 네 죄에 대해서 내가 대신 가져갔다는 것만 기억하기 위해서 네 죄에 대해서 다그치지를 않아요. 선악체계는요, 자신의 지은 죄를 자기가 잊질 못해요. 선악체계에서 자기의 죄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잊지 않음이 선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스라엘 국가의 모토 같은 거예요. 나치를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것은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에요. 생명체계는 기억치 아니해요. 대신 가져갔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성도 안에서 약속의 땅과 바벨론을 오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나의 착함과 의로움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죄 지었는데 용서받았어, 이게 아니라 언약과 언약의 이동이에요. 옛날의 계약, 약정은 파기되었다. 이것은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파기시킨 거예요. 옛날 약정인 율법은 우리 안에 안 들어왔습니다.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지적질 했죠. 똑바로 해. 못하면 너 저주받아.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떨어졌잖아요, 옛날 언약대로. 그리고 난 뒤에 다시 돌아올 때는 옛날 언약 말고 아예 새 언약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 안에. 자, 안에 어떻게 들어오는가?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야 되겠죠. 안에 ‘그냥 들어옵니다.’ ‘들어왔죠? 땡큐.’ 뭐 이래가지고 끝날 문제가 아니고요.

갈라디아서 6장 8절 한번 봅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러분들이 성령의 두루마리처럼 성령으로 뒤엉켜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선악체제, ‘나는 이제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주께 영광을 돌려야지.’ 이런 선악체계로 완전 중무장되어있는 사람인지를 이 6장 8절만 봐도 대번 티가 나게 되어있어요. 성령으로 두루마리 된 사람은 6장 8절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새롭게 구성된 약정, 새 언약을 생각해요. 새 언약을 생각한다면 이 6장 8절의 말씀은 누가 하는 거예요? 이 6장 8절의 말씀이 우리 밖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까? 이미 성령이 지은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죠.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들어온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 선악체계를 아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며 그것은 죽어 마땅함이 되는 거예요.그럼 6장 8절이 들어오면 “영생을 거두리라”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 영생을 거두는 것은 우리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이게 주의 일이 되죠. 쉽게 말해서 남의 일에 우리가 끼어든 게 돼요. 성령 거두는 일에. 그래서 어떤 것도 성령과 무관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 아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차 타고 시속 80으로 가야될 길을 100으로 부아앙~ 가고 있는데 저기서 경찰이 와서 ‘잠시 멈추세요. 속도위반 했습니다. 운전면허증 봅시다.’ 이거 무슨 일이에요? 성령의 일이에요. 부아앙~도 성령의 일이었고. 안 보이거든. 경찰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해서 부아앙~ 하는데 뒤에서 삐용삐용해서 스톱해서 8만원 딱. 이거 누구 일입니까? 성령의 일이죠. 이게 성령의 일이에요. 주께서 배치를 했으니까. 성령께서 ‘경찰관 너 오늘 여기 서. 250m 지점에 서 있어. 성도가 운전하면서 부아앙~하고 좋다고 올 거야. 잡아.’ 모든 것이...... 왜 그래야 됩니까? 그것 때문에 너 살아있는 거야. 어제부로 죽어야 되는데 네가 안 죽고 오늘 산 이유가 오늘 속도위반해서 걸리게 되어있어서 그런 거야. 전부다 배치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성령의 일은 뒤돌아보면서 알 수 있어요. 소급해서 이해하는 거예요. 소급해서. 그런데 선악체제에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하는 순간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부될까? 수도원, 기도원에 가서 기도할까? 이제는 필리핀 선교를 위해서 일할까? 교회에 충성 봉사할까? 이 사람은 뭘 구분합니까? 육의 일과 성령의 일을 자기가 임의로 구분하죠. 자기가 임의로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공부한 것은 뭐냐. 구분을 누가 할 수 있어요? 이게 육인지 성령인지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 새로운 계약이냐, 아니면 옛날 계약이냐에 따라서 구분하는 거예요. 새 계약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니까요. 들어와서 나쁜 의미는 아니지만 우리 안에 호작질을 해버려요. 우리의 원대로 우리 뜻대로 안 되게 만들어요, 뭐든지. 그럼 ‘내가 뜻대로 안 하는 것도 성령의 일입니까?’ 하지 마세요. 우리는 성령의 일인 것을 지나고 난 뒤에 돌아보면서 알 수 있어요. 일이 지나고 난 뒤에 돌아보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 하는 것은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돌아보면서 죄 아닌 것이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식으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되어 있어요.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미리 앞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안다니까요. 그게 뭐냐? 세 자로 ‘막 산다’가 되는 거예요, 막 산다. 막 살고 있다, 가 아니고 막 살아온 게 돼요. 모든 게 막 살아온 거예요.

진도 나가봅시다. 히브리서 한번 봅시다. 어떻게 말씀이 우리 안까지 들어올 수 있나 그 이야기했죠. 히브리서 10장 한번 봅시다. 이것은 여러 번 들어서 아시는 분이 많을 거예요. 히브리서 10장 펴놓으시고요. 이 설명을 다시 들어보세요. 여기 애굽이 있고 다른 편에 바벨론이 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약속의 땅 이스라엘은 핫도그의 소시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언약으로 율법이 주어졌죠. 율법은 저주와 복, 이렇게 두 개가 있어요. 율법대로 못 지키면 저주, 지키면 복을 받는 거예요. 결국은 이 이스라엘이 애초부터 율법대로 지킬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들통내잖아요, 율법이. 로마서 7장처럼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고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이 저주받아서 바벨론 갔죠. 그러면 율법은 그 자체로서 완성을 향하여 진척을 보이는 거예요. 완성을 향하여. 율법대로 해서 벌 받았으니까. 저주 받았으니까. 비록 이스라엘은 저주 받았지만 ‘율법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가 증명되었죠. 그 율법이 바벨론으로 갔다가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거예요. 율법이 바벨론으로 가게 되면 바벨론 쪽이 재앙을 받아요. 바벨론 쪽이 재앙을 받는다고요. 그리고 다시 돌아오죠.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했죠. 히브리서 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그들과 함께 하셔서 가고 옴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받을 재앙을 대신 다 받은 것으로 여겨요. 모든 재앙을 다 받은 걸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 파기된 약정에서 새로운 약정으로 가면서 여기서 무엇이 형성되어야 하느냐 하면 죄에 대한 처벌이 다 완료된 바탕 위에 새 언약이 세워진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가 있죠,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재앙을 받아서 바벨론에 갔잖아요. 그러면 약속의 땅의 입장에서 여기 약속의 백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 무대는 비어있어요, 지금. 주인공이고 조연이고 텅텅 비어있어요. 빈 무대입니다. 이걸 가지고 70년 동안 약속의 땅이 안식한다고 해요. 쉰다. 나가라, 나가라. 다 나가. 다 나가. 꼴 보기 싫어. 다 나가. 무대장치는 그대로 있는데 여기를 채울 인간들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잖아요. 다시 돌아올 때 전에 나갔던 이유가 뭐냐. 율법대로 못 지켜서 나갔잖아요. 그럼 다시 돌아왔다면 율법대로 지킬 수 있는 민족이 들어와야 이 무대장치의 취지가 살아난다 이 말이죠, 무대장치가. 하나님은 언약 중심이니까 언약에 합당한...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거룩이고 이 나왔던 인간은 거룩하지 못하고. 이 나왔던 인간은 죄 지어서 나갔으니까 그다음에 올 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죄가 없는 인간으로 되돌아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여기에 들어올 때 새 언약, 새로운 언약이 있는데 새 언약은 죄를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애초부터 처음부터 그럼 기억치 아니해야지. 왜 나갈 때는 기억해놓고 돌아올 때는 기억치 아니하냐?’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보게 되면 율법대로 반드시 재앙을 받아야 돼요. 처벌을 받아야 돼요. 그 처벌에 대해 돌아오는 새 언약 안에 네 모든 처벌은 다 받았다는 내용이 함유된 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야 비로소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백성이 되는 겁니다. 돌아올 때 약정이 깨어졌기 때문에 백성이 없으므로 모두 죽은 자가 돼요, 약속의 땅이 다 비어있기 때문에. 따라서 다시 이 무대를 채우려면 죽은 자는 못 들어와요. 죽은 자는 계약이 끝났잖아요. 그러면 새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이 빈 무대를 채워야 될 분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아까 처음에 봤던 예레미야 봅시다. 예레미야 31장 22절, “패역한 딸아” 여성이죠, 남성이 아니고.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그러면 남자가 창조되었습니까, 여자가 창조되었습니까? 아니면 남자, 여자 다 창조되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남자, 여자 다 창조되어야죠. 배우 새로 뽑는 거예요, 이 무대 배우를 새로 뽑는 거죠. 이 세상의 모든 배우들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남자에 속한다고요. 여자라 하는 것은 남자 없이 등장한 여자에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그거라 이 말이죠. 여자의 자손이에요.

이제 히브리서 봅시다. 그 정도 하시고 히브리서 10장에서 17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기억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죠. 자, 그렇게 하려면 히브리서 10장 5-7절에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했죠.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오직 한 사람이 그 계약을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관중석에서  너 내려와. 너 내려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원수가 되게 하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의해서. 우리가 원수 되게 하는 거예요. 원수 돼서 최민정이 스케이트 탈 때 우리는 스케이트 타면서 최민정 다리 걸리게 하는 그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천하 죄인 중의 괴수죠. 우리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물 있잖아요. 번제와 속죄제할 때 제물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고 제물을 죽이는 자도 있어야 되거든요. 제물이 제물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죄, 일상이 죄가 되는 우리가 죄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고 11절 보면 이해돼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인간으로 죄 없애는 것은 끝났습니다. 못합니다. 없애지 못하지만 16절부터 보면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그러니까 우리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로 살해한 자로 우리는 이미 죄인으로서 있죠. 이 죄인의 자리에 주께서 나 때문에 죽은, 죄인 때문에 죽은 이 피를 우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18절에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왜? 이미 종결, 완료가 되었어요. 모든 죄 문제에 대해서 죄 사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탤 일이 없어요.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의례나 의식이나 남아있지를 않아요. 그래서 22절 봅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리스도 안에서 피 뿌림을 받은 자에게는 그 피가 우리를 주 앞으로 깨끗하게 새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빈 무대 있죠. 갔죠? 돌아온 사람 몇 명?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렇다면 이 70년은 예수님 죽으심부터 마지막 재림 때까지 모든 기간이 70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서 이 70년을 뭐로 바꿉니까? 70이레로 바꾸죠. 거기에 대한 내용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책 내용이에요. 70년이 70이레로 바뀌는 거예요. 70년x7 할 때 이 7은 인간에게 없는 시간이에요. 주님의 완료가 70년을 완료시켰는데 그게 70이레에요. 그 70이레의 마감은 예수님의 십자가 오심. 예수님 안에 시간이에요, 예수님 안의 시간. 그래서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이 70이레 동안에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너, 너, 너, 너 이리와. 뽑아서 선택해가지고 예수 안 성령 안으로 성령이 찾아오시고 예수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이것이 바로 말씀이 스스로 말씀되게 하는, 이 무대를 채우는, 하나님 백성을 채우고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완성된 새로운 언약이 들어있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 8절,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읽고 마치겠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고 마치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자기의 육체가 있으면 안돼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영생은 이렇게 거두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신은 이미 죽은 육신인 것을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거둘 게 없음을 또한 감사합니다. 거둔다면 오직 생명만 거두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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