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2:6)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별이 예루살렘에서 없어졌어요. 너는 몰라도 돼, 몰라도 돼, 이렇게 된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메시아나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또 몰라야 되는 쪽을, 의도적으로 메시아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없고, 관심 있더라도 악한 마음으로 관심 있는 쪽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각시키는 겁니다. 선악체계가 기세가 등등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가운데서 언약체계에 의해서 비록 유명하지 않은 마을, 미천한 마을,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지만 누군가가 출생하는 거예요.
이것은 기존의 성스럽고 거룩한 도성 시온, 이 예루살렘, 이데올로기, 이념, 예루살렘 이념에 의해서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빵꾸, 구멍을 내버리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 예루살렘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중요하다는 그 생각에 구멍을 내버려요. 그걸 파괴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은 별이 인도하지 않는 도성, 별이 나타나지 않는 도성이 되고 말지요. 선악체계를 유지하면서, 기존의 인간세계를 유지하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가 합류되기를 간곡히 바라는 이러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도성으로, 저주받은 도성, 저주받은 영역으로 베들레헴 아기 예수를 통해서 작업에 나서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인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요, 하나님도 쉬지 않고 일해요. 하나님 노시는 분이 아니에요. 베들레헴, 그냥 베들레헴이 아니라 작은 마을, 변변치 않고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마을 중심으로, 선악체계에서 미천하다고 규정 받은 그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지금의 기독교, 종교를 한번 보세요. 어떻습니까? 베들레헴 위주가 아니에요. 예루살렘 위주입니다. 권력과 결탁된 거예요. 예루살렘은 권력의 집결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알고 있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걸 피해서 메시아가 오게 하십니다. 동방박사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정치 상황인지도 모르고 순진하게도 별 따라 왔지요. 그냥 별 따라오다가 별이 끊어졌으니까 물어봤었고 그래서 베들레헴쪽으로 내려갑니다. 약 한 8킬로 정도 떨어졌어요. 동방박사가 그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방향 틀어서 가는데 그때 끊어졌던 별이 다시 등장했어요. 그리고 그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접견하고 난 뒤에 마태복음 2장 12절입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꿈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다 죽었어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그들은 발을 들인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있는 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에요. 마태복음 2장 16절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그때를 정확하게 잡는 게 아니고 넉넉하게 잡아서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여버렸어요. 다 죽이니 여기는 대살육의 현장이 되었고 이 점에 대해서는 예언된 대로 진행된다는 거예요. 너무나 말씀은 냉정하게 예언된 대로 진행되는데 그 진행되는 장소가 뭐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집단이 뭐냐? 통곡하는 집단이 되는 겁니다. ‘내가 왕인데 또 누가 있어? 사전에 찾아내서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왜? 왕은 고귀한 것이고 예루살렘은 신성하기 때문에, 거룩하기 때문에 그 이념을 포기 못 하는 거예요. 기존의 권력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이 선악체계에 있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저주받을 세력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때문에 파멸이 되고 집단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그런 도시로써 베들레헴이 선택된 거예요. 그 통곡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했다는 조건 하에 새로운 이스라엘로 이 땅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다녀가지 아니하면 이 땅에 이스라엘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요. 자기 자신이 망가져야 돼요. 베들레헴의 파괴에 같이 동참하듯이 자기가 죽음의 살육의 현장에 참여 된 자만이 진정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된 자로 간주되고 그 사람이 바로 베들레헴의 의미를 비로소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이 하나님의 베들레헴 백성들, 통곡하는 라헬, 다시 말해서 통곡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그러한 명칭을, 새로운 의미를 갖는 자들은 자기 안에 죽음의 요소가 들어오고, 자기 안에 저주의 요소가 들어오고, 자기 안에 망함의 요소가 들어오고, 자기 안에 공백, 빈자리, 뻥! 하고 빈자리가 들어와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핍박을 받아서 생겨버린 그 예수님의 몸에 난 죽게 된 못 자국이라는 그 구멍, 창 자국이라는 그 구멍이, 손가락 넣어도 훤하게 들어갈 수 있는 그 구멍이, 이제는 그 구멍과 동일한 구멍이 생겨버린 사람, 바로 이 사람이 베들레헴이라는 출생지를, 주님과 동일한 주민등록을 같이 하는 사람이에요.
마태복음 2장 23절에 보면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이 나사렛 동네의 의미가 뭐냐? 이사야 9장 1절과 6절, 1절부터 보게 되면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멸시받는 자의 인물로 예수님께서 출발해서, 곧 베들레헴에서 주님께서 진즉에 죽을 뻔했다가 이젠 헤롯 죽고 난 뒤에 나사렛으로 왔는데 이곳이 흑암에 속한 동네고 멸시를 받던 동네! 거기서 어디로 향하느냐? 소위 고상하고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소문난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되어 있어요. 베들레헴에서 있었던 그 피의 살육의 현장, 그 피, 핍박받은 그 피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공격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의 여정이고 거기에 참여된 자가 성도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의 선악체계에, 고상하고, 인기 얻고, 유명하고, 부러움을 사고, 환영받고, 존경받는 그 세계에 길들여져 있어요.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자기의’, 선생님 이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그 개념들, 고상하고 천박한 개념으로 계급화되어 있는, 층으로 나뉘어 있는 기존의 이 세상에서 의가 있을 때 존경받거든요.
우리의 출생지는 예수님의 구멍 난 그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랍비가 아니거든요. “이제는 나의 주시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내 중심부에 구멍이 뚫리면 되는 거지요. 사울처럼 “너는 나를 피박하는 자라”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데 주께서 뚫어놓은 그 십자가 구멍을 내가 세상사람들한테 존경받으려고 그걸 매일같이 그걸 도로 메워버려요. 도로 메운다고요 자꾸 그걸 메워버려요. 남한테 안 지려고 그러니까 자꾸 가치 있는 것들 끌어모으기 위해서 두리번거립니다. 매일 삶을 통해서 왜 내가 마땅히 죄인인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어째서 죄인인가 죄인인 이유를 찾는 데 집중하신다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날아가요. 걱정 근심 없애는 방법 참 쉽지요, 잉! 마태복음 11장 7절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 하십니다.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8절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청와대에 있어요, 지금. 옷이 한 두벌이 아니라는데요. 이 세상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거룩한 곳이라고 소문난 그곳에 있어요. 그런데 동방박사가 그곳에 갔다가 거기서 죽을뻔 했어요. 위험한 곳입니다. 모든 자기 의는, 최고의 의는 거기 다 모아진 거예요.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거기 다 집결되어 있습니다. 거기 가면 랍비들 많아요. 선생님, 선생님, 하는 사람들 참 많이 있어요. 거기 가서 어떤 특정 인물을 보고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 하면 맞아 죽습니다. 그 정도로 위험한 곳이에요. 위험하지 않으려면 진즉에 주님한테 구멍이 나버려야 돼요. 주님이 인간에게 당했던 그 구멍, 거기에 우리의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주님도 구멍 났네요. 저도 구멍 났어요. 제 자존심도 구멍 나고, 제 잘남도 구멍 나고, 우리 자리가 바로 죽어야 마땅한 자리고, 저주의 자리고, 망해야 될 자리고 공백의 자리입니다.” 인간들은 주님 보시기에, 성경대로입니다, 이미 죽은 좀비에요. 그래서 여자는 여자 좀비고, 남자는 남자 좀비고, 둘이 결혼식 하면 좀비 둘이 결혼했고, 아기 있으면 아기 좀비들이에요. 그냥 이야기하면 이게 욕하는 것 같고 과도하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과한 표현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모든 게 사라진다면 진즉에 우리는 좀비 맞습니다. 이것을 바로 도마는 알았고 사울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라보는 것은 뭐냐? 새 술은 새 부대에, 주님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철저하게 죄인 되어서, 철저하게 죄인 되면서 비로소 우리 주님과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집중할 수가 있는 거예요. 고마워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엄청나게 위험한 세상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쳤습니다. 으샤으샤, 하면서 모든 것이 들썩거리는 이 현 세계가 사실은 예수님을 죽인 세계인 것을 우리는 자주자주 잊어버립니다. 남한테 인정받고 내 의를 남으로부터 선택받기 위한 의를 모으는 이 일을 이제는 멈추게 해주시고 왜 죄인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우리교회 수요설교 "가장 위험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