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싫소이다

아빠와 함께 2022. 4. 24. 17:02

싫소이다-하마

2022년 4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40: 15-24

(40: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40:16)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40:17) 그 꼬리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40:18)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 같으니

(40:19)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은 자가 칼을 주었고

(40:20) 모든 들 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40:21)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 밭 가운데나 못속에 엎드리니

(40:22)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40:23)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40:24) 그것이 정신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하마를 등장시키십니다. 욥이란 인간을 상대로 질문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와 관련된다고 여겨지지 아니하면 무심코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거기에 비해 하마는 주변 식물과는 서로 관련성을 가지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홀로 자기만을 위한 생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마는 주변 삶의 환경이 바뀌어진다 할지라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호들갑 떨면서 놀라지 않습니다. 침착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물 중 으뜸이다’고 단정하십니다. 욥 같은 인간류들은 쉽게 동의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이미 인간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른 동물은 인간과 감히 견줄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주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마를 보고 ‘창조물 중에 으뜸이다’고 하시는 것은 ‘제거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마는 자기 자신만을 추구하는 자기 세계를 따로 가질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인간들로서는 이런 발상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생각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자는 후대에 따라 계속 자연에서 빼먹을 것을 있게 하려는 이익을 전제로 한 환경입니다. 유기농업에 따른 재배도 환경 파괴입니다. 즉 인간은 그 존재 만으로 환경 훼손입니다. 인간이 움직일 때마다 자연은 망가집니다.

이런 조건에서 인간은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마음가짐 자체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마를 거론하시면서 욥에게 다가오시는 취지는 ‘운동 속에 고정적 삽입’을 위한 겁니다. 즉 인간은 끊임없이 계속 변화를 시도하면서 정서적이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료하게 지내는 것에 지겨워합니다. 불행을 느낍니다. 인간은 어디로 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선택을 해야 자신에게 최대치를 이익을 보장하고 최소치의 손실을 가져올지 쉴새없이 탐구합니다. 하마와 전혀 다릅니다. 하마는 그냥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전체를 위함입니다.

새삼스럽게 하마가 하마다울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냥 지내면 되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고정점이 없습니다. 벌써 망가져 버린 인간에게 있는 고정점은 어떤 모습이 적절할까요? 마태복음 21:28-3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고정점이란 둘째 포도원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한 태도 자체가 고정점입니다. 즉 둘째 아들은 자신이 감히 포도원에 일할 정도로 적절치 않음을 분명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둘째 아들은 더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는 욕심이 낼 수가 없는 새로운 삶의 환경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미 자신이 제거되었기에 더는 제거될 게 없습니다. 마치 세리와 창기와 같습니다. 이들이 천국 백성의 본질을 가까이 보여주는 자들이 됩니다. 욥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은 자신의 시도가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일종에 폐쇄된 공간 안에서 무료함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판단이 옳음을 밝혀질 외부 환경을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본인이 원하는 식의 환경이라든지, 자신의 가치를 파괴하는 식의 환경을 원했던 것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의 고백처럼 “싫소이다”라는 절차가 필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에게 항의 태도를 나타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상대적으로 못된 자연물이라고 여겼고 시시하게 보이는 피조물들을 거론하시면서 욥의 위상을 갖추어내십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은 저주스러운 무료함으로 갇혀 있는 삶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으면서 그런 답답한 환경 개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구원이란 철저하게 자신의 형편을 포기해야만 환경으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9:17에 보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2:18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기생라합은 이미 자신의 처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망가져야 마땅함을 인정합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모든 세상은 다들 무료하게 따분한 지경에 갇힌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활동을 보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기생라합에서 외부 인사가 우연히 하나님에 의해서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즉 기생라합은 자기 생존 위주의 삶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쟁 위주로 세상을 재편했습니다. 자신과 자기 가정은 파괴대상이 됨을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안 건져줄 리가 없습니다. 붉은 줄을 통해서 그들을 살려줄 때, 이미 기생라합은 자신도 정탐꾼처럼 이곳에서 살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였습니다.

붉은 줄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붉은 줄이 이스라엘과 기생라합 사이에 언약줄이었습니다. 이처럼 욥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하시는 하나님이 곧 욥의 구원줄과 같은 분입니다. 욥은 더는 자기 중심으로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란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요? 세상은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기에 아무리 요란을 떨어도 그냥 조용히 멸망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같이 망해가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마땅함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을 벌리기 위해 고정점으로 삽입된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변화가 아니라 주님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2강-욥기 40장 15~24절(싫소이다)22042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0장 15~24절입니다. 구약성경 800페이지입니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찌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 같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은 자가 칼을 주었고,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리라,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못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엎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하수가 창일한다 할찌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찌라도 자약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욥을 상대로 질문을 던지면서 상당히 생뚱맞게 하마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그리고 인간도 내가 만든 것처럼 하마도 내가 만들었다고 운을 던지면서 하마와 너 자신을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라고 언급을 하셨습니다. 으뜸이라고 하실 때 욥이 살짝 자존심 상하죠. 같이 만들었는데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고 하시면 인간보다 낫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난 뒤에 20절에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리라”라고 시작해서 그 뒤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하마가 누워있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주변 환경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림으로 하나의 풍경화가 되는데, 하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주위에 시내 버들, 연 줄기, 연 그늘과 같은 식물성과 더불어 하마와 같이 있으면서 하마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다른 피조 세계도 관련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풍경적으로 모든 피조물이 관련성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자연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태와 사건에 이 하마가 별로 놀라지를 않아요.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찌라도 자약하니”라고 나오는데 침착하단 말이죠. “하수가 창일한다 할찌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라는 건 어떤 사태가,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하마는 가슴이 철렁 내려간 델지 호들갑을 떨지 않아요.

욥에게 문제 있다고 하시면서 그 문제를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 자연 세계에서 욥이라는 인간도 있지만, 하마도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은 평소에 하마와 비교를 안 하죠. ‘그까짓 하마 잡아 먹어버릴까?’ 이것이 하마인지 어떤 동물인지 확실치 않지만 일단 하마로 나왔으니 하마라고 치고, 어떻든 인간은 인간에게만 계속 신경을 쓰지 하마까지 생각을 못 해요.

그리고 환경에 대해서 사람들이 신경을 쓴다고 하는데 이것은 환경을 위함이 아니고 좋은 환경이 수익을 낸다는 앞으로 우리 후손들까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인간들의 자기 이익을 위해서 환경을 이야기하지 이익 없는 환경은 인간 머리에는 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이 농사를 지을 때 유기농으로 하든, 비료를 안 주든, 어떤 식으로 하든, 농사 지음 자체가 환경 파괴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자체가 자연 파괴예요.

하마가 존재하는 자체가 자연 파괴 아닙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면 그 주변은 이미 황폐해지는 겁니다. 화학비료 안 쓰고 탄소를 줄이고 하는 그런 거 아무짝도 쓸모없어요. 제일 좋은 방법은 지금 코로나보다 46배 더 센 것이 나와서 인간을 이 지구상에서 1/3 정도 줄이면 환경이 조금 좋아집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누가 죽을 것인가 하는 ‘가위바위보’가 안된다는 사실이죠.

지금 세계인구가 77억, 거의 80억 가까이 되는데 누가 죽을 것인지에 대해서 전부 다 자기 자신은 발을 빼죠. 어쨌든 간에 코로나바이러스부터 해서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 취지는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기에 요란을 떨고, 난리판이라도, 이 세상은 그냥 조용히 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입장에서는 ‘별일 없지? 아무 일 없잖아. 망하고 있으니 정상이잖아’라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싸대고 설쳐대도 그냥 이 세상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의미했고요, 무의미한 것이 무의미한 채로 망하는데 같이 기뻐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같이 망하는 세상에 같이 기뻐해 주면 되잖아요. 이게 참 쉽죠잉~? 이게 어려운 일입니까? 뭐 진리를 알겠다고 그렇게 절까지 갈 것 없이 그냥 세상은 망합니다. 그러니까 망하는 세상에 유독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망하는 세상을 더 망하게 하는 겁니다. 아프리카 중부 남쪽에 나미비아라는 곳이 있고 그 옆에 보츠와나라는 나라가 있는데 거기에서 근래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댐을 건설하겠다는 거예요. 댐을 건설하겠다고 하니까 그곳에 있는 국민이 들고일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대자연, 아프리카 남부 쪽에 있는데 세계적인 공원으로 지정된 곳인데 너무 경치가 좋아요.

너무 살기 좋고 대대로 그들은 행복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외국에서 돈을 빌려서 전기를 생산하는 댐을 건설하겠다고 한 거예요. 왜 전기를 생산하느냐. 전기를 생산해야 공장을 짓죠. 전기도 없는데 다른 나라에서 돈 대서 공장 지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기도 없는데. 그리고 아스팔트 도로 해야 물류비용 적게 들죠. 그러니까 댐을 건설해서 전기를 생산하면 농사짓는 것보다 취직하는 것이 수입이 나으니까 그렇게 해서 나라를 한번 잘 살려보겠다고 댐 건설에 나선 겁니다. 그 돈도 자기 돈이 아니고 투자받은 돈이죠.

그것도 대통령 입장에서 국민이 자연 파괴된다고 들고일어나니까 이제 난처한 거예요. 자기보고 뭐 어쩌라고? 그럼 이렇게 계속 못 살래? 잘 살고 싶거든 내 말 듣고 댐 건설하고 다 같이 망하려거든 댐 건설이고 뭐고, 대통령이고 뭐고 다 치우고, 그냥 초원에 가축이나 키우면서 그렇게 살다 죽든지, 뭐 어쩔 건데? 그 뜻이 뭐냐 하면 ‘그냥 죽을래?’라는 거죠.

이 나라가 못살기로 뒤에서 몇 등 하거든요. 그래서 그냥 못 살래. 그냥 살다 죽으면 되잖아. 왜 우리가 남의 나라 따라서 좋은 거 먹어야 하고, 좋은 신발 신어야 하고, 그딴 거 필요 없고 그냥 살 만큼 살다가 죽는 것이 운명이고 팔자라 생각하고 그냥 죽으면 되잖아. 이게 국민의 뜻입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고 대부분 국민의 일부는 이미 자본의 맛을 봤어요.

좋은 것, 좋은 맛, 좋은 주택이라는 맛을 봤어요. 이건 뒤로 못갑니다. 그 대통령 말고 다른 대통령 와도 나라 뒤집어 버릴 거예요. 댐 건설하고 할 거 다 할 겁니다. 이 세상은 악한 쪽으로 망하는 쪽으로 인간이 설치는 쪽으로 흘러가지 하마가 설치는 쪽으로 가지 않아요. 이것이 인간과 하마의 차이점입니다. 그렇다면 19절에 이 하마가 창조주의 으뜸이라고 하는데 왜 으뜸이냐 하면 하마 주위에 조성된 여러 가지 전제조건들은 제거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뺄 것이 없어요. 그 자체가 온전한 겁니다.

그런데 욥은 죽어 마땅해요. 자기가 의롭다고 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찾아오신 것은 인간의 정신머리, 사고방식 자체가 인간을 대표한다고 보면 인간을 대표하는 사고방식들을 기준 해서 전부 다 제거 대상들이에요. 인간의 생각 자체가 제거 대상입니다. 마태복음 21장을 보고 난 뒤에 설명을 더해야 할 거 같아요.

마태복음 21장 28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포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주의 뜻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전체가 아버지의 뜻에 위반됨을 파악하고 알아채는 그것이 주의 뜻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싫소이다’를 반드시 거쳐야 해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라’는 지시에 ‘싫소이다.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을 반드시 거쳐야 해요. 왜냐 하면 인간은 이미 망가졌기 때문에, 자기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싫소이다’가 당연한 거예요.

아이들이 좀 컸을 때 뭐 좀 하라고 하면 ‘싫어’라고 하죠.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욥이 그걸 빠뜨린 거예요. 내가 제거되어야 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인간은 첫째 아들에서 둘째 아들로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이 둘째 아들 되려면 반드시 둘째 아들 본인도 내가 주님의 두 번째 아들이라는 본인 자신도 망가져 버려야 해요. ‘나는 망가져도 마땅합니다’라는 말이 ‘싫소이다’에 다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보고 ‘싫소이다’라고 하지 말고 내가 나보고 ‘나는 나 자신이 싫어’라는 그 과정을 거쳐야 해요.

그 과정을 거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거치도록 하느냐 하면 욥에게는 폭풍 속에서, 큰바람 속에서, 뇌우 속에서, 이것을 주시는 겁니다. 폭풍 속에서 말씀 주셨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운동 속에 고정성을 삽입시킨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운동하잖아요. 운동하니까 변화하고 변화하니까 인간은 얼추 희망을 자꾸 품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뭔가 쑥 들어오면서 고정된 것이 들어와 버리면 소위 압침(압핀)이죠. 종이가 펄럭일 때 압침을 딱 꽂아놓는 거예요. 아이가 시끄럽게 하면 한 방 때려서 딱 눌러버리면 고정이 되죠. 물론 어린아이들은 울어버리니까 건들면 더 시끄럽지만. 인간은 고정 점이 있어야 해요. 아니면 정서적으로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온갖 곳 다 헤매도 딱 스톱이 되어야 해요.

아이들에게는 고정 점이 엄마예요. 아무리 저희끼리 놀라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엄마가 없으면 엄마 찾아갑니다. 자기 고정점 찾아갑니다. 그 고정점이 인간에게는 빠져있는 겁니다. 그 고정점이 뭐냐 하면 ‘싫소이다’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싫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죄인 됨, 그것이 우리의 고정점이에요. 욥은 그것을 폭풍 속에서 주께서 고정점을 제시해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시간의 진열장이라고 표현하는데 옛날 50~80년대 초까지 옛날 사람들의 시골 가게가 어디 있느냐면 길가에 있는 한옥집을 구조를 바꿔서 마루에 여러 가지 학용품과 과자를 진열해요. 한옥 마루에다가. 지금 그걸 아는 것은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만 압니다. 그냥 개조할 것도 없어요. 사랑방에 주인 앉아 있고 마루에 물건이랑 음식 내놓고 지나가는 아이들 상대로 파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비포장도로에서 일어난 먼지가 다 내려앉죠. 그런데 거기에서 진열장에 넣어둔 것이 있어요. 그건 단팥빵이랑 크림빵만 유리 진열장에 넣어놨다가 팔 때는 유리 덮개만 들춰서 주잖아요. 인간은 변화하는 시간에 갇혀있어요. 갇혀있기 때문에 갇힌 곳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에 이 말씀 하나로 여러분들이 이해될 거예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한다”

새로운 환경, 하나님께서 날아다니며 돌아다니는 인간을 꽉 눌러서 스톱시키는 주님의 고정성에 합류하는 새로운 진열장이 인간에게는 필요한 겁니다. 만약에 인간이 그렇지 못하고 스스로 진리를 찾겠다든지, 나는 싫다는 말을 절대 안 한다고 하든지, 나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하면서 어떤 진리를 자꾸 찾아다니면서 계속 헤매기 때문에 결국은 본인이 신앙생활 하다가 지쳐버려요.

본인이 제거 대상인데 본인을 제거할 생각을 안 하고 자꾸 주님을 소지하려고 하고 예수님을 내 것 만들려고 자꾸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 방법은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이 경우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시시하게 보는 다른 대상을 동원해서 우리 자신이 할 말이 없이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것을 분명히 보여줘요.

그렇다면 인간이 이렇게 헤매면서 다니면 인간은 어떤 생활을 하느냐.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한마디로 이야기합니다. 무료하다. 지루하고 되게 바쁜 것 같은데 그 자체가 무료해요. 했던 거 또 하고 아침에는 직장에 가고 똑같은 일의 반복과 되풀이를 하는 것이 마치 라푼젤에 나온 공주가 맨날 머리 올렸다가 내렸다가 올렸다가 내렸다가 해요.

동화 속에서 탑이 하나 있는데 탑은 갇혀있는 상태예요. 올라가는 길도 없고 내려가는 길도 없어요. 라푼젤의 이야기와 기생라합을 제가 연결을 한 번 시켜볼게요. 라푼젤 동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아기가 없는데 이렇게 가난하게 살다가 황금으로 만든 양배추밭을 발견해요. 누가 버리고 간 밭인 줄 알고 하나를 따서 먹었어요. 먹고 난 뒤에 자기 부인이 임신했는데 낳아 보니 아이가 황금 머리카락을 가졌어요.

그런데 어떤 마녀가 찾아와서 자기 양배추 누가 훔쳐갔냐고 소리치다가 그 아이를 봤어요. 마녀도 몰랐어요. 황금 양배추 먹으면 황금 머리카락 나오는 줄을. 그런데 보니까 이거 돈 되겠다 싶어서 마녀가 아이를 데려가서 탑에 가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면 라푼젤이 머리를 풀어서 긴 줄을 만들어서 내려주면 마녀가 올라가서 그 황금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서 가져가요.

그러면서 바깥에 나쁜 사람들 있으니 나가지 말라고 말하고 가거든요. 라푼젤은 먹을 거, 입을 거, 다 있는데 갇혀서 무료하게 머리 풀었다가 묶었다가 하는 그 생활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을 빼다 박았어요. 돈은 벌어야 하니 반복적으로 하는데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라푼젤이 그렇게 끝나면 재미가 없잖아요. 늑대에 쫓기는 왕자가 아래 있으니 라푼젤이 머리 풀어서 끌어당겨 주죠.

그리고 서로 좋아하게 되는데 왕자가 라푼젤에게 다른 세계를 소개해준다고 하면서 아주 멋진 세계를 알려줘요. 그리고 그 멋진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면 이야기가 유명할 수가 없어요. 둘이 행복하게 사는데 마녀가 끝까지 따라와서 결투하는데 절벽 끝에서 돌이 무너져서 둘 다 떨어질 때 그때 라푼젤이 급속히 머리를 확 풀어서 왕자만 건지고 마귀는 떨어져서 그렇게 둘이 행복하게 살았죠.

이 이야기가 기생라합에서 베낀 건지 알 수 없지만, 여호수아 2장 18절에 보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해방과 구원은 자기 무료함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어떤 시간의 진열장 속에 빵처럼 갇혀있는 거예요.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마는 지금 주님께서 욥에게 약을 올리시는 비교 대상이에요. 욥은 본인만 집중해서 생각하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마는 두루두루 연 줄기에다가 버드나무까지 계산하고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아요.

아무리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꿈쩍 안 하고 눈만 껌뻑껌뻑하면서 ‘뭐 그렇게 일어나겠지.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라고 태연해요. 하마가 이 세상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것은 제거할 것이 없는 어떤 대표로 부각시키는 거예요. 뭐 재미가 없어서 하마 연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보는 하마와 하나님이 보는 하마가 이렇게 전체를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우리는 왜 전체를 못 봅니까. 자기 일만 생각하고. 기생 라합은 자기가 갇혀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갇혀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한 ‘싫소이다. 나는 하나님 알에 싫다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는 이미 질적으로 망가져야 마땅한 존재입니다’라고 하는 기생라합이 지금 바깥에서 쳐들어오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인 것을 알고 우리는 그냥 맥없이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둘 다 구원과는 상관없는 존재인 것을 자각하고 알게 된 거예요.

그런데 찬스가 왔죠. 바깥에서 왕자님이 등장해요. 라푼젤이 왕자를 두 번 살려주는데 늑대에게 쫓길 때 한 번, 절벽에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살려주는데 여호수아에서 기생라합은 정탐꾼을 살려줄 때 집에 붉은 천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 붉은 줄과 자기 자신을 맞바꾼 거예요. 붉은 줄이 있다는 말은 이미 외부인 이스라엘과 자신이 접촉했다는 증거가 붉은 줄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붉은 줄이 있어요. 이 무료한 세상, 나 이제 끝내도 괜찮다는 이 땅에서 망하는 어떤 사태, 코로나가 와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호들갑 떨지 않고 아주 침착할 수 있는 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폭풍 속에서 접촉한 욥처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주께 구원받을 사람은 주께서는 십자가라는 복음으로 접촉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최고 아닙니다. 제일 잘난 거 아니에요. ‘싫소이다’라고 이야기 한 사람, 둘째 아들, 누가 칭찬받고 누가 구원받겠는가 하면 ‘싫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싫어해요. 나 위주로 살아가는 내가 싫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31절에서 하신 말씀처럼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잘남을, 으뜸인 것을 내세우지 않는 거, ‘싫소이다’라는 그 고백을 웃으면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처지를 알게 하옵소서. 대단한 존재도 아니면서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면서 실상은 반복적이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방향도 모르고 목적도 의미도 없는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모든 일이 주를 증거 하는 일로 의미 있게 다가왔을 때 우리는 ‘싫소이다’라는 이 고백이 얼마나 기쁜 고백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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