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부터 구원
2022년 5월 8일 본문 말씀: 욥기 42:1-6
(42: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2: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욥을 불러서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찾아오신다고 그것으로 연결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상호 연락되는 정도의 연결이 되어야 단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오신 것은 이 단절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왜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소신과 뜻을 펼칠 수 없는 존재인가를 욥을 통해서 알려주려 하십니다. 인간들에게는 본디 자신의 포부와 이상(理想)이 있습니다. 욥의 경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이런 자세가 결코 하나님과의 단절의 요인이 되리라는 생각은 결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이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점을 확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자기가 납득되는 수준에서 회개나 반성을 할 수 있기에 그것으로도 하나님과의 원만한 연락은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욥의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 일반인들의 기본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귀하게 처리해 줄 줄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뜻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약에 와서 그 본질이 전체로 들통났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구약에도 전형적인 인간의 마음 자세가 나옵니다. 호세아 12:8에 보면,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호 12:8) 여기서 왜 부자는 ‘불의’에 대해서 의식합니까?
그것은 인간은 부자되기도 원하고 동시에 의로운 자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 본인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가 숨김없이 나타내며 일상을 삽니다. 욥도 하나님에게 의롭기를 무척 바랐던 사람입니다. 욥은 자신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뭔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감지합니다. 신약에 오면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다 드러납니다. 즉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확정났습니다. 그렇다면 죽어 마땅한 자의 말을 하나님께서 들어줄 이유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은 단절을 느끼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단절성을 품었다는 점에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의 이유가 됩니다. 즉 욥은 ‘나로부터의 구원’을 당한 겁니다. 내가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겁니다. 나의 포부와 이상을 달성하려는 욕망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단절성을 인식 못하게 만든 겁니다.
따라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꼼작 못하게 말을 이낄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이 도리어 다행한 일입니다. 이점은 신약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6:7에 보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즉 예수님께서 떠나 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다행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모든 뜻과 본인들의 뜻이 일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욥의 오해처럼 제자들도 요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뜻 가운데 예수님과 일치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어야 하신다고 하니 베드로와 및 제자들은 말렸습니다.(마 16:21-22)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잠시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곳에 현 제자들은 따라오지 못하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이는 제자들의 내변 변화는 제자들 스스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5:12에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유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때까지 둘째 아들은 스스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 재산을 도시에 가서 다 날리고 와서는 다음과 같이 아버지를 대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애초에 오해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단절성을 자기 쪽에서 해결하거나 해소할 능력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백성에게 다가오실 때는 의도적으로 단절성을 집어넣습니다. 니고데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3:5-8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령’은 명사이며 행위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이 땅에서 동사로서는 그 징후를 보이십니다. 마치 바람같습니다. ‘바람이 분다’라는 말에서 명사나 동사나 모두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움직이지 않는 것은 바람이 아니요 바람이면 반드시 가만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겁니다.
성령이라는 분은 가만있지 않고 니고데모를 움직인다면 이는 니고데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친히 성령께서 움직이게 하신 겁니다. 회개하는 욥의 모습은 더는 욥 자신의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냥 듣기만 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관계로 성도는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존재를 증거하지 말고 우리로 회개케 하신 주님의 움직임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4강-욥기 42장 1~6절(나로부터 구원)22050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2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801페이지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 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단절이라는 것이 주님과 연락이 안 된 상태가 단절이 아니라 아예 대화 자체가 성립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선택해서 대화를 시도하는데 욥이 의인이라서 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욥을 선택한 그 자체에 욥이 의인 될 수밖에 없는 요소를 주께서 주입 시키신 겁니다. 욥 자체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졌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써 욥을 이용하신 거예요.
그런데 과연 욥을 통해서 인간의 건방짐,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과 욥과 대화가 되고 연결이 되면서 들통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이것은 욥으로 하여금 더욱더 죄인 되도록 하면서 더욱더 의인의 반열에, 의인의 노선에 해당 된다는 사실을 주께서 확인시켜준 겁니다. 따라서 욥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의 전형이 될 수 있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태도를 갖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욥이 여기서 회개한다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욥은 자기로부터 본인이 구원받은 거예요. 내가 나를 발목 잡은 겁니다.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 안다고 치고 나는 그 앞에서 완전하고 온전한 삶으로 살겠다고 버틴 겁니다. 이게 누가 오기 전의 건방짐이냐 하면 하늘에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런 건방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욥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내가 주님 모르고, 주님 빼고, 내가 남들 보기에 친구들 보기에 잘났다는 이러한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일상 중에서 행하고 있는 삶의 태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욥기 1장~42장 오기까지 욥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욥 친구들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하나님 입장에서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절대로 그들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야 단절이라는 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뜻이 끊어졌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욥의 기도도 안 들어줬고 욥의 친구 기도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게 되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 고마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 우리 자체가 벌써 문제 있음이 감지되거든요. 왜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규정을 했어요. 죽어야 하는 존재로 이미 최종이 규정되었기 때문에 죄로 인해 죽은 존재를 굳이 뜻을 들어줄 이유 없습니다. 죄지었다고 죽여놓고 그 뜻을 들어줄 이유 없지요. 예를 들어 아주 성깔이 못된 간수가 있다면, 만약 제가 그런 못된 간수라면 사형수 앞에서 “당신은 이제 곧 30분 후에 죽습니다. 이왕 죽는 마당에 뭐 소원 있거든 이야기해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라고 하면 그 죄수가 “그러면 제가 죽거든 제 뼈를 고향집에 묻어주세요. 그 고향집은 ‘Green Green Grass of home’처럼 아주 경치가 좋은 곳입니다”라고 할 때 아주 못되먹은 간수는 “그게 당신의 뜻입니까? 그럼 안 들어줘”라고 하죠.
“당신은 당신의 뼈를 고향에 묻을 자격도 안 되기 때문에 사형시킨 거예요. 고향에 둘 정도가 되면 무기징역 시키지. 사형이 사형값을 하려면 당신의 뜻은 끝까지 안 들어 줄 거야”라고 비정하게 이야기할 거예요. 욥처럼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제 뜻대로 해주세요’라는 것이 절대로 뜻대로 관철되지 않도록 해주셔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우리 행한 것이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면 그 빈자리가 남겨져 있어야겠죠. 그러면 그 남겨진 빈자리에 누가 들어섭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행하심이 거기 들어섭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행하심을 방해하는 작업이 뭐냐 하며 분명히 주께서 떼어놓고 그 자리에 예수님을 중보자로 집어넣었는데 우리는 그 중보자 자리까지 내가 계속해서 거기 들어서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제가 뭐 했잖아요. 봉사했잖아요. 범사에 감사했잖아요’라고 자꾸 들어서려는 경향이 있어요.
유명한 만화 영화 ‘겨울왕국’이라는 것이 있어요. 거기 보면 ‘Let it go’라는 노래도 유명한데 노래 잘못 불렀다가는 저작권에 이 동영상이 걸릴 수도 있어요. 거기 보면 올라프라는 등장인물이 있는데 굉장히 제가 주의 깊게 봐요. 올라프가 뭐냐면 눈사람입니다. 겨울에는 아주 쌩쌩하게 살아서 활동하는데 여름이 되니까 코부터 해서 머리랑 계속 녹아서 없어져요. 성령께서 우리 성도의 자아를 그렇게 올라프처럼 만들어 버리십니다.
괜히 우리가 살아있으면 우리는 자꾸 걱정근심을 가지고 주님께 쏟아내는 경향이 있어요. 성령의 뜨거운 열기로써 눈사람만도 못한 허망한 존재가 자꾸 허망하지 않은 척하고 있으니 계속 어떤 사태를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너라는 존재는 아예 없다고 치라는 것을 우리에게 각인시키십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그런 구절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5~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버리는 것이 유익 하데요. 떠나지 않으면 예수님 생각과 제자들 생각 사이에 오해하기를 주님과 같이 붙어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가진 것이 자꾸 우리의 것이 된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이 떠나서 떠난 그 자리에 제자들이 합류할 수 없고 그냥 고아처럼 뚝 떨어져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없었던 거야? 정말 아무 관계 없었던 거야? 그냥 일방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오해했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할 거라 하시길래 나는 진짜 함께 하시는 줄 알았는데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떠나는 것이 함께 함이야? 뭐 그런 일이 다 있어?’라고 굉장히 혼돈할 때 비로소 제자들 쪽에서 엄청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이 티가 나버립니다.
우리의 평소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는 족족 기도에 응답이 안 될 때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한 거야? 내가 잘 못 생각한 거야?’라는 그런 기회를 가져야 해요. 다시 한번 주께서 하신 말씀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지 우리에게 의논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그냥 주시는 분이에요. 이와 같은 비슷한 일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데 여러분 아시듯이 탕자 이야기입니다. 12절에 보면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되어있어요.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답변하실 필요 없어요. 둘째 아들을 망하게 하신 분은 누구시냐. 둘째 아들을 탕자 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다 아버지에게 계획이 있었어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이 되지 아니하면 이건 구원되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자식이 망해야 그다음에 둘째 아들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이게 나는 구원되어야 하겠다는 그런 ‘나’, 나는 반드시 천국 가고 구원되어야 하겠다는 그런 ‘나’가 올라프처럼 허망하기 짝이 없는 가상 존재인 것을 본인이 알아야 해요. 구원될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본인이 고집을 부린 거예요. 고집을 부리니까 모조리 이단에게 다 넘어가는 거예요. 복음을 아시는 분은 무엇이 이단인가 알아야 합니다. 이단의 공통점은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을 붙여준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려고 애를 쓰고 있다고 주선해 주는 사람은 백프로 이단입니다. 걱정되십니까? 고민되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절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거대하고 영적으로 비상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목적으로 여러분을 이끌어주십니다. 목적으로 이끄는 삶같은 거죠.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자식이 아버지에 의해서 내가 아버지 앞에 독립하고 아버지 앞에 그럴싸한 아들로 보이겠다는 그 맘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끊어진 존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괜찮은 백성이 되려는 그런 발상 자체가 끊어진 상태예요. 마귀의 마음이에요. 주께서는 영광 돌리고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아예 없음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아들은 이미 확정 났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이신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인간은 그냥 쓰레기예요. 제가 사람들보고 쓰레기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쓰레기가 나오니까 쓰레기죠. 담배꽁초 버리고 침 뱉고 커피 마시면 빈 잔 놔두고 이게 쓰레기 아닙니까? 쓰레기 나오니까 쓰레기 버린 자가 있을 것이고 쓰레기 버린 자가 쓰레기죠. 논리 간단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죄인들밖에 없어요. 단절이 단절로써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단절을 유지하는 방법은 욥을 보면 자기 육신이 아프니까 이 정도 하면 충분히 단절되었다고 여겼죠.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받자’라는 욥의 개인적인 고통과 아픔도 단절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전개되는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어지는 단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니엘 7장 21~22절에 보면 예를 들어서 욥의 아픈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이유가 욥과 하나님 사이에 새롭게 추가되어야 해요.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여기 보면 뿔이라는 이 세상의 권세자가 있는데 권세자가 누구와 싸우느냐면 성도와 싸웁니다. 누가 이기느냐 하면 세상의 짐승의 권세자가 이깁니다. 누가 지느냐? 성도가 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원했던 바가 아니죠. 성도가 되었으면 하나님이 팍팍 도와줘서 이겨야 하는데 성도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누가 이기느냐면 성도가 아니라 푸틴이 이기는 거예요. 이 세상 권력자가 이기는 거예요. 이거는 마치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와 축구 했는데 서로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 우리는 성도잖아요. 우리가 이겨서 월드컵 본선에 나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이슬람국가가 이기는 것과 똑같아요.
일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단절을 알아야 회개인데 우리 본인이 단절을 싫어해요. 내가 버젓하게 있고 싶고 대단한 존재로 세상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해요. 출마하면서 기도하기를 이번에 제발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출마하고 어디에 출마하는데 제발 떨어지게 하옵소서. 뭐 교회 좀 다녔다고 온 교회 가서 기도하고 그러는데 뭐냐 하면 우리 인간에게 천국 가는 길이 끊어졌다고 하는데 끊어진 것이 아니고 애초에 길이 없어요.
길이 있는데 끊어진 것이 아니고 아예 길이 없어요. 천국 가는 길은 아예 없습니다. 왜? 강제로 추방했기 때문에 길 자체가 없어요. 없는데 주님께서 욥처럼 인간은 구원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그런 사태로 가다 보면 발을 디딜 때 보면 비로소 길이 거기 생깁니다. 그 길이 무슨 길인가. 바로 아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좁은 길이에요. 그 길만이 생명으로 통합니다.
호세아 12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이 고백이 잘려야 될 인간들의 이 고백이 제대로 된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뭐냐 하면 ‘나는 죄가 없잖아요’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인간은 전형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자를 보여줍니다.
죄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맞아요. 내가 죄가 없어야 복을 받으니까 죄가 없기를 바라는데 주께서 없는 죄를 성도로 하여금 가게 하면서 죄가 일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그 죄가 뭐냐 하면 세상 짐승에게 졌을 때 기분 나쁜 것, 자존심 상하는 이런 거, 단절되어야 마땅한데 막상 단절되면 기분 더럽죠. 그러니까 이건 오늘 본문의 욥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딴에 낮춘다고 낮췄는데 낮춘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낮춰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방법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6~8절을 보면서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이 분다. 여기서 ‘바람’은 명사죠. 그리고 ‘분다’는 동사죠. 그런데 똑같은 말이거든요. 불지 않는 바람은 없고 가만히 있는 바람은 없어요. 불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와서 성령을 만드시는 식이 되어버려요. 성령이 와서 성령을 만들어 버리면 성령이라는 이 명사는 이 땅에 와서 가만히 계시지 않고 바람같이 불러버립니다.
바람같이 불게 되면 소위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예수여, 나 니고데모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고 니고데모가 자기를 명사로 사용한 거예요. 명사로 사는 것은 주님 성령의 동사 앞에 부정당해야 하고 단절되어야 해요. 이게 해체되어야 해요. 명사는 성령만으로 충분해요. 성령이 와서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이 말이 성령이 오셔서 그냥 성령의 일을 하시는 거예요.
니고데모는 바람이 불면 ‘나’라는 명사가 올라프처럼 또는 먼지처럼 해체되어 버려요. 만약 니고데모에게 성령이 왔다면 해체되는 순간 니고데모는 움직이는 니고데모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움직이게 하신다가 될 때 그게 바로 거듭나는 겁니다. 이 말도 그대로 베껴서 내가 구원받은 증거처럼 나 위주의 명사로 만들지 마시고요.
다시 욥기로 돌아와 봅시다. 욥이 뭐라고 하냐면 “내가 듣기만 하겠나이다”라고 해요. 듣는다는 말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예요. 명사는 주님이고 명사께서 어떤 움직임이 있으실 때 그 움직임을 받기만 하겠다는 뜻이에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생명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냥 품어버리는 거예요. 죄인을 품을 때 예수님의 피가 그 순간만 부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함축해서 말하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성도를 통해서 성도 자체가 종말을 보여주는 십자가 사건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서 나는 움직임으로 보이겠지만 그 움직이게 하시는 것은 우리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욥은 예수님을 앞당겨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단절됨을 통해서 이미 단절이 극복된 주의 백성인 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저희를 끌어당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우리가 주님이 일하시는 동사적 움직임으로만 머물러서 주님이 일하셨다고 주께 영광 돌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