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허망함
2022년 5월 1일 본문 말씀: 욥기 41:1-4
(41:1)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수 있겠느냐
(41:2)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41:3)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41:4)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인간은 무슨 일을 해도 상대방하고 계약을 통해서 자신의 몫을 챙기고자 합니다. 계약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의를 발휘하고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합니다. 계약을 하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그 계약에 맞추어서 필히 일어나야 정의롭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은 바로, 계약맺은 인간 자체가 의롭게 될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어를 들이대시면서 인간은 악어와 계속 상대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악어가 천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의 의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인간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한계와 문제점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악어와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악어는 하나님의 주신 능력 그대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에 인간은 끊임없이 변신을 꾀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그 원칙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존재로 변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변신은 인간들이 주변에 있는 자연물의 가치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같은 인간들끼리의 비교에서 발생된 겁니다. 문제성 있는 존재들끼리 교류하면서 누가 더 의로운가를따지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인간들은 한데 모여 일하거나 대화한다는 것은 곧 남의 것을 모방하는 장이 열린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서 얻어진 결과는 뻔합니다.
자기네들 끼리의 경쟁에서 하마나 악어의 가치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자기 잘남을 부추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빼버리고 외면하는 것들을 거론하면서 욥을 공략하십니다. 인간들 사이의 챔피온은 욥이 과연 인간들에 의해서 무시 대상으로 전락한 악어보다 나은 점이 있는가를 따지십니다.
낫다, 못하다는 기준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다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얼마나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갖기 보다는 오만에 빠져 자신의 가치가 자기 마음을 드는 수준까지 향상되었는지를 주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 악어가 인간보다 낫다는 사실을 욥에게 알려주십니다.
인간은 결코 악어를 자신들의 종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 그것은 모든 높은 자를 내려다보며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니라”(욥 41:33-34)
이는 평소에 욥이 결국 교만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감안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교만성을 드러내는 겁니까? 이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2)
이 말씀이 로마서 11:34-36에서는 이런 식으로 내용 범위가 넓어져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를 하신다는 겁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거래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독자적인 의로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계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저 어때요?”가 성립되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의 단독 개념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주위 깊게 주목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은 인간의 방식에 하나님의 요소를 삽입시키시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방식은 평소에 인간들이 같은 인간들과의 주고 받는 거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자기 절차만 관철하시는 겁니다. 이 시도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문제점을 파내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행위의 시발점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에 자신에게 갖습니다.
여기서 변신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상대를 향해 뭘 할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자신의 애씀과 노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몫도 챙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상방 온전히 자기쪽으로 다 가져가지 못하고 일부를 상대의 몫으로 떼어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논쟁과 갈등과 분쟁이 발생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유의 하나님이기를 원하겠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인간과 계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조정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계약하실 의무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곤궁에 처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와줄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악어는 자신의 죽음마저 일상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자기 죽음은 천하에 심각한 일이 됩니다. 어느 쪽에서 자연스럽고 교만이 아닌 겁니까? 그럼에도 인간들은 악어를 무시하고 악어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 발견해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문제가 많은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의 본유의 능력을 어떤 식으로 제시되는 겁니까?
사사기 11:31에 보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사 입다는 객기를 부립니다. 평생을 싸움질하면서 살아온 자가 이스라엘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즉 그는 결코 그 어느 순간에서는 자신의 가치 출발성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과 더불어 일하기에 이스라엘은 해방을 가져왔다는 성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살던 입다에게 있어 지도자 자신을 위해 명예롭게 희생될 자를 일방적으로 결정합니다. 그는 이 큰 전쟁의 승리를 위해 미리 이방종교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큰 승리만 얻을 수 있다면 소소한 인물의 죽음은 도리어 명예스러운 간주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막상 맨처음 자기를 마중한 인물은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입다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그는 다른 인물을 생각했습니다. 즉 자기 딸만 빼놓고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속내를 아시고 하나님과 거래조건 자체에서 인간의 의견이 개입되는 것을 변경시켰습니다. 입다는 심하게 통곡하고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선언한 것처럼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겠노라고 말합니다. 최고의 기쁜 날이 입다에게는 최고의 슬픈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을 두고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믿고 구원받았다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러한 의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죽었음에 마음을 두고, 자신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울 정도로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3강-욥기 41장 1~4절(변신의 허망함)22050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1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800페이지입니다.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읽기는 4절까지만 읽었지만 오늘 설교내용은 41장 전체에 대한 겁니다. 악어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욥에게 특별 질문을 쏟아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질문을 던질 때는 욥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생각지도 못한 그것을 테마로 잡아서 질문을 던집니다. 악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것은 욥의 입장에서는 내가 존재하는 것과 어떤 비교를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악어를 내세울 때는 욥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죠.
악어와 욥의 차이점이 뭐냐. 욥은 인간이고 악어는 동물에 속하죠.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은 동물에게는 죄가 없다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지적할 때, 하나님께서는 악어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들춰주십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불의하다고 욕을 얻어먹는 그 이유가 욥이 은연중에 인간의 전능함에 대해서 과시하면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에게 이런저런 질문의 하소연을 한 거죠.
이제는 욥이 끝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집중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욥이 하나님께 질문할 때는 ‘왜 내 질문에 답변을 안 해줍니까? 제 말을 무시하시는 겁니까?’라고 욥의 마음속에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의를 무시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식으로 욥이 하소연했는데 도대체 욥이 의롭다고 자부하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같은 인간들과 비교해 볼 때 자기가 지혜롭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욥에게 악어는 무엇이냐. 악어는 그냥 짐승이죠. 아무것도 아니죠. 무시 대상이죠. 악어가 뭐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거는 욥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질문을 하는 범위 내에 악어는 빠져있어요. 그런데 악어도 빠져있을뿐더러 지난번에는 하마도 빠져있고 해와 달과 황무지에 비 오는 것도 빠져있고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욥이 골라잡아서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요소만 다 집어넣어서 질문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네가 의도적으로 빼놓은 그것을 통해서 네 잘못을 찾아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악어가 죄가 없다는 말은 악어는 그 있음 자체로 자기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추석 명절에 사람들은 풍성한 것이 많이 나오니까 말하기를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이야기하죠.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아, 그냥 악어만 같아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41장 마지막 3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이 정도로 악어가 대단하며 악어에 비교해서 욥 너는 그리고 인간은 쨉도 안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 비천한 악어와 고귀한 인간을 비교하느냐고 인간들은 불만을 품죠. 악어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그대로 다 살아있어요. 처음에 준 그 능력이 악어에게는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그 변질되지 않는 악어의 요소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이 그대로 다 살아있어요. 심지어 악어의 눈총과 눈꼬리까지 아주 맹렬해서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되어있어요. 심지어 18절에 보면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라고 나오고 19~20절에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 것 같구나”
그러니까 악어의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 약을 올리는 겁니다. ‘도대체 욥 너에 대해서 대단한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악어와 한 번 붙어볼래?’라는 식으로 나오시는 거죠. 제가 만약에 여러분들을 질책한다면 저는 악어를 동원하지 않겠습니다.
‘Fly’, 파리를 한 마리 동원해서 ‘당신은 파리보다 빨라?’라고 하죠. 얼마나 재빠른지 예배 전에 잡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실패했습니다. 어제 우리 집에 파리 한 마리가 나왔는데 결국 못 잡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파리가 없어요. 두 손자 손녀가 파리보다 더 빨리 파리채를 흔들어대니까 파리가 정신이 없어서 물러갔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인간은 주어진 대로 본성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왜곡시키는 거예요. 마치 자기에게 어떤 본질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본질을 내가 잘 정리 정돈해서 어떤 상품 가치를 많이 남겨서 내가 나를 관리한 그 가치를 하나님이 남보다 낫다고 좀 알아달라고 나오는 거예요. 안에서 개조하고 상품화시킨 거예요. 자기가 이만큼 노력했으니까 노력한 그만큼은 하나님이 좀 인정해줘야지 않느냐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보지 못하는 TV프로가 있어요.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일요일 11시에 합니다. 예배시간 맞춰서 같이 해요. 그건 뭐냐 하면 골동품을 가격 매기는 프로그램이에요. 인간은 자꾸 자기 가격을 생각해요. 그런데 인간의 가격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과의 인간사회 공동체에서의 가치이고 가격입니다. 그걸 교환가치라고 하는데, 그 교환가치를 하나님께서는 크게 나무라시죠. “내가 원래 준 거 어디 있느냐? 원래 준거”
어떤 연예인들은 고쳐도 너무 고쳤어요. 나중에 자기 얼굴도 못 알아봐요. 너무 고쳐서. 그 남편 되시는 사람이 저 얼굴 닮을 거라 생각 하고 애를 낳았는데 전혀 다른 아이가 나왔죠. 하도 뜯어고쳤는데 DNA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인간은 맨날 생각하는 것이 자기 개조입니다. 자기를 변질시키는 거죠. 누구 맘에 들도록?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내가 내 맘에 들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악어는 하나님이 준 거 그대로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 의미로 가져와서 그것을 변질시켜 버린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 악어의 요소 중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그러니까 인간보다 낫고, 그래서 인간보다 위대하고, 그래서 인간보다 훌륭하고, 계속 인간보다 못한 구석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나은 요소만 계속 끄집어내십니다.
본문에 보게 되면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는데 뭐 악어 잡는데 혀까지 노끈으로 묶을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네 필요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끈으로 묶을 수 없는 혓바닥 하나하나도 나 하나님의 솜씨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특징이 악어같은 경우에는 절대로 하나님과 알아서 계약 맺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그런 불경스러운 짓은 악어가 하지 않죠.
거기 11절에 보면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악어를 만들 때 악어와 사전에 협약하거나 계약서 쓴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읽었던 욥기 41장 11절에 이방인 욥에게 하나님이 하신 계시가 놀랍게도 로마서 11장 34~35절에 보면 나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이렇게 묻는 것은 욥과 똑같아요.
너희들의 한계를 내가 알려줄게. 너희들이 아는 것이 없음을 내가 알려줄게. 그것도 아주 근원적으로 너는 무식하다는 거. 세상에 대해서 무식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하고, 그래서 너는 너 자신에 대해서도 무식하다는 것을 언급할 때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그리고 주의 마음 모르면서 내 마음 안다고 하지 마세요. 주의 마음 모르면 내 마음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나오죠. 누가 하나님을 감히 가르치겠다는 것이 욥 같아요.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바로 이 대목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가 하나님 앞에 이러이러하게 제 것을 드렸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행동하실 때 마음대로 하지 말고 나한테 물어보고 하세요’라는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께 뭔가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내 손에 쥐고 구속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에 간섭하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어떤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선교로 바치고, 봉사로 바치고, 희생으로 바치고, 돈으로 바치고, 기도로 바치는 거, 이게 순수한 마음일까요? 자기가 악어도 아닌 것이 무슨 순수한 것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가 없죠. 내 마음에 맞도록 이제는 하나의 대상인 하나님마저 이 더러운 마음에 맞춘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 그 하나님도 더럽게 되고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조종하려고 하거든요. 이미 모든 인간이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로마서 11장 35절에서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신 거예요.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는고. 이걸 순수하게 물으면 온 세상이 ‘저요! 저요!’라고 하죠. 모든 사람이. 여기에 자기가 마음을 드려서 그때부터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은근히 조정했으면 좋겠다는 이런 착한 마음을 가진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 착한 마음에 현혹되어서 ‘저요! 저요! 제가 은근히 노렸습니다!’라고 손 다 들고나올 거예요.
말씀을 달리해보겠습니다. 퍼줬는데, 하나님께 목숨 바치고, 헌금하고, 전부 다 드렸는데 전혀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1번 – 섭섭하다, 2번 – 당연하다, 몇 번입니까? 인간의 평소 남에게 하는 행동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게 되어있어요. 언젠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킬 의무가 없다고요. 안산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 가다가 200명인가 물에 빠져 죽었지요. 그거 건져낼 의무가 하나님에게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매일 매일 살려주는 것이 살려달라는 우리의 뜻을 이룸이 아니라 우리 뜻을 일절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주의 마음을 모르면 우리 자신도 모르죠. 그래서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라고 하시죠.
이 욥기라는 것이 성경책입니다. 성경책의 모든 해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옵니다. 모든 말씀이 예수님인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무슨 뜻이냐 하면 누가 하나님 앞에 사전에 의논했겠는가. 그거는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했거든요.
그러면 아버지는 아들과 의논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중에 악어도 포함되어있고 인간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중에 악어는 그냥 만들어진 대로 순하게 받아들여요. 악어가 ‘신이시여, 저도 인간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은 전설의 고향이나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지 구미호는 그냥 구미호 하면 됩니다. 꼬리 아홉 개인 여우 하면 되지 그게 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 전설의 고향은 DNA도 몰라요. 여우 DNA로 그냥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시건방지게 ‘하나님이여, 신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도 참 같잖지도 않겠죠. 제거 엊그제 광주강의 하면서 인간이 신의 집을 지어준다면서 성전을 짓겠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이렇게 비유했죠. 개가 자기가 개집이 있으니까 인간 집이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집을 만들 듯이 다윗이 아이디어를 내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집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자기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거예요. 개가 개집 짓듯이 주인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릴 수 있습니까? 지어봐야 개집이죠. 주께서 개집에 살겠어요? 오전에도 개이고 오후에도 개이고, 집에서 개 키우는 사람이 기분이 좀 상할 수도 있는데. 인간은 인간 자체가 뭔가 이미 틀어졌어요. 그래서 악어의 이 견고함,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고 엄위하심, 여기 26절에 보면 “칼로 칠찌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라고 나오는데 악어를 잡으려고 해도 인간에게 호락호락 잡히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어를 못 이긴다고 하지 말고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악어를 보면서 그 교훈을 받아드려야 해요. 파리 하나를 못 잡은 것은 주께서 생생하게 날아다니도록 하신 거예요. 파리가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더도 덜도 말고 악어만 같아라. 이게 인간의 교만을 낮추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악어를 어떻게 처리했는가. 골프웨어 상표 취급했습니다. ‘크로커다일’이라고. 옷에다 악어 마크 하나 붙인 셔츠로 바꿔놨어요. 악어는 꼼짝없이 돈의 힘에 굴복당해서 돈 될 것같다 싶은 그 순간 악어는 전부 다 사냥감입니다. 아직은 그만큼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그만큼 살아남은 거예요. 자, 이것은 욥과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렇게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 그대로가 아니라 변질에 나서는 그런 사례가 있어요.
사사기 11장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입다라는 깡패 출신, 조폭 출신이 대통령 된 겁니다. 그러니 뭘 잘하느냐 하면 싸움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겁니다. 자기도 그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입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믿는 나라니까 이렇게 큰소리칩니다. 내가 승리한 것은 내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가 승리케 했다면 이건 내 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덕이라는 증거로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을 내가 제물로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그 당시에 제물 중에 사람 제물 바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 하도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와 교류가 있다 보니 이방 나라 종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선호하니까 이방나라 암몬, 모압의 신이 뭐냐 하면 인신공양으로 사람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8세기 아즈텍 문화가 현재 멕시코 과테말라 있는 그 지역에서 피라미드 만들어 놓고 축제 때 사람을 만 명이 넘게 피 흘려서 죽인 것처럼 사람을 바칠 때 신이 우리의 뜻대로 해준다는 거예요. 이게 신과의 계약입니다. 인간이 신을 조종하려고 시도한 거예요. 그대로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을 바치겠다고 그렇게 큰소리친 것은 입다가 싸움하고 전쟁하는 전문가니까 전쟁할 때 사람 죽는 것은 뭐 집에서 닭 한 마리 잡는 거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푸틴 대통령 보세요. 우크라이나 어린아이들이 죽는다고 하면 전쟁하다가 아이가 탱크에 밀려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식이에요. 그런데 입다가 제일 먼저 나온 사람을 죽인다고 할 때 뭘 빠뜨렸냐 하면 내 집사람들은 빼놓고, 그중에서도 나의 하나밖에 없는 딸, 그것도 시집 가본 적도 없고 자식 낳아본 적도 없는 그야말로 남자도 모르는 순결 무구한 처녀 그대로의 딸은 자기가 생각을 안 했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안 할 때 하나님은 꼭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서 우리의 한계성을 들춰내십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딱 나오고 보니까 34절에 보면 얼마나 순진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입다의 딸이 아버지를 반기는데 그냥 반기지도 않아요.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면서 나와서 영접하니” 딸의 기쁨이 극한까지 올라갔어요. 우리 아버지가 전쟁에 승리해서 무사히 돌아와서 지도자로서 제 역할을 하셨다는 극한의 기쁨이 입다 본인에게는 극한의 절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그런데 악어에게는 이게 없어요. 슬프다도 없고 참담함도 없어요. 악어가 자기 뱃가죽을 찢는 거 봤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죠. 악어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음도 일상이에요. 파리에게 ‘너 죽여버린다’라는 소리가 파리에게 전혀 위협되지 않아요.
하나님도 죽었는데 인간만큼은 죽음을 싫어해요. 하나님 죽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죽지만 다른 모든 동물과 백합이 지고 벚꽃 지는 것 때문에 꽃이 눈물 흘리고 하는 것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뭐가 고장이 났어요. 뭔가 이건 인간 자체가, 우리 자체가 문제 있는 겁니다. 철학이고 학문이고 사회고 뭐 사법고시, 의대 고시, 이런 거 백날 공부하니 뭐합니까?
본인이 문제 있다는 것을 발견 못 하는데. 그게 무슨 지혜겠어요. 짐승만도 못한 게 되죠. 예수님이 분명히 알려 줬잖아요. 알려 줬는데 인간은 예수님이 와서 뭐 했다고 하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게. 이삿짐 내리는 풍경을 한번 보세요. 이삿짐 내린다고 하면서 큰 차 와서 시끄럽게 사다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 그 동네가 뭐 난리가 났죠. 그리고 시끄러워서 한 3시간 동안 어디 다녀오게 되면 아무 일 없어요.
이삿짐 내리고 왔다 갔어요. 인간에게는 예수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입니다. 십자가 어쩌고 해도 그냥 왔다 갔어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요. 예수 없는 일상.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라고 할 때 다시 말씀드리지만 악어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이곳은 이스라엘이잖아요. 이방나라 같으면 하나님께서 딸을 안 죽였죠.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인간의 객기, 오만함, 교만함 속에 이런 인간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흔적을 여기에 남깁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결심을 무효화시키려고 할 때 입다의 딸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이번 전쟁은 적을 이긴 것이 전쟁이 아닙니다. 아버지 자신을 이기는 것이 전쟁입니다. 아버지를 이긴다는 말은 자신이 하는 모든 짓이 하나님과 사전에 계약맺지 않은 그저 나만의 우쭐됨과 내 안에 본성인 죄를 들춰내시고자 아버지에게 승리케 하셨습니다. 나는 전쟁에 승리했지만 나는 그로 인하여 내게 감춰진 근원적인 죄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것도 딸의 희생을 통해서”라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예수님, 십자가 믿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내 죄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것이 승리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나는 가짜고 엉터리고 쓰레기만도 못한데 그것을 들어서 사용했다는 거, 이게 바로 인간승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승리인 동시에 성도의 승리예요. 악어 되시고 입다 되셔서 악어보고 ‘형님, 어떻게 자기를 고칠 생각 안 하고 있는 그대로 살 수 있어요’라는 식으로 악어를 통해서 다시 한번 지적받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소유해야만 승리인 줄 알았던 저희들이 빼앗기는 그것이 도리어 복이요, 생명이요, 승리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장악하지 않고 다 빼앗길 때 그 빈자리에 희생하신 입다의 딸처럼 십자가 지신 주님이 그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