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의 생명책에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사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는 이 생명책은 무엇이 되느냐?
텅 빈 형식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형식은 있는데 안에 텅 비어있어요. 텅 비어있으면 그 안에 텅 빈 형식을 내용을 누가 채우겠어요? 당연히 생명책은 하늘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우지요. 그러면 지상에 등장할 때는 텅 빈 형식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이러한 생명책의 설계자는 하나님이시고 그 내용은 누가 채우신다? 우리 주님이 실행자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70인들아 할 때 70인 누구누구 말입니까? 하는 게 아니라 그 70인이라고 하는 것은 How many의 70인이 아니고 How much의 70인이에요. 금 덩어리 한 덩어리처럼. 똑같은 의미가 요한계시록에 7장 4절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보면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4만4천이라고 하는 것은 인 맞은 자를 표현할 때 이 숫자는 How many의 숫자가 아니라 How much의 숫자에요. 한 덩어리. 완벽하게 구원된 사람의 Band, 연대 덩어리를 14만 4천. 12x12x1000을 한 이유가 12는 야곱의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야곱의 아들, 12지파에게 복을 내릴 경우에 그 복은 야곱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야곱 마지막에 최종 온전한 이스라엘, 온전한 교회, 이스라엘까지 12라는 복의 원리는 완료 1000, 완료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기어이 완성시키고 만다.12x12x1000. 144가 아니에요. 12x12입니다. 12를 강조점이 있어요 강조점 엑센트를 주는 겁니다. 언약의 언약은 언약이 언약대로 완성하게 되면 1000. 다시 말해서 시대는 그걸로 종료된다. 생명책에 숫자 다 차면 시간이 멈추고 역사도 끝난다. 그럴 때 하나의 금덩어리처럼 되는 거에요.
왜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왜 How many가 아니라 How much로 단일 양적으로 그렇게 표현하느냐. 이거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상식적이지만 인간은 인공물이 아니에요. 그렇지요? 인간을 인간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부모가 나를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은 인공물이 아닙니다. 부모의 DNA를 자손이 물려받은 건 맞는데 그 DNA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에요.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들 중에 있어요? 없어요? 인간들 중에 없지요. 이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원리는 인간에게 적용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왜? 인간의 어떤 것도 인간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 인간은 인공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만드신 분의 원리가 들어가야 돼요. 인간이 세포로 만들어진 것은 맞아요. 하지만 세포의 원리가 인간에게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세포가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은 세포로 만들어졌지만 재료는 세포지만, 만들어진 원리는 생물학적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인간의 원리란 무엇이냐? 인간이 인공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 원리 해와 달과 별과 동일하게 하나님이 적용하신 원리가 있습니다. 원리를 크게 쓸게요. ‘너를 무서워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악마가 무서워요 귀신이 무서워요 코로나 무서워요. 사람이 남들이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 게 무서워요. 무서워하는 것은 본인이, 본인이 무섭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섭기 때문에 남들도 무서운 거에요. 내가 망가질까봐 무섭고 무너질까봐 무서운 거에요. 사람이 자기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나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내가 텅 빈 형식이 될까봐. 내 안에 아무것도 없어질까봐 인간은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인공물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게 아니고 누가 만들었다면 누가 만드신 그 원리가 나한테 오도록 우리는 자기를 텅텅 비어놔야 되겠지요. 내 것을 비워놓게 되면 내가 남을 공격할 무기는 나한테 없습니다. 왜냐? 텅 빈 형식이기 때문에.그냥 주시는 은혜대로 그냥 받을 뿐이지요. 세리와 창기들처럼. 뭐 내세울게 없어요. 내놓을게 없으니까 주의 뜻대로 안 될까봐 염려하는 것도 없어요. 뭐 개코라도 있어야 희망하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텅빈 형식이 없으면 How much가 아니에요. How many에요. 내가 내 것을 카운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까지는 내것이고 이것까지는 내것 아닙니다를 서로 구분하는 거에요. 이미 마귀가 우리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마귀가 만들어낸 인간이 자기를 만들어준 마귀보고 무서워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만든 인간이에요. 내가 채워줄게 에요. 내가 채워줄게. 텅 빈 형식은 자기로 인하여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 이렇게 하면 내가 말 이렇게 했다고 남이 욕하겠지? 그럼 나는 힘들겠지? 이런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내가 이 말하면 얼마나 상처 받아가지고 내가 얼마나 또 저 사람한테 미안해하고. 자기가 남들 앞에서 나의 체면이 구겨지면 어떡하지? 그런 체면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텅 빈 거에요. 왜냐하면은 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내가 만들어버리면 나는 하나의 개체가 되고 개체는 생명책에 명단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땡! 탈락이에요. 개체는 땡! 탈락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말씀대로 살아서 생명책에 꼭 내 이름이 기록되도록 힘써 노력하겠습니다 파이팅! 이것은 주께서 전부 다 이거는 인공물로 간주해서 다 제거해버립니다. 생명책은 나와 1:1 대응이 안 됩니다. 생명책은 우리가 보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원리는 뭐냐? 동일한 것은 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것은 하나만 있어야 되지 둘이 있으면 안돼요. 동일한 생명책에 원리 적용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책에 들어 온 사람의 특이점, 특이성은 뭐냐? 존재를 보지 않아요. 인간 존재에 대해서 신경 쓰지를 않아요. 주님에게 관심 있다 이 말입니다. 핵심은 뭐냐? 내가 나를 볼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다. 내가 나에게 신경 쓸 그만한 권한은 주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내가 나에게 관심사 되면 나는 How many가 돼요. 하나의 개체가 되버린다고요. 개체. 카운트되는 대상이 된다고요 내가요. 나는 어떤 집단에 속해야지 내가 따로 꼭 집어서 내가 하나의 개체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 개체를 내가 이걸 지킬까 말까 지킬까 말까 하면서 내가 혹시 못 지키면 어쩌나 내가 나를 무서워해요. 평생을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내가 나를 무서워합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어쩔 줄을 모르고 내가 나를 감당을 못해요. 이 덩어리를 어쩌면 좋나. 코로나 안 걸려야 할 텐데 벌벌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한테 무서워하니까 남들이 오는 것도 다 주위 사람이 다 무서운 거에요. 누가 이야기하면 무슨 말할까 벌벌 떨고 있어요. 감당도 못해.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텅 빈 형식이에요. 형식만 있는데 안에 텅 비어있습니다. 그럼 안에 뭐를 채울 것인가? 그게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이런 주께서 일으키는 사건이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그 사건을 피해서 가버렸고 그 다음에 레위인도 그 자리를 피해서 가버렸어요. 주께서 생명책에 필요한 내용을 줬건만 하늘에서 만들 생명책을 만들고자 내용이 있어야 되는데 내용을 줬건만 그 내용을 피해갔습니다. 여기서 오늘 제일 중요한 개념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방향성’. 방향성이 달랐어요. 방향성이 다른 거에요.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그 방향이 아니고 낯을 피하여 반대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반대방향으로. 예수님이 말씀을 탁 던져버리면 네가 지금 가고 있는 인생길이 주님 쪽이 아니냐, 이냐가 이게 주님께 말씀을 듣는 순간 판정이 나고 그 말씀은 사건화 되어서 일어나요. 사건화 되어서. 평소에 자기가 텅 빈 형식이라면 주님의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오게 되면 저 사건은 나로 하여금 내가 주님 가신 쪽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주님 낯을 피해 반대로 가신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을 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동안 맺어왔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끊게 되는 게 텅 빈 형식이에요. 그 텅 빈 형식에 대해서 누가복음 10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그걸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이웃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강도 만난 사람. 강도 만난 사람과 일체성을 이루는 이웃. 첫 번째 텅 빈 형식은 뭡니까? 강도 만난 사람. 두 번째 텅 빈 형식은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는 사마리아 사람.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어디 안에 있는가? 두 사람이 텅 빈 형식을 채우는 생명책이라는 그것을 공정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돼요. 그러면 그 내용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실제로 그 내용을 만드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 본인입니다. 예수님 본인 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웃이 되고 예수님 본인이 그 이웃을 도와주는 분이 되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냐 하면은 한쪽은 완전히 뻗어있는 사건이고 그 사건의 그 뻗어있는 것을 살려주는 사건. 이 두 가지. 십자가도 있고 그 다음에 부활은 뭐냐 하면은 전에 죽은 적이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이제는 너한테 더 끄집어낼게 없어 가지고 갖다버린 적이 있다는 겁니다. 무덤 속으로. 사람이 죽게 되면 과거도 같이 이제는 소용없게 되지요. 과거가 다 빠진 상태다 보시면 됩니다. 그 빠진 상태에 예수님이 하신 일로 그 과거가 채워지게 되면 텅 빈 형식은 주님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새로운 생명책에 해당되는 금덩어리 같은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나 주님의 사건 하나 예를 들은 사건 하나 주님이 일으킨 사건 하나가 다 지금 자기 백성의 내용을 채우는 사건들로 주께서는 일으키신 거에요. 주님 자기만 챙길려고 그 사건 일으킨 거 아니에요.
-십자가마을 강남강의 "텅 빈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