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아빠와 함께 2022. 4. 14. 08:22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 찾아온 공포를 해결하려고 타인과 만나게 됨을 뜻합니다. 이때 타인은 모두 나를 위한 물건이고 사물로 취급됩니다. 나의 소유의 대상들이지요. 왜냐하면 나만 홀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이러합니다. 주인과 주인되고 싶어하는 자들만 있습니다. 자의적으로 종이 되겠다든지 남의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이 세상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아무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드러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형평성 있는 세상이기를 원합니다. 동등과 평등을 이룰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장이 되어야 할 자는 사장이 되어야 하고 종이나 노예가 될 자는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계급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사회에서는 문제거리가 되지만 주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다른 것을 찾으십니다. 그 다른 것이란 바로 ‘예수님만이 홀로 주인이다’는 사실입니다. 즉 이는 주님의 요소가 사회와 가정 구석구석에 다 개입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요소’란 다른 말로 말해서 ‘심판’입니다. ‘저주’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육신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을 감당해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절대자아’가 인간의 육신의 주인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의 ‘절대자아성’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나 사건을 일으키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8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즉 베드로는 평소대로 자신의 발이니 자신이 깨끗게 해서 주님을 찾아뵙겠다는 의식을 털어놓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네 발을 네가 씻는다면 이는 주님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은 ‘주님의 일하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과 관련없이 따로 자신이 추구할 이상적은 목표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사회적으로나 하나님에게 동의를 얻어내는 겁니다.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은 절대자아가 내딛으면서 사회에 나서려는 이유입니다. 베드로는 무심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 겁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회사 사장이 되든지 아니면 회사 종업원이 되든지 상관없이 모두가 ‘사람에게 하듯하는 ’행위만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는 내용은 ‘판’을 바꾸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 세상에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판, 다른 세계가 있음이 예수님에 의해서 소개됩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요 2:7-10)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절대자의 아쉬운 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이 거하는 좌표 자체를 바꾸어 버립니다. 판을 바꾸시는 겁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포도주가 아니라 물을 담게 하시므로서 인간들이 ‘나를 위해 사는’ 그런 세상판 자체를 뒤엎어버립니다. 기존의 절대자아를 추구하는 식으로는 결코 하늘나라는 허락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 인간세계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어 있는지는 구약 때 요셉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요셉의 꿈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꿈은 곧 ‘말씀, 혹은 말씀세계’입니다. 시편 105:17-18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요셉의 예지력을 이용해서 그들의 자아를 충족하려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욕이 드러납니다. ‘소유욕’이란 인간들이 자아를 영원히 사수하기 위해서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이나 물건이나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은 자기 빼놓고 나머지 타인들은 물건, 곧 소유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타인들을 매개로 사용하는 자아는 절대적 자아가 되려고 합니다. 절대적 자아란,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입니다. 하늘의 거룩을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인간이 오로지 절대자아라는 목표를 향하여 질주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중보자(매개인)은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 그래서 생긴 것이 ‘쓴 잔’이요 이 ‘쓴 잔’은 예수님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나 오늘날 성도들도 마셔야 합니다. 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던 그 예수님의 피 씻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주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첫째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이 첫째 죽음 뒤에는 첫째 부활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중보하고 상전과 노예들 사이에 끼어 중보할 때에 피흘리심으로 관여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씻겨나가는 것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은 자기 형편을 원망하거나 주님을 향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형편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와 상관하게 하시는 ‘피로 씻음’이 작용합니다. 그러면 그 성도는 이미 첫째 부활이 된 자입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상전이요 주인이신 주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이 거꾸로되었음을 알지도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주일설교 "상전과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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