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된 게 환란이죠. ⓑ그 말씀은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에게 있었던 환란을 그대로 확장된 게 환란이에요. ⓓ그 예수님의 일생은 십자가로서 압축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 믿는 백성은 자기 역사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다시 압축이 돼야 돼요. ⓕ그러면 압축되고 다시 튀어나오는 모든 일의 전개는 뭐냐 하면 나의 기억이 아니고 나의 기억이 모조리 뭐로 바뀌느냐 하면 주님의 기억으로 바뀌게 돼요. 내가 없는 데서 출생해서 주께서, 주께서 출생하게 했고, 주께서 초등학교 가게 했고, 주께서 뭐하게 하시고 전부 다 ⓖ주님의 일기장에 있는 내용들이 나라는 육체가 커가면서 계속 여기서 기입되는 거예요. 기입이란 말 알지요. 빈 장부에 주님께서 쓰시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 기억을 우리를 노트로 생각해서 거기다가 자기 일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노트에 일어난 일은 주님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에요. 그걸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사도들이죠. 그리고 스데반 집사고요. 스데반 집사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남의 일처럼 여깁니다. “저들은 알지 못합니다, 주여.” 나는 빈 노트에요. 성령께서는 우리를 빈 노트로 만들어요. “너 아니야. 예수님 내 일이야.” ⓘ성령께선 자꾸 꾸짖으면서 우리를 비워내거든요. 비워내면 이게 빈자리가 돼요. 공백이죠. 공백인데 ⓙ우리의 육적인 요소가 아담적 요소가 공백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자꾸 욕망으로 이걸 채워버려요. 주님께서는 비워놓으면 또 우리 욕망이 와서 차지하고. 욕망은 뭐냐 하면 미흡함이에요. 미흡함, 결핍이에요. 전에 서울강의에서 했지요. 호색이란 건 무엇 때문에 생긴다? 결핍이에요, 결핍. 자꾸 결핍으로 메우는 거예요. 메우는 이유가 장래가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내가 숟가락만 빨면 안 되지. 아이를 위해서 일을 해야지. 갑자기 주께서 지금껏 해왔다고 성령께서 그렇게 일러줬건만 내가 초조해서 안 돼. 내가 그냥 마냥 기다릴 순 없어. 장래의 나의 운명은 내 손으로 뭔가 달성하고 싶어요. 뭐 기도라도 해야 됩니다. ⓚ주께서는 하게 하셔요. 욕망 하게 하시고 욕망을 뜯어내지요.
ⓛ이게 뭐냐? 응축의 슬픔이고 응축의 아픔인 거예요. ⓜ해놓고 뜯어내면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그런 뻔한 이야기 또 그 이야기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그 이야기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 사도들도 다 같이 매일같이 한 이야기에요.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 ⓝ자기 시간 아니에요. 주님의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자긴 아무 계획이 없어요. 원치 않는 길로 갈 뿐이에요. 성령께서 함께 해요. 딱 옆에 있어요. 이게 주님이 소동이거든요. 언제까지 실패인 모양이라. ⓞ그것을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반복성이라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보인다 했지요. 십자가는 성격이 다른 두 세계가 중첩돼 있습니다. 대륙지각이 해양지각 밑으로 삽입되는 거예요.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가면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맨틀 속으로 들어가듯이 계속해서 중첩된 이 세상에서 고요하지 않고 주께서 같이 중첩되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은 요한계시록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계속 질주하게 돼 있어요.
환란이 뭐냐? 환란은 외부에서 오는 환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의 내부 환란이에요. 너 진짜 주님 주신 것 없잖아, 이걸 확인시키는 거예요. 주님 자기가 준 성령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는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을 우리 몸도 살리거든요. 따라서 성령이 중요한 거예요.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거기의 답변은 뭐냐? “너 아직 살아 있었어?” 이게 매일 반복돼요, 모든 의욕이 떨어지지요. 성령은 세상 공격도 하지만 환란은 내 내부에서 환란을 유발시킵니다. 나를 업다운을 날마다 거꾸로 뒤집어버려요.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묵시를 현실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누가 필요하냐? 사탄의 활동이 꼭 필요한 거예요. 사탄의 활동은,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하고 시시한 밥풀 떨어내듯이 나의 수 시간 공들였던 복음을 툭 먼지 털어내듯이 털어내 버려요.
ⓤ이것이 우리가 불신자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신자이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 내부에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선과 악의 다툼, 나의 의와 나의 의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주님의 의의 충돌 ⓥ그 가운데서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십자가는 살아 있다는 것, 나는 죽어 있다는 것, 그동안 주님이 살아 있고 십자가 살아 있는데 언약이 살아 있는데 자꾸 나는 현실로 돌아가면 나는 심장 뛰면서 내가 살아 있다고 이거는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인 것처럼 우리가 그걸 매일같이 확정짓고 그 토대 위에 우리는 어떤 행위에 나서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고 치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요. 흉악한 이리를.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흉악한 이리로 볼 줄 모르고 하나님의 참된 목자라고 이해하고 그걸 받아들여요. 성령은 교회를 통치하고 있지만 눈에 보입니까, 눈에 안 보입니까? 눈에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성령께서 보이는 사람을 세운 거예요. 그 보이는 사람이 무엇을 선포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의 핍니까, 하나님의 핍니까?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돼요. 정신병자의 사랑. 이 정신병자의 사랑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걸 스토커라 해요. 내 사랑을 니가 왜 안 알아주느냐 하는 거예요. 이건 세상 사람들 사랑이고, 정신병적 사랑이 있어요. 이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사랑이에요. 인간들 자기 사랑하는 것이 이게 정상적으로 보거든요. 그 정상에 비춰볼 때 자기를 미워하는 사랑, 이거는 정신병적 사랑이에요. 사도 바울은 나는 이 사랑밖에 모르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것, ⓨ바로 안 됩니다. 반드시 거쳐야 돼요. 정신병자 나 사랑에서 이렇게 옮기는데 여기 성령이 개입하십니다. 성령이 개입하니까 처음에는 짜증나다가 그게 갑자기 감사가 되지요. “나 이러다가 지옥 가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 저 혹시 지옥 가면 어떻게 해요?” 이렇게 짜증 내다가 지옥에 가든 말든 주께서 일하시는구나.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 있고 십자가 복음만 전파하는 걸 기뻐한다면 그걸 성경에서는 성령 안에 있다고 이야기해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니까 지옥에 가든 뭘 가도 그거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냥 나그네에 불과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성령이 와서 나는 나만 주장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그걸 보고 기뻐해야지요. 나는 주님이사용하는 자료가 된다는 그것만 해도 얼마나 영광스런 신분인지 몰라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감격과 기쁨 가운데서 나타나야 돼요. 왜냐하면 이거는 내가 그렇게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있기 때문에 부정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하늘나라 왔는데 무슨 또 다른 나라 생각합니까?
①성도는 내가 있는 곳과 내가 있지 않는 곳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돼요.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고 성령 바깥에 그리스도 밖에는 내가 없다는 거예요.
②그런데 우리의 육적인 망상은 마치 그리스도 밖에 내가 있어서 그게 다치면 안 된다고 내가 걱정하고 있지요. 그게 배설물로 빠져나가야 돼요. 아담의 요소니까.
③아담의 요소가 있어줘야 십자가가 살아나니까 그것 한꺼번에 빠질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죽을 때까지 계속 있어줘야 내 구원 위주가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었음만 드러내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마을 대전강의 "불쌍한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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