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19)
여기 샛별이 떠오르지 아니하면 예언을 풀 수 없는데 그 샛별이 뭐냐 하면은 바로 17절에 보면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의 영광 중에 우리가 보았던 그 예수님의 동일한 영광이 이제는 우리 마음속에 떠오른 자에 한해서 이 베드로전후서 뿐만 아니고 사도 바울의 신약성경, 성경 전체를 제대로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차단이죠. 이건 절단시키는 겁니다. 인간의 이성과 해석법으로 가능한 것들을 모두 차단시키는 겁니다. 발달된 인간의 언어해석법중 어떤 해석법도 샛별이 떠오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에 샛별 떠오르는 방법은 이미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야기했어요. 그걸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뒷부분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야기합니다. 40일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특히 잠자지도 않고 버텼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하면 이게 그 장, 영역이 달라서, 필드가 달라서 그래요. 어떤 영역이냐면 이게 영적 영역이기 때문에.
이 영적 영역에서 모세가 이렇게 버틸 수 있다는 것은 모세가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세가 용납할 만큼 모세 수준으로 낮춰 준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모세처럼 되지 아니하면 성경해석 완전 제로입니다. 우린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모세 뿐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는 성경해석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적 낮춰주심을 모세보다 더 낮춰가지고 아예 우리의 더러운 육체 속에 하나님의 자신의 긍휼로 삼으셔서 성령께서 들어와 버렸어요. 인간은 자기 결핍된 것을 찾아서 그걸 메우는 식으로 욕망하게 돼있어요. 성령님께서는 우리한테 오시기 전에 예수님한테 계시던 분이에요. 그런데도 그 거룩한 분에 계신 거룩한 성령님께서 더러운 우리 속에 들어온 거예요.
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거기서 일어나는 더러운 육체를 가졌으니 오죽 더러운 짓을 하겠습니까? 그 더러운 짓까지 뒤에서 다 빨아내기 위해서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내려왔을 때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 뭐라 그러냐 하면은 그걸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고, 자유한대 방종하지 말자 이게 아니라, 이 자유는 누구 자유냐 하면은 성령님께서 자기 멋대로 낮아지려면 우리보다 더 낮아지고 우리보다 더 천하게 낮아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기 조절력, 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죄를 져도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거룩한 말씀 앞에, 십계명 앞에 사람들이 우상, 산 밑에서 풍악을 울리고 놀았을 때 모세는 견디지 못해서 그 돌판을 깨버렸습니다. 지금 그 정도 같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을 보면 이 성경책, 주께서 우리 보고 다 찢어버리고 불태워 버립니다. 날마다 내 가정에 성령께서 나타나서 불로 태워버립니다. 너 같은 인간에게 성경은 아깝다고 불태웁니다. 말씀대로하면 이 말씀은 나한테 해당도 안 되고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런데 말씀이 되신 그분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가 토해내는 모든 것을 다 받아내시기 위해서 자기 자유의사대로 우리가 짓는 죄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우리를 받아내고, 우리의 더러운 신체를 자신의 신체로 간주하시고 자신의 성전 삼으사 우리로 하여금 자유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처음으로 깨닫게 하시는 일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느끼게 하시는 거예요. 말 참 재밌죠. 성경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망을 느끼고 그 절망마저 희망으로 바꾸는 주님의 자유를 느낌으로써 주님의 자유로 성령님의 자유가 곧 우리의 자유가 되도록 그렇게 자유를 비로소 느끼도록 매일 같이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 성령의 세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자유를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냐?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성령님이 누구 성령님이냐 하면 어린양의 성령님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어린양의 일곱 영이 와요. 어린양이 뭐하신 분이냐 하면 이미 죄인을 더불어서 죄인과 함께 속죄양이 되신 분이거든요. 속죄양이 되신 분이 성령님의 활동에 충실한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자기 백성을 용서 안할 죄가 없지요. 그것은 누구 때문에, 성령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수 받아서 십자가의 용서를 그대로 적용시키기 위해서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날마다 책망하고 용서하고, 책망하고 용서하는 일을 되풀이 함으로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 거룩을 우리 안에 심어놓고 거룩이 뭔지를 우리에게 표출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거듭남이라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Elect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unto 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Grace unto you, and peace, be multiplied.
그러니까 베드로전후서를 보면서 느껴야 될 것은, 뭐가 없느냐, ⓐ시간적인 순서나 논리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완결된 상태에서 여기에 해당자다 통보하는 것이 베드로전후서입니다. 극장 안에 들어왔으면 어느 자리에 앉든 간에 극장 안입니다. F 뭐 H2를 앉든, A7번 석을 앉든 어디 앉아도 극장 안입니다. 다 똑같이 어둠에 적용받고 스크린이 다 보이게 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베드로전후서의 내용은 우리보고 새삼스럽게 지켜내란 말이 아니고 이미 네가 온 곳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이리저리 쑤셔보는 거예요. 덕에 절제를, 절제에 경건을 더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예상 못한 새로운 사건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2006 함평수련회 베드로전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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