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의 아픔
2022년 3월 27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6-7
(1: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음의 세계로 떠밀고서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밀고 나갑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의견이나 견해나 지혜와 지식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고 앞으로 진행나갈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버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 교체 작업입니다.
기존의 세계가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도 그들의 행위가 전면적인 홍수를 막아낼 수 없듯이 예수님의 이후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전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나리자 그림을 보면서 크게 그려진 그 여인과 전원풍의 뒷 배경과 잘 어울려야 인물이 사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세상은 자신들의 추억과 기억에 부합되는 세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서는 이 세상이 한꺼번에 멸망한다는 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란 마치 펜싱 경기에에서 최후의 일격과 같습니다. 곧 기존의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의 때의 배경에 맞추기 위해서 인간의 과거 추억을 예수님의 추억으로 바꾸십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의 과거 추억을 제거해 나갑니다. 따라서 성도도 이런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서 자발적으로 이 세상 자체를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은 날마다 자기부터 실시됩니다. “나는 나의 죽음 안에서 살고 있다”를 성립시킵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가 되며 같은 뜻으로는 “나는 환란 안에서 존재한다”가 됩니다. 주님은 성도의 과거 역사를 예수님에 맞추어 ‘때’가 되게 합니다. 한 순간이 되게 합니다.
이 작업이 환란입니다. 즉 예수님을 공격한 그 세력에 자기 백성을 맡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도는 아픔을 느낍니다. 자신의 자존감이 박살나고, 자신의 과거 사랑이 무산됩니다. 자신의 희망마저 좌절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도도 하나님에게 항변하게 마련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아에 없었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네가 없는데 너의 문제나 고민거리가 생길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주님은 끝까지 자기 성도를 버리고 않고 따라오면서 인간적인 과거 추억을 말살하려 하십니다. 이러한 바뀌치기 하는 작업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본인이 결정할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은 아예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모든 말씀은 그 시대나 오늘날 시대에 늘 인간들의 이 불가능을 건드리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5병2어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미리 남자 5000명이 먹고도 남을 도시락을 준비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절차가 필요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성하신 참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인간의 불가능함이 늘 내부에서 되풀이되는 원칙을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유지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엘리사 시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하 6:6에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나가 빌려온 쇠도끼를 물에 빠트렸습니다.
이때 엘리사는 나뭇가지를 던져서 물이 이미 빠진 쇠도끼가 물에 떠오르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동일한 눈을 가지고 동일한 감각으로 이 세상을 이해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진정한 배경이나 환경은 장차 오실 ‘주님의 추억’의 차원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삶은 딱딱한 유리판 위에서 왔다갔다 하는 식입니다.
이 평면적 삶을 빠져나갈 다른 구멍을 찾지 못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세계, 곧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부합되는 딴 세계로 통하는 배수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사를 한 순간으로 응축해서 설명하는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더는 자기 추억이나 역사나 자기 자존감 같은 것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 장군은 자기 몸에 인간으로 치료될 수 없는 문둥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립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죽이는 신호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아만 장군은 여전히 자신의 과거에서 축적된 지식에 입각해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어가라는 명을 얕잡아 봅니다. 하지만 일단 들어가고 난 뒤에 그의 뒷배경은 달라졌습니다. 즉 자기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세상임을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오늘날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뜨고도 주님의 세계를 볼 줄을 모릅니다.
열왕기하 6:38-41에서는 같은 취지의 일이 나옵니다. 독이 된 참외를 솥에 넣고 끊이다가 독이 돈 것을 선지자들의 생도들이 발견합니다. 곧 우리 인간들은 마땅이 죽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시도로 변경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가 가루를 푸니 비로 독소가 제거되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죽어 있어도 본인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멀쩡히 살아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자를 공격하는데 이는 주님 당시에 사람들이 주님에게 행한 일의 반복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성도는 이런 일을 매일 같이 겪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신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10-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거짓되게 십자가 지식으로 여전히 자기 것을 계속 지켜내기 위한 시도는 천사에 의해서 철저하게 제거당합니다. 바꿔치기 당할 겁니다. 그 바꾸치기 하는 그 작업 자체는, 우리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실질적으로 살아계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과거가 지워지는 것을 도리어 복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데살로니가후서 1장 6-7절(압축의 슬픔)220327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6-7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7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재림은 마치 펜싱 경기할 때 펜싱 경기가 언제 끝나느냐 하면, 최후의 일격을 탁, 칠 때 모든 경기가 끝나버립니다. 재림은 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께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겁니다. 그 최후의 일격은 역사가 아니고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재림이 오기 전에 최후의 일격의 그때가 때다움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역사에 대해서 역사가 의미 없다는 것을 나타내야 되겠지요. 그래서 여기 환난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이 환난이라는 것을 겪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게 주보 뒤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환란’이란 말씀대로 완전히 일치될 때나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완전히 일치될 때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환난 받으면, 환난 속에 들어오면 여러분 복 받은 겁니다. 예수님과 일치, 예수님의 삶과 일치될 때 주어지는 것이 환난입니다.
예수님을 중간으로 해서 예수 바깥과 예수 안쪽이 구분되거든요. 예수님 안쪽에 온 사람은 예수님과 더불어 환난이 있게 되고 그 예수님의 환난이 어디서 마감되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 그 지점에서 종결됩니다. 그 다 이루었다, 지점이 뭐냐? 펜싱에서 최후의 일격이에요. 하나의, 한 때입니다. 카이로스, 한순간이 오는 거예요. 십자가의 순간에 다 이룬 겁니다.
마귀는 예수님 보고 십자가 지지 말라고 얼마나 회유를 했었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라는 순간이 없어버리면 역사는 무의미하게, 우리 인생은 무의미하게 그냥 흘러가 버려요. 이유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시간 때우고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답답한 것은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를 모르면서 자유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자유라 하는 것은, 내가 뭘 할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자유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백수가 자유입니까? 아니지요. 열심히 일할 때 휴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자유의 기쁨?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겁니다.
속박이라는 것이 뭐가 있어야 자유를,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시간이라는 여기에, 이 속박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이겁니다. 내일 되면 잘하겠지, 모레 되면 잘 하겠지, 계속 시간 가면 무슨 좋은 날이 오겠지, 이런 식으로 하는데 성도는 다음 날, 다음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서, 내 역사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시간 안에, 예수님에게 있던 그 환난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면 주보에 보면 【환난이란 ‘환란’이란 말씀대로 완전히 일치될 때나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일치될 때나, 이 ‘나’가 꼭 들어가야 돼요. “일치될 때나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환란은 오직 예수님께서 움직일 때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움직이니까 환난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이 땅에서 고생하면 나중에 낙이 오겠지, 그러한 소리는 잘못된 겁니다. 나를 위한 환난에서 나를 위한 안식이 주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의 환난에 들어가야 예수님의 안식이 오는 겁니다. 고생 많이 했다. 이 땅에서 나중에 호강하는 것 아니에요. 강원도 산골에서 부모한테 효도하고 애들 잘 키우고, 그렇게 산다고 해서 천국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일이지 주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환난은 예수님이 움직일 때만나타나기 때문에 성도에게 환란이 일어나는 것은 그 성도의 모든 움직임에 예수님께서 함께 해서 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을 전부 다 지워버려요. 이 세상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 어떤 책무가 있는데, 그것은 성도가 자기 인생을 제거하고 지워버려야 돼요. 지우개로 박박 밀어서 내 인생을 지워버려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곧 나의 추억을 지워버리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나의 추억에서 주님의 추억으로 이전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방금 주보에 설교 요약한 것을 다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환난이라 하는 것은 내 시간, 내 추억의 긴긴 시간을 하나의 때를 향하여 시간이 압축되는 아픔, 그게 환난이에요. ‘참 내가 힘들어서 어려웠어. 내가 이만큼 힘들게 산다고 애썼어.’ 이것은 공장에 가면 프레스 미는 것 있잖아요, 잘못해서 손 끼이면 잘립니다, 그 프레스로 완전히 납작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과거에 자기 고생한 것이 아까워서 아야,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압축해 버리니까 내 긴긴 고통의 시간이 주님의 고통의 한순간으로 강제로 압축 당하는 것, 찌그러지는 것, 이게 환난의 아픔이에요. 그러나 그 목표가 있다는 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그냥 찌그러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 “찌그러져도 괜찮아. 다 이루었잖아.” 압축되는 그 블록, 블록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 어떻게 압축되는 방법은요, 우리를 둘러싼 역사라는 시간의 울타리가 우리를 향하여 쪼그라드는 거예요. 마치 삼성에서 새로 출시한 양면폰처럼. 양면폰은 스마트 폰 전체가 다 화면이에요. 표면 전체가. 이래 봐도 저래 봐도 화면 나오죠. 우리 전체가 주님이 하신 일로 다 덮여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블록이 되고 그 안에서 시간은 종결되었습니다. 없어요. 끝이에요. 그 순간 그 순간이.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이게 바로 그 결정적 일격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가 역사 속에서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고 이미 나의 추억이 예수님의 추억에 의해서 소멸된 사람에게만 지금 주 안에 있는 그때가, 그때에서 일어나는,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때가 바로 재림의 때에요.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그냥 여기 있으면 주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의 모든 나의 시간은 축소되었기 때문에, 한 지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추억을 뜯어내야 되고 나의 시간을 제거해야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보면, 요약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나의 죽음 안에서 살고 있다.”가 돼요.
‘나는 지금 살아 있는데?’ 살아 있잖아요. 실감 나잖아요. 살아 있는데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죽음 안에서 살아 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나는 이미 죽고 그리스도의 응축된 안에서 나는 새로 살고 있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걸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나는 존재한다. 같은 뜻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재림은 교체작업을 하는데 교체작업을 할 때 좀 요란스러워요. 이 세상 자체의 안정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비안정성이 됩니다. 그게 환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환난을 ‘주님이 벌이는 소란행위’ 그걸로 봅니다.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성도한테는 이게 소란스러워요. 왜 소란스러운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그림입니다. 그 모나리자를 볼 때 우아하게 생긴 귀족부인이거든요. 그 모델 되는 사람이. 그림에서 젊은 20대 귀족 부인 그걸 보기 마련인데 그 귀족 부인만 보지 마시고 그 귀족 부인 뒤에 짙은 초록색으로 길도 나와 있고 약간의 들판도 나와 있는 배경을 맞춰서 봐야 돼요.
그 우아한, 눈썹도 없이 웃는 듯 우는 듯한 그 우아한 모나리자, 모나리자가 얼마나 우아했으면 조용필도 언급했겠습니까? 그 모나리자는 뒷배경에 중세적이고 고전적인 평화로운 들판을 배경으로 해서 모나리자의 웃음과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거예요. 만약에 모나리자 있는 뒤에다가 30층이나 50층 빌딩 해 보세요. 이게 안 맞지요.
주님께서 재림이라는 주의 일을 위해서 배경을 깔아놓는 거예요. 그 배경에 맞춰서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 예수님이 살았던 그 시대 상황, 그 시대 상황에 우리로 하여금 뛰어들게 만들어요. 성령을 통해서 뛰어들게 만들어버리면 우리가 사는 것이 비록 21세기고 비록 온통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또 대선 후유증 때문에 원통 절통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소란도 있는데 그렇게 보지 마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움직이는 눈에 보이는 실물경제, 실물사회가 예수님의 살았던 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그때 그 시절의 말씀의 세계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만 예수 믿는다, 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자체가 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왔던 그 유대 사회를 배경을 깔아줘서 환난의 의미가 확 살아나는 거예요. 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나오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그러한 살벌한 분위기, 정치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깔았을 때 우리는 예수님만 덜렁 던져주고 우리가 구경이나 하지 마시고 그 세계 안에 우리가 들어와 버리면 그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렇게 분노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역겨워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당장 죽여라!” 하는 그러한 결정을 우리는 통감해야 되고 같이 공감해야 돼요. ‘아, 그때 그 시대가 변하지 않았구나.’
지금 이 시대가 예수님이 겪었던 그 시대와 똑같은 성질의 시대에요. 똑같은 성질의 시대입니다. 그래야 말씀이 살아나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이야기로 살아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유대 시대에서 외쳤던 것은 뭐냐? 교체작업이었어요. “치워라. 이 세상 다 뜯어낸다. 옛날에는 물로써 멸망했지만 이제는 불로써 다 멸망시킨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잘하고 있지. 그러나 노아 때도 그랬었어.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물로 심판받을 줄 생각 못 했지. 인자의 날도 그러하리라.”
이 말씀이 그대로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적용이 되려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자체가 예수님 시대로 같이 들어가줘야 돼요. 그 시대 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야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살아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주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에요. 이것은 팔자입니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이미 멈출 수 없는 운명 같은 거예요. 이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지켜낼 수 없었다, 가 분명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내식으로 말씀을 지킨다, 율법을 지킨다? 안됩니다. 이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오셔서 이 세상, 바로 그 세상을 봤을 때 그리고 그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봤을 때 주님은 우리를 불안정으로 본 거예요. 그게 환난입니다. 환난 다음에 안식이라는 말은, 불안정한 것을 영원토록 안정화시키겠다는 거예요. 안정화시키겠다는 게 뭐냐 하면, 아까 배경에 부합된 관계, 하나님의 환난, 그 말씀대로 완전하게 일치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를 못 했어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진위를 포착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시한 것은 세상이 포착할 수 없는 흐름과 줄기를 어떤 예수님의 움직임을 통해서 그걸 드러낸 겁니다. 사람들은 왜 그걸 포착하지 못했던가? 그것은 바로 자기 추억과 자기 역사와 자기 과거를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뭐냐?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나의 추억과 주님의 추억을 교체하는 거예요. 바꾸는 겁니다. 나의 추억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 시대에……, 여러분 전체가 예수님 시대에 들어왔다고 칩니다. 일단 칩시다. 다 성령 받았으니까 치는 겁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하는 방식으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병이어 때 남자만 5천 명이 예수님에게 몰려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리 주님께서 도시락을 넉넉하게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미리. 그것은 인간이 주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 쪽에서 주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능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설명하는 방법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넉넉히 먹을 음식을 준비하라고 문제를 던지는 거예요. 문제를 던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난감하지요. 5 천명을 먹일 넉넉한 음식이 없습니다. 왜 없느냐? 인간은 어떤 문제가 주어지게 되면 이것은 자기 추억이 있기 때문에 내 문제라고 여기는 거예요. 자기 고민거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예 내가 없던 시절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없던 시절을 생각하게 되면 내 문제 내 고민 같은 것도 이게 건방진 짓이에요. 내가 없는데, 내가 없는데 무슨 내 문제가 있습니까? “목사님,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고민거리를 가지고 나오는 게 이게 시건방진 짓이에요. 내가 없는 데서 만들어졌잖아요. 과분한 줄, 고마운 줄 알아야지요.
그런데 사람들 문제는 내가 창세 전부터 영원히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겁니다. 주님의 이해는 오해로부터 시작해요. 오해로부터 이해로 빠져나가거든요.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오해밖에 없어요. 5 천명을 먹이라. 무슨 수로? 무슨 수로 먹입니까? 이 사람들 어떻게 배불리 먹입니까? 주님이 일부러 그래요. 일부러, 일부러 치고 나가는 겁니다.
‘너희가 백날 내 말 들어도 너희들은 내 말 알아듣지를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배경이 달라서 그래요. 배경이 말씀에 부합되는 배경이 아닙니다. 말씀에 도전하는 배경으로 되어 있고 우리는 그 배경의 출신들이에요. 그래서 자기 추억을 거기서 다 뽑아내는 겁니다. 자기 추억을 스스로 배신하거나 그걸 제거할 생각이 없어요. 철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있었던 나의 추억 가지고 그 추억을 고이 사랑하면서, 나를 위한 사랑이지요, 그걸 고이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달리 이야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0-12절에 보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게 뭐냐? 10절에 보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는 내가 없었는데 왜 있느냐까지 생각을 못 하고 일단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나의 역사와 나의 과거를 내가 사랑해요. 나의 과거를. 그래서 모든 일어나는 문제는 나의 과거에서 발생 된 문제입니다. 그게 안 되니까 화딱지 나니까 기껏해서 자살만 하는 거예요.
자살하지 말고 주님의 지시를 따르세요. “5 천명을 먹일 수 있는 도시락을 네가 준비해라.” 그 지시에 따르세요. 거기서 우리는 자살할 생각보다도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뭔가 문제 자체를, 질문 자체를 애초부터 내가 잘못된 지점부터 질문을 끄집어내는구나.’ 주의 말씀에 부합되지도 않는 배경을 나의 유일한, 유일하게 버팀목으로 간주해서 거기서 문제를 끄집어내는 이것이 처절하게 뭔가 오류가 발생되는 거예요.
참, 이 교회들 보면 참 한심스럽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유월절 날 주님께서 문지방 문설주에다가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천사의 때가 와요. 와서 그 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간다고 출애굽기 11장에 분명 모세를 통해서 히브리인들에게 약속을 줬습니다. 그냥, 그냥 넘어가요.
뭐 이건, 뭐 천사가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없어요. 피만 보면 그냥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네가 뭘 어떻게 위반했느냐 하는 위반문제, 법 지키고 뭘 지키고 그런 것은 일체 묻지를 않아요. 인간이 착하게 산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잘못된 배경에서 나온 선악체계입니다.
지금 몇 번을 이야기 해야 되겠어요? 우리의 선악 체계, 이건 몰라도 되는 거예요. 선과 윤리 도덕은 없어도 되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는 거예요. 자꾸 그걸 버팀목으로 삼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세요. 우리 뜻 생각하지 말고. 그냥 피만 보고 넘어가는데!
그래서 천사가 피만 보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안쪽에서 얍삽한 히브리인들,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얍삽한 히브리인들이 있다 치고, 애 보고 “야! 망봐라, 망봐. 천사 지나갔는지 망봐라.” “천사 갔어요.” 천사가 이미 넘어갔다는 거예요. “자, 다들 이리 와라, 이리와. 천사는 이미 넘어갔으니까, 요새 말로 하면 구원은 받았으니까 다시 나의 추억, 내 것, 이것은 내 힘으로, 내 자존심과 내 자긍심을 위해서 다시 하자.”
“아빠! 양 잡을 때 내가 두 다리 쥐었잖아. 이게 내 공로야.” 다른 아들이 있다가 “양 고를 때 내가 시장에서 골랐어.” 또 다른 아들이 “양 피 낼 때 내가 잘랐어. 왜 이래?” 이렇게 서로 자기 공로, 자기 시간 속에서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그럴 때, 망봐라, 할 때요, 사람만 천사의 망을 보는 게 아니에요. 천사도 망봐요.
지나가는 척하면서 도로 와서는 취소시켜 버립니다. 양 피 바른 것 취소시켜 버립니다. 십자가 믿은 것 취소시켜 버려요. 천사가 바보입니까? 주님이 주신 그 전파의 혜택을 천사가 무산시키지 않습니다. 제대로 꽂힐 자에게 제대로 꽂아주기 위해서 다시는 자기 추억으로 돌아가지 않을 사람에게 제대로 십자가를 꽂아버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어제 장례식에 가서 목사님들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참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제가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복음 전한다는 목사들, 십자가만 전한다는 목사들 그거 왜 전하느냐 하면, 복음으로 괜찮은 교회 만들기 위해서 하는 짓거리에요. 십자가 복음 전해서 우리 괜찮은 교회다, 우리 교회 오면 구원받는다, 그 짓 하려고 온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십자가 사랑하고 복음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러다가요, 사람들 잘 안 모이면 그 복음, 십자가 치워버립니다. 이 말은, 십자가 믿는 척을 하는데 천사가 바보입니까? 그냥 땡, 탈락이야, 탈락시켜 버려요. 실은 탈락시킬 것도 없지요. 아예 믿지도 않았는데요. 십자가 지식 가지고 복음 전하는 바른 교회 한다는 그런 방식.
결국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십자가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한 거예요. 왜 교회를 사랑하느냐? 교회에 자기 추억이 들어있고 자기 역사 자기 애씀이 들어있거든요. 그래서 같이 식사하던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기도 십자가 복음을 전해 보니까 그 숫자 얼마 되지도 않는 교회에서 장로님 두 사람이 12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버렸다는 거예요.
결국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분명히 십자가만 믿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은 이미 죽었고, 나의 추억에서 이미 추방되었고 나의 추억은 이제 주님에 의해서 박살 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될 텐데 그 교회에 목돈 낸 사람, 교회 처음 지을 때 자본금 출자한 거지요, 자본금 출자한 그 장로들은 자기가 그 교회 오래 다니고, 연배가 있고, 정기적으로 십일조라는 적금을 갖다 부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다가 내가 세운 회사 망하지 않겠는가?’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을 사랑하는 거예요. 앞에다 유월절 어린양 피 바르니 뭐합니까? 바르는 척을 했지요. 천사가 바보입니까? 천사도 망보는 데요. 피 바른 척을 했는지 그래서 너만 사랑했는지 다 보고 있는데요. 이스라엘의 특징이 그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스라엘 하나를 바꾸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를 계속 쇄신하는데 민수기 16장 46-49절에 보면 무려 1만 4천 7백 명이 죽습니다. 전염병으로. 고라자손이 모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어요. 민수기 25장 9절에서는 2만 4천 명이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견지돼요.
이게 바로 유명한 테세우스의 배라는 모순을 설명할 때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테세우스라는 사람은 유명한 아테네의 영웅인데 크레타섬의 미노타우르스라는 괴물을 영웅적으로 물리친 사람입니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라는 그 괴물, 사람을 괴롭히는 그 괴물을 물리치고 그리스로 돌아왔는데 이때 타고 온 그 배가 있어요.
후손들이 그 영웅의 배를 박물관에 모셔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래되니까 배를 만든 판때기 하나가 낡으니까 그것을 새 판때기로 갈아서 붙여놓았어요. 그런데 세월이 점점 지나니까 배의 한 10퍼센트가 낡았어요. 그 10퍼센트를 새 판때기로 바꿔놓았습니다.
나중에 세월 지나서 50퍼센트를 새 판때기로 갈아넣었어요. 나중에 세월이 더 지나 100퍼센트 몽땅 새판때기로 테세우스의 배를 교체했습니다.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 맞습니까? 다 바꿨는데. 테세우스 그때의 판때기는 다 날아갔어요. 사람들은 정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미해결 정답으로 과학책에, 물리책에 나와요.
사람은 왜 정답을 못 내느냐? 그게 정답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꾸는 교체작업 자체가 테세우스의 배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의 인간들은 내가 살아 있고 테세우스의 배는 과거의 추억의 배가 되지만 성령 안에서는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 나는 과거의 인물이고요,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 주님이 살아 있어서 날마다 주님이 몸 된 주의 몸을, 그 구성물을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주님의 몸이 살아 있어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믿는 척하는 인간들 다 바꿔버립니다. 복음으로 괜찮은 교회 하려는 인간들 다 바꿔버려요. 이단으로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만큼 나의 과거라는 것이 이게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교회 몇 년 다녔다느니, 어느 출신이라든지, 이것은 다 필요치 않고 소용없는 거예요. 오병이어에서 5천 명을 무슨 수로 살립니까? 제자들이 어린애 도시락 들고 옵니다. 주님이여……, 이게 인간의 한계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5천 명 먹이라고 한 거예요. 너희가 알아서 점심 줘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에게서 기껏 나온 게 기껏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예요. 이게 다입니다. 5천 명은커녕 혼자서도 배부르지 못해요. 그런데 결과에서 그들 5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얼마나 실컷 먹었으면 세상에 12 광주리나 남았겠습니까? 배불렀다 그 말이지요. 여전히 배고팠으면 11 광주리 밖에 안 남았을 거예요. 실컷 배부르고 배 터질 대로 다 먹게 하시고 그다음에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그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테세우스의 배입니다. 테세우스의 배에요.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스라엘 되느냐?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나의 과거의 추억과 기억은, 전혀 이것은 제거되어야 될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배경은 나의 추억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 배경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여기서 환난을 주시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자, 환난을 주시는 이유는, 나의 역사와 나의 추억을 다 발라내기 위해서, 다 긁어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걸 아까 한 이야기로 다시 하면, 나의 긴긴 시간을 주님의 때로, 십자가로 압축시키는 그 아픔, 그게 환난입니다. 왜? 우리는 내 힘으로는 주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환난은 어떻게 하느냐? 그래도 우리는 안 버려요. 고집들이 있어서. 자존심이 있어서. 그래서 우리를 계속 몰아세웁니다. 절망적으로 몰아세워요. 몰아세우면서 주께서 하시는 것은 이 말이에요. “나는 먼저 죽었다.” 전라도 말로 “너는 뭣허냐?” 이렇게 되지요. “나는 먼저 죽었어. 그런데 너는 여기서 뭣허냐? 뭐하고 있어?”
왜 이렇게 몰아세우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자꾸 행한 것 있잖아요. 행한 것 가지고 자꾸 뭐 개척교회에서 복음 전했습니다, 이런 것, 자꾸 행함 가지고 내세우거든요. 그걸 계속 환난 가지고 긁어내고 제거시켜 버리는 거예요. 지워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주신 게 없는 사람은 결국 삐져서 돌아서게 되어 있어요. 테세우스의 배에서 낡아진 판때기가 되어서 떨어져 나갑니다. 주께서 주신게 없는 사람은 결국은 그동안 종교적인 감각 감수성 가지고 그냥 버티는 거예요. ‘신께서,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좋아하시겠지.’ 계속 버티는 겁니다.
교회에 재밌는 현상이 있는데, 이게 재밌는 현상인지 슬픈 현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 중 하나가 교회에서 복음, 복음도 아니지요, 유사복음이지요, 유사복음이든 말든 하여튼 비스무리 하게 복음 전하던 목사가 은퇴하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복음이 안 들리잖아요. 거기서 뭐 하느냐 하면, 기도 모임 합니다. 기도 모임 해요.
이건 무슨 뜻입니까?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 있잖아요, 자신의 가치를 기도내용에 담는 거예요. 그러면 기도내용이 뭐냐? 자신의 역사에요. 자신의 추억입니다. ‘이거 하나님 들어주시면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해서 나중에 천국 갈게요.’ 이런 식으로 나서는 거예요. 복음도 아니지만, 유사복음이지만 그래도 들을 때는 ‘아 주께서 하셨구나.’ 그 유사복음 중의 하나가 책 이름인데 <하나님의 열심> 이런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이 나이 팔십 넘어서 은퇴했거든요. 하고 나니까 이제는 그 유사복음, 복음도 아니지만, 그 정도로 설교할 목사나 후임자가 없어요. 없으니까 교회는 되어야 되겠지요, 부동산은 유지해야 되고, 교회는 유지해야 되니까 “기도 모임 합시다.” 기도 모임 뭐예요? “주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지금 이 소리가 나와요.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우리 가정을 버리지 마옵소서, 왕왕왕, 웅성웅성웅성, 주님의 소란이 아니라 인간들의 소란, 더러운 죄인들의 소란이에요.
이 환난이라는 것, 우리는 환난을 좋아하지를 않아요. 한번 실험을 해보면 되지요. 식당에 갔는데 감자튀김을 주문했는데 스테이크가 나옵니다. 이게 주님의 방식이거든요. 감자튀김을 주문했는데 스테이크가 나와요. 그런 식당 같으면 사람들이 줄을 서겠지요.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는 그런 위험한 도박은 하지 않습니다. 감자튀김이 아니라 천국 간대도 우리는 지금 내가 망가지는 것을 내가 원치 않아요. 왜냐하면 과거에 있던 나의 가치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환난을 의도적으로 주셔서 우리를 따라오십니다. 경상도 출신의 신혼부부가 제주도 바닷가에 가서 장난을 칩니다. 그때 여자가 먼저 앞에 가지요. “날 잡아봐~라.” 하지요. 빨리 뛰지도 않아요. 슬로모션으로 해서 일부러 막 잡히려고 하는 식이죠. 그러면 경상도 남자가 “니 잡히면 죽이뿐다~!” 해서 잡는다고 쫓아가는데 또 막상 잡지도 않아요. 또 보조 맞춰서 천천히 가요.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 창세 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을 앞에 날 잡아봐라, 하고 보냅니다. 잡아 죽이뿐다, 하거든요. 잡아 죽이는 것이 그게 복이에요. 그게 성령에 포착되어 잡힌 거예요. 그걸 잡아 족치는 것, 잡혀서 죽는다는 말은 나의 과거가 다 날아가는 거예요. 나의 추억과 과거가.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잡아 죽이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죽이뿐다~!” 그거예요.
여러분이 인생 살아가면서 그런 일들을 겪을 때에, 앞에서 분노해서 여러 명 추적할 때 뭐라고 합니까? “한 놈만 잡아 죽인다!” 하잖아요. 그 한 놈이 나예요.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을 잡아 죽여버려야 돼요. 뭐 딴 사람 누구 윤석열 욕하지 말고, 이재명 욕하지 말고, 너 때문에 떨어졌다, 그러지 말고 나를 잡아 죽여야 된다고요, 나를. 내가 나의 추억을 가지고 계속 도망치고 있거든요. 인간은 자기를 제거할 마음이 없어요. 자기 추억대로 하는 거예요.
한국 살다가 캐나다 살다가 미국 살다가……,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유리판 위의 물방울이요, 물방울이 자기 딴에 “어머니, 성공하겠습니다. 캐나다 가서……” 지금 캐나다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캐나다 가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하여간 캐나다 갔다가, 미국 갔다가, 독일 갔다가……, 독일 이야기도 곤란하다. 애 낳아서 “손자 손녀 데려왔어요.” 뭐 그런 것, 백날 해야 유리판 위의 물방울이에요. 가봐야 동서남북 갈 데가 거기밖에 없잖아요. 갈 데가!
서울, 대전 찍고, 목포 찍고, 광주 뭐 어디 인생 돌아가면서 해 봐야 늘어나는 것은 자기 추억만 늘어나요. 자기 추억이에요. 자기 잘남을 부각 시키는 그런 썩어빠진 배경들이에요. 예수님 시대의 배경 아닙니다. 자기를 미화하고 자기를 잘난 체하게 하고 으샤으샤, 하게 하는 거짓된 이발소 그림들이에요. 이발소 그림, 5천 원 주면 사는 액자 그림 있잖아요. 그런 그림들.
인생이 아무리 세월을 보내서 3년 뒤에 잘한다, 5년 뒤에 잘한다 해도 그것은 유리판 위에 돌아다니는 물방울 같은 신세입니다. 거기서 뭐 고생을 직사하게 했다든지, 뭐 누가 아파서 내 인생도 조졌다, 백날 해도 수평적이에요. 거기서 거기에요. 거기서 그 유리판을 뚫는 구멍을 찾아야지요. 구멍을! 그 구멍이 뭐냐? 십자가에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기로 태어나서 끝이었습니까? 아기로 태어나서 할 말 다하고 하늘로 돌아가셨습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가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혼자 죽으신 죽음이 아니에요. 인간들이 예상 못한 다른 배경, 예수님이 죽어야 영생을 얻는 그것을 일치시키는 배경을 찾아갔는데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이야기를, 이게 신약부터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구약부터 잠시 보겠습니다.
구약 열왕기 하 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엘리사 시대인데요. 어떤 사람이 나무 하다가 쇠도끼를 물에 빠트렸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엘리사 보고, 참, 엘리사도 가지가지 일 했어요. 온갖 것 다 처리해주느라고. “내가 쇠도끼를 물에 빠트려서 잃어버렸는데, 그 도끼가 내 도끼가 아니고 빌려온 도끼인데 우째 이런 일이? 어쩌면 좋습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하여튼 뭐 이 엘리사가 신경 안 쓰는 구석이 없어요. 교회 온 전기 다 신경 쓰는 것처럼. 온갖 것 허다한 일을 다 도와줍니다. 6절 뒷부분에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했어요. 동일한 실물이에요. 동일한 사물입니다. 동일한 도끼고 동일한 나뭇가지에요.
누가 봐도 그냥 나뭇가지인데 그 나뭇가지를 던져서 그 잃어버린 보이지 않던 도끼를 떠오르게 할 때 그 도끼는 어떤 도끼냐? “쇠도끼냐?” “아니” “은도끼냐?” “아니” “금도끼냐?” “아니” 잃어버린 도끼에요. 그 도끼가 우리 자신들입니다. 엘리사 선지자 안에 예수님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배경을 보여주는 거예요. “네가 지금 21세기냐? 아니야. 예수님 당시와 동일하게 변하는 것은 없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종말이라서 시간이 지나가도 시대는 변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시대입니다. 교체, 다른 배경, 예수님이 왜 그 일을 굳이 해야 되고, 왜 유월절의 피는 흘려야 되고, 왜 우리의 행동은 과거의 더럽고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 왜 이런 것은 일체 입 다물고 묻지도 않고 왜 유월절 피만 바라볼 수밖에 없느냐?
그렇게 피만 유효하고 효과 있는 그 세계를 주께서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너 세상에서 떠돌지 말고 십자가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눈뜨고도, 그 세계를 눈 뜨고도 못 봐요. 눈 뜨고도 못 보니까 그 눈 뜨고도 못 본 세계가 열왕기하 엘리사 시대에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 된 그 이야기예요.
본인에게 치명적인 병 걸렸습니다. 문둥병자 나아만은 본인에게 병이 걸린 거예요. 남에게 병 걸린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 문둥병이 걸렸으니까 이제는 그만하면 자기가 군대장관, 국방부장관이라는 그것 포기해도 되잖아요. 자기 과거 추억은 버려도 되잖아요. 그런데 아직 정신 못 차리지요. 나 국방부장관이다, 나는 대통령 당선자다, 이러는 거예요. 이제는 이재명 이야기할 것 없어요. 끝난 거니까.
세상을 볼 줄을 모르는 겁니다. 세상 볼 줄 모르는, 눈은 떴는데 봉사인 그들의 정치적 토론과 이론이 케이블 TV마다 다 튀어나오고 신문방송마다 매일같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거기에 또 장단 맞춰서 깨춤 추고 뛰어노는 것, 이것은 또 뭐예요? 이건 또 뭡니까? 편들고 있고. 조져라, 이건 또 뭐예요?
남이 병든 것 같으면 남의 이야기인데 나아만 본인 자신이 문둥병 걸렸어요. 이것은 주님께서 “야, 네가 이 5천 명 도시락 해결해.”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말이 됩니까? 문둥병이에요. 감기 같으면 판콜 A 먹으면 돼요. 그런데 이 문둥병은 되지를 않잖아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그래서 뻗댑니다. 엘리사는 만나 주지도 않아요. 가서 자기 하인 게하시 보내서 “야, 그 사람 요단강 물에 들어가라고 해라.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해.” 왜 일곱 번이냐? 다섯 번이나 여섯 번 아니고 왜 일곱 번이냐? 그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 해도 문제가 안 돼요.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절대로 내 말 안들을 줄 알고 일곱 번 시킨 거예요.
한번 같으면 한번 에이, 하고 ‘더러워도 들어가자.’ 이렇게 하겠는데 절대로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추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주의 말 안 듣습니다. 우리는 내가 없어져야 돼요. 내가 죽어야 되지 절대로 말 듣지 않습니다. 안갑니다. 물에 안 들어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과거 추억에 의하면 우리 동네, 시리아 사람이니까요, 우리 동네 시냇물이 요단강 물보다 더 깨끗하다는 거예요. 이거 참, 아마 그때 엘리사가 그 이야기 들었겠지만 이마 이렇게 이야기했을 거예요. “뭐하니 지금! 너 뭐 해!” 오늘날 우리 보고 묻는 거예요. “너 지금 뭐 해? 너 지금 뭐 알아? 네가 주님의 배경에 대해서 알아? 십자가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어? 어디서 네가 아는 척하고 있느냐!”
하인들이 말렸어요. “장관님, 그러지 마시고요. 이왕 왔는데, 물이 더러운 것은 아는데요.” 요단강이 지금도 더러워요. 더러운데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나아만 장군은 옛날의 나아만 장군은 이제 없습니다. 새로운 배경, 모나리자의 새로운 배경을 가진 거예요. 여러분의 직업과 성격 성질, 그것은 무늬에 불과합니다. 원단은 어디서 왔을까요? 원단은 아담에서 온 거예요. 더러운 원단이 더러운 얼룩무늬를 낳은 거예요.
주께서 원단 치우고 예수님의 원단, 여러분이 예수님의 것만 새겨져 있는 원단으로 여러분을 바꿔주는 겁니다. 방금 열왕기하 5장 했지요. 열왕기하 4장 40절부터 4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38절부터 나오는데 길기 때문에 짧게 줄이면 이렇습니다. 38절에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그래서 국을 끓이는데 39-40절에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이 대목이 나옵니다.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독이 있을 때 41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 독이 없어졌어요. 엘리사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구원을 안 주지요. 십자가에 같이 죽자고 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처음부터 선지 생도들에게 독이 없는 참외를 주는 것이 아니고 독이 있는 것을 먹게 해놓고 배는 고픈데 못 먹지요. 못 먹으면 굶어 죽어야 되겠지요. “그래 굶어 죽어라.” 네가 굶어 죽는 거나 안 굶어죽고 백 년 동안 사는 것이나 둘 다 이미 죽은 거라는 말이에요. 중간에 뭔가 매치가 되어야 돼요. 중간에 뭔가 만나야 돼요.
해독의 가루, 이 해독가루가 요새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엘리사의 해독가루 같으면 장사 좀 될 텐데요, 그 해독의 가루가 와서 나는 이미 죽었다는 그 사실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걸 되풀이시키고 반복시키는 그런 새로운 주님의 추억으로 바뀐 인생이 되어야 돼요.
죽어도 마땅한데 살아 있으니까 무슨 불평이 있고 불만이 있습니까? 주님한테 “내 몸이 왜 아픕니까?” “죽으라고 있는 거다. 뭐 할 말 있어?” “없습니다.” “그냥 감사해라” 이런 거지요. 죽어도 상관없는데 아프다고 난리, 뭐 가난하다고 난리.
십자가는 이게 하수구 구멍의 망 같은 겁니다, 망. 하수구 구멍은 그 하수구에 찌꺼기가 빠지지 않게 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고요, 안에 들어있는 벌레가 올라오는 것도 막는 기능이 있어요. 바로 이 세상에서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유리알 속에 몸부림치고 맘 부림치고 난리도 아니에요, 뭐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저거 하고 이거 하고, 뭐 온갖 것 다 하거든요, 그 온갖 것 다 해도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폭 빠지게 만듭니다. 폭 빠지게 만드니까 거기에는 바로 주님이 “이제 오냐.” 하고 반기지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묻기를 “목사님, 그러면 그 하수구 구멍, 십자가 어디서 발견합니까? 어디서,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묻고 싶어요. 저도 그 물음 생각하다가 아침에 운동하면서 그걸 깨달았어요. 꽃은 아무 데나 핀다는 거예요. 꽃은 인간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도 피어납니다. 내가 꽃 피라고 주목하지 않는 곳에도 꽃이 펴요. 특히 꽃의 특징은 뭐냐? 권력에 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푸틴의 나라에도 꽃은 핍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 빼앗긴 들에도 산에 들에 진달래는 피어요. 제가 사진을 찍었어요. 이 뒤쪽으로 가면 목단 핍니다. 쉬는 시간에 운동하는데 가 보세요. 목단 피어 있어요. 생으로 피어 있습니다. 그리고 꽃은 권력에 매이지 않지만 더 감사한 것은 권력에 휘둘리거나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지듯이 우리 인생도, 송 해처럼 백 년 살려고 하지 마세요. 내일 죽을지도 몰라요. 그냥 내가 죽는다, 하지 말고 주께서 없는 데서 피어나게 한 꽃이 이제는 진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제가 서울의 목사님, 오광록 목사님이라고 전에 같이 성경공부 참석했던 그 목사님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인지 잔칫집인지 분간이 안 돼요. 좋~다고. 저는 거들었지요, 뭐. 분위기 봐서.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셨습니다. 지옥에서.” 사모님보고 “참 비겁하게 남편도 참 못된 남편입니다. 어떻게 사모님 빼놓고 혼자 도망을 칠 수가 있어요? 사모님은 고생 더 하라는 말인지? 주께서 하셨겠지요.” 어제 그 장례식장에서 가슴 아픈 일은 거기에 우산 놔두고 왔다는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꽃입니다. 성령이 와서 꽃 피게 한 거예요. 내가 나를 지목하지 않는 꽃, 낯선 꽃, 내가 예상하지 않는 꽃이 피었습니다. 너의 뒷 배경은 예수님의 말씀의 시대라는 것, 십자가만 유효하고 유월절 피만이 유일한 그 시대의 배경에 합치되는 것, “네가 환난 가운데 기뻐하라.” 재림의 때가 되면 그 과거 다 옛날이야기처럼 그때는 주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하신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내 할 일만 생각하고 자기의 과거의 것만 보충하고 보완하는데 정신 팔려서 쓸데없는 울부짖음으로 주께 원망했고 달려든 저희들, 이제는 오히려 그렇게 된 일 자체가 주님께서 낯선 기쁨과 감사를 제공하기 위한 주의 필요했던 과정이고 절차인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