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시공간
2022년 4월 3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8-9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인간에게 감히(?) 형벌을 언급한다는 것은 참으로 도발적인 언사요 언동처럼 느껴집니다.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을 지적질하는 겁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됩니다. 내부에서 고히 잠자고 있는 분노의 층을 자극하는 바가 됩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형벌’이란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만 수긍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형벌이란, 내가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하여 받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행군하는 어느 군사가 무릎이 아파서 그냥 땅을 주저앉았습니다. 이것은 본 지휘관이 군인의 충성심을 들먹이면서 각양 위협과 위협을 하면 일어나서 계속 행군하기를 제촉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위협과 협박이 무서워도 무릎 자체가 망가져버렸기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 앞에서 인간의 형편이 이러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에게 무서운 지옥불이 기다린다고 해도 이 형벌에서 벗어날 능력이 인간에게는 아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형벌을 자초하는 본성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 의미를 매일같이 쌓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무의미하지 않지 않고 의미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벌받을 나쁜짓을 한 경우에만 지옥간다고 여깁니다. 사도가 제시한 기준 말고 다른 기준으로 지옥형벌이 주어진다고 여기고 싶은 겁니다.
사람은 주변사람 없이는 못삽니다. 어릴 때부터 그들의 도움을 받고 생존해 왔습니다. 그들의 보살힘을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기대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정 나누고 살아온 가족이나 식구나 일가친척을 배려를 못본척없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 하므로서 인간은 비로소 험난 세상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복종치 않는다는 절대적 원칙을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이 기준을 가지고 오랫동안 사랑을 주고 받아온 관계 속에서 단호하게 내세우겠습니까? 그들에 의해서 내침을 당하고 버림받을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소위 하나님 알고 복음 순종한다는 자들이 사도의 이러한 극단적인 발언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가짜요 거짓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0에 보면, 형벌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지옥불에 악마와 더불어 들어가는 자 중에는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죽이 맞는 겁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를 선호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인간이 잘 만하면 천국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마저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저주 형벌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3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속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예수님도 저주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0:22-23에서는 이것은 ‘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예수님께서 저주의 잔을 마시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도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요한복음 9:1-2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제자들은 저 소경과 같은 않고 멀쩡하니 지독한 죄를 안 지은 자로 분류된다고 여긴겁니다.
즉 자신은 형벌받을 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형벌에 대해서 이미 예수님이 오셔서 위치를 잡아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형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거짓되어 있기에 이 예수님으로 인한 복음의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에 거대한 두 천체가 충돌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우주의 시간과 공간은 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력이란 두 물체가 서로 당기는 힘이 아니라 굴곡진 시공간으로 인하여 입체적으로 두 물체가 가까이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넓은 비닐랩 안에 먼저 무거운 참치캔을 놓게 되면 비닐랩 한가운데서 움푹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다 방울토마도는 던지면 자동적으로 방울 토마도는 참치켄 곁에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형벌받아야 될 인간들지만 예수님께서 새로 설정하신 형벌의 시공간에 의해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를 발견하고서는 자동적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당하신 억울함을 발생시키십니다. 사무엘하 11장에서 다윗은 고의로 우리아 장군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습니다.
우리가 장군은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채 위험하고 무모한 한 지역으로 가서 전사하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다윗 자신은 형벌에서는 멀어지고 자신이 사는데 유리한 형편에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리고 죽은 우리아 장군에게 일어난 일을 근거로 다윗의 죄가 노출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마치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 일을 가지고 거짓이 아닌 진실된 인간 모습을 발견케 하는 겁니다. 진실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
35)
나에게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골치꺼리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적과 기대와 희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인간은 십자가 복음 앞에서 허무함을 알기에 다음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 9: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잘해 보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복음의 시공간)22040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8-9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사도바울이 한 이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는, 사력을 다하여서 반박성명을 여러분이 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이라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든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러한 사도바울의 주장은 잠자고 있던 우리의 기분을 싹 망치게 만들고 고요했던 우리의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형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을 때 받아야 형벌의 정당성이 보장이 됩니다. 인정을 할 수가 있어요. “예, 내가 잘못된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소에 착실하게 바르게 살려고 상당히 노력을 많이 하잖아요. 내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나쁜 짓 하지 않고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오늘 사도바울이 제시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이게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에게 형벌을 주신다면 여러분 식구부터 가까운 일가친척을 한번 죽 이렇게 한번 살펴보세요. 형벌 안 받을 자가 있는가요? 그들은 나름대로의 수입도 쏠쏠하고 나름대로 인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인간인데 사도바울의 이 기준에 의하면 그들은 지금 형벌 받고 있는 중이고 형벌,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일가친척, 가족, 특히 고3, “교회 나오지 마라. 대학 합격하면 그때 나오너라.” 우리는 일가친척이나 가족 특히 내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편애적인지 그저 ‘인생이란 남에게 나쁜 소리 안 하고 나쁜 짓 안 하고 착하게 살면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다.’ 우리는 얼마나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삶의 기준을 우리가 전해 왔었습니까?
왜 전하느냐? 그들이 나의 행복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있음으로써 내가 사는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 없으면 내가 외롭기 때문에 더불어 살고 싶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대로 우리는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해 왔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복종치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도리어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의 행복을 앞장서서 보장해주고 싶은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평화가 사도바울의 이 아주 극단적인 발언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그 형벌이 9절에 나옵니다.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끝!
자 이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이제는 큰집에는 다 갔고 식구들, 일가친척들 다 모이기가 힘듭니다. 그들은 하나님 모르는데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있고요, 그들은 복음에 복종치 않는 것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들과 더불어서 합세하지 못해서 아예 안달이 난 그것이 어쩌면 우리 모습 아닌가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말이 맞는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말이 맞는지, 그리고 우리는 중간에 서서 어느 편에 속하든지 본인의 위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상 쪽을 부정하든지 아니면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하여 사도바울의 이러한 단정적인 발언에 대해서 반박을 하든지, 그렇게 뭔가 성의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뭔가 태도를 분명히 해야 돼요.
그런데 사도바울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어느 누가 나에게 심판이라든지 형벌, 이런 이야기만 탁 던져도 우리는 인생 살면서 제일 싫어하는 게 남에게 지적질당하는 거예요. 지적질당하는 것, 이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내가 나쁘다 할지라도 좋게좋게 이야기해야지 인정사정없이 단호하게 지적질하게 되면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 형벌 받아.” 자체가 우리 분노를 자극시키는 발언이 되기 때문에 이런 말은 교회 안에서 ‘쉿! 함부로 하지 말자’ 그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사도바울을 막습니다. 교회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못한다, 정도가 아니라 교회가 나서서, 사도바울의 말은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에 옐로카드, “사도바울 당신 경고입니다.” 그런 쪽으로, 그것도 한 개인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교회 전체가, 목사, 장로, 집사, 교회 전체가 사도바울의 말에 이의 걸고 거기에 반발하고 대드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하는데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취지를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왜 모르냐 하면, 사도바울이 형벌을 준다고 한 말은, 네가 행할 수 없는 것에 의해서 형벌 받는다는 뜻이에요.
네가 잘만 하게 되면, 네가 잘만 노력하게 되면 형벌 면제해준다, 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것은, 이것은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형벌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노력하면 뭔가 형벌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형벌이 주어질 수밖에 없는 그 근거가 예수님의 복음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올 때 누가 알아봤습니까? 제자들이 알아봤습니까? 인간의 타고난 아담의 속성으로서는 예수님을 알아볼, 예수님 말을 들을 수 있는 위인이 없어요. 따라서 형벌이라 하는 것은 모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같은 겁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간단히 이야기하게 되면, 형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불태워버리고 굳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세우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딱 이겁니다. 내가 거기 있다가 떠났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거기 있다가, 인간들 속에 있다가 떠났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자동 지옥이고 자동형벌이에요.
그런데 사람은 여기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좀, 유도리 좀 없습니까? 이 기준을 좀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형벌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상식, 선악체계에 의하면 나쁜 짓 했을 경우에 형벌 받는다. 그런데 별로 내가 나쁜 짓 한 적이 없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형벌이 주어진다면 이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자기 생각인데 예수님 오셔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두고 보게 되면, 인간의 잘못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무의미한데 의미 없는 곳에 인간은 자꾸 거기에 의미를 심어 놓은 게 이게 이제 형벌 받을 수밖에 없도록 사달이 난 겁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 주고, 자기 교회 나옴에 의미 주고, 자기 예수 믿음에 의미 주고. 그 의미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어떤 자기가 목적과 기대와 희망, 이런 것을 자꾸 만들어내요. 이게 바로 인간들이 사도바울의 이 기준에 대해서 반격하는 무기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자신이 거짓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예요. 거짓이라는 것. 그래서 주께서 영원한 멸망, 형벌을 받는다 했는데 이 형벌 받는 자, 형벌 받는 자가 어떤 자들인지를 우리가 미리 한번 볼 필요가 있어요.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형벌 받는 자가 나오는데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밤낮, 늘, 항상, 한시도, 쉬는 시간이 1초도 없이 늘 괴로움만 받는 그 유황불, 지옥의 유황불이 인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누가 있느냐? 거짓 선지자가 있어요. 이 거짓 선지자가 이 땅에서 활동했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짓말만 믿어요. 그게 서로 죽이 맞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거짓말만 믿어요. “당신은 한평생 살아도 아무 의미 없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이 말을 절대로 안 믿습니다. “당신이 한평생 노력한 그만큼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로 변했습니다.” 이 거짓말을 믿어요. 이 거짓말을.
이게 뭐냐?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인간은 자기에게 자꾸 의미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자기 가치 있는 것이 자꾸 쌓이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가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 거짓에 대해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거든요. 진리가 되셔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주님께서는 인간을 통해 그 진리를 이렇게 나타냅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건 뭐냐 하면, 인간에게 육신이 있다는 자체가 죄가 터져 나오는 아지트고 그 아지트가 바로 육신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서 육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죄가 나오는 겁니다. 그 속에, 만약에 후지산 분화구가 있다면 그 분화구 속에, 죄만 들끓는 분화구속에 우리 예수님이 뛰어든 거예요.
그게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형벌이라 하는 것은 나쁜 짓 해서,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하고 나쁜 맘 먹어서 형벌을 받는 게 아니고요, 그것은 불교에서, 팔정도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인간은 육신이……, 육신 있습니까? 육신이 있으면 그 자체가 형벌이, 지옥 불이 오지 않을 수가 없도록 거기에 쏠리게 되어 있어요.
설탕이 있는데, 꿀 발라놨는데 벌이 달려들지요. 죄 냄새를 피우는데 벌이 안 올 수가 있어요? 형벌이 주어지지요. 제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어떤 소경이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질문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거짓되고 무식한지를 다 토하고 말았어요.
“예수님! 스승님!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질문을 그렇게 했어요. “저 사람이 소경된 것, 불편하게 저주받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사람 죄 때문입니까, 조상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상대로 객관식 문제를 내는 거예요. 정답은 딱 둘 중 하나라는 겁니다. 조상 죄 아니면 자기 죄.
그 제자들이 그런 질문할 때 예수님께서 소경 된 이 육신에 합세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도저히 몰랐던 거예요. 왜냐면 제자들은 자기들 눈이 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소경? 너도 소경. 저 사람 소경? 너 소경. 저 사람 죄 때문에? 제자들보고, 네 죄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 사실, 인간들이 너무나 거짓되어서 자기가 거짓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섞이면 안 되는, 섞일 수 없는 그 섞임을 스스로 감내하면서 이 죄 속에 들어오신 거예요. 형벌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보면, 예수님이 스스로 형벌을 담당하시는 그것을 우리 한국말로 딱 한자로 표현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잔’ 이걸 길게 이야기하면 ‘내가 마시려는 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쓴 잔이에요 쓴잔. 십자가지요. 인간들 모든 본성은 될 수 있는 대로 형벌을 피하기위해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서, 이것은 훌륭하신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 보시기에도 ‘아, 쟤한테는 진짜 벌주면 안 돼. 너무 착해.’ 그렇게 내신성적을 좋게 받아가지고 평온한 인생 사는 게 목적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형벌이라는, 지옥 불이라는 형벌은 자기하고 별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거짓인데 그게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연적인 본심으로 그게 자리 잡았어요. 주님께서 쓴잔을 마심으로써 하나님의 형벌의 위치를 정해버립니다. “너희들이 받을 형벌에 내가 참여할게.”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이 땅에 들어온 자는, 심지어 하나님 본인이라도 이 땅에 들어온 자는 형벌을 피할 길이 없는 세상으로 주께서는 위치, 자리를 잡아놨어요.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셔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형벌이라는 것을 새롭게 이 땅에 규정함으로써 형벌을 피하려 하는 자가 곧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가 되어버렸어요. 오늘 우리가 봤던 본문에 보면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 복음에 복종치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면, 형벌을 피하려고 하는 자는 복종치 아니한 자에요. 왜 그런 짓 하느냐? 인간에게는 자기의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 희망은 뭐냐 하면, 나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주님은 형벌 받았는데 무슨 통뼈입니까? 주님마저 형벌 받았는데 지는 왜 면제되려는 그러한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게 거짓이에요. 그것도 집단적으로 거짓에 대해서 전부 다 같이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게 교회라는 이름이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회도 우리를 보호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형벌을 주신다는 것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어떤 군인이 군대 생활하다가 무릎을 다쳤어요. 그래서 무릎을 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관이 있습니다. 군에서 보통 상관이라는 것은 소대장이나 중대장, 이 사람들은 특히 자기 진급에 온 마음이 다 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 대열에서 낙오자가 생기니까 부대 점수가 깎이잖아요.
그때 상관이 막 협박 공갈합니다. 군인정신으로 일어나라, 이런 식으로 협박 공갈하지요. 어떻게 협박하는가 들어보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에게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 백날 해도 모든 인간들이 무릎이 아픈데요? 일어설 수가 없는데요? 협박 공갈하면 벌떡 일어나면 일어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는 형벌 받는다는 것을 입으로 아무리 설교하고, 그걸 강의하고 아무리 집어넣어도 육신이, 무릎이 시려서요. 그래서 그거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복음 외친다고 구원받은 자도 아니에요.
속지 마세요. 우리 교회 교인들 속을 사람 아무도 없지만. 성경 달달 외우고 여호와의 증인처럼 달달 외워도 그거 구원받은 것 아니에요. 구원받은 사람은 성경 말씀 아무리 알아도 그리고 외워도 거기에 대한 실천력은 나한테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이게 구원이 얼마나 드문지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겨우’ 흔하지 않다 그 말이에요.
겨우, ‘겨우’에요. ‘오! 구원받았네. 저렇게 신기할 수가!’ 그렇게 되어야 돼요. 무릎이 주저앉는데 뭘 구보를 합니까? 어떻게 운동을 해요? 무릎이 주저앉는데, 능력이 없는데요. 주의 말씀이 요구하는 그 수준에 도달하는 능력 자체를 이미 상실했는데요 형벌이 곧 우리가 가야 될 마땅한 우리의 본질입니다. 형벌 받는 그것이 어떻게 기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무슨 소리 하든 간에 형벌이 우리 몫이에요.
우리 손녀가 와서 집에 같이 있는데 내가 설교 준비하기 위해서 이면지를 잘라서 쌓아놓고 통을 마련해서 생각나는 대로 메모해서 넣어서 그 양철통 안에 담겨 있어요. 하루는 보니까 메모가 많아졌어요. 왜 이렇게 많지 싶었는데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손녀 지가 아무 의미도 없는, 무의미한 거예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메모해서 이 설교 통에 다 담아 놓았어요.
문제는 그 손녀가 뭘 모르느냐 하면, 그 설교 메모 통을 내가 사용한다는 사실, 용도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예요. 내가 다 뽑아냅니다. 무의미한 것을 다 뽑아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필요 없는 것은 다 메모통에서 빼내듯이 주님이 위치 정해놓은 그 형벌이 마땅함,에 그 주님의 설교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다 제켜버립니다. 다 뽑아버립니다. 인간들은 관심사가 자기한테 관심 있어요. 자기한테 관심 있는 이유는, 아주 어렵게 설명하겠습니다, 어렵게 설명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은 내가 나라고 결정짓는 근거를 기존의 아담의 동일성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나를 결정짓고 확정 짓는 근거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나 자신이 나의 근거를 확정 짓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동질성의 근거를 예수님의 복음으로 거기서 재형성하게 만들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내가 나라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자신이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된 판단으로 내가 나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에 대구 신암동에 차 타고 가는데 우리 어머니를 봤어요.
위에 그 짙은 초록색 스웨터를 입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4월에도 스웨터를 입었으니까요. 그 스웨터를 입고 밑에는 까만 바지를 입었고요. 허리는 앞으로 15도쯤 구부정하게 해서 아주 부리나케 걸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키가 딱 그만하고 머리 모양도 똑같아요. 아이고, 어머니를 봤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모습은 똑같아요. 그러나 동일시할 수가 없어요. 동일시, 같은 분이 아니겠지요.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다는 근거를 어디서 찾는가? 내가 동일하다고 봤기 때문에 동일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세월 가면 만약에 “너는 왜 천국 가야 돼?” 하면 내가 나를 평가하고 내가 보기에 “나는 바르게 살았거든요.” 이렇게 주장한다는 말이지요. “네가 바르게 살았다는 근거를 누가 주장하는데?” “제가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은 내가 알지요. 한 번 외워볼까요?”
그런데 복음에 의하면 복종치 않는 자에게는,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거짓이기 때문에 예수님만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그 내용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어떤 인간, 심지어 제자들일지라도 스스로 자기가 참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들춰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복음에 복종한다는 말은 ‘저는 뭘 해도 뭘 생각해도 거짓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동일성은 이것은 엉터리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이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18년도에 나온 영화가 있어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입니다.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제목을 대하면서 저는 복음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라는 노인을 필요치 않는다. 나는 너 같은 노인은 필요 없어. 우리가 그렇게 처지를 바꿔서 생각할 줄 알아야 돼요. 노인 입장에서 우리를 위한 나라가 왜 없느냐? 나라 입장에서 ‘그냥 코로나로 죽어, 그냥! 하루에 백 명씩 죽어. 고맙다, 코로나. 그러니까 그만 나라를 위해서 죽어줘. 옛날에 많이 살았잖아. 나라는 너 같은 노인이 필요치 않아.’
왜 노인이 입장 바꿔서 그렇게 생각 못 하느냐는 말이지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영화 내용은 간단하게 해서 이런 거예요. 무기력하고 늙은 보안관이 있는데 그 보안관이 옛날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텍사스 지역에서 근무하는데 친구들하고 옛날 이야기하면서 “요즘 젊은애들 하는 모든 것이 참 한탄스럽다.” “그렇지! 요즘 젊은 애들 지맘대로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늙은 보안관이 일하는 지역에서 이상한 사건이 터져요. 악하고 악한, 인정사정없는 어떤 살인자가 사람을 그냥 소 도살하듯이 재미 삼아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겁니다. 그때 그 범인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동전을 던져서 기분 따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젊은 사람한테는 옛날 미국이 미국답게 질서와 통제가 있던 그런 미국이 아니라 자기 기분 따라 살아가는, 마치 고생 안 해도 나라가 다 돌아가는 것처럼 자기만 생각하고 기분 따라 살아가는 그런 세태에 대해서 그 노인네가 걱정을 하는 겁니다.
그 범인은 아예 통제가 안 되지요. 젊은 보안관까지 죽여버려요. ‘왜? 내 맘대로다!’ 이런 식으로 했어요. 범인을 못잡 지요. 포기한 거예요, 그냥. 열심히 국가의 안녕과 법질서를 위해서 살아왔던 자기 시대가 끝나버린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 늙은 보안관은 은퇴를 결심하고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어요. 그래서 보니까 아버지 세대를 자기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내가 ‘이 나라가 잘 되어야 되고 통제되어야 되고 범죄가 없어야 된다.’고 여기는 이 자체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이게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극악무도한 그 나쁜 살인자는 무슨 일이든 사람 죽일 때 우연에 맡겨서 하는 거예요. 마지막까지 그 살인자는 체포가 안되었어요. 어떻게 되었는가? 운전하고 가다가 우연히 옆에서 차가 박는 바람에 죽어 버렸어요. 그렇게 죽는 게 영화의 끝이에요.
그 노인의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세대를 좋은 세상으로 되고자 시도하는 그 모습이 내가 보기에, 내 동일성으로 보기에 얼마나 대견하고 착한지 자기의 착함에 자기가 매료되는 겁니다. 요 근래 사건 하나 있었지요. 어떤 계곡에 남편을 떠밀어 죽였다는 31살 먹은 새댁과 그녀의 남자친구. 보험금 8억 노리고 죽였다는 그 사건 있잖아요.
그 사건 보니까 처음에 복어 먹여서 죽이려고 복어 피를 먹이려고 했는데 그것도 실패했고, 타이어 펑크 내서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도 실패하고, 또 어디서 물에 빠트렸는데 그것도 실패하고요. 사람을 왜 그렇게 못 죽이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성공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젊은 사람이 이 세태 속에서 배우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아니하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겁니다. 그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 살고 싶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게 바로 복음을 복종치 않는 태도입니다.
살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것, 그게 복음에 복종치 않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요, 모든 사람이! 그러니까 구원받는 게 ‘겨우’지요, 겨우!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 이게 얼마나 극단적인 발언으로 들리겠어요. 이 세상에서, 만약에 교회에서 이걸 그대로 하면 교인들 다 떠나고 말지요.
주께서 형벌을 주시는 위치를 잡기 위해서 주께서 하신 것은 환경입니다. 인간은 본인이 착실하게 살아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요. 이 환경 자체를 복음적 환경,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형벌 자체로 보는 그 복음적 환경에 의해서 거기서 복음에 복종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거기서 생산해내고 만들어내는 새로운 환경을 주께서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을 이제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2020년도에 칠레나 여러 천문대에서 중력파라는 것을 발견했어요. 중력파라는 것은 중력이, 시공간이 미세하게 떨리는 그것을 포착하는데 그 중력이 떨리는 것은 시공간 틀 자체가 틀어졌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뉴턴의 만유인력에 의하면, 두 물체가 있으면 두 물체가 서로 당기는 힘이라고 그동안 아인슈타인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당기는 힘이 아니고요, 비닐 랩 하나 준비하고 거기다가 참치 캔 하고 방울 토마토 준비해 보세요.
참치캔을 비닐 랩에 놓으면 무게 때문에 움푹 내려가잖아요. 거기에 조그만 방울 토마토 놓으면 놓인 방울토마토가 거기 놓였던 참치 캔 옆에 턱 붙게 되어 있어요. 그게 만유인력이에요. 이것은 자기가 붙고 싶어서가 아니라 랩, 비닐 랩이라는 시공간이 굴곡이 생겨서 자연적으로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쏠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복음을 복종하는 자, 하나님을 아는 자, 이것은 주님께서 새로운 시공간을 마련하게 되면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알게 만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착실히 살았습니다, 교회 나왔습니다, 가 아니라 “주께서 만드신 환경이 복음적 환경이 나로 하여금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온다 그 말이지요. 이게 사도바울이 전하는 그 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살고자 하는지, 우리는 살면 그냥 삽니까? 기대와 희망과 목적 이걸 늘 새롭게 만들지 아니하면 살 기쁨도 없잖아요. 기쁨도! 쉽게 말해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우리의 골칫거리에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골칫거리에요. 나한테 자꾸 목적과 기대와 희망을 가지니까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복음을 의식해야 되는데 우리는 눈만 뜨면 누구를 의식하느냐? 나를 의식해요. ‘잘 되어야 될 텐데…….’ 스스로 세뇌를 주는 거예요. 오늘도 바르게 살아, 힘내라, 파이팅,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거짓된 것이 거짓된 것을 보고 파이팅, 외치는.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우리가 복음적 시공간에 의해서 주님의 복음 형성에 참여된 자로서 구원되느냐? 그것은 바로 예를 들면 우리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4, 15절에 보면,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하라 하였더라.”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다윗은 우리아 장군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였던 그 암몬 성이 지금 요르단에 유적지가 되어 있습니다. 거기 가면 안내원이 “다윗이 우리아 장군을 죽게 한 성입니다.”라고 알려줘요.
다윗이 우리아 장군을 의도적으로 죽게 만든 이유가, 그것은 우리아 장군에게 어떤 악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정당성, 자기의 의로움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희생물이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이게 아담에서 내려온 본성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는 악하기 싫어요. 선하고 싶어요.
그러나 인간이 자기가 정당하고 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기의 악함을 알고 있는 자를 제거시켜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물론 칼 들고 뭐 누구 계곡에 빠트리는 공격적인 그런 것도 있지만 마음속으로라도 ‘죽어버려라. 인간아!’ 이런 거요. ‘제발 좀 없어져 주면 안 돼? 내 눈앞에서. 좀 사라져줘.’ 그런 거요.
다윗에 있어서 우리아가 눈엣가시가 되었는데 우리아는 그 사실을 몰라요. 그러니까 성도란 뭐냐? 최초의 성도라 할 수 있는, 성도다움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전했던 분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라고 있을 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그러면 두 개 다 해야 됩니까? 하나님도 알아야 되고 복음도 순종해야 되고 그 둘 다를 해야 되는데 만약에 하나님은 아는데 복음에 순종하지 않을 경우에도 과연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50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따로 일하고 예수님 따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일을 다 일임을 해줬어요.
모든 일을 다 일임했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다른 하나님 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은 아시겠지요. 꿈에 계시받았습니다, 기도해 응답받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지요. 기도했더니 머리가 아팠는데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내 기도에 아버지 하나님이 응답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교회는 차고 넘쳐요.
그 소리 듣고 우리는 얼마나 기가 죽었습니까? ‘하나님은 뭐하시노? 나한테는 짜릿한 그런 것 안 주시고 뭐하시노? 하나님 살아 있으면 좀 주셔야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한테는 그런 기적들을 안 주시는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들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형벌 받도록 주신 거예요. 복음을 복종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 복종하는 대신 하나님께 기적 받는 걸로 대체합시다, 하나님.’ 이렇게 나온 거예요. ‘하나님께 능력 받은 걸로 십자가 아는 걸 대체하겠습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 죄인된 그것은 면제시켜 달라는 심보가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교회 나올 때 목적이 뭐냐? 내가 천당 가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본인에게 목적이 있어요. 어떤 목적, 기대, 소망이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이 쓴잔을 마시든지 그것은 모르겠고 내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계속 동일한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천국까지 보내느냐, 온통 정신을 거기에 파는 거예요. 맨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느냐, 이런 식으로, 나를 위한 천국은 왜 없겠느냐, 이런 식이에요.
복음이라는 것은 나 외에, 예수님 외에 그동안 하나님 제대로 안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게 복음입니다.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신 시공간은 예수님이 오셔야 그 새로운 환경이 마련되어서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 십자가 쪽으로 그러니까 참치 캔 쪽으로 오는 방울 토마토입니다.
십자가 쪽으로만 오게 하는 그 영은 예수님의 마음 외에는 없어요. 성령은 뭐냐?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깔아놓은 앱입니다. 그게 연락이 돼요. 그 앱을 깔아야 연락이 돼요. 앱을 안 깔면 연락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무엘하 11장에 우리아는 아무 영문도 모르면서 점점 더 형벌의 자리, 저주의 자리, 멸망의 자리, 죽음의 자리로 가는 겁니다.
우리아 장군이 죽음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다윗은 자기가 사는데 보다 유리해졌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동질성은 멀쩡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마음 우리의 본심입니다. 우리의 본심이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 타인이 있는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그래서 밀어붙이는데 다윗의 입장에서는 형벌은 내게서 멀어지고 형벌은 우리아한테 가깝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유명한 이름이 나와요. 나단 선지자. 우리아가 하나님과 한패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우리아가 당했던 그 사지로 가는 그 무서운 저주 형벌, 우리아 쪽에서 받았고 그 받은 것이 형벌이 자리 잡은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자리 잡은 형벌입니다.
그 형벌을 누가 유발시키느냐, 를 그 형벌이 드디어 범인을 색출하러 갑니다. 이것이 뭐냐?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는 형벌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받았던, 예수님이 받았던 형벌을 이제는 네 몫으로 내가 되돌려 줄게.’ 이 작업을 주께서는 복음의 이름으로 실행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일가친척 가운데서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막 넘어가지 마세요. “아이고, 우리 형님은 복음은 모르는데 인간성이 얼마나 좋은지.” 인간성 좋아서 지옥 가는 거예요. 인간성 좋은 그게 저주받은 거예요. “우리 이모님은 교회 하나님은 아는데 이상하게 복음은 몰라.”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복음 모르면 하나님 모르는 겁니다.
일단 하나님 알고 복음 추가 들어갑니다, 추가밥이요, 그런 것 없어요. 시작을, 하나님 알고 복음을 추가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모르면 내가 알던 하나님은, 내가 믿던 거짓된 하나님이에요 그게. 시공간이 나 중심 아닙니다. 새로운 시공간이에요.
질량이 없는 빛도 그 뒤틀리는 시공간 가운데서는 이게 휘어지기 마련입니다. 2020년도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중성자별과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그들의 궤도가 요만큼 비틀어지니까 그 궤도의 압력을 전자기파로 끄집어내 버리면 그게 계기판에 표시가 되거든요. 아주 미세하나마 시공간이 뒤틀렸음을 발견한 겁니다. 그걸 중력파로 하는 거예요.
그 중력파를, 이 땅 자체가 형벌 받고 있는 지옥이라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주님께서는 수시로 우리를 억울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걸 감지하도록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기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옥 같은 이 세상 살면서 기뻐하시는 거예요.
우리아 장군이 받았던 그것을 다윗에게 되돌려 줍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운송하지요. 운반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라고 하면서 “당신이 바로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 한 거예요. 그 나단 선지자, 하나님의 종 선지자, 거짓선지자 아니에요, 진짜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당신의 정당성과 당신의 그 의로움과 당신의 우수함을 위해서 누군가 희생되었으니까 당신 때문에 희생되었던 그 우리아장군이 받았던 형벌을 이제 다윗 당신 이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전할 때에 다윗은 아주 깔끔하게 그걸 인정해요.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짓된 나에서 내가 거짓됨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어미의 모친의 죄에서 대대로 아담의 죄부터 내가 죄악된 지옥 같은 시공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죄가 나 위주의 인생관이 나올 수밖에 없었음을 깔끔하게 인정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필요 없다는 말은, 제사와 번제를 받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상한 심령,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차이남, 평소에 태어날 때 나는 내가 잘났다고 여겼는데 약간의 비틀어짐, 내가 잘났다고 우기는 이것이 바로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말하고 있는 것인지를, 그걸 발견하는 그 비틀어짐, 그것이 바로 성도의 즐거움이요 기쁨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다니엘 4장에 보면 거기 느부갓네살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4장 34절인데요. 자기가 다니엘의 예언대로 짐승이 되어서 7년 동안 야인 생활 하면서 느낀 점이 이겁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자기의식 할 필요 없어요. “하나님, 제가 바르게 살겠습니다.” 주께서 “바르게 살지 말고 그냥 사라져. 그냥 사라져!” “잘해보겠습니다.” “잘하지 말고 그냥 사라져 줘.”
그러면 사라질 때 어떻게 사라지느냐? 전도서 5장 18, 19절에 그게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니까 이제 코로나 거리 두기도 풀렸으니까 인천공항 가서 해외여행 가야지요. 이제 크루즈여행 가야 된다니까요!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전도서 9장 9절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포도주 마시면서. 7절에 포도주 이야기가 나오지요.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찌어다.” 포도주 마시면서 즐겁게 살아라.
이 전도서 5장 이야기나 9장 이야기를 처음부터 했으면 큰일날 뻔 했어요. 자기가 뭐 즐겁게 살 권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에게 인간은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내일 보장 없습니다. 우리가 궁리하는 것은 이 얼마 되지 않지만 이 몇 푼 가지고 어떻게 즐겁게 사느냐? 이제 대구 외곽 순환도로도 뚫어놨겠다. 통행료 1400원 내고 즐겁게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여행하는 거지요.
여러분의 직장이나 가정에서 어떻게 살 것만 연구하세요. 어차피 지옥에서 주님의 형벌속에 들어간 자는 이미 주님의 형벌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에 주의 은혜가 임한 거예요.
주께서 앱을 깔아서 너는 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가 연구할 것은 치킨 먹고 어떻게 맛있게, 즐겁게 사는지, 감사하면서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것도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도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고 평생을 거짓되게 살아오면서 마귀한테 속아서 이게 진짜 내 자신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자신을 의식하지 말고 복음의 동질성, 복음에 근거를 둔 복음의 연속성만 우리 몸에서 즐겁게 튀어나오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