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재림은 세상 교체 작업입니다. 기존의 지나온 모든 시간들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의 때의 배경에 맞추기 위해서 인간의 과거 추억을 예수님의 추억으로 바꾸십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의 과거 추억을 제거해 나갑니다. 따라서 성도도 이런 하나님의 일에 맞추어서 자발적으로 이 세상 자체를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일은 날마다 자기부터 실시됩니다. “나는 나의 죽음 안에서 살고 있다”를 성립시킵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가 되며 같은 뜻으로는 “나는 환란 안에서 존재한다”가 됩니다. 주님은 성도의 과거 역사를 예수님에 맞추어 ‘때’가 되게 합니다. 한 순간이 되게 합니다. 이 작업이 환란입니다. 즉 예수님을 공격한 그 세력에 자기 백성을 맡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도는 아픔을 느낍니다. 자신의 자존감이 박살나고, 자신의 과거 사랑이 무산됩니다. 자신의 희망마저 좌절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도도 하나님에게 항변하게 마련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아예 없었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네가 없는데 너의 문제나 고민거리가 생길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주님은 끝까지 자기 성도를 버리고 않고 따라오면서 인간적인 과거 추억을 말살하려 하십니다. 이러한 바뀌치기 하는 작업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본인이 결정할 그런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은 아예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모든 말씀은 늘 인간들의 이 불가능을 건드리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5병2어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께서 미리 남자 5000명이 먹고도 남을 도시락을 준비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절차가 필요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성하신 참된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인간의 불가능함이 늘 내부에서 되풀이되는 원칙이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유지됩니다. 사람들은 동일한 눈을 가지고 동일한 감각으로 이 세상을 이해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진정한 배경이나 환경은 장차 오실 ‘주님의 추억’의 차원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삶은 딱딱한 유리판 위에서 왔다갔다 하는 식입니다. 이 평면적 삶을 빠져나갈 다른 구멍을 찾지 못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세계, 곧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부합되는 딴 세계로 통하는 배수구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사를 한 순간으로 응축해서 설명하는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가 됩니다. 더는 자기 추억이나 역사나 자기 자존감 같은 것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세상임을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오늘날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 뜨고도 주님의 세계를 볼 줄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죽어 있어도 본인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멀쩡히 살아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자를 공격하는데 이는 주님 당시에 사람들이 주님에게 행한 일의 반복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성도는 이런 일을 매일 같이 겪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신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재림이 오기 전에 최후의 일격의 그때가 때다움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역사에 대해서 역사가 의미 없다는 것을 나타내야 되겠지요. 그래서 여기 환난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간이 환난이라는 것을 겪는 이유가 무엇이냐? ‘환란’이란 말씀대로 완전히 일치될 때나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세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완전히 일치될 때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환난 받으면, 환난 속에 들어오면 여러분 복 받은 겁니다. 예수님과 일치, 예수님의 삶과 일치될 때 주어지는 것이 환난입니다. 예수님을 중간으로 해서 예수 바깥과 예수 안쪽이 구분되거든요. 예수님 안쪽에 온 사람은 예수님과 더불어 환난이 있게 되고 그 예수님의 환난이 어디서 마감되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 그 지점에서 종결됩니다. 그 다 이루었다, 지점이 뭐냐? 펜싱에서 최후의 일격이에요. 하나의, 한 때입니다. 카이로스, 한순간이 오는 거예요. 십자가의 순간에 다 이룬 겁니다.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이겁니다. 내일 되면 잘하겠지, 모레 되면 잘 하겠지, 계속 시간 가면 무슨 좋은 날이 오겠지, 이런 식으로 하는데 성도는 다음 날, 다음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 모든 시간에서 벗어나서, 내 역사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시간 안에, 예수님에게 있던 그 환난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침에 운동하면서 그걸 깨달았어요. 꽃은 아무 데나 핀다는 거예요. 꽃은 인간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도 피어납니다. 내가 꽃 피라고 주목하지 않는 곳에도 꽃이 펴요. 특히 꽃의 특징은 뭐냐? 권력에 매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푸틴의 나라에도 꽃은 핍니다. 그리고 꽃은 권력에 매이지 않지만 더 감사한 것은 권력에 휘둘리거나 흔들릴 일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지듯이 우리 인생도 주께서 없는 데서 피어나게 한 꽃이 이제는 진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꽃입니다. 성령이 와서 꽃 피게 한 거예요. 내가 나를 지목하지 않는 꽃, 낯선 꽃, 내가 예상하지 않는 꽃이 피었습니다. 너의 뒷 배경은 예수님의 말씀의 시대라는 것, 십자가만 유효하고 유월절 피만이 유일한 그 시대의 배경에 합치되는 것, “네가 환난 가운데 기뻐하라.” 재림의 때가 되면 그 과거 다 옛날이야기처럼 그때는 주와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하신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내 할 일만 생각하고 자기의 과거의 것만 보충하고 보완하는데 정신 팔려서 쓸데없는 울부짖음으로 주께 원망했고 달려든 저희들, 이제는 오히려 그렇게 된 일 자체가 주님께서 낯선 기쁨과 감사를 제공하기 위한 주의 필요했던 과정이고 절차인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20327 우리교회 주일설교 "압축의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