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님의 때

아빠와 함께 2022. 3. 13. 22:20

주님의 때 

2022년 3월 13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1:1-2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두 번째 편지는, 예수님의 재림 사실로 인하여 각가지 문제가 드러났기에 추가적으로 쓴 편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현실에서는 삶의 환란과 관련성에 대해서 교인들이 제대로 엮어내지를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인해 왜 성도들이 현 삶이 힘들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삶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죄성이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표면으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죄란, ‘나는 흠잡히거나 책잡힐 것이 없어야 하는 존재’라는 의식을 말합니다. 인생이 불행한 것은 뭔가 흠이 있거나 책잡힐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벌내린 결과라고 사람들은 지레짐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은 마땅히 이 인생이 마음먹은대로 다 되고 어렵지 않아야 하는 의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고정성’입니다. 자신을 완벽하게 가져가기 위해 평소에 노력했으며 여기에 하나님까지 믿음으로서 철저에 철저를 기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여기에다 예수님 재림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하나 더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연합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평소의 생각은 자기만의 수평적인 역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신은 항상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십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동일하다고 자부합니다. 관심사가 온통 자신을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느냐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세 위에 신(하나님)을 동원시킵니다.

그러나 사도의 편지는 인간들의 추억의 책장이 아닙니다. 그 안에 ‘주님의 고정성’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고정성은 인간들의 수평적인 시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수직적으로 찾아들어서 꽂아버립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자가 고정성’은 주님의 고정성, 즉 주님의 죽으심 안으로 흡수 통합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러한 십자가의 취지에 대해서 일어나는 ‘때’입니다. 십자가도 ‘때’이고 재림도 ‘때’입니다. 시간의 흐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요한복음 7:2-4에 보면, 예수님의 배다른 동생들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즉 큰 명절날에 예수님께서 시골에서 묵혀 있으면 아니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나가서 자신을 들어내시면 예수님께서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요 7:6-7)

즉 예수님의 자신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때’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더 살 권한없고 구원해달라고 요청한 자격이 없음을 완전하게 드러나는 그 때를 말합니다. 인간의 죄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바로 그 주님의 개입을 말합니다. 죄란, 인간 스스로 ‘나는 흠잡을 것 없고 책집힐 것이 없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는 ‘자기 고정성’을 고집하는 겁니다. 하지만 사도의 편지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 역사 꽂아넣으시는 ‘때’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때’가 꽂히게 되면 주변에 흩어져 있는 인간들의 모든 시간 흐름은 그 ‘때’ 중심으로 집약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도의 편지 내용은 인간 역사를 압축한 겁니다.

마치 토네이도가 일어나면 주변의 흙먼지들은 강력한 공기 대류의 휩쓸려서 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튜브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형국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역사는 모두 예수님의 ‘때’을 위함입니다. 이 십자가의 때가 모든 역사조각을 부셔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집약시키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를 즉각적으로 본 자는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 달렸던 한 강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1-43)

올라가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올라가서 강도는 자신과 세상과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만 홀로 죽는 십자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왜 의인되시는 예수님이 자신 곁에서 자기와 함께 죽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자신이 이루고 싶은 ‘예수님의 기억’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기억’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고정적으로 계신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신 겁니다. 성도는 ‘노선 변경’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역사에서 벗어나 주님의 ‘때’속으로 들어서야 합니다. 이 노선 변경의 과정은 시편 1편과 2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시편 1편에서 의인과 악인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정해놓은 의인과 악입니다. 이 의인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시편 2:1에 보면, 이 세상 모든 열방들이 분노합니다. “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그 사연의 현장을 찾아가보니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 아들이 철장을 들고 옹기들을 깨듯이 사정없이 이 세상 모든 나라를 깨는 겁니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시 2:9-10)

즉 이 세상 어느 곳이 인간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인간은 고정성을 보장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은 실은 그냥 빈 집에 잠시 거처하려고 머무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우리 자신의 역사라는 것은 없고 모두 십자가와 같이 재림이라는 때를 위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나중에 나팔 소리 듣거든 깨어나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은 자이니까. 이런 점을 미리 받아들이는 그들이 십자가 때 속에 미리 들어온 바로 신자와 산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완벽하게 가져가려고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데살로니가후서 1장 1-2절(주님의 때)220313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1-2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2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시는데 굳이 편지를 보내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들이 나름의 뭔가 기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특히 자아라 하는 것은 기억을 담아 실어나르는 그릇이거든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딱 쪼개버리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기억들의 집합이 나를 구성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편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억, 인간들이 몰랐던 하나님의 기억이 편지 안에 콤팩트(comact), 축약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기억으로만 살아가는 그 인간이 주님의 편지를 보게 되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납득도 안되고 이해가 안 돼요.

뭔가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기억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그것이 주님중심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이 편지에 파고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하는데 “죄가 무엇입니까?”라고……, 설교를 듣고 복음을 들어도 막상 죄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딱 막히게 되어 있지요.

나름대로 제가 정리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죄라는 것은 자기 완벽성입니다. 퍼펙트한 거예요. 흠 잡히거나 책잡힐 일이 없도록 살아보겠다는 이게 바로 죄입니다. 여기에 종교가 후원해주고 있고요. 모든 종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당신은 흠 잡히거나 책잡히지 않을 사람이 됩니다.”라고 부추겨주는, 도움 주는 일종의 문화같은 겁니다.

종교로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종교를 통해서 평소에 내가 몰랐던 나의 기억의 속성이 오히려 정당화되는 거지요. ‘아, 나는 완전해야 돼. 나는 신처럼 돼야 돼. 나는 신으로 행세해야 돼. 누가 나를 공격하지 않도록, 누가 나를 비난하지 않도록 나는 철저한 방어태세에 나서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정당성과 의로움과 잘남을 위해서 평생토록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싸우고 있습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거기다 종교까지, 교회 다니는 이런 일까지 해서 철저에 철저를 기합니다. ‘나 이정도 하면 남에게 꿇리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완전하고 싶고, 완전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하나님마저 초청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고, 바로 그러한 기억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니까 이 사도의 편지가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사도의 편지 내용이 전혀 납득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인간은 평생을 일기장 쓰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종의 일기장을 써온 셈이 되는 거예요. 3월 13일, 오늘도 완벽했다. 3월 12일, 오늘도 나는 완벽했다. 내일 되면, 오늘도 완벽했다. 나는 이렇게 정당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나는 오늘도 정당했다. 나는 오늘도 철저했다.

그것이 가장 인간들의 관심사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일기장, 편지를 쓰고 있었던 거예요. 편지가 없는 게 아니고 이미 자기편지가 있는데 사도를 통해서 편지가 주어지니까 사도 편지하고 이 내용이 합치될 리가 없지요. 왜냐? 사도 편지는 어디서 오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오기 때문에.

옛날 십자가는 발판이 있어요. 십자가 발판에 올라가서 나와 세상을 다시 볼 때야만 나오는 그 내용이 사도의 편지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 내용이거든요. 왜 내가 죽어야 되는지 그 내용이 편지 안에 들어 있어요. 우리는 맨날 추억의 책장을 넘기고 있어요. 주님의 편지는 그 추억의 책장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래서 이 사도가 편지할 때, 이것은 네가 너 잘되기 위한 어떤 전쟁……, 그 전쟁은 애초부터 이것은 죄죠. 그야말로 그것은 마귀가 우리를 앞장세워서 실시한, 마귀가 대장 되셔서 우리 보고 시킨 나의 정당성, 나의 의로움을 위한 전쟁이고요. 그 전쟁 말고 주님이 중심이 된 전쟁이 편지를 통해서 따로 등장합니다. 주님의 전쟁의 핵심은 이겁니다. 너는 더 이상 살 이유도 없고 구원될 이유도 없다는 것.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왔다면 지금 전쟁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더 살기 위해서, 세상 복 얻기 위해서 나왔다면 초장부터 이것은 핀트가 잘못된 겁니다. 이것은 나의 전쟁이에요. 만약에 성이 김 씨라면 이것을 김의 전쟁이라 하고요, 이 씨라면 이의 전쟁이에요. 전부 다 자기를 위한 전쟁이에요. 약간 폭을 더 넓히면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한 전쟁.

인간의 마음속에는 나름의 시계 같은 것이 째깍째깍 가는데 그 시계는 자기 역사지요. 그 시계가 주님 안에 있는 시계하고 이것은 시각이 맞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전서와 그리고 이 후서, 나중에 쓴 편지라 해서 후서라 하는데 이 후서의 핵심내용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재림을 위한 시계, 재림을 위한 시계는 주님의 편지 안에 그 내용이 담겨 있지요. 그러나 인간의 시계는 재림이 필요치 않은 그러한 추억이 들어있어요. 재림이 필요치 않은. ‘재림이 왜 있어야 돼요? 재림 같은 게 왜 필요한데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전서와 그리고 후서에서 다시 편지를 보낸 이유가 주보 이번 주 설교 요약에 짧게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도 있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거기서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은 첫 번째 서신에 대해서 답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장차 재림에 의해 벌어진 사태를 미리 언급했습니다.(살전 5:1-11)】 이렇게 되어있어요.

주님에 대한 사태, 재림, 주님에 의해서 벌어질 사태에요. 그렇다면 이 재림은 또 뭐냐? 재림이 왜 있어야 되느냐? 그것은 ‘때’입니다. ‘때’ ‘때’인데 이걸 카이로(Kairos)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성경에 보면 카이로스라는 ‘때’인데 이건 뭐냐 하면, 직선적으로 가는데 열차가 벌판을 달리는데 위에서 뭔가 번개 치듯이 열차 위에 수직적으로 찍어 내리는 것, 이게 바로 ‘때’에요. 밑에 어제-오늘-내일, 이런 식으로 죽죽 지나가는 것은 크로노스(Chronos)라 해서 이것은 뭐 보통 시간의 강물 또는 시간의 열차를 말합니다.

캘린더대로 살아가는 것,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로 가는 것,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우리가 아는 그 시간, 우리의 기억에 근거한 그러한 역사, 그게 시간의 흐름이라면 그것을 위에서 구멍을 뚫는다 할까, 수직적으로 뭔가 팍, 하고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수평과 수직의 만남입니다. 여기서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릴 때에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 지나면 오시겠지, 하고 그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찍어누르는 식으로 와 버렸어요. ‘우리 그 역사 끝에서 만납시다. 세상 종말 때 만납시다.’ 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그 만반의 준비가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들어버려요. 위에서 찍어 누르는 것, 팍, 들어오는 겁니다. 주님이 선방 날린 거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주님이 벌인 주님의 전쟁입니다. 이런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노선을 변경하라는 거예요. 노선의 변경은 어디서 어디로의 변경이냐 하면, 나의 고정성에서 주님의 고정성으로, 나의 고정성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역사, 나의 인생에서 주님이 고정되었다는 것으로 옮겨가는 거요. 옮겨가는 그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우리는 10년 전의 나도 나고, 10년 후의 지금의 나도 나가 되고, 10년 후의 나도 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나의 고정성은 어떤 경우라도 양보하지 않고 중추, 그걸 축으로 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와 20년 후의 나가 동일인, 같은 인간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같은 인간이 되려면 조건이 뭐냐 하면,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죽을 때까지는 내가 죽지 말아야 돼요. 죽음은 내가 죽을 그때 죽음이라는 거예요. 내가 죽을 때 죽음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의 죽음으로 ‘아직 죽을 때까지는 안 죽었다’고, 살아 있다고 여기는 나와 바꿔치기해 버리는 거예요. 바꿔치기해 버리는 겁니다.

“이미 죽었어.”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내가 죽을 때 너희들은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 크로노스, 자기 일기장, 자기의 추억의 책장, 자기 기억만 잡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자식들 불러 모아놓고 내 장례식 때 누구 초청하고, 어떤 목사는 오라고 하고, 다른 목사는 오지 말라고 하고, 뭐 찬송가는 몇 장 불러달라 하고, 이렇게 자기 죽음의 장례식을 미리 연출합니다.

미리 연습도 시키고 요구조건을 달아서 관은 이걸로 하고, 장례식장은 파티마병원 그쪽 하지 말고 경대병원으로 가고, 또 뭘 하고, 이런 식으로 미리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죽고 난 뒤의 자기 장례식을 미리 예상하는 것, 그것은 자기가 살아왔던 자기의 동질성,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하고, 죽을 때 나와 동일하다는 그 동질성에 근거해서 내가 미리 구성해 보는 겁니다. 자기가 관속에 누워 있다는 그것으로. 그리고 유언도 한번 미리 써보고요.

그런데 그게 이론적입니다. 성경에 사랑이 두 종류 있는데 이론이 있는 사랑과 이론이 없는 사랑이 있어요. 성경에서는 이론이 없는 사랑이에요. 왜 사랑하는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사랑하기에 사랑한다. 그것뿐입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충성 봉사하니까 사랑한다. 그런 것 없습니다. 네가 교회 헌신했으니까 사랑한다. 그런 것도 없어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론도 있을 수가 없어요.

이론 없는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이론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자기 이익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돼요. 자,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해 봅시다. 죄가 뭐냐 하면, 내가 철저하고 책잡히거나 흠 잡힐 것이 없다고 우기는 그 자체가 이게 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자기는 복음 알고 난 뒤에 “나는 죄인입니다.” 기도할 때도 “주여, 죄인입니다.” 하고 기도하기도 싫은데 기도할 때 죄인이라고 하고, 남들 누구 앞에 나서면 “당신이 복음을 알아?” 하면 미리 준비된 것 있잖아요, 마음에 미리 준비하고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것, 그것으로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을 때도 미리 준비해서 죽을 때 천사가 오면 ‘나 죄인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이렇게 미리 상상을 한다고요.

아무리 상상해도 막상 수직적으로 딱 치고 들어오게 되면 ‘주님,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분명히 자기가 죽을 죄인이라고 수천 번, 평소에 그렇게 연습 아닌 연습을 그렇게 해 왔는데 막상 딱 치고 들어오니까 ‘네가 뭔데 나를 기분 나쁘게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즘은 그런 현상이 많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코로나 안 걸릴 것이다.’ 했는데 코로나 걸려버렸어요. 교회도 못 나오고.

그런데 사무엘상 2장 6-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이렇게 죽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는 거예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김의 전쟁, 나의 전쟁, 이것 하나님께서 인정해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평생을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는데 그리고 싸워서 승리하게 되면 얼마나 기뻤어요? 그러나 패배하면 얼마나 슬펐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줘서 승리했습니다.” 또는 뭐가 안되면 하나님께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들잖아요.

이재명이라는 후보가, 3월 9일이 투표일이었지요, 8일 저녁에 서울 청계천에서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지지자들과 모여서 “끝내 이기리라~” 끝내 이기리라. <상록수> 김민기가 부른 상록수 노래 부르면서 “끝내 이기리라”라고 했어요. 끝내 이기리라. 박세리 공 넣을 때 유행했던 노래 있잖아요. 끝내 이기리라. 그런데 끝내 졌어요. 아, 이 재명 대통령 되라고 기도 얼마나 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추종자들 중에서.

그런데 여기 사무엘상 2장에 보면, 주께서는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윤석열 찍었던 사람들은, 투표 7시 반부터 개표 시작해서 11시까지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4퍼센트 지고 있는데요.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어요? 대구와 경북 각 교회가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 도와달라는 거예요. 도대체 이 전쟁이 누굴 위한 전쟁이에요? 자신의 고정성을 위한 전쟁이에요. 자기 고정성. 끝내 이기리라, 하는 쪽이나 끝내 이겨버렸네, 하는 쪽이나.

이게 뭐냐 하면, 이 수평적 시간의 바닥에 나를 그냥 꽂아두려고 하는 거예요. 그냥 탁 꽂아서 요지부동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의 고정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런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아파트나 단독주택이나 빌라에 사는 것은 그것은 남의 집, 빈집에 임시거처에요.

그냥 곧 가는데, 내가 곧 이 세상을 떠나는데 바람불고 비 오고 하니까 어디에 잠시 몸이나 눕힐까, 하는 그것을 여러분이 돈 주고 산 거예요. 아파트나 뭐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머물 곳이 없어요. 우리는 고정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고정되면요, 교회는 오락이 돼요. 그러나 지나가면 진리가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지만 16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 고정된 하늘에 있는 본성은요, 우리의 성이 아니고 예수님이 미리 가 있는 성이에요. 예수님의 성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이 오늘 본문 편지라 하는 것은 전체로 있는 그 역사를 하나로 콤팩트(compact) 눌러버리는 거예요. 뻥과자 만드는 것 알지요. 압력으로 눌러버리면 섞였던 그 쌀 알갱이들이 하나로 압축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미처 다 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인생도, 그리고 우리가 살았던 그 인생도 주님께서 주님의 몸과 섞어서 같이 압축을 시켜버리는 겁니다. 그 안에서 아크릴처럼 납작하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긴긴 백 년 인생이 납작하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납작하게 되어버리면 그것이 십자가가 되어가지고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주님의 추억과 주님의 시간이 우리에게 꺼풀 풀리듯이 하나씩 풀리면서 우리의 출생과 우리의 죽음까지 다 새로운 의미로 펼쳐지는 거예요. 그 십자가의 혜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입은 자가 누구냐? 바로 누가복음 23장 42절에 나오는 예수 십자가 옆의 십자가에 달려 있던 강도였습니다.

그 강도가 자기의 강도 됨, 강도 되었던 이것을 주님의 시간으로 전환 시켰어요. 주님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일, 주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에 제가 강도 짓을 해야 되는 이게 꼭 필요했지 않았습니까, 라고 그런 쪽으로 주님하고 우리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봅시다, 하는 이것이 십자가에서 하는 거예요.

이렇게 뭔가 올라타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습니다. 십자가에 올라가야. 그리고 주님이 계신 십자가에 이렇게 올라가야 비로소 밝혀지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 목숨보다 진리가 우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진리란 목숨과 바꿀 수 있어야 그게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목숨을 위해서 진리가 있는 게 아니에요. 아낌없이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놔야 돼요.

이 첫 번째 편지 데살로니가전서, 첫 번째 편지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오해했던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신자인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괴롭습니까? 힘듭니까? 왜 신자인데 살 수 있는 여망을, 희망을 왜 계속 주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굉장히 그들은 우왕좌왕 했었어요. 문제점이 많이 일어났어요. ‘인생 이렇게 조진 것, 주님 재림하신다는데 팡팡 놀면서 살자.’ 이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허비하면서 살아왔었습니다.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아직도 자기 죄가 제대로 규정이 되지를 않았어요. 죄가 뭐냐? 오늘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죄라 하는 것은, 나는 흠 잡히거나 책 잡힐 것 이 없어야 될 대상이다. 이 자체가 뭔가 잘못된 거예요. 십자가의 강도는, “내가 죄를 짓든 내가 강도질을 했든 그것은 주님 나라에 꼭 필요했기 때문에 벌어진 주님의 압축된, 콤팩트 된 그 시간 안에 있는 사건 중 하나가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강도질 한 그겁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신의 고정성을 그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평생토록 나 자신의 고정성, ‘내가 이만큼 잘났다’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았던 모든 것이 이게 다 꿈같고 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망상을 다른 망상으로 대체하고 있어요. 계속 망상은 다른 망상으로 대체하고 또 바꾸고 또 바꿔요.

노래방 하다가 때려치우고, 치킨집 하다가 때려치우고, 커피집 하다가 때려치우고. 아내한테는 “이 남편 못 믿나? 내가 니 굶어 죽일 남자로 보이나? 내가 그렇게 보이냐? 내가 굶더라도 너는 안 굶겨 죽일 게. 자식 둘 다 내가 먹여 살릴 게.” 허세와 허풍, 배우 것이라곤 그것밖에 안 배워 가지고.

이게 자기 고정성이거든요. 천하하고도 안 바꾼다. 심지어 하나님하고도 나는 안 바꾼다는 그런 속내를 깊숙한 곳에 감추면서 교회 나옵니다. 거기서 성경을 배우고 복음을 배우면서 그게 또 하나의 자기를 더욱더 깊숙이 감추는 망상이 되고 말았어요. 전쟁을 해야 되는데 자기전쟁을 하고 있어요. 김의 전쟁, 최의 전쟁, 이의 전쟁. 주님의 전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영화에 보면 2차대전 때 피난민 아줌마가 혼자 되었는데 옷이 없어 가지고 굴러다니는 남자의 중위 장교 복을 걸쳐 입었어요. <잉글리시 페이션트>라 하는 유명한 영화입니다. 거기 여자 주인공이 장교 복을 입었는데 복장은 군인이에요. 복장은 군인인데 물론 간호사기도 하지요, 하지만 옷이 없어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누가 봐도 남자 군인이라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교회 와서 사람들이 입는 것은 계속 목사가 시키는 대로 뭔가 내가 신자인 티를 내려면 뭘 하면 됩니까, 하는 그것을 계속 입는 거예요. 돌아다니는 중위 군복 하나 걸치면 남자 군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옷이 없어서 입은 거지요. 마찬가지로 교회 와서 복음 백날 들어도 그것은 자기 전쟁하기 위해서 바쁘지 자기 괜찮은 존재다, 그것 증거 하기 바쁘지 주님의 전쟁은 생각도 못 하고 있지요.

주님의 전쟁을 하려면 노선변경이 일어나야 됩니다. 나의 추억의 책장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야 돼요. 주님의 노선으로 들어와야 된다는 거지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주님의 재림이 갖고 있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여기 데살로니가후서 편지 내용의 핵심은 재림에 대해서 또 언급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미 재림을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또 재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자, 재림은 이렇게 정리합시다. 재림이 뭐냐? 모든 자들은 죽어 있다는 거예요. 모든 자들은 죽어 있다. 따라서 내가 불러낼 때 그때 내 소리 듣고 일어나면 된다는 거예요.

누가복음 10장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귀신들이 제자들 70명 모였을 때에 귀신들이 우리 말 듣고 귀신이 나갔던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자기들이 귀신들과 상대했으니까 영적 전쟁이라고 본 겁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귀신이 나갔다고 해서 영적 전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직도 이 제자들 70명은 본인의 고정성을 포기 못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냈지만 그것이 자기의 노선변경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주의 일을 했을 뿐이에요. 따라서 그들은 무엇까지 접촉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내 이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 주님이 지었던 그 생명책 있잖아요, 그 생명책 안에 내 이름이 있다는 것, 내 적(籍)이 거기에 있다는 것, 하늘 생명책에 내 적(籍)을 두고 있다는 그 사실까지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영적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전쟁을 해 봐야 내 중심으로 사는지, 아니면 소속이 어딘지, 신분이 어딘지, 전쟁을 통해서 자기가 구분이 될 수 있어요. 나의 전쟁인지 아니면 주님의 전쟁인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재림을 믿는데 재림을 믿는 것하고, 재림을 믿는데 왜 우리 형편이 자꾸 환란이 오는지 그게 서로 관련성을 연결 짓기가 상당히 힘들었어요.

그냥 편안히 살면서 태평스럽게 살면서 주님의 재림을 언제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재림이라는 것을 앞두고 우리는 내 뜻대로 내 식대로 왜 못살아가는 쪽으로 주께서 그렇게 다뤄야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마지막 때에 사탄이 발악을 합니다. 그 이야기가 데살로니가후서 2장 5절부터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가후서 편지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불법적인 사람들이, 불법적이니까 악마지요, 사탄이, 사탄의 역사에 따라, 9절에 나와 있듯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 자기 고정성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 완벽과 자기 철저함에 미련을 두고 그걸 버리지를 못하고 있어요.

아무리 복음을 알아도 사는 게 힘들고 몸이 아프니까 우선 짜증부터 확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중세 때부터 교회가 인간들 달래기 위해서 또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뭘 만들었느냐 하면, 사순절(四旬節)이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지금 여러분은 사순절이라는 것이 생소하게 들리지만 기존 교회나 천주교성당에서는 난리도 아닙니다.

서기 325년에 니케아회의 때에 사순절을 결정했습니다. 부활절을 결정하면서 부활절은 춘분 지나고 보름이 되는 그 직후에 있는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절이 너무 영광스러우니까 그전에 우리가 부활을 맞이하는 기쁨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난을 받는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고난 받고 또 기도하시면서 고난받은 것을 본받아서 사십일 동안 고난받는 기간을 정한 겁니다.

그게 바로 사순절입니다. 부활절부터 계산해서 거꾸로 40일 전에 재를 뒤집어쓰는 그 날이 수요일이 되거든요. 일요일 빼고 40일입니다. 일요일 포함해서 40일이 아니라 일요일 빼고 40일이 되어서 재를 뒤집어쓰는 수요일부터 계산해서 40일이 지나면 부활절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일체의 고기를 못 먹고 육식을 금했어요.

고기를 왜 못 먹게 했느냐 하면, 고기를 먹으면 성욕이 너무 동한다고 해서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된다고 해서 고기를 못 먹게 만들었습니다. 고기를 못 먹게 만들고 40일 동안 고난에 동참하게 했던 그게 사순절이에요. 순(旬)이라는 것은 10일, ‘4 곱하기 10일’ 그게 사순절이지요. 벌써 저쪽에서는 시작이 되었어요. 사순절 고난이.

그런데 사순절 고난이 너무 심하다 하니까 일반 민중들이 사순절 되기 직전에 실컷 술과 고기 모든 욕구를 다 채우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그걸 사육제(謝肉祭, carnival)라 합니다. 사육제, 실컷 즐기는 거예요. 마치 장정들이 군에 가기 전에 창녀촌에 가는 것처럼 실컷 욕구를 다 채워요. 맘껏 욕정대로 하려고 하면 부끄럽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는 이제 마스크 쓰고 하는 거예요. 마스크를 쓰고 사육제를 하는데, 그게 오랫동안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예배당을 성당을 짓는데 돈이 모자라잖아요. 프랑스 북쪽에 유명한 르왕대성당이라는게 있어요. 그게 모네의 작품에 나와 있어요. 르왕대성당에서 탑을 하나 세우는데 돈이 없어서 못세 우거든요. 그래서 사순절에 예외조치를 합니다. “헌금을 내면 사순절 날 고난 빼줄게.” 그때는 고기는 먹지 못하게 해놨으니까 어떤 수를 내 가지고 버터를 먹도록 해서 그게 버터 구입건이에요. 버터를 구입해서 사순절에도 버터는 먹게 하고 그 돈 가지고 르왕대성당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을 ‘버터타워’라고 한 겁니다.

왜 성당이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 책잡히고 흠 잡히지 않도록 하는 자기의 고유역사, 자기의 신앙적인 이력 그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고 드리고 싶은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재림은 재림이고 재림할 때까지 덜 고생하고 복을 많이 받아서 힘들지 않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자기 여망이 있는 거예요.

왜 행복하게 살고 싶으냐? 나는 흠이 없으니까,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니까, 말씀대로 꼬박꼬박 지키니까 내가 고생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 매 맞을 일이 없다. 자기 자신을 거기다가 두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노선변경이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 노선변경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예수님의 재림의 때, 사태가 재림 때가 되거든요. 재림 때에, 요 재림의 때, 재림의 때를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사탄의 시험과 유혹도 재림의 때에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재림의 때, 그때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수시로 수평적인 역사에다가 수직적으로 카이로스, ‘때’를 계속 꽂아 넣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나옵니다. 요한복음 7장에 초막절이 가까울 때에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들이 예수님한테 조언을 합니다. “예수님이 촌에 묻혀 사실 분이 아니잖아요. 초막절 큰 명절인데 예수님이 스스로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야 되지 않습니까? 숨어서는 아무 일도 안됩니다.”

3절 끝에 “유대로 가셔서” 그리고 4절에,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한 거예요. 대선 나오라 그 말이지요. 그럴 때 6절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지금의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서 준비된 때가 먼저 있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결정적인 시간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산 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보고, 모든 인간을 구원받을 자로 보지 않고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그때, 십자가 죽으실 그때, 예수님 옆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간 그때,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완벽하게 드러나는 그때, 어떤 인간도 구원해 달라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그때, 그때로 가지 아니하면 노선변경 되지 아니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온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기 때문에 그때가 중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추후에 성령이 오순절 날 오신 거예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하루하루 일상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지요. 강도가 아니라고 우겨도 강도 된 심정으로 십자가에 올라타고 세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 그것이 성령이 와야 가능한 겁니다.

‘아, 내가 강도보다 더한 죄인이었구나. 강도라는 것이 이게 나쁜 짓이 아니라 나는 흠이 없고 나는 티가 없고 나는 책 잡힐 일이 없는 의인이라는 이 자체가 강도죄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것이 악마가 심어놓은 칩이고 악마가 좋아하는 죄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도가 되어서 대인관계가 있을 때에 상대방이 언제 성질내는가를 한번 조사해 보세요. 이제 오늘 설교 들었기 때문에 모른다 하지 마시고요. 상대방이 성질낼 그 때를 한번 보세요. 복음은 잘 알지요. 하루 이틀 들었습니까? 잘 아는데 성질낼 때, 성질낼 때를 보세요.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괄호 열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괄호 닫고. ‘내가 너한테 뭐가 잘못됐는데?’ 괄호 열고, 괄호 닫고. 억울하다 이 말입니다. 남들은 전부 다 멀쩡한데 지 혼자 코로나 걸리고, 이건 뭐가 되게 억울한 거예요.

요한복음 7장에서 그때를 언급했습니다. 그때를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7장 계속 보게 되면 7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세상 어떤 것도 악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분명히 하는 그때, 그때를 위해서 내가 명절에 올라가야 된다.

따라서 너희들, 동생들이지요, 너희들 보기에 초막절 거대한 명절에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기적을 베풀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치를 알아주리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더욱더 어디까지 박차를 가하는가? 이 세상, 이 악마가 만들어놓은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이 지 잘났다, 하는 그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여야 되는 거예요.

나는 뭐 20년 교회 다녔다, 50년 교회 다녔다 하는 그 이야기가 왜 이게 악마의 이야기고 그게 잘못된 이야기인지를 끝까지 가는 거예요. 끝까지. 그게 초막절의 완성이에요. 초막절은 초막절 나타난 게 그게 완성이 아닙니다. 초막절은 십자가를 왜 십자가일 수밖에 없는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노선변경이에요. 완전히 노선이 다른 노선에서 차고 들어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운 노선은 어떻게 장만하는가? 시편 1편과 2편을 연결해서 설명하면 모든 비밀이 다 풀립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해서 이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을 죄인 되게 하고 의인을 의인 되게 하는 취지로 이 땅에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 5절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해서 인간의 역사적 추억의 책장, 인간의 일기장,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내가 심판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어림도 없는 내용이에요. 이것은 애초에 들어있지 않아요. 인간 속에는. 인간 속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들어있지 않고, 내가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될 내용도 거기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자기가 잘났는데요 뭐. 잘난 사람이 무슨 심판을 받아요?

그래서 심판을 받으려면 다른 노선이 가까이 뭔가 접근해야 돼요. 율법의 완성이 접근할 때 비로소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의인과 죄인이 구분되는 겁니다. 우리의 평소 마음가짐이나 행동하고는 심판받는 것, 구원받는 것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이걸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돼요.

우리의 장례식은요, 이미 십자가로서 결정 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돼.’ 이미 결정 난 거예요. 파티마병원 장례식장, 그런 것 찾지 마세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요, 진짜 죽음은 우리는 주님 앞에 저주받아 죽는 것이 진짜 죽음이에요.

이걸 미리 아는 것은 성령이 우리한테 꽂아줄 때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성령이 와서 알려줌으로써 우리가 더이상 나 중심으로, 내 고정적으로 사는 모든 짐과 부담에서, 스트레스에서, 나라는 인생 자체에서 우리는 훨훨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건 뭐 절에 가서 도 닦는다고 자유롭게 되는 게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내 일, 내 일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던 거예요. 내 가정일, 내가 자식 키우는 일, 내가 손자 키우는 일, 이런 일은 없었어요.

시편 1편이 끝나고 2편에 보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분노해요. 분노하는데 그냥 세상 사람들이 분노한다, 하니까 어디 뭐 장터에 누가 먼지 일으키면서 막 싸우고 하면 우리는 관심이 있어서 거기에 가까이 가보잖아요. 왜 싸우는지는 몰라요. 가까이 가 봐야 알지요. 장날에 장보다 보면 먼지가 일어나고 저쪽에서 막 싸우고 있다면 “저기 가봅시다. 저기 무슨 일 있노?” 해서 가보면 꼭 술 처먹고 둘이 시비붙어서 싸우는 거지요.

사람들 둘러싸고 있으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르지요. 시편 2편은 그냥 세상 사람들이 분노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분노가 없어야 되는데, 분노가 일어날 일이 없는데 그냥 분노가 일어나고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편은 뭐냐? 도대체 여기 무슨 일이 있는지 쓱 한번 보는 거예요.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왕이 되신 거예요.

시편 2편 6, 7절에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리고 낳았던 그분이 하는 일이 9절에,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장날에 한쪽에서 뭔가 먼지가 일어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니까, 어떤 분이 철장을 들고, 장날 가면 옹기 같은 것 파는 곳 있잖아요, 옹기점 그릇, 그것을 철장 휘둘러서 다 깨부수는 거예요. 깨부술 때 깨어지는 나라 하나하나가 우크라이나고, 러시아고, 중국이고, 한국이고, 일본이고, 태국이고, 그런 나라들이에요. 모든 국가, 이 세상 열방들을 이스라엘이고 뭐고 다 부수는 거예요.

이건 횡포지요, 횡포. 인간의 무구한 역사, 무구한 역사, 성경대로 하면 6천 년 역사, 진화론에 의하면 46억 년의 지구의 역사, 이 모든 역사를 다 부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역사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역사라는 것이 없다. 인간 내부에 있는 시계 자체를 고장 나게 만들고 부숴버리지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게 뭐냐? ‘때’에요. 카이로스, ‘때’ 때 안에는 지나온 시간도 거기 없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거기 없게 만드는 것. 회오리바람이 오게 되면 주변에 있는 먼지가 다 회오리바람 안에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하나의 토네이도죠, 토네이도 안에 모든 주위의 먼지가, 모든 공기의 기류가 그 안에 다 쏠려서 꼭 토네이도가 지나간 흔적만 나타나듯이 수직적인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수직적인 것만, 용오름이지요, 바다 같으면 용오름, 그 이어가는 이동만 보이듯이 주께서 활동하시는 그 앞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역사와 시간은 전부 다 개뿔이다, 다 의미 없다, 너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가 그런 말씀 드렸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생산해 가지고 그 과거에서 우리가 지난 온 것은 다 나 자신을 다 죽여버린다고요. 오늘 되면 어제를 죽여버리고, 내일 되면 오늘을 죽여버리고, 그리고 죽을 때 되면 살아온 모든 것은 어디 있나? 없어. 예, 분명히 뭔가 백 년, 구십 년 살았는데 없어요. 깔딱거리고 헉헉거리는 이 나만 있지 아무것도 없어요.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없어질 것이 없어지는 거예요. 없어질 것이 그냥 없어진 거예요. 이것은 과학이 아니라 우과학이 와도 부인 못 합니다. 죽을 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명복공원이라는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구시에서 운영하는 화장터.

없어요. 우리는 없음의 노선을 지금 밟고 있습니다. 뭐 십일조 하고 교회 섬기고, 그게 다 없는 거예요. 교회 없어요. 언제 교회 생각했습니까? 자기 생각했지. 무슨 교회를 생각해요? 추상적인데. 부동산이지요, 교회 예배당은 그저 부동산이지요. 모든 게 없는 거예요. 없음, 없다는 것, 십자가에 올라가서 지난 과거를 돌아 보세요. 없어요.

있는 것은 뭐냐? 같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있지요. 예수님만 있음이 되고 그 있음을 있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없음이라는 전철을, 그런 과정을 밟은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 십자가 옆에 강도였습니다. 여러분, 종교를 버려야 돼요. 생명은 종교에서 오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오는 거예요. 십자가에 생명이 있지 종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데 그냥 중위 군복 입고 돌아다니는 것 있잖아요. 예를 제가 살짝 바꿨습니다만 <잉글리시 페이션트> 그 영화에서 제가 말한 그 여자가 사실은 간호장교에요. 하지만 필요한 예를 들기 위해서 제가 살짝 변개했습니다. 그 영화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요.

말라기 2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전쟁하는 나라 이름이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싸워라’ 싸워야 될 나라에요. 멈추면 안 돼요. 그냥 계속 싸워야 돼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싸우는 나라가 유일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 이스라엘, 회오리 바람의 끝에 뭐가 있느냐?

말라기 2장 10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아버지, 회오리바람의 시작이 아버지로부터 나왔거든요. 그러고 난 뒤에 말라기 2장 10절을 봤다고 치고 데살로니가후서 오늘 본문으로 다시 가봅시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그러니까 이것은 노선변경이 된 상태에서 역사는 인정하지 않고 오직 때 매 순간이 때가 되는, 매 순간이 예수님께서 일을 벌이시는 현장으로써 우리 자신과 연결되어 있고 매치가 되어 있는 그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주의 은혜를 받았다. 2절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그게 바로 신자예요. 신자에다 점 하나 더 찍으면 돼요. 신자만이 산자가 됩니다. ‘신자 = 산자’ 신자만이 산자가 돼요. 그게 ‘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마지막 때에 재림에 대해서 앞으로 또 나와요. 1장 7, 8, 9, 10절, 전부 다 재림 이야기입니다.

재림에 대해서 이어지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재림은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보고 재림의 때에요, 때, 때가 되면 죽은 자가 이렇게 있으면 내가 그냥 죽어 있어도 “내가 네 이름을 불러줄게.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자는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네가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그날 무덤에서 다 툭툭 털고 깨어난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왜? 생명책에 이름이 있기 때문에.

누가복음 10장 20절 말씀처럼 재림은 뭐냐? 모든 인간은 죽었다. 이게 재림의 취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 있다. 오직 이름을 불러주게 되면 깨어나면 된다. 무슨 소리로? 나팔 소리와 더불어서. 주의 나팔은 소리가 나가는 거예요. 메가폰이거든요. 나팔이라는 것은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소리를 지르면 잠자는 자가 깨어서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팔 부는데 안 깨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 천사가 와서 재림 때 “이 죽은 자야. 일어나라.” 하고 나팔 불었는데 내가 그 나팔 소리가 안 들리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을 가지고 정신병자라 이렇게 하는데요, 정신병자. 나팔 부느냐 안 부느냐, 깨어날 때와 안 깨어날 때를 걱정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나팔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은 주께서 말하는 진멸의 대상과 그리고 사랑의 대상을 그들이 죽기 전에 이미 성령을 통해서 파악을 하고 있어요. 진멸의 대상을.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우수한 맛에, 자기 정당한 맛에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백퍼센트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런 사람을 주께서는 살아 있으면서 파악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진멸의 대상 가운데서 누구도 포함되느냐 하면, 본인이 진멸의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미리 눈치챈 사람, 강도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을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파악이 가능해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구원해 달라고 요구할 조건이 안되고, 내가 살아야 될 조건이 안된다는 것을 이미 진멸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파악이 되는 사람, 그냥 푹 주무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성령이 와서 세상을 주님의 십자가 안목으로 세상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 이것은 십자가 영 성령이 아니고서야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살만큼 사시다가 안심 푹 놓으시고 눈 꾹 감으시고, 그냥 꾹 감아요, 감고 주무신다면 나팔 소리와 함께 여러분 다 수고했다고 깨워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복음 아는데 사는 게 왜 힘드냐고 따질 때 아직도 은연중에 자기 자신의 역사와 자기 위주의 삶이 그 여지가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한 주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 옛사람이 살아 있기 때문인 줄 아시고 성령께서 우리 옛사람을 늘 혼내 주시고 꾸중해주시고 나무라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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