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1
인간은 누구나 음행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음행의 원리로 갖추어지고 돌아가는 음녀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속에 살고 있는 개개인을 통해서 그 음행적 성격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음행을 가정의 행복이나 사회의 질서차원에서 처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시도는 영적 성질을 도외시한 처리입니다. 즉 음행 안한 사람만 천국에 가고 음행한 사람은 지옥가기를 원합니다. 단 본인이 생각하기에 본인이 음행한 적이 없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인간들이 이미 음녀라는 이 세상에 푹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기에 나온 사상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끼리만 옹기종기 모여사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등장으로 벌써 판명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과 말씀을 실어나려는 그런 민족입니다. 이 세상이 과연 음녀적인 세상이라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지나가면서 발생시키는 자국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민수기 25:1-3에 나옵니다.
모압 신전을 모시는 여인들이 이스라엘 남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그들의 축제 마당에 참여시킵니다. 모든 남자는 여성으로부터 유혹받을 만반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격이 떨어지고 높고 여부에 따라 당장 미혹 받고 아니 받는 상황이 일어날 수는 있어도 항상 지속적으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믿는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유혹케 하신 이유는, 음행을 통해 이 세상의 진상을 살펴주시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영적 세계가 이스라엘 속에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오고 있는지를 밝혀주십니다. 즉 이스라엘은 기존의 인간들만의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을 소개할 역할을 맡은 특수한 나라입니다. 인간들의 감정이나 이성이나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와 좌절을 통해 그 현장에 영적 세계가 출현됩니다.
약속이 스며든 육체를 하나님께서 ‘몸’, 혹은 ‘언약의 몸’, 혹은 ‘약속의 몸’이라고 합니다. 이 몸 안에서 이 음녀의 세계에서 자기 백성을 구출시키는 바탕이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이 품고 있는 ‘정결케 하는 피의 능력’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용서의 능력이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전달되는 식으로 온 나라에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계시받은 남성의 품 안에서 비로소 여성은 구원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0:14에 나오는,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 제 7계명은 20세 이상, 그리고 홍해를 건너온 자 남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런 남성 중심의 율법 수여는 기존의 계시가 없는 육과 육의 감정적 교류를 통해서 가정을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의도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없이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된 사랑’, ‘진정한 사랑’으로 보이지만 실은 음행입니다. 왜냐하면 육과 육의 만남이지 결코 몸과 몸, 즉 ‘약속의 내장된 몸’과 ‘약속이 내장된 몸’의 만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려거든 나를 위해 목숨바치라”고 말입니다. 잠언 19:1 4에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 부부 사이란 단순한 가정 행복 차원이 아니라 로마서 7장에 보면, 율법과 성령의 관계를 미리 당겨서 보여주는 사이입니다. 가정이 아니라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에베소서 5:31-32) 이로서 간음의 반대말은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계시를 보호하는 겁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언약의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이 악한 음란의 세계에서 구출받은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즉 주입된 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늘 증거하는 삶이 곧 복음을 보호하고 또한 복음으로 보호받는 성도의 참된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주님이 다루시는 특수한 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놓치지 말도록 보호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음행2
오늘 본문은 모든 인간들의 상식을 뒤 엎는 말씀입니다. 음행했으니까 지옥가야 된다는 이야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 음행하는 사람의 영도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음행해놓고 구원 얻는 거예요. 뭔가 손해 본다는 느낌, ‘이상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실제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내용이 왜 이렇게 다르지?’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본문입니다.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만나버리면 인간의 뜻은 묵살됩니다. 거짓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특히 여기 4절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개념과 이 땅에 오신 하나님개념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정 반대되는 겁니다. 정 반대되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육신에서 나오는 그 욕구, 종교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고 있어요.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면 천국 갈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 바르게 살아라. 그래서 지옥가거라.” 이런 조로 주께서 일한다는 것을 누가 상상하겠습니까? 바르게 살아도 천국 못 간다면 우리는 거기서 삐져서 “그러면 나는 내 맘대로 개같이 살겠습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진즉부터 그게 네 마음이잖아. 그러면서도 구원을 얻고자 네 마음은 감추고 주의 말씀에 순종합네, 라는 위선과 허울로서 네가 살아왔잖아. 그 껍데기는 벗겨져야지” 그 벗기는 방법은 말씀으로 벗기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음행이라는 것을 통해서 영적세계를 설명하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예수님 이후의 모든 세계가 음녀, 음녀 바벨론이라,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의 도시로 규정을 하고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과 능력들은 음행의 폭발에 의해서 벌어지는 상황들이라는 거지요.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거예요. “나는 음행을 안했으니까 천국 간다.” 이것은 말이 안 돼요.
사람은 태어나서 20세 이하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가정밖에 몰라요. 그러나 20세를 넘게 되면 드디어 세상과 접촉을 하게 됩니다. 접촉을 하면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는 겁니다. 떠미는 대로 떠밀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내 몸은 내 의지와 감정과 내 이성으로 통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그 자체로 육적세계에요. 인간은 절대로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몸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자기 일에 책임지지 마세요. 책임 안 져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느 세계에 놓여 있는가를, 눈을 뜨고 그걸 보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내 인생은 반듯하게 살아왔어.’라고 자기가 자기 몸에만 관심 두던 그 몸은 어항 속에 있는 금붕어처럼 어항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예요. 물 없이 있는 물고기는 없어요. 나를 빠트리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이걸 감당할 수 없는 세계고 중요한 것은 주님은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있는 나를 주님은 어떤 식으로 건져냄에 성공하시는가, 그걸 봐야 돼요. 그래서 아버지의 첩과 음행했다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반드시 일어나야 되고, 일어나고 있고, 또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우리 주변의 이야기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 나는 음행안하고 버텨야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도대체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음행의 세계라고 하는가, 음행의 세계라고 설명을 해야 왜 영적인 설명이 되는지, 그 하나님의 논리의 코스를 우리가 파악을 해줘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는데 바알을 섬기는 신전에 종사하는 여직원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성들을 유혹해서 자기 신들에게로 휘둘리게 만들었어요. 음행입니다.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몸에 싣고 다니는 수레 같은 존재, 국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통과하고 지나치면서 바깥에 있는 세상의 정체, 그 본질이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하나의 배 같은 존재입니다. 계시의 배, 그 배가 지나가면서, 마치 의사가 수술하듯이 배를 가르면 그 안에 내장이 보이듯이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서 이 세상 속내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음행이라는 것은 우리 보기에는 남녀 간의 문제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인간의 실상을 영적인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실상을 비춰주는 접점지점을 음행이라고 여긴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수한 것이지요.
너희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품어져 있는, 계시가 함께 있으면서 그 계시가 에너지가 되어서, 계시가 원동력이 되어서 움직이는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그냥 육적인 본성으로, 그냥 세상 그대로 물에 물 탄 것처럼 가지만 이스라엘은 그 색깔이 땅의 색깔이 아니고 하늘의 색깔, 비취색인가, 그런 색을 띄고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사적인 연애감정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종교가 다르다는 겁니다. 이방민족이 갖고 있고 작용하는 그 영적인 힘, 물론 악마지요, 그 영적인 힘에 너희가 같이 합세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장차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 결정에 대한 기준은 누가 갖고 있는가? 이스라엘이 갖고 있어요. 이 기준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여인과 연애한다는 것은 뭘 무산시키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내장하고 있는 ‘왜 우리는 천국갈 수밖에 없고 왜 우리는 영생 얻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그 기준을 무시한 것 밖에 안돼요. 신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해서는 안 될 특별한 다른 기준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걸 잊어버리고 이방 여인과 사적인 감정에 빠진다면 그것이 바로 음행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냥 속해 있을 뿐만 아니고 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이 세상 현실은 우리의 욕구나 욕망과 상관없이 이미 갖추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장만된 현실 속에 우리가 뒤늦게 뛰어든 것뿐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우리가 심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있는 것에 우리가 뛰어든 것뿐이에요. 그 선후, 순서를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날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이 순서가 바뀌게 되면 자기 일에 우환이 벌어지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왜 하필이면 우리 집에서. 왜 하필이면 나에게. 자, 그렇다면 이 음행을 통해서 어떻게 영적 세계로 넘어가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요. 우리 몸은 하나님이 주신 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몸 중심이에요. 하나님의 몸이라고 할 때는 이 신체 덩어리를 몸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밧줄, 파이프로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몸이라고 합니다. 약속과 끊어진 것을 육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조종 받는 것이 몸입니다. 이 몸의 특수성은 하나님의 계시가 거기에 삽입되어 있어요. 그래서 음행해도 천국 가는 그런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약속은 절대로 약속을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심지어 껍데기는 사탄에게 내어줘서 죽음에 넘겨준다 할지라도 영은 뽑아내는 겁니다. 마지막 날에 영을 살리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조종 받는, 약속에 의해서 특수한 신분으로서의 몸을 갖추었느냐를 묻고 있는 거지요. 고린도교회에 “여러분, 여러분은 등허리 뒤에 주님의 약속의 파이프가 있지요? 하나님의 계시가 흐르고 있지요? 그런데 왜 여러분은 간음한 사람을 가지고 그냥 몸이 아니고 육적인 사람인 것처럼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그냥 넘어가십니까? 그렇다면 몸과 육의 차이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아닌 사람의 차이, 하나님의 계시의 기준이 어떻게 드러나겠습니까?”라는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 간음이라는 것을 제가 남성중심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상당히 이걸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요. 남성중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레위기 21장 7절에 보면,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사장이 결혼하거나 재혼할 때는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이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여인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이라는 것을 몸으로 규정하는 겁니다. 육이 아니고 몸으로 규정하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 이방 여인들이 지나가는 이스라엘 남성을 후려서 자기 신에게 빼돌렸다 했잖아요. 그걸 바알브올 사건이라고 하고 그걸 음행이라 하는데 그 때의 그 남성들이 물론 다 여호와를 믿고 애굽에서 나왔고 다 홍해를 건너 온 사람들이에요.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튜브를 통해서 용서라는 은혜가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음행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보호입니다, 보호. 보호해주는 거예요. 지켜주는 겁니다. 온 이스라엘이 제사장을 지켜줘야 돼요. 제사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쏙쏙 하늘에서 공급해 주는 게 있어요. 그게 피 용서입니다. 여러분 속에 복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여러분이 지켜줘야 돼요. 보호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음행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하고 여자가 물에 빠진다면 누굴 건지겠습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자만 사랑하지 말고 죽도록 너를 구원한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고 이것이 영적세계의 원리거든요. 이것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남자는 유부녀와 통간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뭘 설명하느냐 하면, 영적세계의 영역으로 넘어가려는 의도를 굉장히 강하게 갖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용서의 계시가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전달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성을 통해서 여성에게. 남자가 일종의 메시아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요. 다윗 같은 경우에도 분명히 결혼했던 사람과 두 번째 결혼을 했거든요. 그 경우에는 일단 그 여자의 남편이 죽어줘야 돼요. 죽여주는데 누가 죽이는가 하면, 하나님이 죽여주고 그 다음에 과부된 그 사람과 다윗이 결혼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어떤 여인이 남편과 혼인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찾으면 간음이 되지만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요.
육적인 우리가 들을 때는 이것이 사적인 결혼문제로 느껴지지요? 로마서 7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성령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움직이는 계시라면 이스라엘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기 위한 계시의 도판, 계시를 그려내는 모자이크 같은 역할, 하나의 배열의 역할로서 그 위치를 갖고 있어요.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적인 사랑을 어떻게 불태우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내 안에 스며져 있는 이 구원의 복음을 어떤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걸 지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는 지금 이런 식으로 확인되어 있다는 확인절차입니다. 이미 영생 얻기로 작정된 사람이기에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가 있고 그 계시에 의해서 그 사람이 죽거나 살거나에 관계없이 그 사람은 영생 얻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 가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의 역할 때문에 그런 겁니다. 따라서 음행이라 할 때는 반드시 이것이 확인 차원이라,
‘아, 세상을 좋아하는 이것이 음행이구나.’ 또는 더 나아가서 나를 좋아하는 것이 음행이라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이름을 위한 연출이거든요. 평생 모든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니까. 그것이 음행이고 그것이 육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겠다는 그것이 뭐가 나쁜가?’ 그것이 음행이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 거기는 아무 복음적인 요소가 없어요. 그저 돈 많고, 인물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날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했다. 그게 음행이라니까요? 그 앞의 조건에 뭐가 빠졌습니까? “나 죄인입니다.” 이게 빠져 있잖아요. 제발 날 죄인이라고 확인해 줄 그런 남자 만나고 그런 여자 만났으면 좋겠어요.
슬기로운 아내는 어디서 온다고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 이 결혼 자체가 구출작전이에요. 결혼이 그냥 결혼이 아니고 이 음란한 세계에서, 큰 성 바벨론에서 사람을 건지는 방법 중에 하나가 결혼입니다. 여자들? 아니에요. 남자들. 남성 중심이니까. 남자가 복음 아는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곧 본인이 구원받는 계기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래서 아내는 그냥 우리 일상의 사랑이 아니에요. 확인 차원이라니까요, 확인차원.
오늘날 성도에게 이 두꺼운 성경전체는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또 복음이 나가네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차원이라니까요, 확인차원. 음행 안 해서 천국가야지, 이런 것은 없어요. 나는 음행했으니까 지옥 간다, 그런 것도 없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아들은 음행이라는 이름의 쓸데없는 일을 한 겁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일을 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바람피우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에요. 사소한 일이라는 말이 아니고 진짜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뭐보다 중요한가?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거지요. 그게 뭐냐? 네가 죽어도 산다는 것을 왜 까먹어 버렸느냐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신 것은 개인이 어떻게 훌륭한가, 얼마나 한 여인에게 충성을 다 했는가가 아니라 네가 풍덩 빠진 이 세상 그 자체가 이미 네가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고 버리는 그 세상 속에 풍덩 빠져놓고 남자하고 여자하고 사랑하는 그 일만 전부인줄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진짜 세상이 거꾸로 되었어요. 이쪽에서 저쪽을 보는 아닙니다. 저쪽에서, 천국에서 우리를 보는 그런 눈이 열려야 돼요. 그래서 음행은 지옥 가는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음행은 “주님이여, 사랑해도 좋을까요?” 하고 자기 쪽에서 주님을 본 거예요.
주님 쪽에서 볼 때는, 너는 네 육을 보호하지 말고 네 몸을 보호해야 돼요. 육이 아니고 몸을 보호해야 돼요. 세상은 음녀에요. 음행이에요, 그 자체가. 나밖에 모르는, 나의 사랑밖에 모르는. 어떻게 피합니까? “화살이다! 화살이다!” 여자 피하면 남자가 달려듭니다. 세상 전체가 저주받고 불의한 거예요. 세상 더럽다, 악하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정답 아니에요. 그것은 나만 착하다는 또 다른 표현일 수가 있거든요. 주께서는 그것이 아니고 “너도 마찬가지인데 너는 어떻게 거기서 건짐 받았느냐? 네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어야 된다.” 주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지 아니하면 뒤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7장 같은 경우를 설명하면 제가 욕을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라.”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함부로 이야기합니까? 결혼을 앞두고 선보러 다니는데 “혼자 지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 왜? 결혼하게 되면 주님을 덜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들이 뭐냐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한테는 육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우리가 몸이 된다는 거예요. 육이 아니고 몸이에요. 뭔가 우리 속에 우리가 보호해야 될 것이 있어요. 나를 구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호해야 됩니다. 우리가 보호할 능력은 없지만 주의 능력으로 보호케 하셔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저 여자 아니면 죽을 거야.’ 그렇게 하지 말고 ‘주님 아니면 죽을 거야.’ 왜 그렇게 못 바꾸느냐는 말이지요. 만약 어떤 여자를 너무 사랑하는데 그 여자 때문에 자기가 죽고자 한다면 그 여자가 정말로 슬기롭고 여호와가 파견한 여자라면 “당신은 날 위해 죽지 말고 주를 위해 죽어.” 이러한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어야 되겠지요.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보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지고 노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지요. 사실은 이것이 모든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제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우리 자체가 이미 교회입니다. 교회는 보호해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주의 복음입니다. 이게 택한 백성이에요. 음행 했니 안했니, 그런 것으로 자랑질 하면 안돼요. 이미 우리가 육이 아니고 몸이라면 영적인 주님의 능력 속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서로가 죄인이고 못난 사람이며 주께서 살린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 안에 들어 있는 주님의 복음을 끄집어낸다면 그것처럼 이상적인 가정, 다시 말해서 이상적인 교회가 또 없을 겁니다. 자기 가정부터 교회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증거 되고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이거 언급해야 돼요. ‘내가 못났다는 것, 내가 못났는데 주님이 붙여주시니까 당신이 이렇게 빨래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참 고맙다. 라면 하나 못 끓이면 어떤데? 내가 끓이면 되지.’ 그런 마음. 항상 자신에게는 과분하다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이미 그 가정 속에서 새록새록 봄날에 주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주의 능력이, 주의 천국이 영적인 차원에서 덮쳐져 있는 가정인 겁니다.
이미 음행함 속에서 같이 합세되어 있는 세상적인 인간, 육적인 인간을 주께서 복음 주셔서 건져낸다는 이 하나님의 작업을 한시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