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실패

아빠와 함께 2022. 1. 6. 17:13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이걸 확장시킵니다. 크게 키워나가요. 전(全)우주로 다 키워나갑니다. 큰 영광 중에 우리가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오는 음성을 들었다 하는 이야기, 나중에 샛별이 떠오른다는 이 모든 이야기는 ‘베드로, 나 자신의 변화와 연계해서 주님을 증거한다’는 거예요. 나 자신의 변화와 연계해서, 연결 지어서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내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주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내용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내 자신의 변화를 내가 시도한다,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이게 기만이고 하나님 앞에 속인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내가 시도한 일은 하나도 없고 다 내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 결부되어서 나에게 이런 파도가 밀려오고 물결이 밀려온 거예요. 그 사실을 베드로 자신의 변화 속에서 베드로가 발견하고 체험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설득하지 않아요, 우리를. 달래지도 않습니다. “그래, 너는 네 길로 가라. 나는 내 할 일 할 테니까.” 이래서 구원된 거예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쳐라! 내가 네 짱돌에 얻어맞을게.” 너의 그 딱딱함, 너의 완고함, 너의 마귀적인 것, 내가 그 모든 일을 구원하는 데에 천국 백성 만드는 데에 효과적으로 내가 써먹을 거야, 그거. 네 심성을 내가 써먹을 거야. 그렇게 해서 찾아온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는 유구무언,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주님은 나를 알아도 나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주님을 보고 주님과 식사하고 주님과 온갖 말 주고받고 고난을 따르겠습니다, 뭐 백날 해도 그것은 베드로가 내가 뭔가 되고자 하는, 꿍치고 싶은 자기 의도로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봐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알아본 거예요, 주님이.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두 번째 주님이 찾아왔을 때,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왔을 때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님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 본인이 본인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3년 동안 따라다녀도 몰랐더랬습니다.’ 라는 이야기.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 예수님을 배신한 그 일까지, 주님 자신의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대신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처리할 내 문제는 일체 없습니다.
주님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께서는 나는 나만 알고 주님은 몰랐다는 인간으로 변화시켜서 베드로를 구원하는 겁니다.

(벧후1;19)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개역한글)  We have also a more sure word of prophecy; whereunto ye do well that ye take heed, as unto a light that shineth in a dark place, until the day dawn, and the day star arise in your hearts:(KJV)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이, 모든 되어지는 일이 나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그 사실을 우리가 나의 변화와 동반해서 알려면 부지런히 내 일은 내가 챙겨야 돼요. 부지런히 열심히. 주님 찾아오게 되면 바로 그 이야기하세요. 나는 나밖에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그 이야기할 때 무슨 의미가 강하게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샛별이 떠오른다는 말이 비로소 의미 있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르는 거예요.
이 샛별의 특징은 나의 어둠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이” 오는 거예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변명 하지 말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라. 그게 합당한 구원의 신앙고백이에요.
샛별은 소유용이 아니고 저쪽에서 나를 비추는 용도에요.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신경 쓰라고 비추는 게 샛별이에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하심을, 주님의 주님 되심을 저항하고 밀쳐내는 그런 속성인 것을 이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주님을 밀어내는 그 힘밖에는 안 나옵니다. 주님의 그에 대한 답변은 이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나를 밀어내는 그 힘이, 그 작용이 네 문제가 아니고 바로 예수 내 문제이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 샛별이라는 말은 자기 인생,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고 그때 고기 잡을 때 다시 찾아왔던 그 절차,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설정하신 그 절차를 딱 샛별로 해서 준 겁니다. 샛별로 줬을 때, 어둠을 밝히는 이 샛별이 지금 베드로에게는 아주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운 거예요. 내가 내 일, 인생에 대해서 정리하거나 수습할 생각을 완전히 가시게 만드는 그런 상태, 그것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샛별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고민이라든지 염려라든지 걱정, 이런 게 완전히 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결국 샛별로 재편성하는 겁니다. 나의 세계가 샛별로 재편성돼요. 샛별로 재편성되면 나는 지독한 어둠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지독한 어둠의 역할.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역할을 우리에게 맡긴 거예요.내가 이정도로 악한 역할이었을까? 본인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놀라면서 한쪽에선 기분 좋은 거예요. 그 기분 알아요? 악한 역할은 누구보다 지지 않는 악한 역할을 하면서 속으로 ‘다행이다. 주여 이런 역할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역할도 없어서 지옥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이런 악한 역할을 하면서 “주님, 악해도 이건 너무 심한 역할인데......”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모든 것은 네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다.” 나의 나됨을 위해서, 내가 너에게 찾아간 그 취지를 위해서 너는 그 역할을 감당해야 되고 담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참 하기 싫은데 주님이 시키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일을 해야지.’ 하면서 악한 일을 할까~요? 아닙니다. 아주 신났어. 신났어. 평소에 악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좋은 구실 있잖아요. 잘됐다 싶어가지고 뭐 신나게 하죠, 신나게. 내가 너무 막 가는 게 아닌가. 역할인데 너무 신난다. 이거 너무 신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또 들 겁니다.
영광스러움과 졸지에 별세하는 것과 조화가 안 되잖아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연결이. 영광스럽다는 말은 어떤 힘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고 있거든요. 공격력도 갖고 있고. 죽으신다는 말은 허약성, 방어할 것이 전혀 없음이 돼요. 자기가 자기를 지킬 어떤 여력이 없다는 뜻이 되거든요, 죽었다는 말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이라는 그분의 이미지를 대할 때 열두 제자가 오해한 그 오해를 모든 인간은 전부다 같이 다 체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한테 이익이 되고 유리할 것 같아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변화됨과 엘리야와 모세, 세 분이 별세에 대해서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열두 제자들은 감히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에 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잘되는 쪽으로 생각해야지, 왜 망해서 죽어버리는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 주님을 그렇게 생각할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그걸로 인하여 예수님은 죽었고 그 죽음 자체를 예수님은 ‘제자야, 그건 네 문제가 아니고 이건 나의 문제다.’ 라고 간주하셔서 주께서는 외롭게 다 떨쳐버리고 누구의 후원도 없이 도움도 마다하시고 홀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어둡다는 그런 역할을 제공하신 분이 진짜 주님이에요. 나를 죄인 되게 하신 주님. 나에게 죄인 역할을 제공하신 주님. 이 대목에서 여러분, 신나야 됩니다. 그 죄인 역할, 그건 안 배워도 잘 해요. 타고났으니까. 나는 내 것만 챙기는 그 속성을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어요. 인간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나만 챙기는 그 죄, 그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샛별이 떠오를 때에 그때 일어난 변화는 이 세상 전체가 한꺼번에 샛별과 더불어서 이 세상 주변의 어둡던 것이 한꺼번에 다 밝혀져요. 그러면 인간이 기존에 알던 대자연의 세계가 아니라 말씀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 나는 서울에 산다, 이거 아니거든요. 나는 말씀 세계에 살아요. 서울에 살게 되면 남의 눈치를 봐야 돼요.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서는 눈치보고 사는 입장이 아니라 이미 주께서 다 알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눈치 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의 세계에 살아요. 서울에 살아버리면 여기에 선악체계가 작용해요. 윤리도덕이 여기에 작용합니다. 말씀 세계는 선악체계를 뛰어넘은 세계에요. 윤리도덕을 뛰어넘은 세계라고요. 더 이상 우리를 닦달 내는 세계가 아니에요, 이 말씀 세계가. 어떤 세계냐 하면 로마서 4장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의롭게 만드는 세계가 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언약의 세계이고. 아무 한 것도 없는데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거예요.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것처럼 점점 더 사방이 밝아오기 시작하니까 모든 것이 말씀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그 말씀의 세계의 핵심은 예수님 살해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인당하는 사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한 거예요.우리는 무슨 이야기하고 있어요? 백신 맞았어요, 세 번째? 뭐 이런 얘기. 예수님 이야기 안하고 자기 살 궁리 챙기고 있는 거예요, 살 궁리를. 그러니까 이 말은 관심사가 말씀의 세계에 있지 않고 서울에 살고 있다, 왜 자꾸 여기에 관심을 두느냐 하면 서울에 산다는 이 말은 시간과 공간을 우리가 못 벗어나서 그래요. 서울이라는 공간, 지금 나라는 현재, 이것을 벗어나지 못해서 그래요.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란 이미 죽은 나를 둘러싸는 삼베옷이다. 시체를 둘둘 싸는 삼베옷이 시간과 공간이에요. 시간과 공간은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죽었단 말입니까, 살았단 말입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거예요. 어디에? 말씀의 세계에. 시간과 공간을 바꾼다는 말은 무엇을 바꾼다고 했던가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다는 것은 선악체제에 얽매인다. 선과 악, 내가 선할까, 악할까 맨날 점검하는 그 환경에 빠져버린 겁니다. 자, 선과 악의 환경에 빠져있는 데에서 그걸 하나님께서 빼내는 방법은 주님께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우리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우리를 아예 시체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죽었을 때 우리도 함께 죽게 하거든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우리도 같이 죽게 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죽었을 때에 그 죽은 자를 죽었다고 이야기해도 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같이 죽는 나의 효과로 인하여 너의 죄는 용서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용서받은 인간은 기존의 내가 아니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주님의 죽으심에서 그것도 새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주님의 용서하심의 내용이 거기에 같이 결합되어있는 상태. 
그러니까 주님은 자기 용서를 사랑해요. 자기가 벌였던 용서하심을 사랑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말려든 것이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죠. 베드로가 죽어야 될 이유가 뭐냐. 베드로가 나쁜 짓, 악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작동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어떤 일을 해도 죽어야 되는 거예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하는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고자 노력하는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신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적대적인지 아시겠죠? 복음에 반대적인지 아시겠죠, 덮쳐야 됩니다. 샛별이라는,  새로운 환경, 시간과 공간 자체가 없이 그게 말씀으로써 덮쳐야 돼요. 비가 어느 때 오느냐 하면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공기 위에 덮칠 때 비가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비라 하는 것은 하나의 효과이고 원인은 따뜻한 공기가 차가운 공기 위에 올라탄 거예요. 비는 나중 문제라니까요. 우리가 구원의 비를 맞는 것은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에 그것을 펼치기 때문이에요. 주님 자신의 일이거든요. 서로 대비가 되는 자신의 일. 위에서 내려올 때는 죄인으로 오셨다가 올라갈 때는 의인으로 올라가시는, 본인 안에서 내부적으로 상반된 그 일의 효과가 우리에게 용서와 구원과 천국 백성 되게 하는 모든 사랑이 여기서 다 나오는 겁니다. 주로부터 시작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선과 악을 아는 것 자체를 자기는 이미 선으로 규정해놓았어요. 그러니 자기에게는 하자가 없는 거예요. 선도 알고 악도 알았으니까. 이건 하나님만 아는 것을 우리도 같이 알아버렸으니까 더 이상 하나님이 나한테 지적할 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내가 나쁜 사람 안 되기 위해서 내가 지적하면 끝날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뭐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철저하게 선악체제를 답습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래서 이 성경 전체가 율법적으로 기록된 거예요, 사도 바울의 명령이나 지시가.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나요.아니죠 왜? 모든 말씀, 모든 성경 구절 내부에 십자가 살인사건이 들어있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성경 구절 밑에는 말씀의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말씀의 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말씀의 세계가 드러날 때는 필히 예수님이 피해자의 모습으로 드러나요. 이것이 십자가 살인사건이에요. 너 죽으면 우리도 같이 죽겠습니다, 이것은 선악체계에요. 일종의 오기이고 객기입니다. 인간은 이미 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선악체제가 있죠. 선악체제를 따먹은 자가 아담이죠. 그럼 아담의 후손은 선악체제를 인수인계 받습니다. 인수인계 받으면 선악체제를 행하는 당사자가 누구에요? 본인이죠, 본인. 이 본인이 선악체제의 주인공이잖아요, 주인공. 그러니까 이 주인공 앞에 말씀이 등장하게 되면 어떤 지시와 명령이 떨어지게 되면 누가 마중 나와서 누가 그걸 지키려고 하겠어요? 본인이 나서죠. 본인이 나서는 거예요. 이 짓을 누가 했느냐? 이 짓을 바로 베드로가 한 거예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생명체계에서는 한 분이 값을 치름으로서 모든 사람은 값없이 의롭게 되는 법칙만 통하게 되어있어요. 성령의 비가 주룩주룩 오잖아요. 우리는 주룩주룩 오는 비에 파묻히죠. 선악체제에 주님의 생명의 은혜가 완전히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겁니다. 덮치는 거예요, 이게. 샛별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베드로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1:2)
성령, 예수님의 피 뿌림, 택함 이 모든 외부인의 활동에 대해서 우리 쪽에서 손 댈 수 있어요, 없어요, 이 외부적인 활동을? 그냥 받기만 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외부적인 활동을 외부적인 활동으로 계속 누락이 없이 그걸 드러내야 될 필요가 있죠. 그걸 끊임없이. 말씀세계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낚시놀이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야, 올라와. 이러지 않았잖아요. 누가 왔잖아요. 하늘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왔죠. 내려오셨죠. 내려오셔서 선악체제의 피해를 직접 체험하셨잖아요.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가 율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성전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자신이 구름 타고 온다고 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내부에 인간들의 선악체제에서 나온 이 화근, 문제점이 예수님 몸에 그대로 담겨있죠. 담겨있는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으로, 말씀세계이니까 쏟아내어 버리는 겁니다. 너희들 이거 지킨다고 그렇게 내 복음을 안 믿었잖아,  십자가 살인사건을 고려치 않고 그 짓  했잖아. 하고 쏟아내는 거예요. 그게 모든 말씀 안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이지, 결코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20절 봅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이 대목이에요. 자, 이 대목, “사사로이 풀 것이” 그다음에 뭡니까? 뭐라고 되어있죠? “아니니”라고 되어있죠. 그럼 이 뜻을 알려면 사사로이 풀었던 경험이 인간세계에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말하는 의미를 내 쪽에서 받아들이면 내가 재해석하는데, 재해석이 사사로이 푸는 건데요, 사적으로 푸는데 여기에 선악체계가 작용한다니까요, 선악체계. 사사로이 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해석은 내가 구원받기 위한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는 그러한 해석이죠. 그럼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로 하여금 일단 인간들이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안을 인간 쪽에서 하도록 주께서 허락하죠. 그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통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성경해석이에요.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만큼 더 정확한 성경해석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성경해석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다,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했다, 그것도 은혜로. 우리가 그냥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우리 인간들의 해석을 가미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고 우리는 어떠한 것도 가미하지 않았다는 그 해석이 바로 너의 해석이 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성경을 해석하는 이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필수적인 착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착한 일을 내가 지금 시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하나님 잘 믿겠다는데 이게 왜 죄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해석의 핵심은 십자가죠.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성경해석을 할 때 우리는 우리를 경유할 필요가 없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게 아니고 없던 데서 있게 하고 살아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죽게 해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체계입니다. 
스쳐지나가고 그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거예요. 그때 베드로는 샛별이 떠올랐다. 내가 나를 해석해왔었다, 그동안. 마치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했다. 그래서 나는 헌신을 다하여 노력했다.이 땅에 야곱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없어요. 그러나 야곱으로 인하여 싸움해야 됐던 그 천사의 희생을 근거로 해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겼다. 이겼다, 와! 하고 보니까 이긴 자가 자기를 축복해야 될 하나님을 야곱이 이겨버린 거예요. 야곱은 하나님의 적이 된 겁니다. 하나님을 싸워서 이기는 순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하나님의 적이 되게 만들어가지고 살 자격도 없게 만들어버렸죠.
자기 아들, 죄 없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은 뭐로 만들었습니까? 죄 있는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말로 때웠습니까, 십자가에 실제로 죽게 했습니까? 실제로 십자가에 죽게 했죠. 그로 인하여 살아있는 채로 살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꼼수는 다 실패로 끝나게 만들었어요, 십자가 앞에서. 살아있는 자가 복음 알고 살아있는 자가 어떻게 기도해서 구원받겠다는 꼼수는 십자가 앞에서 전부다 허상이 헛짓한 거예요. 소용없어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성령은 죽었다가 산 분의 영이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냐 하면 죽은 자도 살려내는 능력이 있거든요. 그 능력이, 성령이 임해버리니까 그다음부터 우리는 능력에 의해서 깨보니까, 뾰로롱~ 하고 깨보니까 값없이 구원받아버려요, 값없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왜 값없이 구원받지? 행한 것도 없이 의롭게 되어 버렸어요. 뭐 이런 수가 다 있어?

그러고 난 뒤에 우리 자신의 일과 앞으로 남은 우리의 육신으로 해야 될 모든 것을 이미 구원받은 십자가와 대조하면서 살게 만들어 버려요. 대조하면서 어떻게 사느냐. 성경 말씀을 주는 겁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절제를, 이렇게 하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선악체계의 육신으로 해보려고 하면서 그게 전부다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을, 심지어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실패다, 하는 실패로 끝나게 하시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냥 싱긋이 웃고 감사하죠. 내 믿음이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만약에 내 믿음에 내가 성공해보세요. 믿음에 성공한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될 게 아니겠습니까? 너는 실패했지? 나는 성공했다! 하면서 외칠 것 아니겠습니까? 뭘 해도 실패할 수 있는 이 자유. 성령이 아니면 누가 알겠어요?  나를 덮치는 십자가! 내가 아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나에게 매일같이 소용없는 짓을 했다고 덮치는 그 십자가. 성령이 이끄는 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에요. 따라서 구원의 능력을 받은 자로서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우리는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야,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너를 이끌 것이다.” 네가 원치 않는 길.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가 나라는 것이 개입될 때가 언제인가 하면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될 때 내가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그 일에 우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이의 달고 막 달려들었습니까? 아니죠. 주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선악체계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냥 주님이 주시는 그것을 사과나무 향기로써 만끽하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실패를 보면서  흐뭇한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나의 실패를. 그런데 실패를 미리 하면 안돼요. 실패를 미리 예상하는 것도 나의 뜻이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내가 원하는 실패를 그것도 내 뜻대로 안 해주고 다른 실패로 대체해주십니다.  

'내 생각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싯딤골짜기  (0) 2022.01.07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  (0) 2022.01.06
나의 일은 없다  (0) 2022.01.02
확인차원이란?  (0) 2022.01.01
속아 주어라2  (0) 202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