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속아 주어라1

아빠와 함께 2022. 1. 1. 10:15

‘속임’이란 자신을 고정적 존재로 인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즉 “나는 한결같기를 원하는데 네가 뭔데 감히 나를 흔들어 그동안 터 잡은 나의 정립을 혼란스럽게 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앎은 지식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 속에서 참된 진실됨을 직접 심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어떤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의미와 목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예수님뿐입니다. 그 외는 모두 독자적으로 무의미합니다. 마치 유원지에 설치되어 있는 회전목마에 올라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같은 풍경, 같은 모양새만 반복해서 보게 될 뿐입니다. 나사못처럼 회전축이 자기 자신으로 고정되어 이상 여전한 동일한 풍경만 상상할 뿐이고 확인할 뿐입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그런 겁니다.

마지막 때에 성도가 출현합니다.
‘나를 위하여’가 근원적으로 차단된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취’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이 내장된 신적 요소로 인하여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임을 자인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때의  ‘십자가’라는 절대적 기준에 준해서 용납하지 않음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속임수란 바로, 자기 안에 남들이 원하고 있는 바가 들어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에게 꼭 필요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쉬지 말고 타인을 속여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담을 정신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그 모든 것이 자기 잘남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나며 그 업적은 자아 정체성 창고에 보관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로를 위하여 소중하게 쓰실 재료가 됩니다. 구약에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야곱을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도리어 속임을 당하는 하나님’이 바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희생당해야 하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마저 속이는 현장이 하나님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계속해서 관여하여 야곱으로 하여금 라반 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야곱은 지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속임수와 속임수의 배틀이 이루어지는 야곱 인생을 하나님이 진행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서 밤에 찾아갈 때, 야곱은 자신의 속임수 있는 인생 전체를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식으로 확정된 티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낯선 방문지와 죽도록 밤새 싸우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입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본인뿐 아니라 아무도 지켜 줄 위인이 없습니다.
이 야곱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옛적 살던 동네입니다. 이 동네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면목을 되풀이하면서 주님의 용서하심을 되풀이하면서 증거하게 됩니다. 우리의 위선적 가면이 환경과 더불어 원치 않고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우리를 지켜보신 낯선 시선을 느끼게 됩니다. 마태복음 17:4에 나오는 변화산 기적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소감을 밝힙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더 이상 속고 속이는 것조차 의미없는 세계에서 성도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은 자의 삶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 위선없이 살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이 마치 존재할 가치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인 십자가를 늘 새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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