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속아 주어라2

아빠와 함께 2022. 1. 1. 11:1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고전6:6-8)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그 진리라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리를 거부하는 세상 재판관 앞에서 “진리를 우리사이에  판단해 주세요.”라고 설 수 있느냐고 답답해하는 겁니다. “그러고서도 형제냐? 예수님의 형제고 너희들끼리 형제냐?” 묻는 겁니다.

“물론 주님이 진리지요. 하지만 저는 재산 손해를 봤습니다. 나는 바르게 했는데 저 형제가 나를 속였습니다. 내 것 손해 봤으니 받아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송사했습니다. 재판하는 권력은 판사가 갖고 있으니까 제 권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진리를 안다고 하는데 왜 그게 현실적으로 반영이 안 되느냐.” 

예수님의 진리가 너희 생활 속에 파급이 되어야 너희는 하나하나가 주님의 형제라고 인정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진리가 뭐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하는 겁니다. 차리라 속는 것이 낫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것은 성도 본인 나름대로의 자기의 가치나 의미를 따로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따로 나름대로의 나의 가치나 의미를 챙기려 하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나에게 손해를 주느냐? 나도 가만있을 줄 아느냐? 같은 교인이지만 소송해야 되겠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세상에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존재의 이유가 없고 목적도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목적이 있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은 없습니다. 속임수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바로 나한테 어떤 존재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데서부터 남을 속이기 시작해야 되고 또 속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아무리 살아 보세요. 우리는 왜 사는지, 왜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지의 이유를 우리에게서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발견할 수가 없고 가질 수가 없습니다. 깔끔하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는 이유나 의미가 없습니다. 아예 인생의 목적이나 존재의 의미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이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중앙에 있고 우리가 그 주변을 돌고 있는 겁니다. 세상 모든 변화는 다 예수님을 위해서 있지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우리가 살아도 혹은 죽어도 주를 위해서 살기도 하고 주를 위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스겔 24장 18절의 이런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에스겔의 아내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악에 받쳐서 막 하나님께 대들었을 거예요.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는데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가게 되면 내가 무슨 의욕을 가지고 일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하고 악이란 악은 총동원시켜서 대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에스겔은 담담합니다. 왜? 자기가 태양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태양이 아니거든요. 나는 별이 아니고 나는 태양을 도는 행성에 불과합니다. 이 발상의 전환이 되는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 형제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본문 고린도전서가 신약이잖아요. 여러분은 그냥 보지만 이 본문이 신약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구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있어요. 성경 후반부에 있습니다. 신약은 마무리, 끝 지점에 나오는 말씀들이에요. 끝 지점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을 지연할 아무런 이유가 없이 모든 것이 마무리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끝 지점에 나올 예수님의 형제, 예수님의 몸, 지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미 죽음 속에 갔다가 튕겨져 나온 사람이에요. 그러니 죽기 전에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사람을 가지고 형제라,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신약이에요. 그런데 신약을 볼 때는 죽음에 의해서 튕겨져 나와야 하는데 아직 튕겨져 나온 일이 없이 아직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냥 신약을 보니까 성경을 봐도 전부 육적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의 요한계시록 해석이고 그게 육적인 해석이 되는 겁니다. 살아보려고 하는 것.  

구약은 선언이고 신약은 성취에요. 구약에서 “네가 십계명을 어기고 범죄 하면 죽는다.” 했고 신약에서는 “너는 그래서 죽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죽음을 성취시킨 거예요. 무슨 목적이 있고, 무슨 목적이 이끄는 삶이 있고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튕겨져 나왔는데요.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불과합니다. 회전목마까지 갈 것도 없이 어린애들 놀이터에서 빙빙 도는 것 타고 돌아보세요. 아무리 돌아봐도 주변 환경이 그냥 반복해서 돌 뿐이에요.

주께서 마지막 때 일을 벌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네 체제 안에 담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가 주님 주위를 도는 하나의 행성처럼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미 죽은 자로서 다시 이 세상에서 파견근무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와 보면 옛날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 놀던 동네에요. 다 알아요. 이미 어떤 인간이 어떤 노력을 다 해도, 교회 다니고 목사 장로가 되어도 구원 못 받는다는 것을 이미 안 사람이 다시 교회 다녀야 됩니다. “실례합니다. 아이고,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이런 식으로. 구원 받은 자의 여유? 구원받은 자의 여유로 가야 돼요.
이게 바로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 “속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아니하냐.” 하는 이 대목을 육신으로 해석하지 말고 신약 때 성령 받은 영으로 해석돼야 돼요.

육신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형제가 속이더라도 이미 너는 가진 자니까 차라리 속아줘 버려라. 그러면 그 형제와 네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 몸을 이룰 것이 아니냐? 참는 사람이 이긴 자다. 그렇게 생각해라.” 그게 바로 육신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러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절대로 인간이 양보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통합되지 않습니다. 형제로 하나 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네가 차라리 속아줌으로 말미암아 저쪽 상대방이 나를 속일 때 ‘나는 저 사람을 속여도 저 사람은 나를 안 속이는구나.’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안심 푹 놓게 해줘야 그 다음부터 내가 마음 놓고 저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영적인 해석이에요.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할 때 너라는 존재는 매일 같이 속지 아니하면 너는 살 수 없는 인간으로 이미 확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속이지 않는 분은 주님 한 분으로 족하지 너까지 속이지 않는 사람으로 행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 속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습니다.”

사람이 왜 남을 속여야 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신적인 말씀, 율법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지요, 그 법을 우리 속에 집어넣으면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요소가 우리한테 잠식되는 순간 그야말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신약에 와서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찾고 있어요. 거기서부터 남을 속일 때 어떤 취지로 속이느냐 하면, 남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귀한 것이 마치 나에게 있는 듯이 행세하면서 남들을 속여 나갑니다. “너희들 나 무시하지 마라. 너희들이 찾고 있는 것이 나한테 있다.” 너희들이 나에게 잘해주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고 못해준다면 너희만 손해지, 라는 식으로 행세하는 그 보람으로 인생 살아갑니다.
그게 뭐냐? 그게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억지로 만들어낸 존재의 의미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괴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래야만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는것이 명확해 지니까요. 주님의 자기의 명예와 관련되어서 이 신약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해라. 왜? 너는 당해도 싸니까.” 그게 정답이에요. 오늘 본문의 정답.

“참아라. 참으면 언젠가는 너에게 감동이 올 거다.” 그게 정답이 아니에요. “내가 양보할게. 그래, 네가 이겼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기를 사기 처먹은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네 돈은 처먹었지만 저 사람은 인간성 하나는 좋더라.” 이렇게 되고 그리되면 “내가 인간성 괜찮은 사람 아는데 나한테 사기당해 놓고 재판도 포기하고 ‘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해서 나한테 없는 게 그 사람한테는 있어.”라고 내가 그 쪽을 속이는 셈이 되잖아요. 참 복잡합니다.

선언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성취는 주님이 하시고요. 잊지 마세요. 선언은 주님이 하시고 성취도 주님이 하시고.
선언한대로 하시는데 그 선언에서 성취로 바뀔 때에 내가 정하는 기준을 빼버리고 주님이 주신 기준을 집어넣습니다. 그 대표적 기준은 뭐냐? 선악과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그 기준은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파고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일방적으로 죄인 돼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우리 죄를 용서하려고 죽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로 죄 짓게 해서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만의 공로를 높이기 위해서, 곧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말씀을 주신 겁니다. 왜? 주님이 태양이기에. 우리는 태양인 주님을 도는 하나의 지구에 불과해요. 그래서 내 중심으로 내 의미를 생각하면 안돼요.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남을 속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남을 속여야 돼요. 그 속이는 현장이 뭐냐? 고된 노동의 현장입니다. 고된 노동의 현장에 우리는 던져져서 속이는 것에 점차 단련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속임의 달인이 되는 거지요. 애들은 속이는 것도 유치해요. 빵 먹지 말라고 했는데 빵 먹어놓고 엄마가 “빵 누가 먹으라고 했어?” 하면 “엄마, 나 빵 안 먹었어. 동생이 먹었어.” 하는데 입 주변에 온통 허연 빵 가루가 묻었어요.
속이는 난이도가 높을수록 이 세상에서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에요. 감언이설로 속이는 사람치고 인간성 나쁜 사람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잘 속이는 사람은 다 인간성이 좋아요. 그런데 꼭 어설프게 속이는 사람, 노동의 현장에서 속임수에 숙달되지 못한 사람은 직접적으로 속이려 들기 때문에 후안무치하달까, 짐승 같은 인간으로 취급당해요.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비판적인 사람이 인간성 나쁜 사람이거든요. 성경에서 제일 인간성 나쁜 사람이 예수님이고 인간성 제일 좋은 사람이 가룟유다입니다. 안 그런 척 할 수 있는 노하우가 그만큼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양심적으로 인간성이 좋았으면 자살을 다 해요.
타인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가치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난이도를 조절하고 그 수완을 계속해서 개발해 나갑니다. 사람이 혼자 못사는 이유는요, 계속 자기가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은 자기 가치를 자랑질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졌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사람이 못살아요. 꼭 누구를 만나서 자꾸 속여 줘야 돼요.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속이는데서 사는 재미를 느끼는 겁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할 때의 그 진리는 “네가 너 자신을 중심에 놓고 백날 진리를 외쳐봐야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나를 향하여 속여라. 나를 속여, 나를. 나를 속이는 그것이 너의 구원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남 속이지 말고 나를 속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속아 넘어가 줄게.”

이게 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이에요. 이삭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식들에게 복을 전수할 때 거기 공모자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7장 11절에 보면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찐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찌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이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이 어두워서 마지막 유언을 하면서 “나에게 별미 가져온 자식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겠다. 그리고 나머지는 저주하겠다.”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그걸 듣고 어머니 리브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야곱과 공모해서 아버지를 속이기로 했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 생각해요. ‘도대체 하나님은 눈 먼 하나님 아니야? 어떻게 인간의 어설픈 거짓말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쉽게 속임을 당하느냐?’ 그 말이지요. 거기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진실과 하나님의 진실이 차이가 거기서 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스스로 희생자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속였던 죄를 죄로 묻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바로 그 방식이에요. 

이 사실은 자기를 태양이라고 여기는 인간들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이런 발상은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구원받은 거요? 우리가 예상해서 나온 발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요? 아직도 그것 가지고 안 돼요. 뭐냐?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복음을 알고 난 이후에 남을 속이는 재미로 살아야 될 그런 인간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복음을 알든, 십자가를 알든, 피를 알든 그런 것 안다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매일 같이 남 속여먹는 재미로 그런 육신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래야 돼요. 교회 좀 나오세요. 교회 나와야 자기가 믿음 좋을 거라고 상대방이 그 속임에 넘어가는 기쁨도 같이 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안 만나게 되면 자기가 진짜 믿음 좋은지 알아요.  


1.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리브가의 공모에 넘어가줍니다. 넘어가주고 속이는 자에게 축복을 해버려요. 이렇게 되면 후대에 어떤 원칙으로 남는가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따내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곧 축복을 지향하기만 해서 결과만 좋으면 수단이 어찌되었든 묻지를 않는다는 전철을 남기는 셈이 되잖아요. 그걸 하나님이 유도했습니다. 왜? ‘야, 하나님의 일에서도 속여서 무조건 내 것 만들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진즉에 가졌어야 돼요. ‘나는 이제 하나님께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께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제 몸과 마음을 다 해서 헌신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야, 하나님마저 나에게 속아 넘어가니 하나님도 만만하다.’ 그런 마음으로 그냥 가야 돼요. 마이 웨이, 죽 나의 길을 그냥 가야 돼요.

2.가면서 그 중간중간에 야곱의 인생에 개입을 하십니다. 이제는 야곱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순서가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전부 속임을 당하는 인생을 살아요. 그리고 야곱은 거기에 대해서 또 삼촌을 속입니다. 야곱 이름 자체가 속이는 자에요. 속이는 인생, 바로 우리의 본 모습으로 역사 속에 야곱을 먼저 상정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임을 당했지요. 당했는데 그게 하나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래. 속임을 당할게.” 해놓고 야곱과 더불어 사시면서 야곱이 타인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축복이라는 것이 속여서 빼앗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속임을 당하는 그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속였으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속였더니 그 때부터 속였던 나 자신을 주님께서 재료로 사용해서 진실을 찾는 거예요. 진실이란 사기에서, 생명이란 죽음에서, 모든 것을 다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놓고 허무하다고 다 나자빠질 때 그리고 절망할 때 그 속에서 진짜 예상치도 못한 구원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주께서는 사용하시는 거예요.

 

3.그러면 그것이 신약에 와서 어떻게 되는가? 신약의 마태복음 1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변화산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던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 17:4) 미래가 미리 현재 속에 삽입되어 들어온 거예요. 죽음 이후의 사람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산다고 했지요. 이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다.”고 말할 때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시켜도 괜찮았어요.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비로소 그 의미가 다가오지요. 여기 있는 것이 좋은데 남이 나를 속인들, 내가 남을 속이게 되었다고 한들, 내가 남을 속였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남이 나를 속였다고 해서 내 처지와 내가 받아야 될 영광이 훼손되는 것도 아닌 그런 세계, 그런 세계를 주께서는 준비해놓으신 겁니다.


4.‘그 준비된 세계를 우리가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의 그 마음을 가지고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남을 속이면서 속이는 재미로 사는 그 범죄의 현장에서 이 모든 축복이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늘 속이세요. 속이면서 ‘나는 드디어 이겼다. 남 속여먹는 재미가 이렇게 고소하네.’라는 순간 뭔가 뻥, 하고 변화산이 날라 오게 되면 “주여, 나는 여기가 더 좋습니다. 남 속여서 사는 작은 재미, 내가 승리했다는 작은 재미보다도 주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은혜는 주님의 공로가 됩니다.
이것은 내가 그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덮쳐버린 거예요. 나는 아무것도 간직한 것이 없는데 주님이 나를 가져버렸어요. 주님이 나를 가져버리니까 그 때부터 신약, 이 고린도전서 6장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오늘 설교제목이 “속아 주어라.” 왜? “이제는 거기에 네가 신경 거슬릴 것이 없잖아. 여기가 좋다는데. 여기가 좋다는데, 아직도 ‘네가 속였다. 속았다. 이겼다. 졌다.’ 그런 자기 기준을 적용시키지 말고 주님이 마지막 때 택한 자에게 주는 변화산의 원칙을 그냥 받아버리면 나머지 이 인생살이라는 것은 다 의미 없다.” 하는 거예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주님의 의미로 우리 자신에게 덮치는 겁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 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에게 의미 있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5.드라마를 지나다가 언뜻 보니까 김영란이라는 탤런트가 나와요. 그 장면이 저에게 너무나 확 다가왔어요. 오열하고 통곡하면서 뒤에 있는 커튼을 잡아 내리는 장면이 나왔어요. <압구정백야>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잘 키워놓은 아들이 자식도 있는 과부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놀래서 그런 것인데 거기서 제가 뭘 치명적으로 봤느냐?
커튼을 잡아당기니까 그 커튼이 와르르 내려앉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뭡니까? 바로 이 세상은 세트장이에요. 세트장이기 때문에 김영란이라는 탤런트가 잡아당겨도 소품담당이 다시 설치하면 되거든요. 이 세상 주변의 모든 것은 잡아 당겨서 울고 싶을 때는 울라는 말이지요. 웃고 싶을 때는 또 웃고. 세트장을 잡아 당겨도 주께서는 “내 것을 왜 네가 망치느냐?”하고 묻거나 따지지를 않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연극무대에, 세트장에 가두어진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무너질 때는 무너져야지요. 내려앉을 때는 내려앉아야 돼요. 그래야 드라마가 되니까.
그 탤런트가 ‘아까워라. 이거 망가지면 안 되지.’ 하면서 살살 뭐라도 안 망치는 식으로 하면 이 드라마가 살지를 않아요. 그리고 화가 나서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치워라!” 하면서 다 엎을 때 우리 보기에는 ‘아, 저거 설치한다고 무지 고생했을 것을.’ 하고 걱정되지만 연기를 위해서는 그것을 그대로 확 엎으면서 “치워라!” 해야 돼요. 이 세상은 속고 속이는 겁니다.

 

6.그러면 참되다 하는 것은 뭐냐? 참되다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체가 진리를,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거짓을 충실히 행할 때, 비로소 그것이 세트장의 커튼처럼 내려앉고 뭉개질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가 가렸던 진실은 그 현장에 나타나는 법이에요.
“내가 이래서 못산다.” 할 때 ‘어, 이게 바로 변화산이구나. 아, 변화산…….’ “나는 도저히 이래서는 못산다. 갈라서자.”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히죽, 웃어야 돼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무너지는 이 세트장과 더불어서 ‘내가 그동안 나 살기 위해서, 내 존재의 의미, 내 존재의 목적 때문에 얼마나 주님이 주는 변화산의 은혜를 우리가 가리면서 살아왔느냐.’를 다시 한 번 우리가 깨닫게 하는 기회로 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야곱이에요. 인간은 자기 외에는 자기를 챙길 누구도 없다는 것을 명심합니다. 그게 야곱이에요. 야곱은 가는 곳 마다 속임을 당해도 ‘속이든 뭐든 내가 알아서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그게 진실한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을 주께서는 구원해 내십니다. 바로 나밖에 없다는 그것이 가장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만 오직 주님의 공로만,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되어서 하늘나라 갔을 때에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님만 보면서 진심으로 좋아하는, 주님 주위를 늘 돌고 또 도는 기쁨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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