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말씀이 옛 인간을 (그다음에 중요하기 때문에 크게 써보겠습니다)삼켜서새로운 인간을 (또 중요한 말)토해내면된다.”여기 인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인간은 말씀이 스스로 완성하고 성취하기 위해서 제공된, 주님에게 필요한 환경의 일부죠. 주님의 작업장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 안이 그냥 재료가 아니라 재료라 여기는 공간 안에 주님이 아예 들어와 버리거든요.말씀이 한번 들어오고 멈추는 게 아니고 계속 들어오는 이유는 옛 인간이 계속 유지되어줘서 거기서 계속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토해내야 되니까요.
2.옛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봅니다. 환경이 수치스러우니까 수치스러운 것을 메꾸려 하니까 당연히 힘들잖아요. 고생되잖아요. 고생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꾸 피해자라고 자처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인간은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탈구형 육신을 보여줍니다, 탈구형 육신. 예를 들면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이 태어날 때 어디서 태어납니까? 구유에서 태어나죠. 왕으로 오셨잖아요.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이미 그 분이 왕이에요. 왕이 왕궁에서 태어나야 되는데 어디서 태어납니까? 이게 탈구 아닙니까?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소속이 되어버리면 왕의 그 말씀 또는 왕의 소속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자유와 연관되어서 이런 문장이 성립되죠. ‘나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대한 자유는 우리가 선고받은 거예요. 선고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유에 우리가 갇혀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목표를 달성해도 그것은 또 하나의 미흡한 선택지가 되죠. 다음에 또 선택해야 돼요, 나의 자유를.그래서 부재에서 결핍을 느끼게 되어있고 결핍은 결국 우리의 과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옛 사람이고 주님이 새로운 인간을 토해놓는 새 사람의 출발 지점이 이 지점이에요. 항상 옛 인간이 되어야 돼요. 말씀이 우리의 옛 인간에서부터 출발되어야 되는 겁니다.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되겠죠. 율법이 오게 되면 옛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의식하게 되어 있어요.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타이밍이 안 좋아서 그렇고 어떻고 저떻고... 얼마나 변명과 핑계거리가 많습니까?
여기서 한번 봅시다. ‘삼킨다’는 단어 나오죠. 피동적입니다. ‘토해낸다’ 피동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말씀이 시작했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끝내버렸어요. 왜냐하면 옛 인간의 어떤 요소도 새로운 인간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해내지 못하면서도 as if, 마치 된 것처럼 여기죠. 된 것처럼 여길 때 그 시작점이 뭐냐? 자기를 피해자로 여기고 피해자 망상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천하에 고난 받는 사람인 줄 알고 있어요.
3.자, 그렇다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토해내는 방법이 뭐냐? 그 방법은 제가 아까 언급했어요. 예수님 스스로 자기의 몸을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고 죄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그 일을 진행시킵니다. 그러다보니까 옛 사람이 자기를 피해자로 여기는 것과 주님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기는 그들로부터 피해를 받는 진짜 피해자가 된, 이 두 가지가 나란히 가는 거예요, 나란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해석 안 될 수가 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들고 있던 무기는 뭐였습니까? 공중 속의 동굴.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산성이시요’ 있잖아요. 자기 백성을 주께서는 빼내주시는 겁니다. 공중, 허공 속에 있는 동굴 안으로 들여보내주는 거예요.스데반 집사는 죽음으로써 여기 쑥 들어가는 겁니다. 쑥 들어가는 이 동굴 이름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이거 완전 미친 수준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죽였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들 사는 세계에서 추방시킨 거예요. 그래서 동굴 안에서 바깥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씩씩거리면서 짱돌 들고 있는 모습이 그 출입구에서 다 보이는 거예요. 문제는 그 짱돌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자식이나 가족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전율이 일어나죠.
예수 믿는다고 미워하고 복음 전한다고 싫어하는 자식이나 부모나 남편, 아내보고 이 성도가 어떤 느낌이 들까요? ‘고마워요.’ 이게 무기입니다. 나를 당신네들 세계에서 추방시켜줘서 고맙습니다.
4.“호명이 일어나면” 호명 받은 자의 선택은 호명 하신분의 선택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 “박탈의 장”. 인간은 늘 선택한다 했죠. 선택지를 찾죠. 모든 행동에 목적, 노림수가 있다고요. 새로운 선택, 새롭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선택을 노리고 있는데 ‘박탈의 장’ 이 되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실은 ‘비 본래적 선택행위’이었음이 드러나죠. 옛 사람은 늘 선택해요. 옛 사람이 선택한 그 선택지를 하나님께서는 박탈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내 뜻대로 마옵시고”를 모든 자기 백성에게 그걸 현실화 시켜버리죠. 주님께서는 내가 선택한 것을 일체 들어주지 않습니다. 박탈당해야 돼요. 왜? as if, 마치 ~인 것처럼 위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장할 때 그냥 위장하지 않죠. 성경말씀 보고 실천에 옮긴다고 위장하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하는데 ‘자기를 부인하고’ 이걸 딱 보고 실천에 옮길 것처럼 이제 나섭니다. ‘나를 부인하게 해주시되 나를 부인하게 된, 그 부인된 나를 부인하게 하옵소서.’ 라고 우리가 선택을 해요. 인간 쪽에서 선택을 한다고요. 이거 주께서 들어주겠습니까, 안 들어주겠습니까? 이거 안 들어줍니다. 들어주지를 않아요.
그러면 그 말한 것은 무효가 될까요, 무효가 안 될까요? 무효가 또 안 됩니다. 이걸 또 가져와요. ⓐ자기를 부인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가져옵니다. 기도하게 되면 여기서 ⓑ교체현상이 일어나요. 제가 십자가를 이렇게(†) 그리잖아요. 교체현상을 제대로 표현하면 십자가를 이렇게(†) 그리지 말고 이렇게(⍖) 그리는 게 더 나을 거 같아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게 해달라 할 때, 인간은 여기서 예측하고 예상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난 뒤에 내가 기대했던 그 내 모습은 아마 이럴 것이라고 예상했잖아요. 예상한 것을 십자가에서 함께 거꾸로 돌려버리면 ‘나는 나에 대해서 전혀 예상할 자격도 없구나.’ 이게 바로 자기부인이에요. 삼켜서 토해내니까 거기서 나오는 수치와 모욕감, 결핍,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나를 박탈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요. 내가 박탈되었음을.새 사람의 원형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박탈의 장을 만들었다 이 말이죠. 빈 자리를 만든 거예요. 그 빈 자리는 아까 공중의 동굴처럼 예상 못한 거예요, 그냥.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도 본인이 몰라요, 맞아죽어서 들어갔지. 그게 박탈의 장이에요.박탈의 장은 뭐냐? 내가, 이 자리는 내 자리이고 이 자리에 있으면서 ‘나는 있다’ 하는 그 자리가 없어지는 게 박탈이에요. 누구한테 빼앗긴 거예요. 주님한테 빼앗기고 없는 자리에요. 그 없는 자리가 올 때 여기서 범사에 감사와 찬송과 그리고 기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성령의 열매라 하지만 이게 자기부인이에요, 자기부인.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결론은 한 가지에요. 성경에 나오는 자기부인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한 것을 반복해서 적용하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 것을 할당시키고 분배한 거예요, 분배. 분배한 거예요. 화투는 주님 화투에요. 화투는 주님 화투이고 에이, 너는 장땡 먹어라, 하고 나눠주는 거예요. 예측도 못했죠.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으로 하여금 충분히 선택하게 해요. 매일같이 선택하게 해놓고,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다 선택하게 해놓고 그것을 비 선택적 행위의 그림에다가 그걸 집어넣어버립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언약의 완성입니다. 내가 자살하는 것 말고 내가 예상 못한 주님의 죽음에 내가 합류하게 됐다는 이 사실이 도저히 우리 아이디어에서는 꺼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죽을 때 임마누엘,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것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지, 인간은 아무도 못합니다.
그 못하는 것을 내(주님)가 했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주는 것, 그게 바로 “박탈의 장, 곧 주체의 공터를 발생시키는 사건” 그렇게 되어 있어요, p.214 밑에서 7번째 줄에. 그런데 왜 이것을 사건이라 하느냐? 되풀이 안되는 게 사건입니다. 사건은 되풀이가 안돼요.
5.출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봤습니까? 어떻습니까, 만나봤습니까? 안 만나봤죠.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찬송은 그렇게 하지만 눈으로 목격하고 봤습니까? 없는 존재를 바라본 거예요, 없는 존재를. 사람이 있는 것을 믿는 건 믿음이라 하지 않고 그걸 신앙이라 하지 않고 그걸 신념이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신념이기 때문에 자기 밖을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신앙이라 해도 그것은 신념이 돼요. 그러면 내가 믿는 것도 나의 신념이에요. 다시 할게요. 신념이라는 것은 나에게 이득이 오는 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이득이 오는 게 신념이에요.
신앙은 죽음 너머에서 오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죽음 너머에서. 내가 여기 있는 한 죽음 너머를 못 보잖아요.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볼 수 없는 분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무엇, 그게 바로 선물로서의 신앙입니다. 죽음 너머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나한테 적용이 되지, 나의 행함은 아니잖아요.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알았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죠. 배신하고 난 뒤에 다시 주님이 찾아올 때 비로소 베드로는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내가 주를 위해서 이걸 했습니다, 저걸 했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고 나 때문에 주님의 몸이 탈구되었다는 것. 주님이 하신 모든 그 고생 고생이 우리가 얼마나 주님 오신 것과 반대쪽을 향하고 있음을 그걸 너무나 아시기 때문에 반대로 가신 거예요. 우리가 아는 십자가가 아니고 거꾸로 진 십자가죠.
주님의 고생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피조물로부터 폭격 당하신 몸. 피조물에 둘러싸여서, 자기 백성이든 아니든 관계없어요, 피조물에 둘러싸여서 모든 모욕과 저주와 비난과 조롱을 홀로 폭격 당하신 몸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살해사건은 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6.여호와는 용사죠. 용사라 하는 것은 전술적 군사 개념이에요. 주님이 하신 공로, 예수님이 하신 것이 선물로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그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 그 현장은 무슨 현장이냐? 전쟁터입니다. 전쟁터에요. 예수님,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뾰로롱 고맙다고 도망칠 게 아니고 우리는 전쟁을 해야 돼요. 내 것이 박탈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전사,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향한 싸움. 정답은 주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에요, 주의 이름을.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주의 이름은 보인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고요. 공중 속의 동굴이 보일 리가 있습니까? 허공 속의 동굴인데 없잖아요. 없는 것을 지키는 전사 또는 군인,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입니다.
“적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되면서 역시 ‘무(無)’에서 적이 호출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을 벌일 때 우리를 군인으로 부를 때 비로소 그때 적이 등장하는 것이지, 내가 나서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것은 돈키호테에요. 지가 망상에 빠져서 사는 거예요, 망상에.
이 점을 돕기 위해서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에 강의에서 했는데요. 참 중요한 거예요. 우리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이게 어릴 때부터 익숙해졌습니다. 이게 전부에요. 우리는 ⓑ사람 대 하나님의 관계가 익숙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 보이거든요.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나와 하나님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요. 모든 사고방식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요. 북쪽의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잡으려고 오십 명과 그 오십 명 대장을 보냈잖아요. 왜 그 오십 명을 보냈습니까? 엘리야를 뭐로 봤습니까? 엘리야는 우리가 있는 것처럼 자기 혼자 있는 줄 알았죠. 엘리야를 건드린 것은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가지고 오십 명과 그 대장, 51명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했습니다. 엘리야는 박탈의 장이에요, 엘리야가 있는 곳이. 엘리야는 제단에다 물을 막 세 통씩 붓잖아요. 그러니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질 그 제물에 물이 흥건해서 축축히 젖었어요. 이건 뭐 라이터 틀어도 이제 불 붙일 여지가 전혀 없는 거예요. 어드밴티지를 받는 게 아니고 아예 본인이 알아서 핸디캡을 줘버려요, 본인이 알아서. 자, 안되지? 너희들 봐도 이건 불가능하지? 그걸 똑똑히 보여줍니다.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 전쟁을 하는 거예요.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들고 있어야 될 무기,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그럼 목사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오른손에 들고 있습니까, 왼손에 들고 있습니까? 그 무기가 뭡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선택지를 한다고. 내 하고 싶은대로 막 산다고요. 그게 무기에요.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하는 일대로 하면 되죠, 누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누가 감사하느냐 하면 예상 한 게 아니고 여러분 자신들이 놀라야 돼요. 주께서 살아있다는 사실에.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주께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매일같이 순간순간 그것을 발견해야 되죠.
그렇다면 여호와 이름의 적은 누구입니까?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답변 나와야죠. 여러분의 적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죠, 나 자신. 그게 구약이 아니고 신약입니다. 신약에는 우리를 닦달내고 그래서 성령께서 찾아오심으로써 성령께서 찾아오셨다는 자체가 아군 되기 때문에 적이라는 것도 주의 이름이 하는 현장에서 진짜 적을 뽑아내는데 그 적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에 새삼스럽게 적이라는 것을 규정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버려요.
7.p.215 밑에서 3번째 줄에, ‘비 그침’이라는 말이 나오죠, 비 그침.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던 백 일이나 쏟아졌던 그 홍수에서 비 그침이라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비가 그치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5월, 6월, 7월 세 달 동안 장마 내려보세요. 비가 그치는 게 신기하죠.그걸 가지고 ‘자애로운 특별한 혜택’이라 합니다. 그게 창세기 8장에 나옵니다. 내가 다시는 물로써는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을 하나님의 긍휼과 자애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마음만 먹으면 주께서 옛날처럼 비로써 홍수로 다 죽일 수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브레이크 걸어서 멈추는 것은 주께서 은혜를 계속 주시기 위해서 자기 쪽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해서. 무지개가 생기고 난 뒤에 지상에 주목한 곳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브레이크를 걸 때 그냥 브레이크를 막 건 게 아니고 가치 있는 희생제물다운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심판의 브레이크를 자진해서 stop을 시킨 거예요. 나중에 피의 가치가 다 끝나면 다시 심판은 그냥 지속될 겁니다. 더 혹독하게 줄 거예요. 지금은 브레이크 시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있는 한. 그래서 마태복음 마지막에 세상 끝날까지만 네가 복음을 전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중요하니까요. 새 사람을 생산하시는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성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피로써 심판을 유보시킨 겁니다, 피로써. 새 사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제물로서 끼어들 때 흘려지는 피에요. 인간의 피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는 생명 되시는 분에게 흘러나온 피이기 때문에 이 피는 곧 생명이에요.그래서 이스라엘 내에서는 하나님의 생명되는 피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피째 먹지 말라 또는 짐승의 피나 어떤 피도 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게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기초로 들어갑니다. 거룩한 쪽의 것을 먹는다면 먹는 그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피의 혜택을 입었다는 그 거룩 속성을 그대로 유지해줘야 되죠. 구약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서는 as if, 제사 지켰다고 구원받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이 말씀을 지킨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때 종말에는 완성이죠. 예수님 홀로 다 완성했습니다. 그건 as if가 아니에요. 마치 ~인 것처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에요.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계속해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순환구조에다가 집어넣어서 우리가 예상하는 감사와 고마움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고마움이 나오게 만드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