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예수님의 12제자가 악귀를 쫓아낸다고 되어 있는데 이 악귀를 쫓아낸다는 말은 이 세상에 악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악귀가. 그럼 그동안 인간들이 악귀하고 줄 곧 악귀, 악한 귀신과 더불어 살았다는 겁니다. with 악귀. with 코로나. 함께 악귀와 더불어 산거에요.
하나님이 사시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 보고 그걸 만들어내라고 하니까 그걸 만들 수가 있겠어요? 여기에 누가 오느냐? 천사가 등장해요. 약속이 완성이 되면 하나님이 살 수가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약속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천사가 앞장서야 되지요. 천사가 언약대로 실시할 때 그거는 종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따라가야 돼요. 이 말은 이스라엘이 악귀가 안 들린다 할지라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동행자가 이스라엘 동행자가 그 당시 이 세상의 악귀보다 더 우열한 더 통치력을 가진 분이 동행해주지 아니하면 악귀는 물러갈 생각을 안 합니다
천국,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이에요. 씨 뿌리는 비유가.
그러면 씨를 뿌린다는 그 취지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자체가 씨가 없는 세상이다 이 말입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 나는 구원이 안 되는 여자에요.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이건 뭘 반영하느냐 하면은 그 당시의 현실세계, 오늘날 우리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이 현실세계라는 말은 어떤 것도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로 보여주는 거에요.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이 불가능한데 이 땅에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정됐잖아요. 일곱 귀신이 덮고 있으니까 안 되잖아요. 일곱 귀신이 있어서 안 되는데 주님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현실 안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뭘로 보느냐 하면은 씨 안의 존재로 봐요. 씨 안의 존재. 씨는 뭐냐? 여호와의 말씀. 말씀 안의 존재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주님께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그 씨가 현실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씨가 되는 거에요. 씨를 뿌릴 때에 여기에 나타나지 않던 이 세상의 통치자가 나타나가지고 길가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걸 물어 없애버리지요. 그러니까 현재 인간들이 정상으로 보는 아! 대한민국. 중공. 중국 공산당. 이 모든 것은 노림수가 딱 한 개에요. 대한민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관계없이 딱 하나입니다. 뭐냐 하면은 씨를 없애버리는 것, 씨를 말려버리는 것. 씨를 말리는 것.
그러면 성도는 그렇게 씨를 말려들어갈 때 성도가 얻는 게 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여러분 도달했습니다. 성도는 뭘 얻느냐? 질문할께요. 성도가 얻는 것은 열매다. 맞아요? 열매다. 1번 맞다. 2번 틀렸다. 성도가 얻는 것은 열매다. 1번 이 말이 맞다. 2번 틀렸다. 30배 60배 100의 열매다. 2번 아니다. 몇 번입니까?
열매는 주님이 얻는 것이지 성도가 얻는 게 아니에요. 성도는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과정입니다. ‘과정’. 성도는 결실이 되면 안 됩니다. 결실은 주의 일이기 때문에 결실은 주님의 일이 결실 되야지 내가 결실되면 안돼요. 내 안에 ‘나’가 없어요. 나는 하나의 주의 일에 과정으로 프로세스 과정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과정으로. 과정으로 들어가거든요. 과정으로.
씨는 다른 씨가 아니에요. 동일한 씨입니다. 동일한 씨를 사일로 여기에 다 내려보내지요. 여기서 뭡니까? 쭉쭉 내려오지요. 일종의 사다리타기. 사다리타기 알지요? 쭉쭉 내려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일로 하나하나가 뭐냐 하면은 과정들을 통해서 절차를 보여줍니다.
천국이 이루어지는,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통과해야 되는 절차, 이 절차를 보여줘요. 동일한 씨를 뿌립니다. 이 전체가 지금 인간의 일입니까? 성도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이게 주의 일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가리잖아요. 옛날 이스라엘처럼.
다시 이야기할께요.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하는 것은 그들이 살기 위함이 아니고 누구를 살게 하기 위함이다? 주의 이름이 거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완성하면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약속을 완성한다는 그 완성의 의미는 그 약속을 도발하고 약속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대하는 것을 계속해서 그걸 끄집어낸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에요. 주님의 적수를 계속 끄집어내는 거에요.
씨 안에 막달라 마리아 들어있어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귀신이 나갔잖아요. 막달라 마리아 사적인 의미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에요. 구원을 받았지만 나는 구원 받았다를 적용해버리고 너는 하나의 씨앗이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씨앗이야. 전체가 하나의 씨앗이 되는 거에요.
그 전에는 뭐냐 하면은 나는 불가능해. 나라는 인간은 불가능해 에서 인간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씨로 바뀌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남 보기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인간이잖아요. 그러나 비유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의 세계에서는 그걸 인간으로 보지 않고 씨 안에 있는 주님의 생산물로 보는 거에요. 주님의 생산물.
못난 인간이라서 구원 안 되는 게 아니고 인간이라는 자체가 구원이 안돼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왜? 씨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나보고 씨라고 의미를 부여해야 구원을 받아요. 말씀 안에 주님의 작업에 동참해야 구원이 되는 거에요. 그럴러면 우리는 어느 지평선? 현실의 지평선에서 소멸되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성도는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사라져가는 사람이에요. “나 간다~” “어디로?” “나도 몰라.” 그냥 가버려요. 지평선, 현실이라는 지평선 너머 씨의 나라, 비유의 나라로 가버리는 거에요.
씨 뿌리는 비유에 의하면 성도는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은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 그런 것은 없어도 되는 상관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나는 과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일의 시작과 마감은 내 소관이 아니에요.
주님의 포도나무가 그 열매가 우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가 내가 내 인생을 챙길 주체가 못 된다니까요. 우리는 어디에 연관되어 있어요. 주님의 벌렸던 그 거미줄에 사로잡힌 자 된 거에요. 내 세계가 아니고 내 세계가 따로 없어요. 주님에게 얽혀 들어간 겁니다.
이걸 뭐냐 하면은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사랑의 밧줄로. 그 밧줄이 나를 꽁꽁 묶는 거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에 이런 거 있지요. 13장 5절에 나오는 말씀.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그 작업에 우리를 하나의 씨, 그 말씀의 씨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럼 마귀가 와서 우리 마음에 와서 있는 대로 다 솎아내는 거에요.이 과정 속에 우리가 포함된 거에요. 네가 하란 말이 아니고. 참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네가 이렇게 하면 천당 보내줄게’ 가 아니라 이렇게 되는 말씀이 이렇게 되는 그 과정 속에 네가 여기서 이미 네가 말려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을 냈는데 나는 성을 냈는데 주님이 성을 낸 게 아니래. 이 말이 이게 진짜 말이야 막걸리야 이게. 정말 희한한 해석을 부여받는 거에요. 나는 성냈는데 그게 성이 아니래요. 나는 화냈는데 화가 아니랍니다. 저 화내는 것 좀 봐 얼마나 귀여워 이러고 있다니까요.
과정의 특징은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에요. 홀로 움직이지 않아요. 과정은 전체가 같이 움직여요. 전체가 씨의 나라, 천국이죠. 말씀의 나라에서는 이런 정황 저런 정황 이게 다 동시다발적으로 늘 다발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거에요. 그걸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진짜 어려운 거 들어가는데요 이 사일로. 네가지 통로. 길가에 떨어진 것, 가시밭에 떨어진 것, 바위에 떨어진 것, 100배 열매를 맺는 것 과정들요. 주님께서 분리를 했잖아요. 각각 밭이 다르다. 이 전체가 과정은 결과와 닮지 않는다. 과정은 결과와 닮지 않아요. 생산라인은 과정이거든요. 과정은 그 결과물 생산물과 전혀 안 닮았어요.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뭐 타고 올라갔습니까? 구름이 내려와서 타고 올라갔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체가 있을 때와 그 과정 속에 있을 때에 그 면면이 모양새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이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걸 분간을 못 하는 거에요. 우습게 보는 거에요. 인간 세계에서.그 인간 모습 속에 감추어진 그 영광스러운 주의 영광은 아무도 알아 볼 수가 없는 거에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그가 오실 때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죄인의 모습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렇다면 모양만 그러냐? 아니면 그분의 하시는 말의 의미도 그럴까. 말의 의미도 그런 거에요. 말의 의미는 천국의 세계에서 주어진 거에요. 천국의 세계에서는 완성된 단계고 이 세상은 뭐냐? 과정이에요. 과정. 과정에 있는 사람이 완성된 세계의 그 전체를 미리 넘보면 안 됩니다. 100배의 결실이 뭐가 좋아요? 100배의 결실 맺을래요? 아니면 여러분이 해 같이 빛날래요? 어느 쪽 할랍니까?
네 가지 과정은 전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심지어 마귀가 와서 먹는 것도 주님의 일이에요. 이 일을 씨가, 씨들이, 오직 씨들만이 다 겪어야 돼요. 다 겪어야 돼요. 말씀이 왔다가 다 먹히는 경험도 이미 구원받은 자가 겪어야 됩니다. 네 가지 과정 다 말씀에 속한 거에요. 성도는 말씀의 씨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서 한 가지 나는 1번, 2번, 3번, 바위 위에 떨어진 것, 가시에 떨어진 것, 길가에 떨어진 것 그건 안 하고 4번만 나 잡을래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이것 다 매일같이 이것 네 개 다 우리는 경험해야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왜 기꺼이 이런 과정을 왜 기꺼이 안 받을려고 합니까? 아직 내 안에서 내가 안 빠져나간 증거 아닙니까? 그게. 이미 우리는 귀신을 못 이겨요. 악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왔다가 자기 집으로 거주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악귀를 악한 마귀를 악한 귀신을 쫓아냈어요.‘나는’ 이게 빠져야 돼요. 이게 뭐가 되야 되느냐 하면은 씨가 되야 돼요. 씨가.
그래서 이걸 빼내는 방법을 여기서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빼내는 방법. 말씀은 자체적으로 과정을 거쳐서 완성으로 갑니다. 말씀이 완성돼요. 이 완성된 걸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성령의 공동체’. 개인 아니지요 공동체입니다. 손이 발더러 소용없다고 하면 안돼요. 한 몸이에요. 성령의 공동체가 뭐냐 하면은 이게 미래의 도래의 공동체에요. 미래라는 말이 쉬운데 어려운 말로 도래의 공동체에요. 미래가 그냥 살면 있는 게 미래지만 그 미래가 움직이는 것은 도래라고 합니다. 단어 하나 쓰는 것도 진짜 조심스럽게 쓸 수밖에 없어요.
미래가 움직이는 게 도래거든요. 도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현재를 잡아먹어요. 삼켜버립니다. 현재를 삼킨다. 현재를 삼켜버리면 ‘나는 행복해야 돼’가 뭐가 삼키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가 ‘나는 행복해야 돼’ 이걸 삼켜버려요. 마치 고래가 요나를 삼키듯이.
나는 구원받았다를 빼게 되면 모든 말은 다 이해가 돼요. 내 구원을 빠져버리면 이해가 다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집단 구원이 ‘나’라는 개인 구원을 삼켜서 없애버린 거에요. 삼켜서 없애버린 거에요.
주님이 떡을 떼요. 주님의 떡이에요. 베드로 떡 뺏어온 게 아니고 주님이 자기 떡을 나눠주게 되면 주님의 몸체의 분배가 되는 겁니다. ‘분배’.
내 몸 너한테 간다 이게 언약, 이게 약속이에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절대 약속을 안 합니다. 약속할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약속은 주님하고 약속하지, 우리하고 약속 안 해요. 주님은 우리가 뭘 해도 그리스도 한 몸 안에 지체라는 조건 하에 약속이 유효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 이름이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럼 내 이름은 뭐냐? 죽은 이름이죠.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얼마나 허접하고 허술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와도 알아먹지 못하고 마귀가 뺏어가도 그걸 모르는 우리가 되야 되고 그 다음에 바위에 떨어져가지고 말씀을 받아 기쁘지만 시험들 때는 나자빠지고 배반하는 그런 나여야 되고 가시덤불 떨어져가지고 말씀 다 듣다가 갑자기 세상 유혹과 세상 돈 버는 재미에 빠져가지고 그걸 해야 되고 그 다음에 좋은 땅에 있다고 착하고 인내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얼마 안 되서 홀랑 다 날아가버리는 그런 것을 경험을 해야 되는 거에요.
왜? 다 같이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골라서 지키는 게 아니고 미래의 완성된 말씀이 나를 덮치니까. 나 이 말씀 할래. 이 말씀 안 지킬래 골라 골라 골라잡을 그럴 입장이 안 됩니다. 그냥 따라 말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지금 누가복음 8장 12절 말씀을 지금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거에요.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성령이 와서 삼켜버리면 이런 모든 것이 소급해서 무슨 일이 되느냐 하면은 나의 일이 아니고 이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일이 되면서 비로소 우리는 마귀 짓 했고 가시덤불 떨어진 씨앗 질 했고 씨는 씨인데 바위에 떨어져서 배신했고 가시덤불 떨어져 농부가 원하는 열매 못 맺었고 그것이 불현듯 계속해서 기억나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의 기억이 아니고 누구의 기억입니까?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건드려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우며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로마서 5장의 그 말씀, 그것도 말씀이잖아요. 그 말씀을 이렇게 너한테 완성시켰다는 것을 티내게 만드는 그 작업에 계속해서 우리가 가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가 아니고 누가 주인공이에요. 내 안에 살아계신 분, 주님이 살아 계신 거에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거는 주께서 필히 이 세상에서 네가 이런 세상에서 네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필수 코스에요. 하나의 과정 속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성도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들을 귀가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거에요. 아 말씀이 왔을 때 마귀가 뺏어가는구나. 이게 성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그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냥 두고서 그걸 쉽게 의미를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주님의 비유는 뭐냐 하면은 허락 맡아야 알고 비밀이고 일체 악귀가 지배하는 악마가 있는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 건너올래야 건너올 수 없다는 것, 그걸 분명히 하는 그게 바로 비유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 있다는 이 말은 만약에 이렇게 열매를 맺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 능력입니까? 땅 자체가 좋아서 그렇습니까? 밭 자체가 땅 자체가 좋아서 그런 거에요. 주여 저를 왜 좋은 땅으로 사용했습니까? 오히려 반문해야 되지요. 왜 차이가 없는데 다 같이 어둠이고 다 같이 죄인인데 왜 차이를 두십니까. 너 잘나서 차이 두는 게 아니고 과정에 오다 보니까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님 자신이 통과해야 될 위치거든요.
주님은 마귀도 통과하고 바위도 통과하고 가시덤불로 통과하고 다 통과 통과 통과 해가지고 주님 자신이 좋은 밭이 되었잖아요. 그럼 그 통과를 제자들도 같이 통과하는 거에요 이제. 어차피 열매가 되었으니까. 포도나무 열매가 되었으니까요. 과정 속으로. 이거. 제목은 ‘아름다운 과정’이에요. ‘아름다운 나’가 아니고 그냥 내가 과정 속에 흡수, 통합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럼 주인은 누굽니까? 주님이 주인이죠. 주님이 과정을 이끄는 거죠.
이 땅에 사는 것은 이거는 그냥 합격되고 난 뒤에 수능 다 합격되고 난 뒤에 시험 치는 거죠. 안 쳐도 합격이에요. 합격인데 그 시험 과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 있는 자리에서 있는 나이대에 있는 시대에 따라 있는 국가 따라 각자 각자 주님께서 거기서 주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으로 왕 같은 제사장 되게 하신 겁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의 과정속입니다. 본인이 열매를 챙길려고 하지 마세요. 열매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지. 온유와 화평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요. 내 과정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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