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001설교모음

11강-믿음과 안식

아빠와 함께 2021. 8. 30. 11:54

11. 말씀과 안식(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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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NIV)Now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God has said, "So I declared on oath in my anger,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And yet his work has been finished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KJV)For we which have believed do enter into rest, as he said, As I have sworn in my wrath, if they shall enter into my rest: although the works were finished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NASB)For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He has said, " AS I SWORE IN MY WRATH,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although His works were finished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4: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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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개인적으로 봐서, 그 사람이 한 평생을 잘 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할 수가 있는데, 내가 이 정도면 괜찮게 살았다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 세상이 자기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닌데, 다른 목적이 있을 수가 있기에, 그래서 자기가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해서 그게 곧 정말로 행복이겠느냐는 말이죠.

 

그러한 점에 대해서 우리가 안심할 수 없는데, “목사님, 제가 한 평생을 아무런 탈이 없이 살았습니다.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거기에 대해서 저는 오늘 본문 41절 말씀을 해드리고 싶은데, 거기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한다는 겁니다.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자기는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살았다고 여기고 싶은데, 그런데 정작 성경말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전체를 보지 않고 그렇게 자기 개인만 바라보고 산 사람에 대해서는 요주의 인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까불지마. 두려워해라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니가 잘 살았나? 내가 잘 살았나? 니가 멋있는 인물인가? 내가 멋있는 인물인가?” 라고 하면서, 그렇게 서로 비교하면서 토닥거리면서 살아온 우리 인생의 전체에 덮쳐지는, 그 일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자만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계획에서 탈락할 수 있는데, 그러니 이런 것은 생겨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이 전체를 알자는 것인데, 이 전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를 말이죠.

 

어디에 목숨을 바칠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다가 우리는 아예 목숨을 바쳐야 하는데, 지금 세상 사람들을 붙들고 당신은 목숨을 바칠 일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아마 없다고 하지 싶은데 말이죠. 그런데 사람이 자기 목숨을 바칠 일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면, 늘 뭔가 찜찜하고 서글픈데, 큰 기쁨이 다가와도 그게 날아가 버리면 그만 허전함이 밀려와서,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목숨을 바칠 곳이 있다고 하면, 자기 목숨을 마음놓고 바친다고 하면, 그 뒤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렇게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자기 한 평생을 살아도, “이것은 내 목숨을 걸어도 좋은 일이다라는 것을 만나기가 싶지 않은데, 만약에 그것을 만난다고 하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는 겁니다.

 

나이나 직업이나 재산과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닌데, 그것이면 되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부도가 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만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그러면 자기 인생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 집단이 저기 북한에 살고 있는데, 물론 북한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정치적인 해석이 있겠지만, 저는 단 하나로 봅니다. 저는 북한을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는데, 그런 집단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집단에 목숨을 바치도록 한다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시키는데, 그것을 세뇌교육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살 길은 이것밖에 없다. 우리 김일성 주석님을 모시고. 김정일 지도자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미제국자들에게 잡혀 먹힌다. 그러니 우리는 수령님에게 우리 목숨을 바치고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데, 그것만이 자기들이 살 길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집단이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남한에도 얼마든지 있는데,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해서 재산을 다 바치게 하는데, 그렇게 교인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겁니다. 그들이 사이비나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기존교회도 그들 못지 않게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그런 사이비 종교에게 속아서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겁니다. 목숨을 바치되, 그런데 그렇게 목숨을 바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교회에 목숨을 바치세요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은 대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엄청나게 바쁜데, 그런데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벌써 30년 전인데 말이죠. 그때는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데모를 한다고 말이죠. 그리고 데모를 하지 않는 학생들은 논다고 바빴다는 겁니다.

 

그때 광주민주화운동도 일어나고 했었는데, 그때가 수요일이었는데, 그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치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문이 든다는 말이죠. 즉 안중근 의사가 한 일이 과연 잘한 것이냐는 겁니다.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물론 군대에 가서 복무를 하는데 전쟁이 나서 싸우다가 그만 죽는 것은 어쩔 수가 없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고, 자기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목숨을 바치고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짓이 아느냐는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정부가 들어섰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또 목숨을 바쳐야 합니까? 그러니 목숨을 바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에 바쳐야 하는데, 우리 인간이 손을 대면 이렇게 바뀌고 저렇게 바뀌는, 그런 것에 왜 목숨을 바치느냐는 겁니다.

 

보통 아가씨들이 결혼을 하기 이전에는 결혼에 목숨을 거는데,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물론 결혼이 행복의 입구가 될 수도 있고, 또한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만약 결혼에 목숨을 걸었다면, 이혼을 하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는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아니면 내가 죽는다. 남편이 아니면 내가 죽는다. 자식이 아니면 내가 죽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헛된 것에 자기 목숨을 거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참으로 값비싼 수강료를 내고 그게 헛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을 잡아도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또 저것을 잡았다고 해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 세상에는 자기 목숨을 바칠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만 하는데,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믿고 추구하는, 그렇게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43절입니다.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

 

여기에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왜 자기가 어떤 집단에 들어갈 때, 그쪽에서 들어오지 않는다고 굳이 화를 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런 것은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하는데, 그 남자가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만 죽여버리겠다라고 해서 억지로 결혼을 합니까? 물론 조폭 두목을 만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그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선택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목숨을 걸든지 말든지, 그것까지도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않으면 진노를 내리겠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은 골라서 선택하는 버릇이 있는데, 마치 뷔페에서 마음에 드는 음식을 골라서 먹듯이 말이죠.

 

그런데 천국은 그렇게 자기가 좋다고 해서 들어가고, 또한 자기가 싫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천국과 지옥은 이미 상주해있다는 말이죠. 여기에서 4절과 5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면 저주의 대상이 될 뿐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셨는데, 따라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이다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라는 말이죠.

 

오늘 본문은 상당히 긴데, 간추리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이라는 것을 주셨는데, 그 안식에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안식은 안식대로 있지만,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분노의 사람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작정하고 나섰다. 따라서 우리는 만사를 제쳐두고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그러면 그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고 하니, 믿음으로 들어가는데, 반면에 안식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사람은, 2절에도 나오듯이, 믿음에 화합치 않아서 그렇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지는데,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던졌는데, 그 말씀 속에는 인간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데, 그런데 인간은 말씀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즉 믿음에 화합치 않았기에 그만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여호수아의 경우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죠.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라고 한다는 겁니다.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것을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잘 들어보세요.

 

* 목사 : 집사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 집사 : , 알겠습니다.

* 목사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니깐요?

* 집사 : , 잘 알겠습니다.

* 목사 : 그렇게 창조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 집사 : , 그렇군요. 안식에 들어가셨군요.

* 목사 : 아니, 하나님이 안식에 들어갔다니깐요?

* 집사 : ,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만 믿음에 화합치 못한 사람이 되고 마는데, 그 이유가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1절에서 3절을 보겠습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셨구나. 참 잘 만들었네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잘 만들었다고 해버리면 말이죠.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고 하니, 말씀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믿어야,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깥에 나가서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면, 사람들은 조물주가 만들었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믿음으로 천당에 가느냐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계속 유입이 된다는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이죠.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잘 만들었구나라고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믿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것은 세상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교인들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 말이죠. 몸도 불편하고 하니, “주여, 주여!” 라고 하면서, 그저 아픈 몸이 편안하게 있다가 천당에 가는 것, 그게 최고라는 말이죠. 나이도 많고 하니 골치 아프게 무슨 성경공부를 하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내용은 왕창 다 빠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를 줄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 목사 : 예수님을 믿습니까?

* 할매 : 그럼요, 믿지요.

* 목사 :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 할매 : 골치 아프게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 목사 : 예수님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 할매 : 괜찮아요.

* 목사 : 그러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 할매 : 그저 몸이나 아프지 않다가 천당에 가면 됩니다.

* 목사 : 성경말씀은 왜 있는지 아십니까?

* 할매 : 괜찮아요.

* 목사 : 그러면 무엇을 아십니까?

* 할매 : 그저 자식들만 잘 되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이 아닌데,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셨는데, 그런데 그게 전부라면, 여호수아까지 등장해서 안식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없어야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야, 안식에 들어가라라고, 그런 말씀을 왜 하시느냐는 말이죠.

 

그냥 하늘을 쳐다보고 참 잘 만들었다. 누가 만들었지? 창조주가 만들었구나. 그것을 믿으면 천당에 가겠네라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여호수아를 따라서 나온 자들이 광야에서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만 망하고 말았는데, 즉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때 그때마다 주시는 말씀이 따로 있어 !!

 

여기서 한 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는데, 그렇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솔솔 말씀을 주시는데, 그러니 옛날 것만을 잡으면 안 되고, 지금 주어지는 말씀을 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호수아 때는 그때의 안식에 들어갈 말씀이 따로 주어지는데, “너희들이 요단강을 그냥 건너가거라라고 하면, “, 조물주만 믿습니다라고 하다가는 다 빠져죽고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홍해를 바라보면서 너희들이 홍해를 그냥 용감하게 건너가거라라고 하면, “무서워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애굽 사람들과 같이 살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믿습니다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그때 그때마다 안식에 들어가라고 주시는 말씀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머니 무엇을 믿습니까? - 조물주를 믿습니다. - 그러면 구원을 받았습니다. - , 고맙습니다라고 하고 있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말씀이 창세기 11절만 있는 것이 아닌데, 그때 그때마다 주어지는 추가되는 말씀이 계속해서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다음과 같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도 믿는가? - , 믿습니다. - 오케이! - 그러면 이 말씀도 믿어? - , 이 말씀도 믿습니다. - 오케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정말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 어떤 말씀이 주어져도 모두 다 수용하고 들어오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한 우물이니 말이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우물은 같은 우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한 우물이기에, 동일한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여러분, 같은 우물에 돌을 던지면 어떻습니까? 퐁당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퐁당’, 두 번째는 와장창’,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죠. 같은 우물이라고 하면, 다같이 아멘!’ 이라는 겁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던지든 간에 다 수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목사님, 저는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은 믿어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도저히 믿지를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어디 무슨 떨이시장에서 골라잡을 일이 있습니까? 그게 인간의 고집인데, 자기가 죽어서 천당에는 가고 싶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믿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안식이라는 것이 여호수아 이전에 다 끝난 이야기라고 하면, 이제 그것만 믿으면 된다고 하면,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제 자동적으로 안식에 들어간다라고 하지, “너희들 중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라고, 그렇게 여운을 남기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다윗도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 여호수아 시절에는 여호수아와 그를 따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안식에 관한 말씀이 따로 있었고, 또한 다윗 시절에는 다윗 시절에 살던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안식에 관한 말씀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좀 복잡하죠? 그러니 한 번 지나간 것으로 끝났다고 여기지 말고, 여호수아 시대는 여호수아 시대에 안식에 들어갈 말씀으로서 주어진 말씀이 따로 있고, 다윗시대는 다윗시대대로, 그리고 오늘날은 오늘날대로 따로 있는데, 거기에 우리는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숨을 바칠 일이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과거에 안식의 땅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탈락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분을 좋게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여호수아에게 주었던 그 말씀이 농담이 아니고, 그 말씀대로 정확하게 실행이 되었다면 말이죠.

 

계속해서 한 점의 오차도 없이 말씀대로 !!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한 점의 오차도 없이 말씀대로 실행을 하셨다고 하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역시 전혀 한 점의 오차도 없이 말씀대로 실행이 될 것이니까, 우리는 안심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과거에 누가 탈락을 했다.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라는 것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는 목숨을 바칠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즉 십자가의 피만큼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도 전혀 괜찮다고 하는, 오히려 그런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말씀을 보기 전에는, “하나님, 제가 조금 바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보기 힘드는데, 그러니 누가 탈락을 했으니, 어디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그냥 입에 넣어주듯이, ‘이것을 믿어라. 저것을 믿어라.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라고, 그런 것들만 10개 정도를 주시면, 그것은 어떻게 제가 좀 해보겠습니다라고 나오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말씀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탈락하고, 누가 미끄러지고, 누가 뒤돌아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누가 멸망을 당하고 하는, 그러한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목숨을 바칠 것이 있다고 하는,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굳건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가 한 가지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느냐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복음 2125절에서 28절을 보겠습니다.

 

(21:25)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1:26)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21:27)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1: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일월 성신아 무너져라 !!

 

그야말로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데, 그러니 개인적으로 나는 성공한 인생이다. 이만하면 괜찮은 가정을 꾸렸다. 이 정도면 그래도 열심히 주의 일을 했다라고 하는 자들에게, 그러한 안일함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소리라는 겁니다.

 

밤하늘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별 하나에 사랑하나라고 하면서 시를 짓던 그 별이 마구 흔들리고, 여름에 해수욕을 하던 그 바닷물이 용광로가 되고,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냐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인자로서 구름을 타고 오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려고 하면 무슨 말씀을 수용해주어야 하는 겁니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개인적으로 잘 살았다고 하는 것, 그런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라면을 끓이다가 냄비가 뒤집어졌는데, 수프가 짜고 말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엎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목숨을 바칠 것은 우리 자신의 인생이 아니고, 물론 한 가정의 가장으로 나름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만, 거기에 인생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가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은 주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것인데, 천사와 함께 말이죠. 그때는 죽은 자도 일어나는데, 여기에 우리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사업번창이 아니고 교회부흥이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 행복이나 이득을 전혀 고려해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마라난타 !!

 

이제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자면, 왜 여호수아 시절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화합치 못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꾸만 애굽을 생각하면서, 애굽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라고 하면서 너무나 개인적인 것에 매달렸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적인데 말이죠. 그렇게 개인적인 소박한 꿈에 묻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눈에 보이는 않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주님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가 여기에 목숨을 건다고 하면, 우리는 결코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보면 불행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바로 참된 행복이라는 말이죠.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6장을 보겠는데, 26절입니다.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에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는데, 즉 온 천하가 우리가 목숨을 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면 어디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게 진짜로 복 받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 여호수아 시대에 탈락한 자들이 우리보다 욕심이 많아서가 아닌 줄 압니다. 주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개인적인 것에 국한시켜서 그런 줄 압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의 말씀에 바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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