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말씀의 능력(히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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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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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씀으로 천국을 가고 말씀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먼저 전제가 되어야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으로 우리가 깨어지고 부서져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왔다면, 그것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여기 칼을 받아라 !!
오늘 본문을 보면, 말씀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냐하면, 무시무시한 날카로운 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예리한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서 쪼갠다고 되어있죠. 그런데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쪼갭니까? 그냥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켜라” 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시면 되는데, 쪼개기는 왜 쪼개느냐는 겁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 이유는 간단한데, 도살장에 가서 소나 돼지를 잡을 때, 소나 돼지를 보고 부탁을 해서 잡습니까? “소야, 니가 좀 알아서 죽어다오” 라고 합니까? 그게 아닌데, 도살장에 무지막지한 칼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외부에서 소와 돼지의 내부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말씀이 우리를 구원한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사건을, 어떤 일을 저질러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말씀이 일반적인 문자와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을 ‘칼’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 보면, 파란 불과 빨간 불, 그렇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문자입니다. 파란 불은 건너가라는 말이고, 그리고 빨간 불은 경찰이 없을 때 가라는 말이 아니고(ㅋㅋ), 건너가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은 일종의 문자이고 기호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문자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까? 문자가 우리 내부를 찔러서 쪼갭니까?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문자 앞에서 우리가 벌거벗은 채로 드러납니까? 문자라는 것은 차이성, 그것을 변별성이라고 하는데, 그 차이성을 가지고 의미만 소통을 시킨다는 겁니다. 즉 “파란 불입니다. 건너가세요”, 혹은 “빨간 불입니다. 가지 마세요” 라고 말이죠.
쪼개져야 하느니라 !!
그렇게 문자나 글자는 우리 인간들끼리의 의사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있는데, 그런데 이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까? 그렇지 못한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횡단보도의 파란 불과 빨간 불의 의미를 알아차리는데, 그런데 왜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 외부가 그대로 있기 때문인데, 쪼개지지 않은 상태로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과의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파란 불일 때 횡단보도를 건너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군대에서 오라고 해서 갔다왔는데,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아무리 지시와 명령을 따라도 구원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를 하라” 라는 말씀이 있으면, 그러면 십일조를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 십일조가 우리의 내부를 쪼개고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을 해체시키는 능력으로 다가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십일조라고? 그까짓 것 하면 되지 뭐” 라고 한다면, 그런 식으로 십일조를 해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구약에 안식일이 나오는데,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면 구원을 받습니까? 요즘은 그것을 교회에서 주일성수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성경에는 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이죠. 구약에서의 안식일은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가라, 서라” 라고 지시하는 신호등과 같은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쪼갠다고 하는데, 왜 쪼개야만 하고 그리고 어떻게 쪼개는지, 그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여기서 마태복음 13장 10절과 11절을 봅시다.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허락이요 !!
여기에 ‘허락’ 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말이죠. 드디어 입시철이 되었는데, 입시가 무엇입니까? 일정한 성적만 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허락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 점수가 되면 자기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입시가 아닌데, 위에서 허락하면 들어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말이죠. 저는 이것을 가지고 지금까지 싸워왔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만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성경말씀을 봐도 위에서 허락이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위에서 허락만 하면, 아무리 농땡이를 치던 놈이라고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러니 허락이 결정적이란 겁니다.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우리 인간은 도전할 목표가 있으면 오기를 부려서라도 도착하려고 하는데, 이 세상의 대학이나 직장은 그렇게 오기를 부려서 들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천국은 정말로 곤란하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소리가 어떻게 들립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저는 엄청 기분이 좋게 들립니다. 왜 이게 기분이 좋게 들리는고 하니,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어떤 행세를 하더라도, 우리의 인간 됨됨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위에서 허락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데,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위에서 “허락이요!” 라고 하면 끝이라는 겁니다. 그 허락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하는 것인데, 그러니 거기에 누가 시비를 거느냐는 말이죠. 마귀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에 나오는데, 33절에서 35절입니다.
(롬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니 위에서 허락하신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허락을 받지 않는 자는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은 말씀이 아닌 문자와 기호인데, 그러니 그것으로는 이 허락의 정신이 나오지 않는데, 그러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구원을 받도록 허락된 자가 누구냐?
반면에 구원받은 자는 어떻습니까? 똑같이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즉 허락이 된 자들이란 말이죠.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 말씀이 믿어지도록 허락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즉 “구원을 받도록 허락된 자가 누구냐?” 라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래서 말씀이 이 땅에 주어졌다는 겁니다.
원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서 있는데, 그래서 언어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죠. 언어를 공부하게 되면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고 유동성이 있는데, 그러니 어떤 특정 언어를 좋은 것이라고 해서 붙잡을 수 없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의사소통만 되면, 그게 곧 진리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변화가 되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그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평등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힘으로 들어가야지, 하나님이 사랑해서 허락한 사람만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한다면 불합리합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죄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지적하고 꾸짖고 쪼개는 역할을 누가 한다는 겁니까? 그러한 역할을 말씀이 하신다는 것이죠. 말이 아닌 말씀이 말이죠.
십일조가 곧 사랑 !!
여기서 다시 십일조 이야기를 하면,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하고, 그러면 하늘에서 복을 주는지 주지 않는지 시험을 해봐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아하, 십일조를 하게 되면 하늘에 복을 받는구나. 그러면 내가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아야지” 라고 나온다고 하면, 그런 인간은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자기가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하는, 그것이 이미 마음속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과 정면으로 충돌이 되는데,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이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십일조를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에 깔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백 날을 해봐야 헛수고라는 겁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요? 아무런 대가도 없이 “허락이요!” 라고 하는 것이 사랑인데, 그것보다 더 푸근한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죠.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허락이라는 겁니다. “니가 9살 때 뭘 했지? 30살 때 뭘 했지? 70살 때 뭘 했지?” 라는 것을 전혀 묻지를 않고, 그냥 “허락이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야말로 공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말라기서를 보고 십일조를 하게 되면, “아하, 이것은 사랑을 이야기하는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도, 어떤 특정한 날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게 저의 해석이 아니고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를 더욱 더 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속에 무엇인가 잠재되어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게 우리 속에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천국입시를 통과하겠나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면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탐심을 내지 말라는 것을 지켰어?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지 말라는 것을 지켰어?”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것은 했는데, 이것은 못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것은 몽땅 지키지 못한 것이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놓았나?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고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했나? 쉬지 말고 기도했나? 범사에 감사했나?” 라고 하는 모든 말씀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도 아니면서 무엇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도 죄인이 주제에 말이죠. 그런 것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행함이 아닌, 허락 !!
그래서 허락인데, 행함이 아니고 말이죠. 우리는 행함을 언급할 만한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냥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먼저 너의 주제파악을 하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다는 말이죠.
사람은 경쟁이 있어야 살아가는 맛이 있는데, 그래서 “붙어라, 붙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이 들어오게 되니까, 왜 우리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없는지,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여기 13절을 보면,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고상하게 보이는 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교회에서는 “나는 착하다. 하나님의 일을 이만큼 했다” 라고 하는 것이 통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나도 예수님처럼 될 수가 있습니까? 인자는 머리를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되면 자살을 하고 마는데, 그러니 우리 속에 있는 것과 예수님 속에 있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런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런 또 다시 발가벗겼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에, 그 집사님의 이야기가 사도행전 7장에 왜 들어있습니까? 그 말씀이 우리를 쪼갠다는 겁니다. 집사님이 돌아가실 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그 말씀이 왜 우리의 찌르고 쪼갭니까?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는 누가 가다가 어깨만 건드려도 시비를 건다고 여겨서, “한 번 붙어볼까?” 라고 하는데, 그러니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가 당한 것은 자기가 복수를 해야만 속이 시원한데, 그러니 우리는 성령을 받은 스데반 집사님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모른다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는 결코 구원될 수가 없는데, 오직 주님의 “허락이요!” 라고 하는 것에 한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오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하고, 오로지 주님의 은혜만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죠.
쓰레기통을 뒤져라 !!
왜 여자들이 저녁에 보면 거울 앞에서 크린싱 크림을 발라서 화장지를 가지고 닦아서 화장을 지워내는데, 그러면 그게 본 모습입니까? 물론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흔히 그것을 맨 얼굴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휴지통을 뒤져서 버린 것을 다 찾아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가 닦아서 버린 것을 다시 얼굴에 붙여서, 그것을 가지고 본래의 모습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크린싱 크림으로 닦아내기에 바쁜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끄집어내기에 바쁘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다윗은 이렇게 살인했다. 다윗은 이렇게 간음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갔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하지만 변화산을 보아라. 모세는 주님과 함께 계신다”, “강도를 봐라. 주님에게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서 그날 밤에 천국에 갔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다 끄집어내어서 모으면 무엇입니까? “행함을 놔라!” 라는 것인데, 즉 우리의 잘남을 놓으라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짐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허락하심만 바라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왜 주님의 허락하심으로만 구원을 받는지, 그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방주’ 라는 말씀 !!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이 어떻게 그런 말씀과 통하는고 하니,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창세기 6장에서 8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나오는고 하니까, 노아라는 사람이 방주를 만드는데, 그런데 그 방주를 가지고 하나님이 내리신 물의 심판을 거뜬하게 이겨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주에 어떤 요소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이겼을까요? 객관식 문제입니다. “1번, 물이 새지 않았다. 2번, 프로펠러가 달려있었다. 3번, 방주가 크고 넓었다. 4번, 방주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대신 희생을 당했다” 라는 것 중에서, 여기서 몇 번입니까?
물론 노아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육지로 나와서 노아가 정결한 짐승의 제물로 바치고 난 뒤에 비로소 알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드린 번제를 하나님께서는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을 세우면서 말씀하시기를, “다시는 물로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창 8: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창 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깨끗한 것을 잡아서 !!
그러니 방주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에 탔다고 해서 잘난 사람들이 결코 아닌데, 다들 죄인이라는 겁니다. 물론 모두 합쳐봐야 노아의 8식구뿐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들도 있었지만, 정결치 못한 더러운 짐승들도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깨끗한 것만 골라서 잡아넣으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같이 동승시킴으로서, 더러운 것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것을 잡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더러운 것도 물의 심판에서 무사히 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더러운 짐승을 잡아서 더러운 요소를 줄이는 방식으로 하지 않고, 아예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될 정결한 짐승을 대신해서 잡는다는 말이죠.
방주는 그 당시의 말씀 !!
이 ‘방주’ 라는 것은 그 당시의 말씀인데,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누가 대신해서 희생을 당함으로서 우리가 허락을 받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대신해서 희생을 했다는 말이죠. 이것이 그 당시 주어진 방주, 즉 말씀의 핵심인데, 이것이 방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살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방주는 결국 “허락이요!” 라는 것을 유발시키는 사건이라는 말이죠.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은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말씀대로 지켜야 구원을 받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원리는 노아 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역시 그와 똑같은 방식이 적용된다는 말이죠.
그게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고린도후서 3장 6절을 보겠습니다.
(고후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
여기서 ‘의문’ 이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라는 것이 아니라 ‘문자’ 라는 뜻입니다. 즉 “글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글자로 와서 우리를 죽이고, 그렇게 해서 죽은 우리를 영으로 되살린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새 언약’ 이라는 말이죠.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들은 글자, 즉 문자로 보면 안 되고, “이런 문자의 내용을 누가 희생해서 만들어내었는가?” 라는 것, 그것을 더불어 아는 자는 신령한 사람이고, 그와 반대로 뒤에 것을 떼버리고, “이 문자를 내가 행하면 되겠네” 라고 보는 사람은 문자에 얽매인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글자가 아닌 영으로 읽어야 하는데, 글자는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니 말이죠.
이런 관점은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도 나옵니다.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에 보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라고 하는데, 성경말씀을 말씀을 잘못 풀어서 멸망에 이른다고 하는데, 즉 사도바울의 편지를 신령하게 보지 못하고 문자로 보고 해석을 하려다가 그만 멸망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을 문자가 아닌 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죠.
지금도 불교의 승려를 양성하는 승가대학과 같은 데서도 성경을 공부하는데, 기독교와는 라이벌이니 말이죠. 그래서 두루 두루 배워보면 모든 진리가 사랑이라는 것으로, 그렇게 한 곳으로 모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봐도, 영으로 읽지 못하고 문자로 읽기 때문에 멸망에 이르고 만다는 것이죠. 즉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다” 라는 말씀을 보면, “야, 기독교에도 무소유 정신이 있네. 그러면 그렇지. 예수나 석가모니나 모두가 무소유 정신으로 살았구나. 역시 모든 종교는 하나야. 그러니 우리도 하나가 되자” 라고, 그렇게 주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다” 라는 것이 그런 의미라고 한다면, 저도 노숙자가 되고 싶은데, 어떤 의미에서는 무소유로 구원을 받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말이죠.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든지 간에, 머리를 둘 곳이 없으면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그게 아니라, 크린싱 크림으로 씻어서 버린 것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십일조를 하면 되겠네. 구제를 하면 되겠네” 라고 하는 것은 불교라는 말이죠. 십계명 제일 마지막에 보면 “탐내지 말라” 라고 하는데, 우리가 과연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나오는 족족 탐을 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설령 40살 때까지 절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60살이 되면 풀릴 수가 있다는 말이죠.
참으로 훌륭한 가정입니다 !!
한 번은 집회를 마치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분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가 아이를 어릴 때부터 말씀대로 살라고 교육을 시켰다는 겁니다. 교회도 잘 다니고 거짓말도 하지 말라고 말이죠. 중학교 때까지는 잘 들었는데, 그런데 고등학교 때에 와서 이 아이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버지는 위선자야. 말씀과 행동이 달라” 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묻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참으로 훌륭한 가정입니다” 라고 했어요. 왜 그런고 하니까, 아버지가 말씀을 문자로 주었는데, 그러면 자식이 아버지가 준 문자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속에 다시 한 번 걸러낼 수 있는 자질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합당한가? 아버지는 옳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옳은 것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그렇게 자기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은, 자식을 제대로 키웠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 예!”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문자일 수가 있다는 말이죠. “아닌 것 같은데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게 말씀이 아니라면 어느 자식이 그렇게 나오겠냐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자식은 자식의 인생을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예,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저도 나름 한 믿음을 하는데, 이것은 조금 있다가 하겠습니다. 이것은 당장 하기 싫습니다” 라는 관점에서 말씀이 들어올 때, 말씀이 그 사람에게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죠.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학교 동창생과 놀 생각만 하고, 정작 설교시간에는 졸고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인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말씀이 들어와서 “아무리 당신이 목사지만, 나는 절대로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한다” 라고 하면, 그게 말씀이 작동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 정도는 나는 괜찮은 인간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천국에 넣어주시는지, 나는 그것에 대해서 지금은 거부하고 싶다. 나는 내 힘으로 갈란다” 라는 생각도 들고, 그것이 바로 영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이 있다는 것이 완벽주의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것이 성령이 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항상 기뻐하라” 라고 한다면,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참 철이 없었는데, 우리 고모님의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는데, 연세대학교 의대 본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죠. 목욕탕에서 미끄러져서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키워놓았는데, 빛도 보지 못하고 말이죠.
그런데 제가 고모님에게 뭐라고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잃어버릴 때, 그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느끼라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평소에 고모님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고마워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 우리가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말은 맞는데, 그런데 고모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자기 아들이 죽었는데, 그게 귀에 들어오겠느냐는 말이죠. 고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지금 이 땅에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그리고 나쁜 놈들도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이면 제 아들을 데리고 가십니까?”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속에서 티격태격하는 싸움, 그것이 있을 때 그게 바로 성령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항상 기뻐하라” 라고 해도, 자기 아들이 죽은 장례식에서 그게 되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안 되는데, 그래서 말씀이 우리의 골수와 관절을 찌르고 쪼갠다는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 저도 한 말씀을 지킵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 컨디션이 좋을 때, 집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의 일이고, 그때는 말씀도 잘 지키고 봉사도 잘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가정이 무너져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여,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라고 하던 것은 다 어디로 가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인데,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허락이요!” 라고 하시는데, 즉 “니가 바로 사랑을 받음으로 허락이 되었다. 오직 이것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씀을 신령하게 보는데, 신령이 무슨 의미입니까? 신령하신 분, 즉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골수를 쪼개는데, 그 안에는 “너는 내 덕분에 들어간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벌벌 떨면서 “할렐루야!” 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일종의 신비인데, 좋은 말로 표현해서 말이죠. 신령이라는 것은, 자기 행동이 첨가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의 행함으로 말미암아서, “허락이요!” 라는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말씀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다시 할까요? 그들이 물에서 건짐을 받은 것은 누군가가 대신해서 희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서, “누가 송사하리요? 누가 끊으리요?” 라는 것인데, 누가 주님이 허락하신 구원을 함부로 하겠느냐는 말이죠.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인생을 폭넓게 알기를 원합니다. 컨디션이 좋은 때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가정에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대들곤 합니다. 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사오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항상 주님만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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