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길과 믿음(히 3: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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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히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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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본문에 보니, “어떤 무리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애굽에서는 나왔으나, 결국은 이들이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간다” 라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살다가 그냥 이 땅에서 죽는 것으로서 생을 마감하는데, 그러니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들어간다 것은 전혀 생소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가기는 어디를 갑니까? 그냥 이곳에 묻히면 그만이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나그네는 길에서 머물지 않는다 !!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나는 길이요!” 라고 말이죠. 여기서 길이란 말은, 이 세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데, 그렇지요? 이 세상은 우리가 머물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처럼 마냥 머물고 싶은데, 이왕 머무는 것 이름까지 날리면서 머물고 싶다는 말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리를 털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길인데, 왜 머무느냐는 말이죠. 기차여행을 하다가보면, 깊은 산골에 조그만 간이역을 볼 수 있는데, 참으로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가 막상 자기의 평생 근무지라고 하면, 그만 앞이 깜깜하겠지요?
강원도 산골의 조그마한 분교, 지나가다가 보면 낭만도 있고 괜찮아 보이는데, 하지만 그곳으로 교사발령이 나서 가야한다고 하면, 그러면 가족들이 반대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자기도 가기 싫은데, 무슨 귀양살이도 아니고 말이죠. 지나가는 길이라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는데, 정작 머물려고 하면 문제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야’가 바로 그런 곳인데, 머물러야하는 곳이 아니라 통과해야만 한다는 말이죠. 길이라는 말은, 어딘가를 향해서 뚫려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터널 속에서 살고 싶어요? 그럴 사람은 없어요. 터널의 역할은,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연결해주는 기능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설국(雪國) !!
‘설국’ 이라는 일본 사람이 쓴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눈으로 쌓여있는 그야말로 ‘눈의 나라’ 라는 의미인데 말이죠. 노벨 문학상까지도 받았는데, 그 소설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는고 하니, “이 터널을 지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으로 가득한 별 천지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일본에 실제로 있는 터널인데 말이죠.
이쪽세계와 저쪽세계는 전혀 다른, 이쪽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광경이 터널을 통과하면 펼쳐진다는 것이죠. 지붕도 눈이고, 장독대도 눈이고, 전봇대도 눈이고, 산도 눈이고, 그야말로 눈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눈의 천지인데, 그런 눈의 세계, 즉 설국이 있다는 것을 그 소설이 시작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아무튼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에 충격을 받는 사람도 있고, 전혀 충격을 받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포기하고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어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무슨 길이 필요한가?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충족되고 충분해. 이 세상은 이게 전부다” 라는 사람은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처럼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다” 라고 하심으로서, 이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세계로 보고, 우리가 도착해야 될 세상은 따로 존재한다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구약에서는 “이 세상은 광야다” 라고 함으로서, 이 세상은 스쳐 지나가야 하는 곳임을 말해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광야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통과하지도 못하고 그냥 이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된 자들도 있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일단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나온 것은 성공했는데, 이 광야에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 통해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왜 약속에 땅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는가?
하지만 일상에 바쁜 요즈음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어디에서 빠져 나와서 또 어디로 들어간다고 하는, 이러한 스토리가 그야말로 허황하게 보인다는 겁니다. “어디서 나와서 또 가기는 어디로 가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평소에 우리의 사고방식이 성경말씀과는 서로 다른 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로 나와서 어디로 가야한다” 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진짜로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는데,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까지 왔으면서도, 그들은 왜 약속에 땅에 들어가는 것은 실패했는가?” 라고 하는, 그 이유를 우리가 이 시간에 한 번 알아보자는 겁니다.
여기서 오늘본문 15절과 18절을 보겠습니다.
(히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
(히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마음이 강퍅해서 !!
여기에 보면 그 이유가 추상적으로 나와있는데, 즉 ‘마음이 강퍅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했고, 그래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죠.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고 완악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로 돌아가서 그들은 보게 되면, 그들은 그렇게 완고하고 완악한 자들이 아니란 말이죠. 그들이 조폭집단이 아닌데, 그들은 범죄집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강퍅’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서 민수기 11장 18절을 보겠습니다.
(민 11: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여기에 보면, “애굽에 있을 때에 우리가 재미있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현재 광야환경은 어떻다는 겁니까? 너무 너무 어렵고 힘들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비교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입니까? 지금 이 사람들이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고 있습니까? 애굽의 좋았던 그 시절과, 하나님만 믿고 살아야하는 지금의 초라한 처지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당연히 이런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하나님도 참으로 고약한데, 천국에 자기 백성들을 넣어주면서 좀 곱게 넣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동행한다고 하면서 애굽에서의 좋았던 것은 전혀 제공해주지 않는데, 왜 그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시느냐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도 풍족하게 물자를 뒷받침해 주시면서, 그러면서 이 광야를 통과케 해주면, 어느 인간이 하나님에게 감히 불평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통과할텐데 말이죠. 요즘 말로 하면, 교회에 나오니 사업도 더 잘 되고 자식도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 하고 하면, 그러면 얼마나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순종, 진정한 마음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그래서 어려운 환경 속에 몰아넣으시면서, “이래도 나를 믿고자 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거지 나사로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천국은 꼭 가야겠다는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천국에 간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문제는 이것인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꼭 그렇게 힘들게 하셔야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지옥은 한 번 빠지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그래서 꼭 천국은 가야만 하겠는데, 그렇더라도 일부러 이렇게 고생을 꼭 시켜야 되겠느냐는 말이죠. 아마 다들 그렇게 하나님에게 항의를 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놓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서 ‘강퍅하다’, 혹은 ‘완고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마음구조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인데, 그런 점을 우리가 놓치고 있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마음가짐도 천국다워야 !!
쉽게 말하면, 천국은 환경이 이 세상보다도 월등하다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천국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씨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천국은 환경만 천국다운 것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천국다운 겁니다. 그러니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가봤자, 거기에서 또 항의하기 마련입니다. 무슨 천국에서 데모하고 파업을 할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합니까? 마음을 바뀌어야 하는데, 그런데 마음은 바꾸지 않고 자꾸만 애굽의 꿈만 꾸고 있다는 말이죠. 즉 교회에 왔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마음으로 바뀌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마음을 바꾸기는커녕 복만 바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 복은 여기서 가까운 동화사나 파계사에서 다 이야기하고 있고 것인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부처님을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복 받고, 복 받고!” 라는 것을 반복하는 가운데서, 여전히 강퍅한 자기 마음은 은근 슬쩍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자신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얼마나 다른지, 그것을 계속해서 은폐하고 있는데,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예수님께서 “나는 건강한 자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라고 하셨는데, 병든 자에 한해서 의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병든 자를 건강케 해주는 주치의는 예수님뿐이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을 필요로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기 이전에, ‘광야’ 라는 어항에다가 이스라엘을 모두 넣어놓고는, 과연 어느 고기가 천국 고기이며 어느 고기가 지옥 고기인지를 골라내시는 겁니다. 즉 마음가짐이 천국다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광야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하지만 아직 무슨 문제가 남았는고 하니, “광야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믿음대로 사는 것인지, 그 점을 제가 지금부터 말씀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1장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순종하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는데,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합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 라고 하니, “안 됩니다. 들어가지 못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 땅은 텅텅 비어있는 땅이 아닙니다. 환경적으로 보면, 그 성채는 하늘같이 높고, 또한 거기에 살고 있는 토박이들은 신체가 창대한데, 그런 자들이 그 땅을 사수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니 당연히 그 마음이 완고한데, 그래서 “어느 놈이든 이곳에 발만 들여봐라. 다 죽인다” 라고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충분히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나오든 말든 간에, 하나님께서 “애들아, 들어가라”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들어가면 되는데, 그런데 덩치가 산만한 놈들이 버티고 있으니 도저히 들어가지를 못하는데,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만 울고 말았다는 겁니다.
12명의 정탐꾼 !!
신명기 1장에 보면 그들이 정탐꾼을 보는데, 사실은 이것도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면 되는데 말이죠. 그래도 모세가 그것을 좋게 보고 허락을 해주는데, 그래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서 12명을 정탐꾼으로 보내었죠. 그런데 정탐을 하고 나서 11명이 대성통곡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어가지도 못할 곳에 들어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신 1: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신 1:23)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신 1:24) 그들이 앞으로 가서 산지에 올라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그곳을 정탐하고
거기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자기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이제 이곳 광야에서 그만 죽게 되었다. 광야가 이제 공동묘지가 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길이 되심을 믿고 들어가면 그만인데, 왜 미리 정탐을 해서 스스로 낙담을 자청합니까? 그러니 이것이 곧 완고한 마음이고, 강퍅한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인 갈렙은 그렇지 않았는데, “과연 토박이들 키가 크고 장대와 같고, 우리는 그 앞에서 서니 완전히 메뚜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땅에 들어가라’ 라고 했으니,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해서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광야에서의 신자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천국에 간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순종이라는 조건이, 그만 우리가 눈이 달려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느낀 우리의 조건으로 인해서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데, 이것이 강퍅한 것이고 완고한 겁니다. 자기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되는데, 왜 이게 안 되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조건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조건을 보니, 어찌 이런 모습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강퍅한 것이지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그렇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그러한데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조건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렇게 일부러 해놓았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그래야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될 자만이 구원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천국백성의 마음가짐이 바로 이러한데, 즉 “하나님, 제가 구원받은 것은 십자가의 공로 덕분이었습니다. 전혀 제 능력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능력으로 이곳에서 살 수 있는데, 그러니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의 마음가짐이고 마음씀씀이라는 겁니다.
제가 우리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여러 번 강조를 했는데, “제발 행함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들이 비록 기적을 눈으로 보고 혜택을 몸소 입었어도, 아무리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어도, 결정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으로 간다” 라고 하는,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로 민수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게 신학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이제 너희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22절을 보겠습니다.
(민 14:22)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그러니까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나의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라는 말이죠.
애굽의 바로 왕이 애굽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습니까? 열 번이었는데, 그것을 경험하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말인가요? 똑같이 열 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광야로 나왔지만 그들은 애굽과 같은 생활이 그대로 지속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했는데, “애굽생활은 재미있었다. 거기는 맛있는 것도 풍족했는데, 부추도 있고 향신료도 있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완고한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환경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내 신세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라는 것인데, 즉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던 그 시절이 좋았었다” 라는 겁니다.
바로 왕의 강퍅 !!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의 바로 왕이 강퍅할 때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재앙을 내려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셨는데, 그게 열 가지 재앙인데 말이죠. 물론 처음부터 재앙을 내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모세를 자기를 보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는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러자 바로 왕이 “아니, 이놈이 보통이 아니구나”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술객들이 “형님, 저희들도 그 정도는 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서 흉내를 내니까, 바로 왕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재앙이 시작되는데, 지팡이를 나일강에 대니 그 푸른 물이 그만 붉은 피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노? 제발 좀 그만해라” 라고 해서, 모세가 원래대로 해주니, 바로 왕이 “농담도 못하나?”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즉 “가기는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전부이지, 무슨 또 다른 설국이 있단 말인가?” 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개구리가 바로 왕의 밥상 위까지 올라오는 재앙인데, 그러니 그놈의 개구리 때문에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개구리를 철수시키고 가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구리를 철수시키고 가려고 하는데, 그만 바로 왕의 마음이 변해서 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세 번째는 공중의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인데, 온 몸이 근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왕이 세 번째부터는 좀 기가 죽는데, “니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참 별종이구나. 우리와는 다르구나. 이제 너의 백성들을 데리고 가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또 마음이 변해서 보내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네 번째는 파리가 온 나라에 들끓는 재앙인데, 그러니 나라전체가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그리고 다섯 번째는 애굽에 있는 모든 가축이 죽는 재앙이고, 여섯 번째는 독종이 사람과 가축에게 마구 넘치는 재앙이고, 그 다음으로 일곱 번째는 그 열대지방에 우박이 떨어지는 재앙인데, 그러니 과일이고 뭐고 간에 그만 농산물이 박살이 나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여덟 번째는 메뚜기가 온 나라를 덮쳐서, 들판에 있는 농산물은 물론이고 아예 마지막 싹까지도 다 먹어버리는 재앙인데, 그야말로 남김없이 말이죠. 그리고 아홉 번째는 3일 동안 온 종일 해가 없어지고 밤이 지속되는 재앙인데, 그러니 얼마나 겁이 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인데, 즉 저주가 임했다는 겁니다. 그래도 바로 왕은 백성들을 놔주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애굽의 집안에서 특별히 맏이가 하늘의 공격을 받아서 사망하는 재앙이라는 겁니다. 이때 바로 왕의 맏이도 그만 죽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혈통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 장자들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장자들뿐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가 열 번이나 임하게 되었으면, 그 저주가 어떤 취지에서 떨어졌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즉 바로 왕에게 어떤 마음이 계속 되었기에 이런 재앙이 열 차례나 떨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마음을 바꿔야 하는데, 그런데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재앙이 멈추지 않고, 11번째, 12번째 재앙은 광야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환경에 의존하고, 사람을 너무 의식하고 타인에게 너무 신경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통과하기 위한 광야가 아니라, 그냥 주저앉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광야는 그냥 통과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이제 끝으로,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이죠.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 아버지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복을 받는 곳입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는 그들이 왜 광야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는지, 광야의 내막을 눈치채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았습니까? 우리 마음이 문제였던 것인데, 그게 바로 거지 나사로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통과하는 곳이기에, 그러니 남들에게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시고, 그런 것으로 인해서 낙담하지 마시고, 우리는 주님이 제시해준 길만 가면 된다는 것, 이점을 고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볍고 부담 없이 통과하는, 그런 남은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착해서 복이나 행운을 독차지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 아닌 줄을 알았습니다. 통과하는 이 세상에 주저앉지 않게 해주시고, 환경이 나쁘다고 하나님께 원망할 일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서, 그래서 이제는 천국에 가서 주님께 항의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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