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001설교모음

8강-하나님의 집

아빠와 함께 2021. 8. 30. 11:51

8. 하나님의 집(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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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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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고 하니,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혼자서 몽땅 다 하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혼자 다 하셔서 우리에게 넘겨주시는, 그런 구원의 담당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분을 믿기만 하면 영생이 주어지는데,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 보면,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한다는 겁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것을 성경에서는 핵심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자신이 일을 해야한다고 여깁니까? 그렇게 자기가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나서니까, 그 마음이 겸손해지는 것은 고사하고 날마다 교만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말씀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 겨우 이것밖에 안 됩니다.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 뭐라고 했어?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좌절할 일이 없는데, 그런데 너는 왜 그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의아해하시는데,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 제가 말씀대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 자꾸만 왜 그래? 왜 그래?”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설교를 다시 할까요? 교회에 10, 20년을 다녀도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말이죠. 평소에 제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말씀대로 했는데,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2개는 지켰는데, 나머지 5개는 도저히 안 됩니다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곧 마귀의 짓거리 !!

 

그러면 이런 선입관을 누가 집어넣었는고 하니, 누가 낙담케 하고 좌절케 했는고 하니, 마귀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말씀이 보이지? - , 보입니다. - 그러면 지켜라. - , 지키겠습니다. - 만약에 못 지키면 지옥이다. - , 알겠습니다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게 마귀의 수법인데, “쉬지 말고 기도해라. - , 하겠습니다. - 23시간을 했나? 그러면 1시간을 못했으니 지옥에 간다. 열심히 해라 - , 알겠습니다라는, 이게 바로 마귀의 전략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선입관은 무엇인고 하니, “그까짓 것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 저의 솜씨를 좀 봐주세요.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니까, 제가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데, 하지만 해보면 날이 갈수록 격차만 더 벌어진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신감이 떨어지는데,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아? 백성이 맞아? 이것도 못 지키고 저것도 못 지키고, 내 마음도 다스리지를 못하고, 욕심이 점점 더 늘어나고, 이게 뭐야?” 라고 하면, 마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안 되잖아. 그러니 포기해라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성경말씀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속에 마귀가 심어준 것이 들어있는 입장에서 성경말씀을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고 지시를 내리니까, “아하, 이것은 내가 다 지켜야 하는 모양이다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가 다 지키지 못하니까, “하나님, 제가 지킬 수 있는 것만을 몇 개 골라서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물론 나중에는 그것도 지키지를 못하니까, “하나님,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이제는 조금 쉬겠습니다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뒤로 물러가면서, 스스로 무너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우리교회가 개척을 한 지가 얼마 안 되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점점 예배시간에 늦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5분 늦다가, 10분 늦어지고, 15, 그렇게 점점 뒤로 물러나는데, 자기는 나름대로 일찍 준비해서 교회에 나오려고 하는데, 뭔가 환경이 뒤따라주지 않으니 제대로 말이죠. 그러면 미안한 마음은 증가하고, 믿음은 떨어진다는 겁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봐야할 것은, 아까 찬송가 40장을 불렀는데, 거기에 보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과연 주님이 언제 그렇게 높아 보이고 위대해 보이냐는 겁니다. 일년 중에서 가을하늘이 가장 높은데, 그것은 따듯한 공기가 물러가고 차가운 공기가 다가오면 투과율이 높아서 높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주님이 높고 위대해 보이는고 하니, 정말 자기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역시, 주님은 나와 게임이 안 되는군요. 정말 주님이 오셔서, 몽땅 내 죄를 대신해서 지시고 돌아가셔야 하는군요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완전히 개판이니 말이죠.

 

물론 찬송가 40장은 누구나 연습을 하면 부를 수 있는데, 하지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연습해서 찬송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과 점점 더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이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주님이 필요로 하게 되고 절실하게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우리와는 게임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주님이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일을 다 하셨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고백하게 되는,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는 순간이 된다는 말이죠.

 

목사님, 뉴에이지 음악은 안 되나요?

 

이틀 전에 어떤 청년에게서 상담전화를 받았는데, “목사님, 우리교회에서 목사님이 뉴에이지 음악을, 그게 사탄의 음악이라고 하면서 듣지 말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래서 속으로 율법적인 교회가 여기에 또 있구나. 영혼이 참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하지만 궁금해서 질문도 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참으로 기특하다는 겁니다.

 

음악이라는 것은 듣고 즐기면 되는데, 콩나물에 무슨 마귀에 있느냐는 것이죠. 여기서 콩나물은 음표를 말하는데(ㅋㅋ), 마귀가 달리 마귀가 아니라, “이것은 부르면 안 되고, 이것은 부르면 됩니다라고 하는, 그게 바로 마귀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를 절망케 하고 교만케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술책이라는 말이죠.

 

해바라기를 아시나요

 

그러니 뽕짝이든, 트로트든, 지루박이든, 팝이든, 힙합이든, 무엇이든지 부르라는 겁니다. 놀러가서는 해바라기를 아시나요 라고 하면서 부르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까지 부르면 좀 곤란한데(ㅋㅋ), 아무튼 자기가 무엇인가 징크스를 만든다는 것은 자기도 무엇인가 튀어보려고 하는 것인데, 주님도 높지만 나도 높다라는 겁니다.

 

주님만 높으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같이 높아지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너는 그냥 그 자리에 있어라. 내가 찾아가서 건져주겠다라는 것인데,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도 주님과 같이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제 아무리 스스로 무엇을 만들려고 해도 주님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는데,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늪 속으로 깊이 깊이 빠지고 만다는 겁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아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

 

오늘 본문을 보면, 오늘 본문은 참 간단한데, 1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오셨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교과서에 보면 이 제사장이 나오지를 않는데, 물론 신학서적에는 나오지만 말이죠. 우리는 제사장에서 대해서 어릴 때부터 배운 적이 없는데, 그러니 당연히 수능시험에도 출제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 제사장이 성경에 있어도, 우리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도 나오지만 모르고, 하나님의 집이 나오는데도 모르고, 하나님의 종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또한 모세가 나오는데, 물론 모세를 상식적으로는 대강 알지만, 역시 모른다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자기 백성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지도자 정도로만 안다는 말이죠.

 

비밀은 계속해서 비밀 !!

 

그러니 우리는 모르는데, 이 모른다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비밀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비밀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오늘 장로님의 기도 가운데서도 비밀이 나왔는데, 그러니 우리는 안다고 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이게 비밀이라는 말이죠.

 

왜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알아채면 우리는 곧장 어떻게 합니까?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해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니 우리에게는 비밀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그 비밀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나도 해낸다. 예수님만이 해내나? 나도 할 수 있다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그만 말썽거리가 되고, 그게 종교가 된다는 겁니다. 비밀은 계속해서 비밀인데, 그런데 그저 얻어걸린 사람만이 참여하게 되는 놀라운 세계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사장도 비밀인데, 우리가 안다고 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 비밀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님의 비밀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의 비밀이 있고, 그 다음은 우리 자신의 비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비밀과 비밀의 만남에 있어서 예수님을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 !!

 

여기에 대해서 쉽게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고, 그러면 모세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게 5절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하는데, 즉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겁니다.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여러분은 어쨌든 모세가 하나님의 집의 사환으로, 종으로 열심히 일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자꾸만 예수님께서 일을 다 하셨다고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의문점을 가질 수 있는데,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모세가 한 일들 중에서 한 가지만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거기에서 모세가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모세가 놋뱀을 만드는데,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었는데, 그리고 그것을 장대에 매달아서 높이 치켜세우자,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살아났다는 겁니다.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모세가 왜 그렇게 했는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물이 없고 양식이 없다고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셨는데, 그래도 또 애굽에서 먹었던 맛있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또 불평을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서 물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게 해서 높이 달게 하시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들은 살아나고 그렇게 않은 자들은 죽게 하셨다는 말이죠.

 

이것이 모세가 한 일인데, 그러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서 장사를 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것을 만들면 사람들이 칭찬해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백성들을 의식하면서 만들었습니까? 오히려 내가 미쳤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라고 여기지 않았겠느냐는 겁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불뱀을 물러가게 하시는 것이 합리적이지, 그런데 여전히 불뱀을 주위에 우글거리는데, 딱딱한 놋뱀을 만든다는 것은, 이 놋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데 말이죠. 그러니 모세는 자기가 놋뱀을 만들면서도 정작 당황스러운데, 그래서 이것이 바로 비밀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동창생이 둘이 있는데, 학교를 다닐 때는 둘 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 그런데 졸업을 하고 나서 한 사람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둘의 대화를 한 번 들어봅시다.

 

* 친구 A :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번 일요일에 산에 가자.

* 친구 B : , 교회에 가야해.

* 친구 A : 너 같은 골초에다가 술고래가 교회에 간다고?

* 친구 B : , 진짜로 다녀.

* 친구 A : 그 좋아하던 술과 담배는 어떻게 하고?

* 친구 B : 그것은 좀 줄였어.

* 친구 A : 진짜 이해가 안 되네?

* 친구 B : 사실은 나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

 

그렇게 하나님의 비밀에 접촉된 사람은 내가 왜 이래?” 라고 하게 되는데, 내가 미쳤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무엇이 남는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다니고 있지?” 라는, 그런 느낌이 올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성도라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만 하옵소서. 저도 꽤 괜찮은 인간입니다. 물론 예수님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합니다라고 한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이 없어요. “술 취하지 말라고 하면 술을 끊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지키겠습니다라고, 그렇게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만이 하시고, 자기는 도저히 할 마음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그리고 자기 머리 속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행동을 보이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비밀에 합류되어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것을 자랑하는데, 그런데 그 비밀에 합류한 자들은 누구를 자랑합니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 자신과 자기 가문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데, 그런데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무슨 이렇게 희한한 일이 다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것은 사람들이 흉내낼 것이 아닌데, 애를 쓴다고 해서 따라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 놋뱀은 결코 모세의 아이디어가 아닌데, 모세가 언제 일기장에 하나님, 놋뱀을 만들어서 영광을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 인간의 속성과 전혀 맞지를 않다는 말이죠.

 

사랑의 반대말은, 윤리와 도덕 !!

 

제가 이번에 여름수련회를 하면서 첫날에 사랑에 대해서 목사님들에게 강의를 했는데, 물론 여러분도 사랑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할 수는 없지 싶은데 말이죠.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그래서 제가 강의를 하면서 사랑의 반대말은 윤리와 도덕이다라고 했는데,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을 대할 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냐는 겁니다.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서, 그 상대로 하여금, 자기가 얼마나 인품이 좋고, 남을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을 정도로 심성이 넓은지, 그것을 알려지는 것을 노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렇다는 말이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이놈의 자식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나? 이런 넓은 부모 마음을 니가 몰라주면 되겠나?” 라는 것인데,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겁니다. 목사라고 하면, 교인들에게 어떤 행동을 함으로서, “우리 목사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아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을 각오로 과연 사랑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의 반대는 자기의 윤리와 도덕을 챙기면서 하는 사랑인데, 그야말로 가증스러운 것이죠. 그래서 제가 첫날부터 여러분이 목사입니까? 목회를 잘해서 훌륭하고 인격이 고상한 목사, 사랑이 넘치는 목사, 그런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가증스러운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말이죠. 사랑은 자기 위신과 체면도 다 포기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 그게 곧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여러분, 부부간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달리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상대를 서로 이용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가서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아무리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해도, 교회에 좀 다니면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저도 조금은 지킵니다. 십일조도 잘 내고요, 교회봉사도 열심히 합니다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니가 고린도전서 13장을 봤어? 거기에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되어있는데, 너는 그것을 몰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것은 내년에 지키려고 합니다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는 것은,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신앙생활을 50년을 해도, 우리 속에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쪽으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음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 나와 너의 격차가 더 벌어졌음을 확인해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이 아닌데, 우리가 믿을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점잔하고 예의바르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되겠느냐는 말이죠.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말이죠. 나름 다들 한 윤리와 한 도덕을 하는데, 그러니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누가 놋뱀을 쳐다보겠는가?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모세가 놋뱀을 들었는데, 그런데 우리의 상식은 무엇입니까? 놋뱀을 쳐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불뱀이 물러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불뱀은 불뱀대로 물려오게 하시고, 그리고 놋뱀을 쳐다보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전혀 예상치도 못한 돌발적인 상황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정신이 나간 자들이나 바보들이 쳐다보지, 누가 그 놋뱀을 누가 쳐다보겠습니까? 모두들 한 인격을 하는 잘난 인간들인데 말이죠. 그러니 사람들은 당연히 모세야, 당신 지금 뭐하노? 우리하고 장난을 치자는 것인가? 이게 무슨 짓이고?”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은 이런 모세의 행동을 두고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집의 사환으로 있는 자의 충성된 행동이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종이 그러하다고 하면, 아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가 그렇게 놋뱀을 든 것에다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렸다는 겁니다.

 

장차 오실 아들을 보여주는 사환 !!

 

그러니 사환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오실 아들이 십자가를 지시는데, 그 십자가를 믿는 자는, 배우든 배우지 못했던 간에, 돈이 있든 없든 간에, 세리든 창기든 간에, 십자가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 참으로 희한한 비밀, 그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모세도 광야에서 희한한 일을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놋뱀을 믿지 않는 자들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도 믿지를 않는데, 그렇게 십자가를 믿지 못하니까 무엇이라고 합니까? “목사님, 저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압니다. 그리고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 특히 형제우애는 끝내줍니다라고 나오는데, 자기는 그런 것들을 신앙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십자가를 아는 것인가요?

 

저는 그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것은 묻고 싶은데, “키가 2m 90cm이 되는 사람과 싸워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아마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싸워볼 의향조차 없지 싶은데,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골리앗인데, 그러니 막상 그런 사람과 싸우라고 하면 당연히 탱크나 수류탄으로 무장을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아니면 36계를 놓든지 말이죠.

 

그러나 소년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갑옷도 없이 칼도 없이 달랑 돌멩이 하나만 들고 그 골리앗과 마주섰는데, 이것이 과연 제 정신입니까?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의 행동이 무모하다고 여겨져야,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무모하다고 여기는 것은 다 벗어버리고, 자기 행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 그 당시에 다윗을 해치려고 했던 사울 집단들이 행했던 행세라는 겁니다. 불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기독교는 간단한데, 따지고 보면 말씀은 간단해요.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몽땅 다 대행하려고 오신 분이 계시는데, 그 어떤 경우라도 그분을 잊지 말자라는 겁니다.

 

모세가 나왔으니 누가복음 9장을 보겠는데, 28절에서 31절입니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여기에 보면 모세와 예수님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이 변화산 사건인데, 시대를 초월해서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고 하면, 먼저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슨 대화를 해야하는지, 그것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셔야 하는데, 정말 그렇게 하실 겁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그래, 내가 죽어야한다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고, 누가복음 9장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 별세를 하셔야 합니다 !!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야, 니가 참 착하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야, 너도 말씀을 참 잘 지키는구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야, 니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위대하구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모세가 예수님, 돌아가셔야 하는데요?” 라고 하니, 예수님은 그래,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죄를 위해서 죽어줄게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는 말이죠.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지금 바깥 세상에서는 윤리와 도덕적으로 이 세상을 따지고, 그리고 성도라면 이런 착한 행동을 해야한다라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서는 전혀 다른,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빛과 소금이 되어야한다라는,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

 

그것을 오늘 본문 5절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고 하는데, 모세의 장래는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인데, 그렇게 예수님의 일을 앞당겨서 증거할 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죠.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모세는 장차 올 일을 위해서 놋뱀을 들었는데, 모세도 그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니까, 그 의미가 드러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사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라는 것을, 그것을 나중에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모세 이야기이고, 그러면 우리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 혹은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그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목에 십자가를 걸면 됩니까? 자동차에 십자가를 매달면 됩니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거리에 나가서 전도를 할까요? 그러면 되는 겁니까?

 

우리는 하나만을 하면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의 비밀을 하나님의 비밀과 바꿔치기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제가 너무 어렵게 이야기를 했습니까? 자기의 비밀은 제일 깊숙이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비밀을, 예수님의 비밀을 마치 구들장에 공깃밥을 넣어놓듯이 넣어놓으면 된다는 됩니다.

 

인생이란, 나의 교통수단을 바꾸는 것 !!

 

다른 예를 들면,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생은 내가 교통수단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죠. 참 좋은 이야기인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을 타고 온 인생이 열차로 갈아탄다는, 살아있을 때는 말을 탔지만, 죽음 이후에는 열차를 탄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교통수단이 말에서 열차로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죽는다고 해서 자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여전히 열차를 타고 있으니, 그러니 죽음에 너무 겁먹지 말라는 말이죠.

 

이제는 비밀을 바꾸자 !!

 

저는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싶은데, 여러분 속에는 분명히 보물이 있는데, 그 보물을 바꿔볼 마음이 없느냐는 겁니다. 즉 보물을 갈아치우자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이 보물인데, 우리 딸아이의 이름이 진주인데, 그러니 그야말로 보물이라는 겁니다(ㅋㅋ).

 

모두가 다 보물이 있는데, 그게 자존심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아무튼 다들 있다는 겁니다. 이제 그것을 좀 밀쳐내 보자는 겁니다. “그동안 내가 너 때문에 잘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자리를 좀 비켜다오. 미안하다. 50년 동안 정이 많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만 헤어지자라고 하자는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정들었던 비밀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비밀,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그 대제사장이 되심,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가 이전에 보물을 두었던 그 자리에 집어넣자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은 다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라고 하지 않는데, 그것은 목사가 요구하는데 말이죠. 그 어디를 가도 그 듬직한 무게중심,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인데, 그것을 우리의 비밀금고에 심어놓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돈이 날아가고 건강이 날아가고 자식이 날아가도, 우리의 바뀌어진 그 비밀은 절대로 날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우리의 진짜 보물로 삼을 때, 그러면 마지막으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친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나? 고등학교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잖아. 물론 교회도 다니지 않고 말이야. 우리가 미션스쿨을 나와서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다 아는데, 그런데 지금 왜 그래? 지금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나?”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점점 더 멀어지는 주님, 그러나 그 주님이 진정으로 나의 보물로 삼기에 합당하신 주님이고, 그 주님을 찬양한다 라는 대답과 고백이 나온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 보물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남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고이 간직한 그 보물을, 한 평생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꿈과 희망을 주었던 보물을 이제는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운 보물로 바꿀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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