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모방 인생

아빠와 함께 2021. 8. 16. 10:45

모방 인생 

2021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욥기 29:8-18

(29:8)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29:9)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29:10)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 천장에 붙었었느니라

(29:11)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29:12)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29: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29:14)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29:15)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29:16)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29:17)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

(29:18)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 같이 많을 것이라

욥은 자신을 ‘궁극적 존재’로 모델로 여깁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고 군더더기없는 인생을 살아왔노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자신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이런 주장을 보중증해 줄 수많은 각계 각층의 사람이 있음을 전제로 친구들에게 자신감 있게 말합니다, 착하고 선함의 표준으로 살아온 자신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합니다.

욥의 이러한 주장은, 복음 밖에서 복음이나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견해를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선하시다’에서 출발해서 ,‘하나님 믿는 자는 선해야 한다’를 거쳐서 ‘그래서 내가 이런 선한 일을 벌리고 있다’ 더나아가서 ‘그래서 나는 하나님마저 인정해주는 선한 사람 맞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에 하자가 없다고 여깁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은 비록 교회는 안 나가지만 선함에 대해서 포기하거나 기피하거나 악함으로 나아가고자 한 적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을 거점으로 삼아 자신의 미래나 운명까지 보장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이런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내 안에 선한 신이 계시기 때문이다”는 주장입니다.

도대체 욥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대로 라면 욥은 그 사회의 ‘정신적 스승’으로 대우받아왔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젊은이들은 욥의 권위를 인정해주었고 늙은이들도 욥의 뛰어난 지혜에 합당한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갖는 사람들을 욥은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고 그들은 그의 도와줌에 만족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근원적으로 모르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변화나 움직임이 욥의 착함을 위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내가 일부러 TV를 켜기 전에 저절로 TV가 켜졌어 왕왕 각종 소리들을 내뿜는 그 환경에 일방적으로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욥이 착한 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조성되고 움직여지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고 생동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를 때는 이것이 정답’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욥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어도 족할 그 정도의 진리를 듣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겁니다.

이 문제와 유사한 문제가 사도행전 10장에 나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2,4)

고넬료는 지금 이 순간까지 복음을 모릅니다. 그런데 복음은 모르지만 그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까지 도달했다고 천사가 와서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람이 복음을 몰라도 천국 가거나 하나님을 기뻐시게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와 관련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이러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원천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모르는 고넬료가 지금 자신이 행한 그 일의 의미는 의미대로 유지하면서 베드로를 만나 복음까지 알아서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미진한 것들이 제대로 채워져서 온전하게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천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 복음을 알았다면, 그가 복음을 알기 전에 한 모든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안에서 미리 일하신 ‘주님의 일’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인간 행함의 원칙은 마태복음 16:24의 말씀을 준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이 예수님 앞에서 다 부인되어야 될 것들입니다. 요한복음 3:27에 보면,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인간을 쓰시는 겁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내가 했다”가 성립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욥은 이런 한계점을 드러내는 걸까요? 그것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방하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도 모방이 시작됩니다.

이는 모델은 이미 기존의 세상에서 찾는 방식입니다. 즉 모델은 그 시대에 ‘사람같이 사는 사람’을 찾고자 했던 겁니다. 어떤 사람이 바르게 살면, 자신은 ‘그 사람이 행한 것+ 자신이 더 한 것’을 개발할 수 있는 모티브(동기)로 사용한 겁니다. 그래서 완전에 완전히 기하는 바로 그것은 인간이 올바른 쪽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분노와 원한(怨恨)을 안고 태어납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만사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섹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소설에서, 유대인의 지독한 상인은 자기에게 살점을 빚진 자를 상대로 고소했습니다.

기어이 담보로 잡은 살점을 자신이 갖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현명한 재판장은, “살점을 가져가되 피 한 방울을 흘리게 하면서 가져가서는 안 된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은 실패와 거기에 오는 좌절과 그리고 그 좌절을 애써 들키지 않으려는 위선으로 포장되면서 진행됩니다.

남들이 고마워한다고 해서 참으로 고마워하는지, 아니면 그 사람의 근원적인 욕심까지 원천적으로 욥이 나서서 제거해주었는지 그것은 인간으로서 알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일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상대방이 정신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타인은 곧 타인을 위함이 아니라 타인에게 행한 자신의 선한 일을 돋보이게 하는 행위로 전락됩니다.

올바른 사람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 복음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원한을 가진 귀신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분노와 원한까지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6강-욥기 29장 8~18절(모방인생)21081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9장 8~18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천장에 붙었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 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었느니라,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

욥이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살았으면 나는 이 정도 존재고 이것은 내가 부정할 수 없고 너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런 일을 했을 때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너희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고 지금 친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완벽하잖아. 인간으로서 더는 완벽하게 살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살았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욥 자신의 말이나 행동은 너무나 권위가 있어서 8절에 보면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혹시 또 뭐 걸릴 게 있을까 싶어서, 담배 피웠다고 잔소리할까 싶어서 피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볼 때는 저분에게는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그로 인해 내가 자책할 것이 많다고 하면서 피하는 겁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라고 되어 있는데 인생 사는 것이 나보다 적은데도 불구하고 인생 아는 것이 나보다 훨씬 많이 산 것처럼 지혜를 베푸니 내가 건방지게 앉아 있을 수 없다. 이건 어른 모시듯이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당한 예우를 갖추는 거예요. 욥이 이렇게 살아온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멘토입니다. 정신적인 스승, 예수님 당시는 이것을 가지고 ‘랍비’라고 하죠. 스승, 도사, 또는 지혜자, 제갈공명 이런 거죠.

모르는 것이 없고 앞일까지 아는 혜안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기에서 욥은 지금 한껏 자기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여기에 자기로부터 혜택받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라고 되어있는데 망하게 된 자도 욥이 가서 도와줘서 안 망하게 되었고, 남에게 항상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도 빼앗기는 그 당시 교육받지 못한 여성들인 과부의 마음, 또 여기 의지할 만한 분으로서 자기는 욥이 있다는 그 자체로 나는 세상 살맛 난다는 그 정도로 대단한 멘토, 스승으로서의 욥의 위상은 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4~15절에 보면 욥 자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의 정의 올바름으로 완전무장되어 있고 15절에 보면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잘 모르는 미제사건까지 해결했어요. 경찰서에서 해결 못 하는 미제사건까지 해결했어요.

어려운 사람의 아비가 되어서 “내가 있잖아. 내가 도와줄게”라고 도와줬으며 심지어 17절에 보면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불의한 자,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사채업자, 사채업자가 이자 받아간 거 도로 다 받아내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었느니라”라고 하는 건, 이러한 스파이더맨, 수퍼맨같은 존재, 이 시대의 희망이에요. 이런 사람이 대선 나와야죠. 이런 사람이 대통령 되어야죠.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리고 18절에 보면 자기가 이렇게 살았으니까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자기는 있는 자리에서 곱게 죽겠다는 것이 선종이에요. 선종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만, 평소에는 사람들이 선종이라는 단어를 잘 몰랐는데 김수환 추기경 죽고 나서 언론에서 선종이라고 해서 ‘아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구나’라는 그 선종이 욥기에 나오는 선종이에요.

그냥 인간들 죽는 것은 죽는 거고 착하고 착한 사람,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다 죽은 사람은 선종이에요. 자기는 아까운 죽음이라고 칭송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선종하고 난 뒤에는 자기 날은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같은 사람은 죽고 난 뒤에 오래오래 더 영원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착함과 선행이 아까워서라도 이거는 허무하게 소멸될 수 없을 그 정도로 나는 대단한 일을 했다는 겁니다.

이런 자기를 뭘 지적해. 이런 행함이 있는데. 이게 다 무의미한 거야. 지금 증거자들이 있고 이 말에 대해서 ‘그렇게 했었습니다’라고 보증해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이런 나를 그렇게 욕을 하느냐고 나오는 거죠. 이러한 욥에 대해서 제가 굳이 나서서 욕할 필요도 없이 그 뒤에 엘리후가 나와서 욕이란 욕은 다 해줍니다. 그러면 욥의 이런 주장을 욥이 의도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고요, 본인도 답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욥의 이러한 태도는 뭐냐 하면 내가 남은 인생을 다 갖다가 툴툴 털어서 다 바칠 테니까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진리, 그 진리 없는지를 우리에게 되묻는 겁니다. 내 인생과 사는 거 전부 다 갖다 바칠 테니까 그 바치는 거 이상 가치 있는 핵심 정답을 누가 주실 분 없느냐고 묻는 거예요. 이 욥이라는 사람이 성경에 등장하고 실제 인간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을 우리는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내놓습니다. 욥은 자기를 궁극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최후 존재. 그러면 욥의 뭐가 문제 있는지 우리가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왜냐 하면 이렇게 나왔을 때, 어떤 사람이 교회 다니냐 안 다니냐, 어떤 사람이 십자가 복음 전하면 욥같은 이러한 바탕을, 사상을 깔고 ‘내가 굳이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터무니없이 들린다. 나는 도무지 용납 못 하겠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그런데 십자가가 죄도 없는 나 대신 십자가를 대신 진다는 것이 말이 되냐?’라고 누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사람 있다면, 물론 복음을 이야기해야 그런 소리가 들리겠지만,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거기에 대해 합당한 답변을 해주겠습니까?

미리 예상 문제로 욥 29장에 나와 있잖아요. 제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세익스피어가 먼저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베니스 상인에서 아주 악착같이 돈만 밝히는 유대인 사채업자가 담보로 뭘 잡느냐 하면 그 사람이 돈 없다고 하니까 “너의 엉덩이 살점을 담보로 돈 빌려줄게”라고 빌려준 거죠. 그 사람은 돈 될 줄 알고 했는데 안 돼서 “다음에 갚아 줄게요”라고 미루니까 계약서대로 살점 내놓으라고 한 거죠.

살점 내놓으라는 것은 이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죠. 그래서 재판을 열었는데 판사가 아주 명판사예요. “좋아. 살점을 뜯어가라.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욥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군더더기 없는 인생을 살려고 시도한 거예요. 욥은 뭘 놓쳤느냐 하면, 욥이 만약 요즘 사람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태어났는데 벌써 내가 켜지도 않았는데 TV가 켜져 있었다는 이 세상.

이 환경이라는 것이 여기 나오는 고아나 과부, 소경, 절룩발이, 빈궁한 사람, 이 사람들이 욥이 착한 일하기 위해서 욥이 착한 일 하도록 부추기기 위해서 소경 아닌 자가 소경이 딱 되어서 등장했습니까? 아니거든요. 이미 이 환경이라는 거, 절룩발이, 과부가 있는 이 모든 환경이라는 것은 욥이 태어나기 전에, 욥이 뭔가 일하기 전에 이미 주어진 겁니다. 내가 TV 켜기 전에 TV에서 왕왕 소리가 나듯이, 이 세상은 이미 모든 것이 그렇게 주어진 거예요.

이미 주어졌으면 욥은 뭘 찾아야 하느냐 하면 내가 이 가운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를 찾을 것이 아니고, 자기 이야기 할 것이 아니고 왜 세상은 소경과 절룩발이가 있는지 그 원인부터, 그 원천, 그 출처부터 본인이 알고 있어야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욥은요 진짜 이방인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에도 욥같은 이방인이 있는데요, 그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0장 1~2절에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대(이탈리아 군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4절에 보면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는 이 대목입니다.

고넬료는 지금 복음을 모릅니다. 성령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 만나기 전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더니 4절에 보면 천사가 와서 그걸 인정했어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그러면 이 이방인 고넬료는 착한 일 많이 해서 천당 가는 사람입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복음 몰라도 복음 이전부터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편의(advantage)를 제공해서 다른 착한 일 적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 제치고 고넬료부터 먼저 백신 맞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고넬료부터 구원의 백신 맞게 하시고 천국 보내시는 그런 이론이 성립되는 거예요. 제가 묻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안 믿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물었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이 답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명히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데요.

불신자가, 불교 신자가, 또 여호와증인이 어떤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복음 아는 입장에서는 ‘아이고, 쓸데없는 지옥 갈 짓 한다. 무의미하다’라고 하겠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여호와증인아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고 기억되었사오니”라고 하면 그들은 복음은 몰라도 천국 갈 가능성은 다른 사람보다 그만큼 많이 확보했다는 것이 되지요. 뭐 풍선을 많이 확보했든지 점수를 많이 땄든지 사전 준비를 많이 했다든지.

그런 비슷한 이론이 천주교에 있습니다. 하여튼 천주교에서 하는 일은 하나같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정도는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천주교에서 하는 주장과 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복음 아닌 일만 해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너무너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많이 봐주기로 했다는 겁니다.

서양에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있다면 그러면 동양에는 공자, 맹자, ‘자’자 돌림 멘토들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중에 천국에 다 간다는 말씀이거든요. 왜냐. 품성이 워낙 착하거든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프리카 독립할 때나 아시아, 동남아시아 독립운동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각 나라에 안중근의사같은 자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 하나 생각해서 몸 바쳤을 때 그들은 천국 가는 겁니까. 진주 남강에 몸 던진 논개도 지금 천국에 가 있습니까? 이러한 생각들, 세종대왕, 자기가 세종대왕을 알기는 알아요?, 연개소문, 을지문덕, 나라 하나 지키기 위해서 수나라 백만대군과 싸웠던 그 을지문덕 장군, 장수왕, 이런 사람들. 지금 이게 안 믿는 사람들, 초등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그 질문을 해대는지요.

성경 사도행전에 고넬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금 원천은 모르고 결과만 지금 갖고있는 거예요. 결과만. 지금 고넬료가 이 정도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자칫하면 어떤 논리에 빠지느냐 하면 고넬료는 복음을 알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이 기억한바 되는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거기에 십자가 복음까지 알아버리면 이 고넬료는 같이 천국을 가되 어떤 이익이 주어지느냐 하면 상급이 많다는 거예요. 상급, 보너스, 성과급이 많다는 겁니다. 잔업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넬료로 하여금 베드로와 우발적으로 만나게 하신 것은 그동안 네가 한 기도와 하나님이 응답한 기도와 구제가 네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모르기 이전부터 이미 주님이 너를 선택하기로 작정한 주님께서 복음 만나는 시점 이전부터 이미 주의 일이 계시가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고넬료는 뭐냐 하면 내가 했다는 거예요. 내가 시발점이고 내가 원천점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넬료는 복음 모르면 지옥 갑니다. 고넬료가 달라져야 할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전에 이 착한 일은 기도해도 내가 기도하고 구제해도 내가 구제하고 하나님을 경외해도 내가 경외한다는 자기가 자기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고넬료 이야기와 유사한 것이 오늘 본문에 욥 이야기예요. 욥은 지금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모르고 있어요.

복음을 모르고 어떤 결과만 쭉 내놓고 이게 과연 무의미하다는 말이냐고 내세웁니다. 제가 지금 욥이 있는 그 현장에 있다면 욥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요. 당신의 그 착하다는 거, 선하다는 것을 누구에게 모방했습니까? 누구를 모델로 해서 그렇게 착하고 선한 일을 했습니까? 문제는 욥에게는 그런 모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모델이 없으면 모든 착한 일은 주인공이 나 외에는 없다. 내가 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어긋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어요. 여러분이 이해가 잘 안 가신다는 눈치인데, 요한복음 3장 27절에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라는 이 원칙을 지금 욥은 모르고 있어요.

또 욥이 모르는 것이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나오는 청동거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0~12절에 보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장성했다는 것을 장성한 자에 한해서만 지난날이 어린아이 같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린아이 같다는 말은 의미 없거든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그게 다 온전한 것이 아니에요. 부분적이에요. 지금 욥도 그 정도는 알아요. 내가 지금 완전하게 완벽하게 일을 하는데 혹시 이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고 이것도 하나에 한 모퉁이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온전한 것을 나에게 좀 이야기해달라고 지금 욥은 답답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온전한 것이 뭐냐. 온전한 것은 신약에 와서 아는 거예요. 여기 13절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여기서 거울은 청동거울이에요. 이건 닦아서 윤기 내서 보는 거울이에요, “희미하나” 청동거울의 특징이 뭐냐 하면 희미한 거예요. 온전한 것에 비하면 희미한 거. 그 당시에 거울이 발명이 안 되었으니까 희미한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욥에게 하는 거예요.

당신의 그 옳다는 주장은 누구에게 베껴서 그런 결론을 내렸느냐는 그것을 묻고 싶은 거예요. 이 말은 오늘날 불신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나는 교회 안 다녔지만 착한 일 많이 했다”라고 할 때 그 이야기를 누구를 모델로 해서 누구한테 베껴서 그 이야기를 옳다고 우기면서 그 말을 하는 건지 묻고 싶은 거예요.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나요?

하늘에서 온 겁니까? 땅에서 온 겁니까? 당연히 땅에서 온 거죠. 같은 인간끼리 같은 인간을 모방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인간의 모든 시작은 모방이라고 했잖아요. 인간은 모든 교육은 모방이라고. 이게 그 착하기 짝이 없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처럼 모든 인간은 교육이 모방에서 시작한다고 할 때 제가 또 묻고 싶어요. 그거 누구에게 배웠어요? 누구에게.

자기 부모에게 배웠고, 사회에서 배웠지요. 그러니까 온전치 못한 데서 온전치 못한 것을 그냥 카피한 거예요. 이 세상 인간들이 하는 주장을, 그 육적인 주장들을. 다른 안 믿는 사람 욕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봅시다. 우리 자신들이 내뱉는 이야기가 누구에게 들었던 이야기고 누구에게 베낀 겁니까? 이 모방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레피티션(repetition) 이라고 해요. ‘레피티션’이라고 하는 것은 연기할 때 처음 연기하는 사람에게 훈련을 시키는 방법이 레피티션 이에요.

어떤 사람이 제 앞에 있으면 제가 방금 이야기 한 거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누구에게 베낀 거예요?”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대로 따라 하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누구에게 베낀 거예요?”라고. “옳지 감정 좋고. 그것 참 잘했습니다”라고 하면 “그것 참 잘했습니다”라고 또 반복하는 이게 연기수업에 일종이에요. 인간은 돈 내고 교육받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TV, 유튜브, 그 모든 뉴스를 가지고 전부 다 흡수합니다. 자꾸 흡수하니까 가만히 있어도 배우게 돼요.

TV가 틀어져 있으니까. 세상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이 욥에게 따끔하게 당신은 이래서 문제이고 잘못되었다는 내용은 그거예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인간같은 인간을 찾은 것이 그 자체가 당신의 실수예요. 내가 모방할 만한 그런 사람 찾고 싶다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어요. 이 세상에 사람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모두 다 원한을 갖고 있어요.

원한을 품은 비가 주룩주룩 오는 공동묘지에 귀신들입니다. 전부다. 머리 풀고 소복 입고 있어요. 전부 얌전히 앉아 있지만, 속에 뜯어 보면 해부해 보면 원한과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어요. 화장실에서 변 안 나온다고 분노하죠, 오줌발 약하다고 분노하죠, 날씨 덥다고 분노하죠, 자기 해수욕장 가는데 비온다고 분노하죠, 오면서 차 밀린다고 분노하죠, 왜 우리 집만 확진자 나오냐고 분노하죠. 분노가 지층처럼 쌓이고 쌓여있습니다.

애써 분노를 안 들키려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좋은 사람 만나서 ‘이쁘다. 사랑한다’라고 맨날 해도 헤어져 보세요. 갑자기 잠복 되어있던 분노가 ‘네가 나를 차?’라고 너 죽고 나 살자며 덤비죠. 데이트폭력. 모든 것이 태어날 때부터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기도 케이크 먹고 누나도 케이크 먹는데 누나는 아직 남아 있고 자기는 다 먹었거든요.

강제로 누나의 것을 잡으니까 누나가 손으로 딱 치니까 두 살 먹은 아이가 분노의 얼굴을 하면서 울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생일날인데도 불구하고. 생일에는 웃어야 하는 건데 그런 건 몰라요. 케이크 다 먹었다고 분노의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달래준다고 밥 먹여주고. 자녀 교육 딴 거 아니에요. 분노를 다른 욕망으로 대체해 주면 그게 자녀 교육입니다. 저도 사자머리 교수처럼 십분 상담하고 50만 원 받아야겠어요.

제가 아니어도 엘리후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지적을 다 합니다. 너는 지금껏 아무리 착하게 해도 너밖에 모른다. 너밖에 몰라. 그러면 신약에 오면 뭐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오직 복음만 알아라. 딴 거 하지 말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너 자신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말아라. 그냥 하루 치만 살고 네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내일 되면 또 주께서 일 주실 거예요.

성령 받았다는 말이 뭐냐 하면 다른 게 아니고 내 것이 자꾸 무너지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내 것이 무너져도 또 내일이 되면 내 것이 또 생겨요. 그러니까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는 성령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성령에 의해 새롭게 확인받고 지적받아야 해요. 왜? 자꾸만 잘난 나가 자꾸 생기니까요. 내가 뭐 어때서, 내가 뭐 잘못했는데. 이게 자꾸 생긴다고요. 자꾸 생기면 성령은 자꾸 지적하죠.

그래서 복음, 십자가만 생각해야 해요. 다 이루었다. 저 피가 나를 살리는구나. 그것만 생각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부수는 작업을 매일 하루하루 우리에게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똑바로 알고 우리 자신도 알게 하옵소서. 분노를 모방하고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 우리 일과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착한 일 했고 바른 일 했고 주님 섬겼다고 우깁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십자가에 부정되어야 할 일인 것을 끄집어내야 할 일인 것을 죄인인 것을 저희들이 자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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