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지혜 찾기

아빠와 함께 2021. 8. 3. 11:07

지헤 찾기 

2021년 8월 1일                  본문 말씀: 욥기 28: 21-28

(28:21)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28:22)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28:23)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8:24)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28:25)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28:26)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28:27) 그 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이 지혜를 찾는 방식은 자기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이것 정도는 안다, 저것도 안다’라고 하면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식으로 해봤자 자기에게 난데없이 들이닥친 고통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 포기할 수는 없고 어떻게 하든지 진리 찾기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욥이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이 말이 맞다 틀렸다는 인간들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혜와 진리를 찾겠다고 나선 것자체가 마치 자신에게 진리나 지혜나 명철을 찾아나설 권리가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무리 뭘 찾아나서도 결국 그 모든 의미는 시작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일 뿐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에게서 출발해서 자기에게도 되돌아오는 그 노선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정도로 갇힌 상태입니다. 요한복음 13:36-37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지혜나 진리에 세계에 들어설 자격이 왜 없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진리 자체가 인간들이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제대로 율법을 충족시키는 죽음을 준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꾸 자신을 살리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인간들의 자기 의가 그대로 유지가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즉 자신이 ‘꼭 죽어야 될 이유’에서 본인이 의도적으로 회피한 바가 됩니다. ‘일단 나는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어’는 전제로 해서 지혜와 진리를 찾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욥이 말하는 지혜나 선이나 악함은 어디까지나 그정도는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나 선이나 악함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욥은 구약 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욥에게 막힌 문제는 이스라엘의 언약 속에서 발견됩니다. 시편 1:5-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에서 악인에게는 견디지 못하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즉 악인이 스스로 심판을 이기고 의인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는 식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일 안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의인이라야 심판에서 벗어난 지역에 산다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주어진 율법은 완전한 의인을 양산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의 지혜는 자기 택한 백성을 일단 죽이십니다. 그 죽이는 방식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는 식으로 개입’하십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악의 조정을 받는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이 개입에 준해서 악인과 의인이 수립됩니다.

즉 하나님의 개입, 혹은 하나님만이 의가 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십니다. 이를 인하여 철저하게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7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여기서 ‘닫으면 열 자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즉 친히 문을 닫아걸어 둔 이상, 그 어떤 인간도 그 닫힌 문을 열 자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문 안과 문 밖으로 구분짓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있어 인간이 관여하는 일이 일체 없게끔 하시겠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처리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지혜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으로 친히 그 지혜를 찾아내기 위해 하늘에서 어떤 분이 오시게 되는데 그 오심의 경로가 바로 ‘길’이 됩니다.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 끝에만 지혜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은 그 길에 들어설 수가 없었던 겁니다. 베드로가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을 꼭붙어 다니겠다고 제안해도 주님께서 단호하게 거절 하신 이유가 그 길은 오직 예수님만이 형성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는 경우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14-15절에 보면, “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찾는 실력으로 철저하게 부정하시고 그 배격한 그 자리에 오직 예수님 자신을 두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요 길입니다. 이 길로 인하여 왜 모든 인간이 의인이 하나도 없고 죄인들 뿐이냐가 드러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 악인들에게는 시편 1:5의 말씀처럼, 가혹한 심판만 주어질 뿐입니다.

인간이 버텨낼 심판은 아예 하나님께서 주신 적도 없습니다. 필히 인간이 못 이겨내는 심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마저도 친히 저주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그렇다면 이제 지혜의 남은 사역은 이것입니다. 말씀대로 저주받은 자 중에서 친히 말씀께서 스스로 일하셔서 그 저주받은 자 속을 말씀의 세계로 조성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그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하지만 그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말씀의 작용으로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이런 혜택은 입은 자들이 바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살려내신 겁니다. 지혜가 미완성이 아니라 완성이 되었기에 그들의 위한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세계로 들어오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의롭다’가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의롭다’가 성립됩니다.

주님의 의로심이 작렬하기에 의인의 회중에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혜가 자리잡은 장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4강-욥기 28장 21~28절(지혜찾기)21080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8장 21~28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오심은 숨겨놓은 것을 보물찾기하기 위해서 오셨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보물을 딱 두시고 사람은 모르는데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에 어떤 경로를 만들어요. 내가 숨겨놓은 영생의 보물을 다른 사람은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다고 계속 제쳐 나가시면서 오직 예수님만이 그 보물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곧 길이요. 보물 어디 있는지 나만 안다. 곧 주님만 아신다는 겁니다. 생명이 어디 있는지 주님 나만 안다는 겁니다. “나는 곧 길이요”라고 하실 때 여기서 벌어지는 상황은 베드로가 그 길에 참여하고자 할 때 베드로를 밀어냅니다. 요한복음 13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막습니다. 하여튼 눈치도 없어요.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합니다.

주님과 같이 붙어있으면 주님 가신 그 길을 자기가 같이 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뭔가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이 정도 하면 뭔가 변화 일어났잖아’라고 자기 변화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 막무가내로 주님에게 꼭 붙어서 안 떨어지고 붙어있으면 주님 가시는 그곳에 자기도 갈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못 옵니다. 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14장에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 자리가 없다고. 너의 자리가 없어요. 하늘나라에는 우리 자리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가고 싶죠. 이렇게 더운데 언제까지 여기 살겁니까. 가고 싶은데 내 자리가 없어요. 그리고 예수 믿어도 내 자리가 없습니다. 하여튼 장례식 할 때마다 “먼저 가신 분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리운 분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는데 지긋지긋해요, 이제. 남편 보내고 좀 사나 싶은데 남편 보내고 다시 천국 가서 만나고 싶어요? 진정 그러고 싶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천국에는 나의 자리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의 자리를 배격해요. 천국은 나의 자리가 없고 나를 어떠한 자리도 주님께서는 마련할 생각도 없고 마련한 적도 없고요. 천국에서 마련한 것은 나의 자리가 아니고 우리의 자리예요. 그 우리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의 확장이냐 하면 예수님의 자리가 확장되면 그게 우리가 되는 거예요.

네가 천국 오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니고 내가(주님이) 가서 이제는 너의 자격이 아니라 나(예수님)의 자격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나가 아니고 성령님과 아버지와 예수님과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우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되게 되어있어요. 베드로가 따라가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 베드로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일, 어떤 행동, 어떤 의도를 가져도 항상 최종적으로 내게 유리해야 해요. 내게 필요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욥을 보면서 욥이 지혜를 못 찾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지혜를 못 찾지만 저 대자연, 저 바람 속에는 지혜가 있겠지, 그리고 공중의 새도 모르고 생물도 모르지만 저 땅끝까지 감찰하시는 바람과 물 그리고 비에는 우리가 모르는 지혜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바람 속에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바람의 아들입니까? 이종범이에요?

팝송에도 그런 노래 있어요.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 세계는 모르지만 바람 너는 알겠지? 바람도 몰라요. 왜? 바람이니까. 알 필요도 없고. 욥이 지혜를 찾고 있는 욥 자신에게 먼저 내가 지혜를 찾을만한 자격이 되는지를 욥은 자기에게 물어야 해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지혜 찾아서 뭐 할겁니까? 그 돈도 안 되는 거.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해요.

‘나는 지혜를 찾고 싶어라. 진리를 찾고 싶어라’라고 하신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배불러서 하는 이야기야. 네가 지금 돈이 없고, 네가 가정에 우환이 있으면 지혜고 진리고 없어요. 그냥 나 하나 편하면 끝난다는 생각만 있죠. 그냥 배불러서 하는 이야기예요. 그 진리 얻어서 지혜 얻어서 뭐 할 건데요? 진리를 얻겠다고 찾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 소관이 되면 안 됩니다. 그건 누구 주 업무냐 하면 하나님 주 업무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숨겨놓은, 던져놓은 보물을 본인이 찾아가면서 거기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길입니다. 이게 길이에요. 그러면 그 길을 욥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막연하게 찾고 있습니다. 진리가 뭐냐, 진리를 알아야 내 고통의 의미도 발견하게 되는데 이유도 없이 그냥 아프니까 진리를 알아야 아플 때 아프고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자고 욥이 이런 식으로 지혜자로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죽는 이유를 알아요? 살 때 사는 이유에 충실해야 하지 죽는 이유는 죽을 때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객관식 문제인데, 다음 중 죽는 이유는? 1번 코로나 걸렸다, 2번 교통사고 당했다, 3번 몸이 아프다, 4번 기력이 쇠했다. 몇 번입니까? 사람들은 그 전부 다를 이야기하거든요. 전부 다가 지혜가 아닙니다. 왜 죽는지는 하나님만 아시지 인간은 자기 죽는 이유를 몰라요.

뭐 세포 끝이 떨어져 나가면서 죽는다고 하는 것은 뭐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욥 같은 사람들이나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극구 이유라고 자꾸 찾아내려고 하다 보니까 만들어진 것이 뭐냐 하면 Science, 과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과학이 왜 진리가 아니고 왜 지혜가 아니냐면 과학 만화책 들여다 봐도 그게 지혜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에요. 만화책 백날 봐도.

이 Science, Technique, 이런 것들이 왜 진리가 아니냐면 이미 목적이 있어요. 자연의 변화 가운데 자를 거 다 잘라내고 인간에게 인간의 생존에 도움 되는 것만 쏙쏙 뽑아서 그걸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기술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게 도움 되는 거예요. 내게. 19세기 말에 뭘 발명했느냐 하면 접시를 닦는 기계를 발명했어요. 팔릴까요, 안 팔릴까요? 하나도 안 팔렸습니다. 너무 시대를 앞서갔어요.

식기세척기는 최근에 만들어진 겁니다. 최근에 전자회사에서 만든 거예요. 미치지 않고서야 만들지 않는다는 그 식기세척기를 만든 겁니다. 드라마 이야기지만. 옛날에는 그게 필요 없어요. 발명한다고 꼭 사라는 법은 없습니다. 소비자는 지금 내게 뭐가 필요한지만 중요하고 내게 필요한 것만 사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자본금이 쏠리게 되어있고 그 자본금을 바탕으로 백신을 만들든지 지금 필요한 거, 그걸 과학이라고 하는데 근원적으로 인간은 왜 죽는가, 인간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이런 것이 돈 될 거 같으면 그걸 발명하죠. 그런데 그게 돈이 안 됩니다. 역사상 인간은 왜 죽느냐, 왜 사느냐, 그거 이야기하는 것은 인문학 강좌에서나 약간 돈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돈이 안 돼요.

인간은 왜 사느냐, 인간은 왜 죽느냐, 제가 백날 강의하고 싶어도 한국과 멕시코와 월드컵 예선전 하면 거기에 정신 다 팔려있어요. 왜 사는지 그딴 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 사람들이 교회 안 나오냐 하면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에 얼추 이만해도 살만하니까 그렇게 교회 다니는 것이 아쉽지 않다는 겁니다. 돈 좀 있겠다, 연금 타겠다, 뭐 하려고 나옵니까?

그래서 과학이라는 것은 길인데, 진리로 가는 길인데, 그 진리의 길 끝에 누가 서 있느냐 하면 본인이 서 있어요. 본인이~. 본인이 길 위에 서 있다고요. 내게 유리하면 그건 좋은 기술 좋은 과학이고 나의 신체를 불편하게 만들면 그건 나쁜 기술이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과학이 진리가 됩니까? 돈 되는 것은 진리고 돈 안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게 과학에서 말하는 진실, 진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과학 믿고 지옥 가는 거예요. 과학 연구하고 지옥 가는 겁니다. 적어도 과학자가 되어서 미생물 연구소에 있다든지 하면 그런 걸 연구하고 그런 과학적이 분야에서 공부하게 되면 그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런 걸 알아야 해요. 왜 내가 공부하는 이런 과학적 사실이 나로 하여금 영생을 주지 못하느냐.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 그걸 철저하게 규명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노벨상 타고 지옥 가는지, 왜 사람들은 금메달 따고 지옥 가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해요. 거기에 대해서 이 욥은 이방인이기 때문에 해답은 이방인에게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럼 이 이방인 욥의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두꺼운 구약성경 안에 있잖아요. 그럼 구약성경에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은 누구냐 하면 이방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는 모세가 쓴 책에서는 하나님의 진리, 길, 생명, 그건 어떻게 시작되는가.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 나오죠.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면 사람을 죽여놓고 시작해요. 아벨 계통이 영생으로 가는 노선을 따라서 장차 예수님이 오시거든요.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너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 자신이 아벨과 사가랴 억울하게 죽은 선지자의 피와 예수님의 피가 같은 노선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 노선이 쭉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벨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아벨에게 나중에 당회장 되고 목회자 되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냥 아벨을 죽여요. 어떤 죽음이냐 하면 아벨은 그냥 죽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아벨 취지가 살아나게 되어있어요. 죽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는 주님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산자와 일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와 일해요. 왜 아벨을 죽여놓고 일을 하시느냐 하면 가인은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진짜 때려 죽여도 가인은 아벨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아까 요한복음 13장 보셨지요. 베드로가 주님 따라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요. “네가 나 있는데 오지를 못 한다” 왜? 너의 자리가 없다.

인간은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구더기처럼 계속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거예요. 구약에서 어떤 충격적인 이야기가 많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정해봤어요. 구약에 충격적인 거, 신약에 충격적인 거, 이 두 가지를 뽑아봤는데 먼저 구약에 시편 1장 5~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의인이 없고 악인이고 죄인이거든요. 죄인은, 다른 말로 바꾸면 악인은, 다른 말로 바꾸면 인간은 심판을 견뎌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심판을 견딜만한 위인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러면 의인이 있다고 하실 텐데 뒤에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라고 나옵니다. 의인은 지연됩니다. 어디까지 지연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올 때까지 의는 계속 지연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하고, 망하고 망해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곧 망하기 위해서 함께 있는 겁니다. 자기 망하는 것을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인간은 성공하는 것을 고마워하지 말고 망하는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요. ‘아, 이게 내 구원이 안 되는구나. 교회 와도 구원이 안 되는구나’라는 이걸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이게 바로 길이에요. 이게 바로 길에 접어든 거예요.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이. ‘야, 예수 믿어도 구원 안 되는구나’라는 이걸 알아채야 해요.

왜냐 하면 예수 믿는 그게 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짓거리는 뭘 해도 이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왜? 내 이름이니까. 내가 시발점이 되니까. 내가 나서기 때문에 이것은 주께서 다 보류하고 거부하는 거예요. “목사님 뭘 하면 구원받습니까?” “누가요?” “본인이...” “안 돼요!!” 본인이 아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안 돼요. 뭘 하면 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로마서에 보면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니까 나는 행하지 않고 믿을까요?”라고 하면 그 믿는 게 행함이에요. 왜? 본인이 본인을 믿으니까. 본인이 믿음을 행하는 본인을 믿고 있으니까 그게 행함이에요.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고집을 그렇게 부리는 거예요.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면 심판을 안 견디면 돼요. 심판 앞에 지면 돼요. 그게 길에 접어든 성도의 모습입니다.

나는 죽고 시편 1편 5절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거예요. 본격적으로 나를 죽여놓고 나보다 더 센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면 “악인은 심판을 이기지 못한다”라고 성경이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해줘요. ‘너는 무슨 일을 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거야’라고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해줄 때 그 친절함이 우리 시체 안에서 막 살아나는 거예요. 말씀이 살아나는 거.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해서 우리가 종으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구약에서 심각한 것이 뭐냐 하면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에서 심판이 인간에게 지는 심판 같으면 아예 하나님께서 그런 심판은 주지도 않습니다. 모든 인간을 꺾어버리는 그런 심판을 주십니다. 심지어 이 땅에 오셨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에 저주받은 거예요.

예수님도 저주받았는데 우리가 뭔데 저주를 안 받아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무슨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사기를 치고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인간은 복을 받을 자격조차가 안 돼요. 인간은 망해서 죽는 것이 복의 길에 얼추 접어든 거예요. 아벨이 구원받은 것은 아벨이 살아서 뭘 한 것이 아니고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그냥 죽어버린 거예요.

죽어버리니까 아벨을 죽이는 그 취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하나님의 개입. 제사를 받으시는 방법으로 아벨에게 개입했기 때문에 악의 부추김을 받는 가인이 아벨을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니까 악마가 시키는 대로 죽이도록 했고 그 계획이 주님으로서는 성사가 된 거예요. 아벨이 억울 하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일이 그렇게 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이 말씀대로 할 거예요.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는. 그다음에 신약에서 약간 충격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나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이 말씀이 왜 충격적이냐 하면 여러분 앞에서 문이 닫혔는데 안에서 소곤소곤 이야기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문을 아무리 노크하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니까 백날 발로 차고 두드리고 열어보려고 해도 문이 열리지를 않네요. 왜?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없는데 본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지금 문 밖에 있는 거예요. 문 밖에.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에 보면 성(castle)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그 성의 주인공 K가 성에 다가가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성이 멀어져요.

뭔가 인간들이 구원을 시도하는데, 교회 와서 시키는 대로 다 하는데, 점점 더 구원이 멀어져요. 그것은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나의 의보다 육신이 갖고 있는 죄가 나로 하여금 주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하고 싶지만 우리의 본성은 뭐냐 하면 그 사랑이 다 헛사랑이고 그건 하나의 위선에 불과하다는 쪽으로 이 세상이 나를 노출 시키고 마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다 헛짓이고 소용없는 거구나.

차가운 눈치 보이면서 나는 너와 결별이라고 해놓고 이제 뒤늦게 와서 문 밖에 딱 서 가지고 다시 어떻게 좋은 관계 맺고 싶다고 하게 되면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그 사랑 잊었다고 하잖아요. 주님 하시기 전에 박강성이도 먼저 이야기했어요. 문밖에 있는 여인이라고. 노을 진 가슴 터지는 그런 사랑 다 지나간 사랑이라고. 그냥 문 밖에 서 있는 여자예요. 문 밖에 서 있어요.

마태복음 25장에도 나오죠. 기름 준비를 못 해서 그냥 문 밖에 서 있어요. 지금 문 안에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자기는 문 밖에 서 있는 거예요. 대책이 없어요. 속수무책으로. 문을 열 수가 없어요. 문을 닫으시니까 열 수가 없는 거예요. 열 수가. 어떻게 열 재주가 없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입니까. 왜 이런 성경이 안 보입니까. 옛날 CF에 그런 게 있어요.

이덕화가 나오는 선전인데 후회하면서 문을 딱 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속옷을 그 속옷을 안 입어서 여자가 튕기는 거예요. TRY. 속옷 바꿔입고 올걸. 그러면 문 열릴 텐데. 그렇게 속옷 바꿔 입고 오는 것은 인간이 가능하잖아요. 이미 문 닫혔지만. 이미 문 닫힌 후에는 이미 끝났습니다. 따라서 욥이 자꾸 어떤 지혜를 달라고 하는데 지혜는 인간이 알 권한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그냥 자기 살던 대로 살다가 지옥 가면 돼요.

쓸데없이 지혜를 왜 얻으려고 합니까. 지혜고 진리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건 배부른 까닭이에요. 이건 뭔가 배불렀어요.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는 게 좀 형편이 풀렸다는 뜻이거든요. 지금까지 결론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내게 필요한 사람이나 대상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자기에게 유리하니까 진리라는 말을 함부로 붙이는 이 한계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성사될 수 없는 이 문을 주께서는 어떻게 여시는가.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여러 가지 씨뿌리는 비유, 무슨 비유, 비유들이 쭉 나오는데, 그 비유를 어떤 분이 그런 요청을 했어요. “목사님, 예수님의 비유를 한꺼번에 설명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시간에 딱 한 마디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인간을 제치고 인간을 빼내 버리고 인간을 배격하고 배격된 그 빈자리에 핍박받는 예수님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예요. 그러면 해결 다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3장 14~15절에 보면 “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장 예언에 의하면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력으로 자기 지혜를 동원하고 본인이 찾아낸 어떤 지식 덩어리로써 성경이나 교리든지, 성경 신학, 조직 신학, 이런 거 배워서 말씀 달달 외워서 천국 오는 것을 주님께서 극구 그걸 저지하십니다. 그런 방법을 인간이 한두 번 했겠어요. 철야기도하고 금식하고 이런 식으로 구원받는 것을 다 저지해요.

그래서 말씀은 말씀대로 어느 인간도 자력으로 하나님에게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자, 안 되겠지? 너희는 끝났지? 너희는 백날 하고 싶어도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유리한 쪽으로 모든 것을 왜곡되게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면 천당 가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먼저 챙기는 방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해석이 안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 모든 것을 없애는 방법으로 내가 해석하겠다.

그래서 말씀 따라서 여기 씨뿌리는 비유인 복음이 주어지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같은 경우에 하나님의 샛별,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복음의 씨가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상밖에,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의도하지 않는 거, 30배 60배 100배는 우리가 의도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30배 60배 100배 이런 식으로 염치없는 자들이 아니에요. 자기 딴에 고상하고 품격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십일조 5만 원 하고 30배인 150만 원 원하는 이런 도둑놈은 아니에요.

5만 원 했으면 10만 원만 되어도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할 줄 아는 게 우리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가 모든 목숨과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그게 100배의 가치를 지닐만한 것들을 우리 안에서 생산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분명히 죄인이고 잘못되었는데 잘못되고 어두운 우리 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는 훌륭한 배양지가 됩니다.

화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아까 내린 의인이라는 거, 문을 닫으면 열 자 없고 열면 닫을 자 없다는 그러한 문, 그러면 우리는 문 밖에 있는 여인이냐 문 밖에 있는 남자냐 그것은 말씀이 연결해 줘야 해요. 문 밖에 있든지 안에 있든지 상관없어요. 내가 시발점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하신 그 말씀이 시작점이 되어서 우리 안에 넝쿨째 들어온다면 바로 우리 안이 성령이 거하는 예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②성전이 되면 우리는 움직이는 말씀이 되어 버려요.

우리가 무엇이 되든지 그 안에서 우리가 행하지 않았고 네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런 일을 유발했다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③이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걸 지혜, 바로 하나님의 십자가의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진리는 내가 예상 못 한 것으로 쑥 들어와 버려요. 쑥 들어와서 내가 뭘 얻겠다가 아니라 ④우리를 죽여놓고 본격적으로 우리를 죽이신 주님께서 죽은 우리 안을 자기의 영역으로 자기의 세계로 사용해 버리면 ⑤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해도 자유입니다.

더이상 율법이나 윤리적 도덕적 죄책감에 시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버티는 것은 아직도 자기 의가 남아있다는 증거예요. 아직도 잘난 면이 있기에 뭔가 버티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처음에 우리 속에 들어가면 이거 지켜내겠다고 얼마나 악을 쓰면서 덤벼드는데 시작점이 자기 의로 되어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결과로써, 아까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가, 우리 자신이 주님의 기도 응답체가 되도록 만들어 놓고 네까짓 것이 왜 천국 가는지를 그 이유를 우리 몸을 가지고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갖고 관리하고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주의 말씀대로 지키면 복을 받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가는 것이 우리의 예측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측을 무시하시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말씀이 쳐들어 와서 이미 우리가 다 이루었고 구원된 자로 살게 하시니 이 은혜를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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