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자칭

아빠와 함께 2021. 7. 27. 10:56

자칭

2021년 7월 25일                   본문 말씀: 욥기 28:12-20

(28:12)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28:13)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28:14)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28:15)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28:16)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28:17)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28:18)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28:19)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28:20)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욥은 신앙인입니다. 이점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처지는 지혜를 못 찾아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신앙이면서도 지혜를 모를 수가 있는지 언듯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이 이 인간사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한데 묶어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없어 그러합니다.

욥은, 지혜란 반(反)-지혜와 더불어 나타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 특히 자기 같은 신앙인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모든 것을 당연히 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식으로 통치하는 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욥은 자신을 반(反)-지혜에 집어넣고 생각 못하고 따로 자신이 지혜편에 서 있다고 여기는데서 오는 오류입니다. 지적인 공감으로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일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식입니다. “나는 내가 건드릴테니 하나님께서 수고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궁극적 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좌절합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욥에게 이런 조언을 해줄겁니다. “그냥 살아. 밥 먹고 편히 자고 건강하고 무탈한 것, 그것으로 충분해. 무엇 때문에 지혜나 진리에 관심 가져?” 여전히 우리는 욥이 신앙인이고, 하나님과 연결된 자이며 욥의 관심사가 지혜에 가 있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나는 괜찮은 존재야. 그러니 계속 괜찮은 존재로 살고 싶어’가 이 얼마나 당연시해 보이는 자아상이지만 하나님 바로 이점을 문제삼습니다. 욥은 구약 사람이라는 신약의 상황을 모릅니다. 역사를 끝장 내시기 위해 오신 주님의 결정적 증거에 대해서 이미 신약을 살고 있는 성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신상에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사건 중에 하나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봅시다. 요한복음 19:19-21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여기에 ‘자칭’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유대 지도자층에서는 예수님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봅니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을 쏟아내었다고 봅시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메시야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 유대지도층이 내린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뱉은 모든 말에 인간들이 동의를 할 능력이 인간쪽에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칭(스스로 칭하기)’라는 말은 팻말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빌라도에게 요구한 겁니다. 왜 그들은 ‘자칭’이라는 단어를 집어넣기를 고집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세계에 대해 예수님을 영구히 떼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유대사회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자기 주장에 동의해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이 유대사회에서 살려면 기존의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인간 사회에 섞여도 무방하다’는 무언 중의 동의를 획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있어 진리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자들만이 진리을 접할 자격이 된다는 바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없고 ‘자칭’이라는 단어를 넣어야 옳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진짜 메시야라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자칭’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라고 고집부렸던 그들이 ‘자칭’ 인간들이 되고 맙니다.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인간이 인간 행세해 온 것으로 드러날 겁니다. 그래서 유대사회를 이를 사전에 방비하고자 예수님의 십자가 달린 그 팻말에도 ‘자칭’이라는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 쪽에서 문제가 있는 것을 예수님에게 문제 있다고 떠넘기는 겁니다. 도대체 이 인간사회는 지혜와 진리를 왜 그토록 무서워하는 겁니까?

요한계시록 3:7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최종 진리란 결국 ‘막(膜)’이라는 겁니다. 막은 공간을 나누어버립니다.

최종 진리란 막으로 막혀 있는 두 공간 사이를 통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이 천국 열쇠의 존재와 등장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음부의 권세’ 곧 악마의 세력입니다.

이처럼 지혜란 최종적입니다. 부분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총괄적으로 다 적용되는 개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숨겨진 악마마저 노출됩니다. 선이 단독적으로 등장하고 악을 동반시키도록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진리와 지혜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사실이 발각됩니다.

악마가 인간을 속여왔던 겁니다. ‘자칭’이라는 말을 굳이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전부 자기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끌어당깁니다. 여기서 ‘의미있다’는 말은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 한 예를 들면, 마태복음 12:47-48입니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즉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이인 가족 관계마저 진리로 이해 해체되는 막이 생겨버립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를 천국과 대립하는 세계로 간주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는 부활이 없다고 가르치지만 진짜 현실에서는 죽어도 다시 사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욥은 지혜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 세상에 없는 지혜가 예수님이 마련한 세계에는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의 열쇠로 인하여, 열쇠없는 세상 형편이 눈이 띄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3강-욥기 28장 12~21절(자칭)21072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8장 12~21절입니다. 구약성경 787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사람 사는 땅에서는 지혜가 없다’와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라는 찾을 수 없다는 것과 지혜가 없다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있는데 사람이 찾지 못할 때는 사람이 자체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지혜 쪽에서 알아서 숨음으로 말미암아 내 쪽에 문제 있음을 밝혀 주는 식이 되겠지요. ‘뭐가 있는데 못 찾았다. 아, 내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구나. 나는 지혜가 없으니까 어찌할꼬’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지금 욥은 신앙인으로 나와 있고 하나님도 욥의 신앙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궁극적인 삶의 의미가 뭐냐. 지혜가 어디 있으며 지혜가 무엇이냐에 꽂혀 사는 거예요. 제가 오전 설교에서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사회적으로 내가 남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되어있어요. 내가 이 정도인데 당신도 내가 나를 인정하는 만큼 나를 인정해주면 안 되겠어. 이게 바로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소원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뭐 사랑을 얻고, 지혜를 얻고, 뭔가를 얻는 것이 초점이 어디로 쏠려 들어오느냐 하면 나에게 쏠려 들어오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나한테는 내가 전부니까요. 하나님도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알아줄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욥이 일반인들에게, 지금 욥이 안 믿는 사람에게 이런 탄식을 한다면 그들은 욥을 이렇게 꾸중할 겁니다.

사람은 그냥 돈만 있으면 되는 거야. 사는 것처럼 살면 돼. 죽고 난 뒤에는 그건 인간 소관 아니니까. 그냥 ‘지혜가 어디 있느냐, 진리가 어디 있느냐’라는 그런 것 좀 찾지 마. 그냥 함께 섞여서 가면 되는 거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책망할 겁니다. 저는 단언하기를 우리교회 교인들이 그런 대우를 받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런 대우를. 돈도 안 되고 밥도 안 되는 그런 걸 왜 그리 신경 쓰냐는 말이죠.

지혜고 진리고 그걸 왜 굳이 알아야 해? 남들이 안 알아주는 걸 왜 그렇게 궁금해하는 거야. 이렇게 타박을 받을 겁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요. 욥이 궁금하다는 말은 욥이 궁금한 것을 통해서 메시아가 계통을 통해서 이 땅에 내려오는 방식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주님의 모든 말씀의 관심사가 ‘너희들 지혜가 어디 있는 줄 알아? 진리가 뭔 줄 알아? 궁금해?’라는 이런 이야기를 담아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한 거예요.

따라서 권력에 관심 있고 돈에 관심 있고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귀찮은 거예요. 예수님은 귀찮고 짜증 나고 멀리하고 싶고 ‘당신과 나와 상관없이 삽시다’라는 마귀 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이야기합니다만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났으면 원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지금껏 제가 인생을 짧게 살았지만 짧게 살면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편하면 끝나는 거예요.

마음 편하고 몸 편하고 그냥 편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게 잘 안되니까 소주 한 세 병 먹는 거예요. 소주 세 병 먹고 기분 업되면 그게 좋은 거예요. 진리고 지혜고 그거 아무 관심 없습니다. 지혜와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좀 특이한 사람들이에요. 신앙인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것에 비해서 사람들은 일단 편하면 좋고 외로우면 사람을 찾고 하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고개 넘어가는 구름 같은 겁니다.

고개 넘어가면 사라지고 없어요. 어딨지? 벌써 넘어가고 없어요. 그래서 사람 사는 곳에 없다는 것을 살피기 위해서 온갖 것을 지금 본문에서 욥이 다 들춰봅니다. 뭣과 비교해 보느냐 하면 광산에서 보석을 캐내는 심정으로 여기에 보석 있을까, 저기에 보석 있을까, 이 동네는 있을까, 저 동네는 있을까, 계속해서 지혜를 어디서 얻을 수 있으며 명철은 어느 곳에 있는가, 내가 그것만 있다면 값을 다 치르고라도 살 건데.

그 진리보다 더 귀한 지혜와 진리, 이런 것은 정말 보석보다 더 귀하다고 탄식하면서 이것을 찾고 있습니다. 근데 욥이 이걸 찾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 자기가 아프잖아요. 고난받고, 자기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욥의 입장에서 무엇을 원하느냐면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하나님과 더불어서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그것을 지혜와 진리라고 간주를 하고 그것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

욥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뭐냐, 착하면 천당 간다는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쁜 쪽은 지옥 가고 착하면 천당 간다는 이 정도는 아는데, 문제는 이게 틀렸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고통이 왔을 때 이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기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거예요. 무엇이 지혜냐는 모르고 내가 아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탈락될 수가 있다는 그것은 감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답답해서 남들에게 묻는 거예요. ‘못 봤어? 절대적인 하나님의 일하심과 뜻을 못 봤어?’라고 묻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참 궁금하죠. 그래서 제가 미리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 지혜는 이것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혜가 뭐냐? 열쇠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천국의 열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베드로에게 주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것은 악마가 제발 그 이야기만은 하지 말라고 악마 쪽에서 그렇게 말리고 싶었던 그 진리가 천국의 열쇠가 있다는 그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바로 그 열쇠. 자, 열쇠라는 것이 어디에 필요하냐면 서로 완전히 단절되어있는 두 개의 영역이 형성될 때 열쇠가 필요합니다. 이쪽 세계 따로 있고 저쪽 세계 따로 있을 때 그 두 세계가 내 뜻대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없을 때 닫혀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이 인간사는 세상에서는 지혜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 찾으니까 지혜를 못 찾는 거예요. 열쇠 모르고 찾으려고 하니까 이게 지혜 있는 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갖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에게 천국의 열쇠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한꺼번에 다 이해가 될 거예요. 아마 이 말씀도 이해될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47~50절에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가족파괴입니다. 가족이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열쇠를 안 가진 가족이 열쇠를 가진 가족에게 원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하는 거예요. 격막이라고 하죠. 두 공간을 분리하고 쪼개는 격막. 가족인데 남편과 아내가 같이 부부라고 하지만 한쪽은 열쇠를 갖고 있고 한쪽은 열쇠가 없으면 둘은 지금 가는 방향이, 경향이,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하는데, 가는 방향이 반대로 되어있습니다.

서로 대척하는 관계가 되어있죠. 거기에 대해서 이 말에, 이 경우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아주 힘들어합니다. 굉장히 고통스러워해요. 알고 지내는 사이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이게 세상이 주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멀쩡하게 잘 지내는 사이도 천국의 열쇠 이야기가 딱 들어오는 순간 이게 두 조각 나니까 이건 아파도 너무 아프잖아요.

인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과거사를 말하는데 인간의 과거사가 천국의 열쇠 오기 전까지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열쇠가 딱 오고 난 뒤에는 열쇠 없이 평생을 살았다는 거. 그러면 누가 그 짓을 했는가. 천국 열쇠를 제일 싫어하는 쪽에서 그것을 반대했겠죠. 그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음부의 권세, 악마가 그런 짓을 해온 겁니다.

어떤 연극이 있는데 연극 내용에 어떤 남편이 부인을 자기의 정신적 종으로 다루기 위해서 라이터 가스 불을 작게 낮춰요. 집에 들어왔는데 라이터 가스 불이 작으니까 뭐가 잘 안 보이고 뭐가 뭔지 잘 모르잖아요. 부인이 저건가 하고 가려고 하면 “아니, 그거 아니야. 이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어두컴컴하니까 부인이 “저건 뭐다”라고 하면 남편은 “그건 무조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저건 아니야”라고 라이터 가스 불을 조절해서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자기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거, 이게 가스라이팅이죠. 요새 유행하는 말입니다.

그처럼 철저하게 인간을 농락해 온 겁니다. 만약에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지혜가 있다면, 세상이 꽉 막힌다고 할지라도 이 열쇠가 포커 에이스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아침에 반찬을 뭐했는지 잠을 어디서 잤는지 상관없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와 모든 일은 천국 쪽으로 방향이 정립되도록, 경향이라고 하는데, 그쪽으로 마음이 바뀌기 위해서 주께서 유발한 사건 속에 우리가 휘말려 가게 되어있어요.

중국 광저우에 시간당 400mm의 엄청난 비가 왔는데 조금 전까지 중앙선 그어있던 그 도로가 계곡이 되고 말았어요. 물에 휩싸여서. 문제는 거기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구멍 맨홀 속으로 빠진다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이라는 것은 전부 다 뭔가 악마로부터 계속해서 속임 당하는 속고 있었던 그 속까지 휩쓸려 가버려요. 예수님은 좁은 길로 가라고 하죠. 넓은 길로, 사람들이 찾는 많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는 이 말은 좁은 길로 갔다가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아까 말씀드렸던 마태복음 16장의 천국의 열쇠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버림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건 상관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말하기를, 산호며 수정이며 쭉 찾고 있는데, 여기서 욥이 기존 인간 세계에서 더듬고 탐색해서 지혜를 얻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만약 욥이 신약에 와서 지혜를 발견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어디에도 있구나가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유발한 상황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천국에 가는 길이 발견되는 구나 라고 기쁨으로 이야기할 겁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말씀드려서 아주 뛰어난 음악가로 생각해 봅시다. 아마추어들은 음악을 할 때 정신 바짝 차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특정한 시간에나 음악을 듣는 그때만 음악이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진짜 프로 음악가는 길을 가면서도 음악이 귀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에요. 눈으로도 코로도 입으로도 음악이 막 들어와요. 전체가 음악의 세계예요.

출렁이는 이 세상이 음악이고 리듬이에요. 봄 소리 다르고 여름 소리 다르고 가을 소리 다르고, 그 자체가 악상이 떠오르는 거예요. 그 세계 속에 하나님의 음악이 주는 권력장 속에 놓여서 뭘 해도 음악으로 토해놓을 수 있는 겁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에는 악마에게 속아 넘어갔던 악마가 통치하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그걸 몰랐죠.

그러나 천국의 열쇠를 받고 열면 열리고 닫히면 닫히는 그 열쇠를 받고 난 뒤에 다시 자기 인생을 돌아보니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이 천국의 열쇠라는 그 존재를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고 발악하는 힘들이 느껴지는 체험이 가능해져요. 본인이 체험하는 것이. 이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의미가 뭐냐고 한다면 인간들은 그 의미를 찾을 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의미라고 하거든요.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고 할 때 백신을 맞았으니까 나는 이익이고 백신 안 맞는 사람은 코로나 빨리 걸리라는 식으로 돼요. 인간이 그럴 때 비로소 백신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어요. 안 그러면 물에 물탄 듯이 무의미하거든요. 반드시 인간은 내 중심이 될 때 의미가 있어요.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의식입니까. 그런데 천국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세상을 볼 때 뭐냐면 ‘아, 이것이 천국의 열쇠가 없는 상태였고 이것이 천국의 열쇠가 있는 상태구나’라는 그러한 것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겁니다.

지금 세상 이야기를 다 예를 들을 수는 없고요,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그 핵심인 세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그 핵심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좀 어렵습니다만 제가 나름대로 애쓰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9절에 보면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 그중에 한 대목이 여기 나오는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라고 그렇게 시작하거든요, 21절에 보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하니”라고 여기 ‘자칭’이라는 말이 나와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면서 저 예수는 사이비고 메시아 아니라고 과대망상증이라고 이걸 한꺼번에 ‘자칭’ 내가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자칭 주장하는데, 그런 의미를 담아서 앞에 자칭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라는 겁니다.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는다고 쓰지 말고 유대인의 왕 앞에 자칭을 집어넣어야 예수님 지우고 난 뒤에 남아있는 우리 세계는 멀쩡하고 건전하고 하자 없는 것으로 계속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 할 때 예수님 제자들 어디가 있습니까? 다 도망치고 말았어요. 왜? 아직 까지는 성령을 안 받아서 천국의 열쇠가 없어요.

천국의 열쇠가 없어서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한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나 하나 편하면 되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겁니다. 지리산을 가든지 자연인이 되든지 나 하나 숨어 들어가면 되는 곳으로. 왜냐 하면 그래야 나의 의미가 아직도 나에게 유효하니까요. 나는 괜찮아. 누가 뭐래도 나는 멀쩡해. 이거는 사회로부터 공인받은 거야. 남들이 나를 좋아해. 칭찬해. 그 점에 대해서 나도 그쪽에 동의해.

멀쩡하면 되고 편하면 되지 뭘 더 원해? 이게 사는 거지, 인생 사는 거지. 누구한테 욕 안 먹고 내 인생 편하게 사는 것으로 끝. 끝난 거예요. 무슨 지혜와 진리입니까. 내가 잘 먹고 내가 편하고 내가 건강하고 내가 남에게 욕 얻어먹지 않고 파출소 안 끌려가는 이게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지혜의 끝장입니다. 이게 인간에게는 진리예요.

그런데 여기에 아주 초를 치는 분이 오셨어요. 이렇게 전부 다 각자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세상에 그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분이 오셨죠. 예수님.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희는 그냥 죽지만 나는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보는 많은 사람이 사도행전을 보면서 삼천 명, 육천 명, 숫자 늘어나는데 신경써요. ‘아, 진짜 교회는 숫자가 늘어나야 진짜 교회구나’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내용 보세요. 사도행전 설교는 딱 하나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한다. 이건 완전히 인간 세계에 초를 치는 거예요. 사서 고생하는 겁니다. 너는 또라이고 너는 미쳤다고. 우리는 미치기 싫어요. 우리가 미쳐버리면 사람들로부터 사람답게 산다는 동의를 얻어 낼 수가 없어요. 이건 제가 광주강의에서 했는데 여러분이 좀 어렵지만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자아는 남들이 나를 평가한 것들의 집대성이 자아예요. 평소에 아빠 엄마가 나를 이뻐했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이뻐 해야 이게 나다워요. 만약에 어릴 때 부모로부터 많이 얻어맞았잖아요. 잔소리 들었잖아요. 그런데 커서 누가 자기에게 사랑한다고 하면 안 믿습니다. 나같은 인간은 미워해야 하지 누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가 견지하려는 그 자아성과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 사회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인간은 어디로 귀환하고 싶으냐 하면 자꾸 고향으로 가고 싶어요. 고향에 뭐가 있는데요? 고향에는 뭐가 있는 곳이 아니고 어릴 때 자기 기억이 있는 곳이에요. 그런데 명절에 가보면 세상은 그 기억조차도 가만두지 않죠. 현대건설에서 아파트 다 만들어 버렸어요. 내가 살던 고향을 아파트로 다 개발해 버렸어요.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그 아줌마 아저씨들 다 돌아가셨어요.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왜 추억이 좋으냐 하면 그때의 내가 이쁘게 구성되었기 때문이에요. 이쁜 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보며 살맛 나게 만든 그런 시절이 바로 과거에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걸 그냥 지켜내는 것뿐이에요. 이게 얼마나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짓인지 몰라요. 얼마나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할 때 그게 십자가입니다. 네가 걱정 염려하지 말고 죽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광주강의에서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에게 그릇 준비하라고 할 때 밀가루와 기름이 가득 차는 기적 있잖아요. 제가 그걸 설명하면서 그렇게 했어요. 그릇을 다 치워버려라. 그릇을 다 치워야 해요. 왜? 그렇게 살아봐야 나중에 아들이 죽기 때문에.

진짜 기적은 내가 밥 먹고 잘난 내가 계속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언제쯤 제가 군말 안 하고 기쁘게 죽어야 하는지를 아는 순간, 내가 죽는 그 순간이 내가 가장 나다운 순간이에요. 그 순간이. 살 가치도 없는 게 마귀에게 속아서 계속 살아온 거예요. 남들에게는 괜찮은 존재라고 칭찬받아가면서. 이 거짓된 삶이 언제 끝날까요. 바로 이 내용이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설교내용이었습니다.

이건 미친 거예요. 교인 한 명도 없어요. 사람을 기쁘게 해야 교인이 있는데 기쁘게 하지도 않는데 무슨 교인이 있겠어요. 그때 등장한 것이 성령입니다. 천국의 열쇠입니다. 네가 있는 동네와 주님이 장만한 동네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다르다는 이야기예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여러분이 한 번 맞춰보세요.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다음 중 피서하는 방법 중 가장 시원한 것은? 1번은 부채, 그것도 글자로 폭풍 바람이라고 쓰인 부채, 2번 선풍기, 3번 에어컨, 이것 중에 가장 시원한 것은 에어컨이죠. 아직 네 번째가 남아있습니다. 4번 냉장고 냉동실에 들어간다. 뭡니까? 어느 것이 가장 시원합니까? 냉동실이 가장 시원하죠. 그런데 얼마 있으면 죽지요. 죽게 되면 피서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천국의 열쇠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부활의 열쇠를 우리에게 줘버렸어요. 성령이라는 것이 부활의 영이거든요. 부활의 천국 열쇠를 이미 받았어요. 이걸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이게 찐찐 진짜 현실이라고 지금 사도들이 외치고 있는 거예요. 거의 미친 순간이죠. 스데반 집사님은 설교할 때 천사처럼 되었다고 하는데 얼굴이 천사처럼 되면 뭐합니까. 돌에 맞아 죽었는데.

이게 진짜예요. 진짜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걸 누가 믿겠어요. 사도는 배짱 튕깁니다. 믿을 자만 믿으라고. “영생주기로 작정 된 자만 믿더라”라고 되어있어요. 뭐 배짱도 이런 배짱이 어디 있습니까.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만약 천국 열쇠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이 뉴질랜드에 1대 0으로 졌어요. 기분 정말 나쁘죠. 그런데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축구에서 한국이 뉴질랜드에 졌어요. 뭐 어쩌라고. 그게 뭔데요.

이제 끝으로 지혜가 뭐냐. 여기 욥에서도 나와요. 28장 뒷부분에 “사람이 악을 떠나는 것이 지혜”라고 나오는데 이 욥의 말이 예수님의 완성이 되거든요. 내 죄가 내가 악마에게 속았던 내 죄가 새로운 부활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이게 제거되어서 달라질 때 이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진리 그 자체란 말이죠.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진리 되시는 예수님이 나에게 찾아와서 “이제는 네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라는 이거는 돈으로 연봉 1억으로 계산이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설교 여기에서 끝낸다는 것이 아쉽네요. 시간 관계상 나머지 몫은 일상에서, 하루의 일과 속에서 천국 문이 열리는 그 열쇠, 성령 받은 것에 대해서 본인이 깜짝 놀라야 해요. 내가 이렇게 달라졌구나. 그 달라짐이 올여름에 시원한 피서가 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언제 자아 챙기고 언제 자존심 챙기고 언제 위신 챙길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에게 무엇을 할 거냐가 아니라 주께서 무슨 일을 벌였는가에 우리가 매료되고 그것에 이끌려서 그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시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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